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흥양오씨(興陽吳氏),오완(吳完),흥양오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5 16:02 수정일 : 2018-04-05 15:13

흥양오씨(興陽吳氏)의 연원(淵源)

흥양오씨는 중국의 주태왕(周太王)의 후예요, 오(吳)나라 부차왕(夫差王)의 손자(孫子)이신 루양왕(鏤羊王)이 위(衛) 땅에 들어가시어 위후(衛候)가 되셨는데 오(吳)의 땅에서 위(衛)의 땅으로 들어 가셨다고 해서 오(吳)를 성(姓)으로 받게 되셨다.

흥양오씨의 시조(始祖) 오완(吳完)은 오현필(吳賢弼) 보성오씨(寶城吳氏) 시조(始祖)의 차자(次子) 오양(吳良)의 육세손(六世孫)이니 오완은 1339년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시에 사마시(司馬試)에 발탁, 같은 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으며, 충목왕(忠穆王)때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태부(太傅)가 되고 국가에 유공하여 흥양군(興陽君)에 봉(封)해지니 그 후 후손들이 오완(吳完)을 시조로 하고 보성오씨(寶城吳氏)에서 분적(分籍) 본관(本貫)을 흥양(興陽)으로 하여 계세(繼世)하고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흥양조씨는 남한에 2,8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歷代) 중요인물(重要人物)

고려시대(高麗時代)

오현우(吳玄祐) 대관서승(大官暑丞) 병부상서(兵部尙書) 참지정사(參知政事) 충목왕시 문과에 급제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오르다.

오의(吳懿) 이부상서(吏部尙書) 평리 영익공(評理榮益公)

오원경(吳原敬) 호부상서(戶部尙書)

오중권(吳仲權) 자(字) 집중(執中) 공민왕시대 문과에 급제 현감(縣監)으로 출사(出仕),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오르고 이부상서(吏部尙書) 참지정사(參知政事)로 흥양군(興陽君)에 봉(封)해 졌다.

오용권(吳用權) 자(字) 계중(季中) 병부시랑 대장군(兵部侍郞 大將軍)

오사흥(吳嗣興) 자(字) 윤선(潤先) 호(號) 괴천(槐川) 고려의 망국한(亡國恨)을 품고 괴산(槐山)에 은거함에 이태조(李太祖)가 이조정랑(吏曹正 郞)으로 제수하고 수차 불렀으나 고경불취(故竟不就) 하였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오사종(吳嗣宗) 자(字) 계선(繼先) 호(號) 지족당(知足堂). 고려말(高麗末)에 전리총랑(典理摠郞)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 서경유수(西京留守), 판밀직사(判密直使)를 역임하고 고려가 망하자 괴산에 은거하니 이태조(李太祖) 삼징(三徵), 부득이 출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예조판서가 되고 1406년에 숭정대부로 의정부 좌참찬, 경연춘추관사, 성균관사, 세자이사를 역임하고, 판중추원사를 하였다. 증직(贈職)은 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이다.

오숙(吳夙) 자(字) 신여(晨汝) 호(號) 일민(逸民) 사헌부 감찰을 거쳐 풍기군사가 되고 통정대부로 청풍군수를 하였다. 서거 후 이조판서 원평군(原平君)을 증 받다.

오영노(吳寧老) 자(字) 경부(敬夫) 호(號) 야계(野溪) 봉군(封君) : 두성(荳城)  세종 7년(1425) 8월 18일 전라도 경차관(敬差官)으로 떠돌아 옮겨 사는 장정(壯丁) 7,618명 을 전라, 충청, 경기 각포(各包)에 농업(農業) 정군(征軍), 선군(船軍) 배정 충당에 치적이 있었으며, 1426년 함길도의 송골매를 잡아 들이는데 전력을 다하고 1430년 원평부사로 토 지의 비옥과 척박을 변별하며 조세를 거두게 하였다.

자산(慈山) 의주(義州)에 거사비(去思碑)가 있으며 후에 홍문관 부제학, 대사헌, 예조, 병조, 이조 판서,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하였다.

1471년 순충적덕보조공신 두성군(純忠積德補祚功臣 荳城君)으로 봉하고 좌찬성(左贊成)을 추증 받다.

오안노(吳安老) 자(字) 기서(耆瑞) 시호(諡號): 양평(良平) 해주판관으로 호조참판에 이르고 강원 관찰사를 하였다.

오익창(吳益昌) 자(字) 성윤(盛潤) 호(號) 사호(沙湖) 세종시에 예괴원(隸槐院)에 들고 예조좌랑, 사 헌부장령, 1452년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영광군수, 광주부윤, 이조참의를 역임, 1459년 부원수가 되어 북호(北胡)를 섬멸하고 이어 도승지가 되었으며 1460년 부령부사를 역임하고 길주 목사로 부임 후 체찰사 신숙주(申叔舟)와 같이 북쪽 오랑캐 모린위(毛隣衛) 지계강(池繼江)을 격퇴하다가 순사(殉死)하였다.

오백창(吳伯昌) 자(字) 성화(盛華) 호(號) 겸문재(謙文齋) 시호(諡號): 헌평(憲平) 세종대에 사마시에 합격, 1450년 문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藝文館檢閱兼 春秋館記事官)으로 고려사 편찬에 수사관(修 史官)이 되고, 세종으로부터 성종대에 까지 사 헌부 감찰, 병조정랑, 승정원 우부승지, 도총 부 도총관, 예조참판, 지중추부사, 대사헌, 의 금부지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외직으로 경기도사, 성천부사와 평안, 경상, 전라 삼도 관찰 사를 역임하였으며 1469년 정조사(正朝史)로 요동(遼東)에 다녀오고 1471년 순성좌리공신 (純誠佐理功臣)에 책록 흥원군(興原君)에 봉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봉조 하(奉朝賀)에 명하다. 1473년에 59세로 서거하였다.

오계창(吳季昌) 자(字) 성재(盛哉) 순창(淳昌), 강릉(江陵)군수를 역임하고 황주(黃州)목사를 하였다.

오순손(吳順孫) 자(字) 경장(慶璋) 호(號) 약산(若山) 시호(諡號):양숙(襄肅) 1457년 세조 3년 무과 급제 130근의 활을 당겨 합격 임금이 특별히 겸사복(兼司僕)을 명 하였다. 진위장군 행충좌위부사용(振威將軍行忠佐衛部司勇), 1467년 세조 13년에 이시애(李 施愛)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정충적개 이등공신(精忠敵愾二等功臣)이 되고, 절충 장군 행의흥위 상호군(折衝將軍行義興衛上護軍)으로 두원군(荳原君)에 봉하였으며, 이해 정해년 12월 5일에 31세로 서거하니 병조판서를 증하고 후에 숭정대부 의정부 좌참찬을 추증하였다.

오수공(吳守恭) 자(字) 경여(敬汝) 수의부위행룡양위중부사용(修義副尉行龍驤衛中部司勇)

오숙형(吳淑亨) 자(字) 달보(達甫) 병절교위충좌위부사용 어모장군행충좌위부호군(秉節校尉忠佐衛副司勇 御侮將軍行忠佐衛副護軍)

오언경(吳彦卿) 자(字) 효력부위행충좌위부사용(效力副尉行忠佐衛副司勇)

오광손(吳廣孫) 자(字) 대경(大慶) 통훈대부 공조좌랑(通訓大夫工曹佐郞)이었다.

오의손(吳義孫) 자(字) 인호(仁浩) 호(號) 월봉(月峰) 성종 시 선교랑(宣敎郞) 북부참봉(北部參奉)이 었다.

오석경(吳碩敬) 자(字) 화보(和甫) 산음현감(山陰縣監)이었다.

오수도(吳守道) 자(字) 관일(貫一) 이조참의(吏曹參議)이었다.

오숙문(吳淑文) 가평군수에서 충주목사(忠州牧使)

오극성(吳克誠) 자(字) 한성좌윤

오복량(吳福良) 자(字) 덕순(德醇) 룡양위대호군(龍驤衛大護軍)

오국량(吳國良) 자(字) 직재(直哉) 선조 시에 무과로 발탁, 여러 관직을 거쳐 통정대부 부령부사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에 형 주부공 오득량(吳得良)과 같이 거병(擧兵) 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울산 병영(蔚山兵營)에 서 형 주부공과 함께 순절하니 후에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증(贈) 받았다.

오흥로(吳興魯) 자(字) 성우(聖宇) 호(號) 후산(厚山) 단양군수(丹陽郡守)

오해(吳海) 자(字) 청원(淸源) 통훈대부 황간현감

오세호(吳世豪) 자(字) 학해(學海) 호(號) 성재(省齋) 명종(明宗)시에 무과급제, 사헌부 감찰 겸 훈련원 판관, 통훈대부 신창현감(通訓大夫新昌 縣監)으로 낙향하였다.

오언교(吳彦敎) 자(字) 여수(汝授) 이조참판 동지의금부사

오대남(吳大男) 자(字) 윤부(胤夫) 1590년 선전관에 보직되고, 이어 무과에 급제, 훈련원 판관 시 북쪽 오랑캐 모진(毛鎭)이 여 러번 침입, 공이 장군파만호(將軍坡萬戶)가 되어 이를 격퇴하고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성천부사를 역임, 1624년 이괄(李适)의 반란에도 공이 있어 자헌대부 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도 총관이 되었다.

오경린(吳璟璘) 자(字) 명서(明瑞) 무과급제, 훈련주부, 어모장군 충좌위부호군으로 임진란에 공이 있어 원종공신에 오르고 두산군(荳山君)에 봉해지다.

오응호(吳應虎) 자(字) 무중(武仲) 무과 전력부위, 충좌위부사용, 어모장군 행 충좌위대호군, 절충장군 행 용양위상호군이었다.

오찬서(吳纘緖) 자(字) 사술(士述) 호(號) 백산(栢山) 별시 무과에 급제하고 군자봉사, 훈련주부, 양 지현감, 통훈대부 흥덕현감이었다.

오흥남(吳興南) 자(字) 성보(誠甫) 통정대부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 첨지중추부사

오정태(吳鼎泰) 자(字) 래숙(來叔)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양관제학 봉(封) 흥남군(興南君)

오희복(吳喜复) 자(字) 중초(仲初) 호(號) 영수당(永守堂) 가선대부 이조참판 동지경연 양관제학 봉(封) 흥풍군(興豊君)

오한적(吳漢廸) 자(字) 도경(道卿) 별시무과 제2행 낙안, 영광군수

오석범(吳錫範) 자(字) 여구(汝九) 호(號) 운곡(雲谷)  1886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로 천거 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운산에 은거 학문에 힘쓰다.

오인용(吳仁庸) 자(字) 우원(宇元)  고종 때 사람으로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세인들이 비석을 세우고 정문을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으며 제원군 효행록에 오르다.

근대(近代) 국가(國家) 유공인사

오창선(吳昌善) 3. 1운동에 참가 후 광복군에 참여 국내외 일본기관 파괴에 주력, 부산에서 체포되어 수년 간 옥고를 격고 출감 그 후로 항일운동을 계속하며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 힘쓰다가 1940년에 돌아가다. 평택군 오성면 양교리에 사적비가 있으며 1977년에 건국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오학선(吳鶴善) 국가유공 화랑무공 훈장 수수

오흥선(吳興善) 6. 25 동란 시 전투 참전 화랑무공 훈장 수수

오유선(吳裕善) 6. 25 동란 시 강원 홍천지구 전지복무 중 순사

오익선(吳益善) 6. 25 동란 시 양구지구 전투 중 순사 국립묘지 국군묘역 안장

오길선(吳吉善) 6. 25 동란 시 양주지구 전투 중 순사 국립묘지 안장

오상선(吳相善) 6. 25 동란 참전. 고성 명호리 전투 중 좌안 실명, 원호처장과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유공 훈포장 수수

오웅선(吳雄善) 월남전으로 파병. 현지 전투 중 순사 국군묘지 안장

오각현(吳珏鉉) 대통령으로부터 면려포장 수수

오현택(吳鉉澤) 6. 25 동란 참전 전투 화랑무공 훈장 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