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순창옹씨시조(淳昌邕氏),옹희태(邕羲泰),순창옹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5 20:24 수정일 : 2018-04-19 10:54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순창옹씨(淳昌邕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옹희태(邕羲泰)로 전(傳)하며, 판관(判官)을 지낸 몽진(夢辰)을 중조(中祖)로 하고 있다. 그후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은 명정(命廷)의 아들 은(誾)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선조(先祖)의 세거지(世居地)인 순창(淳昌 : 옥천의 옛 지명)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순창(淳昌)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쪽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원래 백제(百濟)의 도실군(道實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순화군(淳化郡 : 일명 渟化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때에는 순창현이 되어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가 1314년(충숙왕 1) 군(郡)으로 승격, 조선시대(朝鮮時代)에도 그대로 군(郡)으로 삼았다. 옥천(玉川)은 순창의 별호(別號)이다.


대표적인 인물

옥천․순창옹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옹몽진(邕夢辰)은 문장가(文章家)로 이름이 높았고 과거에 급제하여 음성(陰城)․청하(淸河)․운산(雲山)․황간(黃澗)의 현감(縣監)과 적용판관(籍用判官)․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 등을 지내고, 충청 도사(忠淸都事)․형조․예조의 좌랑(佐郞),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했다.

달행(達行)의 아들인 경신(景信)이 조선(朝鮮) 인조(仁祖) 때 이 괄(李 适)의 난(亂)을 평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세운 공(功)으로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에 제수되었으며 효행(孝行)이 뛰어나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이외에도 학문(學文)이 뛰어나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증직(贈職)된 기풍(基豊), 한말(韓末)에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택규(宅奎),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한 봉규(奉奎)는 관찰부 주사(觀察府主事) 승규(勝奎) 등과 함께 순창 옹씨(淳昌邕氏)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옥천옹씨는 남한에 464명, 순창옹씨는 303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歷代人物)-순창옹씨조상인물

옹경성(邕慶星): 고려말(高麗末)의 인물로 벼슬이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는데, 국운이 날로 기울어짐을 개탄하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었다.

옹의성(邕義聖): 고려말에 벼슬하여 도통(都統)․승선(承宣) 등을 역임하고 치안(治安)에 관한 15조를 지어 올렸다.

옹명정(邕命廷): 고려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옹몽진(邕夢辰): 자(字)는 응룡(應龍). 그를 잉태할 때 당시 순창 군수(淳昌郡守) 이 운(李 韻)의 꿈에 5색이 영롱한 서운(瑞雲)이 그 집을 가리우고 그 속에서 황룡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하여 이름을 몽진(夢辰)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재주가 뛰어나 16세 때 향리(鄕吏)가 방립(方笠)을 쓰지 않도록 하는 <탈향리방립문(脫鄕吏方笠文)>이라는 소문(疏文)을 올려 향리(鄕吏)가 방립쓰는 제도를 폐지(廢止)시켰다. 고경명(高敬命)이 그의 문장이 뛰어남을 보고 불러다가 곁에 두고 귀여워하며 시구(詩句)를 수응수답하였는데 발바닥에 검정사마귀 열두 개가 있는 것을 보고 이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감탄했다 한다. 1553년(명종 8) 친경별시(親耕別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556년(명종 11) 중시(重試)에 병과(丙科)로, 1559년 중시(中試)에 각각 급제하여 음성(陰城)․청하(淸河)․운산(雲山)․황간(黃澗)의 현감(縣監)과 적용 판관(籍用判官)․봉상시 판관(奉商寺判官) 등을 지내고, 충청 도사(忠淸都事)․형조(刑曹)와 예조(禮曹)의 좌랑(佐郞),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역임했다. 음성(陰城)에 유애비(遺愛碑)와 청하(淸河)에 청백비(淸白碑)가 세워졌다.

옹달행(邕達行): 자(字)는 사임(士任), 호(號)는 사락당(四樂堂). 조선조(朝鮮朝)에 참봉(參奉)을 지냈다.

옹경신(邕景信): 자(字)는 이립(而立). 1624년(조선 인조 2) 이 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훈록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군공을 세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에 제수(除授)되었다. 만년에 효행(孝行)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제수(除授)되었다.

옹기풍(邕基豊): 초명(初名)은 재풍(載豊), 자(字)는 대거(大擧). 학문이 뛰어나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증직(贈職)되었다.

옹륜학(邕侖鶴): 초명(初名)은 륜기(崙奇), 자(字)는 명서(明瑞). 효행으로 천거되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贈職)되었다.

옹문규(邕文奎): 자(字)는 주경(周卿).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옹택규(邕宅奎): 자(字)는 처안(處安), 호(號)는 우연(又蓮). 조선조(朝鮮朝)에 문장(文章)과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쳤다. 일찍이 감영(監營)의 희현당(希賢堂)에 가서 감사(監司) 이병문(李炳文)과 시(詩)를 창수(唱酬)하였는데, 감사(監司)가 「청연(淸蓮)이 다시 세상에 태어났다」는 뜻으로 우연(又蓮)이라고 호(號)를 지어 주었다. 1885년(고종 22) 부름을 받아 용양위(龍驤衛) 부사용(副司勇)에 기용되고 이어 선략장군(宣略將軍)․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에 승진되었다.

옹봉규(邕奉奎): 자(字)는 흥삼(興三). 한말(韓末)에 중추권 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하였다.

옹승규(邕勝奎): 자(字)는 군칠(君七). 한말(韓末)에 관찰부(觀察府) 주사(主事)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