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원주김씨시조(原州金氏),김거공(金巨公),원주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5 08:57 수정일 : 2018-02-25 19:26

원주김씨(原州金氏)

원주김씨시조 김거공(金巨公)은 신라 제56대 경순왕(敬順王)의 제8자 일선군(一善君) 추(鐘)의 6세손 주(離)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의종 때 서리(肖吏) 출신으로 이부상서(吏部尙書)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원성이 원주로 개칭되자 본관을 원주(原州)로 하였다.

원주김씨 시조 김거공(金巨公) 존영(尊影)

조선조에서 배출한 문과 급제자 가운데 상신(相臣) 2명이 나와 같은 신라계(新羅系) 김씨 중 상신(相臣)을 낸 순위가 일곱 번째이다.

대표적인 인물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현손 김자(金資)가 있다. 그는 충숙왕 때 대호군 (大護軍)으로 성절부사(聖節副使)가 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왔으며 충숙왕이 복위한 해에 다시 사신으로 원나라에 가서 순제(順帝)의 즉위를 축하했다.

1339년 조적(曺)의 난으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가자 원제(元帝)에 의해 김지겸(金之謙)과 함께 권관국사(權管國事)가 되고 이어 경화공주(慶華公主)에 의해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가 되었다.

조선조에서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을신(Z辛)의 아들 대경공(戴敬公) 김연지(金連枝)가 세종 때 공조참판 대사헌 한성판윤을 거쳐 경기도 경상도 관찰 사를 지내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렸다.

김형(金珩)의 아들 충정공(忠靖公) 김응남(金應南)은 선조 초에 문과에 급제 호당(湖堂)에 뽑혔고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 부체찰사(副體察使)로서 평안도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했으며 환도 후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사후(死後)에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김응남(金應南)의 당질 김준룡(金俊龍)은 선조조에 무과에 급제 병자호란 때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용인의 광교산(光敎山)에서 청(淸)나라 태조의 사위인 백양고라(白羊高羅)를 포함한 많은 적병을 사살하고 김해 도호부사 경상도 병마 절도사 등을 지냈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김덕원(金德遠)은 김준룡(金俊龍)의 손자로 판관 인문(仁文)의 아들이다.

김덕원은 현종 때 문과에 급제 내외적을 두루 거쳐 형조 호조 판서를 역임하고 1689년(숙종.15)에 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남인(南人)의 한 사람으로서 폐비(廢妃) 민씨(閔氏)의 복위 운동을 반대하다가 갑술옥사(甲戌獄事)에 걸려 제주도로 유배(流配)되었다가 4년 뒤에 해남으로 옮겨 풀려났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주김씨는 남한에 13,21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주김씨 분파도

역대 인물-원주김씨조상인물

김거공(金巨公) ? 1163 (의종 17) 초명은 자표(子彪). 서리(胥吏)로부터 내시(內侍)가 되었으며, 1142(인종 20) 금나라․동경(東京)에 다녀왔다. 1161(의종 15)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이듬해 지추밀월산.판삼사사(判三司事).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호부 상서(戶部尙書) 등을 지냈다.

김윤간(金允侃) 고려 때 시중(侍中).정승(政丞) 등을 역임하였다.

김시보(金時寶) 고려조에 좌대언(左代言)을 지냈다.

김양신(金良信) 고려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김자(金 資) 고려 때 도첨의사사(都僉議司事)에 올랐다.

김의(金 義) 고려 시대에 선주수(宣州守)를 지냈다.

김해(金 晐) 조선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김득우(金得雨) : 문정공파조(文貞公派祖)이다 ()는 원백(元伯) ()는 소 명(素明) ()(文貞)이니 만호(萬戶) ()의 아들이며 무민자(无悶 子) 신군평(申君平)의 손서(孫壻)이자 신수(申璲)의 사위이다

려말에 충주목사(忠州牧使)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시다 공()은 일 찍이 정몽주(鄭夢周) 원천석(元天錫) 김자수(金自粹) 신덕린(申德隣) 김 윤견(金允堅) 김중남(金仲南) 김지윤(金智允) 류종혜(柳從惠) 허기(許愭) 등 당대의 명류들과 교유(交遊)하며 신문정공(申文貞公)의 도학(道學)을 전수받고 많은 유학(儒學)서적이 거듭 불에 타고난 나머지 온전치 못한 문운(文運)을 개척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고려의 사직(社稷)이 망하고 조선이 개국함에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은둔(隱遁)하였다 조선조정이 고려의 명사(名士)들을 회유하려는 정책을 시도하여 여러차례 벼슬을 내 리면서 새 조정에 출사하기를 종용하였으나 끝까지 나아가지 않고 망복 지절(罔僕之節)을 지키었다

아들 을신(乙辛)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김을신(金乙辛) 조선조에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올랐다.

김극신(金克辛) 조선 때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김연종(金連宗)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김연지(金連枝) : 대경공파조(戴敬公派祖)이다 ()는 간보(幹甫) ()는 대 경(戴敬)이니 지중추원부사(知中樞院府事) 을신(乙辛)의 아들로 1411(태종.11) 16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413년 문과(文科)에 급제 하였다 1422년 세종(世宗)이 세자(世子)에게 정사(政事)를 대리(代理)시 키고자 둔 첨사원(詹事院)의 동첨사(同詹事)가 되어 출납(出納)을 주관하 여 세종(世宗)의 신임을 받았다

1452(문종.2)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전라도 관찰사(觀察使)가 되 었으며 이어서 공조참판(工曹參判) 대사헌(大司憲)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하고 다시 외직(外職)으로 나가 경기도 관찰사(觀察使) 경상도 관찰 사(觀察使)로서 선정(善政)을 폈다 1467(세조.13) 지중추원사(知中樞院 事)로서 봉조하(奉朝賀)에 이르고 그의 딸이 정종대왕(定宗大王) 아홉 번째 아들 석보군복생(石保君福生)과 혼인하였다

김연간(金連幹) 조선조에 정랑(正郞)을 지냈다.

김연장(金連長) 조선 때 판관(判官)을 역임했다.

김미수(金眉壽) 조선 시대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김인수(金麟壽) 조선 때 현령(縣令)에 올랐다.

김팽수(金彭壽)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경수(金慶壽) 조선 시대에 경력(經歷)에 이르렀다.

김견수(金堅壽) 조선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올랐다.

김만수(金萬壽) 조선조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김유경(金由敬)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윤호(金潤晧) 조선 때 참의(參議)를 역임했다.

김철손(金哲孫) 조선조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김말손(金末孫) : 병판공파조(兵判公派祖)이다 ()는 백윤(伯胤) ()(耕 雲)이며 려말충신(麗末忠臣) 득우(得雨)의 현손(玄孫)이다 나이 겨우 약 관(弱冠)에 붓을 던지고 활 쏘기를 배워 23세에 뽑히여 선전관(宣傳官) 이 되었으며 얼마 후 재령군수(載寧郡守)가 되어 정성(政聲)이 높았다 충청병수사(忠淸兵水使)와 전라병수사(全羅兵水使)를 역임하고 만년(晩 年)에 안동부사(安東府使)가 되어 득병(得病)함에 내 어찌 객사(客死)하 겠는가 하고 서둘러 조령(鳥嶺)을 넘어 서교구장(西郊舊庄)에 돌아와 머 물다가 졸()하시니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최(金 璀) 조선 때의 집의(執義)를 지냈다.

김양세(金陽世) 조선조에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김주경(金周敬) 조선 때 정랑(正郞)을 역임했다.

김안조(金安祚) : 감찰공파조(監察公派祖)이다 ()는 중수(仲綏) ()는 홍 파(弘巴)이니 병판공(兵判公) 말손(末孫)의 차자(次子)로 나이 십이~삼세 에 시서대의(詩書大義)에 통달(通達)하고 능문(能文)하여 중종(中宗) 갑 술(甲戌) 1514년에 생진시(生進試)에 급제(及第)하여 성균생원(成均生員) 이 되고 다음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등탁(登擢)되었으며 통정대부 (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김계조(金繼祖)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순원(金舜元) 조선조에 첨절제사(僉節制使)에 올랐다.

김우(金 瑀) 조선 때 사복시정(司僕시正)을 역임했다.

김경(金 璟) 조선 시대에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에 이르렀다.

김안우(金安祐) : 찬성공파조(贊成公派祖)이다 ()는 계수(季綏) ()(弘 月)이니 병판공(兵判公) 말손(末孫)의 삼남(三男)으로 중종(中宗) 계해(癸 亥)에 음직(蔭職)으로 예빈시별좌(禮賓寺別坐)에 선보(選補)되었으며 특 전(特典)에 의해 숭록대부좌찬성(崇祿大夫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우길(金友吉)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김영(金 榮) 조선조에 참의(參議)에 올랐다.

김복경(金復慶) 조선 때 판윤(判尹)을 지냈다.

김두남(金斗南) : 파강공파조(巴江公派祖)이다 ()는 일숙(一叔) ()는 파 강(巴江)이니 전설사별좌(典設司別坐) ()의 아들로 가선대부(嘉善大 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으며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김응남(金應南) : 두암공파조(斗巖公派祖)이다 ()는 중숙(重叔) 호는 두암 (斗巖) ()는 충정(忠靖)이니 1568(선조.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 과(乙科)로 급제 예문관(藝文館)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으며 1583년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승지(右承旨)를 지냈다 그후 좌부승지(左副承旨) 대사헌(大司憲) 대사간(大司諫) 부제학(副提學) 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하고 1591년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판윤(漢 城判尹)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에 병조판서(兵曹判書) 부체찰사(副體 察使)로서 평안도로 피난하는 선조를 모셨고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왕을 따라 환도(還都) 1594년 우의정(右議政) 1595년 좌의정(左議政)이 되었 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는 안무사(按撫使)를 지냈고 1604년 호 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김기남(金起南) : 부사공파조(府使公派祖)이다. ()는 명숙(明叔) ()는 두 촌(斗村)이며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 응남(應南)의 아우이다 선조(宣祖) 기묘(己卯)에 음직(蔭職)으로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내고 판관(判官)을 거쳐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역임하였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 職)되었다

김진남(金振南) 조선 시대에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을 지냈다.

김수(金 修) 조선 때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김준룡(金俊龍) : 충양공파조(忠襄公派祖)이다. ()는 수부(秀夫) ()는 충 양(忠襄)이며 1608년 무과(武科)에 급제 1636(인조.14) 전라도 병마절 도사(兵馬節度使)가 되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용인 광교산 (光敎山) 전투에서 청()나라 대군을 맞아 청태조(淸太祖)의 사위인 백 양고라(白羊高羅) 장군을 포함한 많은 적병(敵兵)을 사살함으로서 광교 산(光敎山) 대승첩(大勝捷)의 전공(戰功)을 남기고 뒤에 어영중군(御營中 軍)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 경상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등을 역임(歷任)하였다.

지금도 광교산 상봉(上峯)의 암반(巖盤)에는 忠襄公金俊龍戰勝地 丙子淸 亂公提湖南兵 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고 새겨진 암각서(巖刻書)가 경기도.기 념물 제38호로 지정(指定)되어 선명하게 보존(保存)되고 있다

김명룡(金命龍) 조선조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중혁(金重爀) 조선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하였다.

김중문(金重文) 조선 시대에 찰방(察訪)에 이르렀다.

김자문(金子文) 조선조에 부사(府使)에 올랐다.

김경문(金敬文) 조선 때 사재시 첨정(司宰寺僉正)을 지냈다.

김현문(金炫文) 조선 때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김한문(金漢文) 조선조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김윤문(金胤文) 자 자문 세마 예조정랑

김덕원(金德遠) : 휴곡공파조(休谷公派祖)이다. ()는 자장(子長) ()는 휴 곡(休谷)이며 판관(判官) 인문(仁文)의 아들로서 효종(孝宗) 5(1654) 갑오(甲午)에 진사시(進士試)에 들고 현종(顯宗) 3(1662) (壬寅)에 등 과(登科)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직(補職)되었다 동() 7(1666) 병오(丙午)에 경안찰방(慶安察訪)으로 나아가 가을 문과중시 (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及第)하여 전적(典籍)이 되었다.

그 후 내외직(內外職)을 두루 거쳐 형조(刑曹) 호조(戶曹) 예조판서(禮曹 判書) 등을 역임하고 숙종(肅宗) 15(1689) 기사(己巳)에 벼슬이 우의 정(右議政)에 이르렀고 1691년 신미(辛未)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에 연루(連累)되어 제주도로 유배(流配) 당하 였다가 4년만에 해남(海南)으로 옮겨 풀려났다

김중(金 重)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몽익(金夢翼) 조선조에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김몽형(金夢衡) 조선 때 부사(府使)에 올랐다.

김창업(金昌業) 조선 시대에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냈다.

김몽갑(金夢甲) 조선조에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을 역임했다.

김몽협(金夢協) 조선 때 판관(判官)을 역임했다.

김몽양(金夢陽) 조선 때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김몽서(金夢瑞) 조선조에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정하(金鼎夏) 조선조에 부사(府使)에 올랐다.

김정윤(金廷潤) 조선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김조윤(金朝潤) 조선 때 우윤(右尹)에 이르렀다.

김조윤(金曺潤) 조선 시대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화제(金華濟) 조선조에 군수(郡守)에 올랐다.

김두천(金斗天)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수정(金壽鼎) 조선조에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김중섭(金重燮) 조선 때 현감(縣監)에 올랐다.

김세원(金世元)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김준(金 遵) 조선조에 현령(縣令)을 지냈다.

김호명(金昊明) 조선 시대에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김호길(金昊吉) 조선 때 경력(經歷)을 지냈다.

김우명(金遇明) 조선조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다.

김봉년(金鳳年) 조선조에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김봉희(金鳳熙)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에 올랐다.

김교영(金敎英) 조선조에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김하영(金夏英) 조선 시대에 승지(承旨)를 지냈다.

김동일(金東一) 조선 때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원주김씨 대종회 역대 회장(歷代 會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