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장흥오씨시조(長興吳氏),오천우(吳天佑),장흥오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4 14:10 수정일 : 2018-03-21 21:2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장흥오씨(長興吳氏)의 시조(始祖)인 오천우(吳天佑)는 조선조(朝鮮朝)에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그후 후손들이 장흥(長興)에 정착(定着) 세거(世居)하면서 보성 오씨(寶城吳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장흥(長興)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장흥(長興)은 전라남도의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는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인데 신라 때 오아(烏兒)로 개칭되어 보성군에 속해 있다가 고려 때 영암(靈岩)에 소속되고, 인종(仁宗) 때 장흥부(長興府)로 승격되었다. 1265년(인종 6)에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다시 장흥부가 되었다. 그 이후 많은 변천을 거쳐 1895년에 장흥군이 되었다. 1914년 부․군․면 폐합(廢合)에 따라 웅치(熊峙)․회천(會泉) 2개면이 보성군에 이관되었으며, 1936년 부동면(府東面)을 장흥면으로 개칭하고, 남상(南上)․남하(南下) 양면을 용산면(蓉山面)으로, 고읍면(古邑面)을 관산면(冠山面)으로 개칭하였다. 1942년 장흥면이 장흥읍으로 승격하고, 1980년 관산면이 관산읍으로, 대덕면이 대덕읍으로 승격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장흥오씨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조선(朝鮮)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섭의(燮宜)와 목사(牧使)를 지낸 신언(愼言), 그리고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낸 신행(愼行)이 있다.

이외에도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용맹을 떨친 계은(繼殷),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한 린(麟)과 언신(彦信) 등이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흥오씨(長興吳氏)는 남한(南韓)에 4,132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歷代人物)-장흥오씨조상인물

오천우(吳天佑): 호(號)는 청암(淸菴). 조선조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오순적(吳順迪): 호(號)는 죽은(竹隱). 조선 때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를 지냈다.

오자화(吳自和): 호(號)는 청은(淸隱). 조선 때 판윤(判尹)을 지냈다.

오섭의(吳燮宜): 호(號)는 겸재(謙齋). 조선(朝鮮)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오신언(吳愼言): 호(號)는 경재(敬齋). 조선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오신행(吳愼行): 호(號)는 삼성재(三省齋). 조선(朝鮮) 때 군자감(軍資監) 정(正)을 역임하였다.

오권(吳 權): 호(號)는 성암(誠菴). 조선(朝鮮)에서 관상감(觀象監)을 역임하였다.

오계은(吳繼殷): 호(號)는 정재(靜齋). 조선(朝鮮) 때 품계(品階)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오인(吳 麟): 호(號)는 덕재(德齋). 조선조(朝鮮朝)에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오응철(吳應哲): 자(字)는 방언(邦彦), 호(號)는 송강(松岡). 조선(朝鮮)에서 봉사(奉事)를 지냈다.

오적(吳 勣): 자(字)는 여익(汝翼), 호(號)는 요재(蓼齋). 조선(朝鮮) 때 기사관(記事官)을 역임하였다.

오언신(吳彦信): 자(字)는 사행(士行), 호(號)는 이검재(履儉齋). 조선조(朝鮮朝)에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