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동복오씨(同福吳氏),동복오씨시조,오녕(吳寧) ,동복오씨유래,동복오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4 13:38 수정일 : 2018-01-23 15:22

시조 및 동복오씨유래(본관)

동복오씨(同福吳氏)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거란을 토평(討平)한 공()으로 동복군(同福君)에 봉해진 오녕(吳 寧)을 시조(始祖)로 하고 동복(同福)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동복(同福)은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는 백제시대의 두부지현(豆夫只縣)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 때 동복현(同福縣)으로 개명하였고 고려초에는 보성에 편입시켰다가 후에 다시 설치하였다. 1394(태조 3)에 화순(和順)에 편입시켰고, 1405(태종 5)에 복순(福順)으로 개칭하였다가 1416(태종 16)에는 현으로 복구하였고, 그 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지금은 동복면으로서 화순군(和順郡)에 편입되어 있다.


동복오씨시조 녕()의 손자 대승(大陞)이 원종(元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시중(侍中)에 이르렀으며, 증손 광찰(光札)이 대장군(大將軍), 5세손 선()이 판판도낭사(判版圖郎事)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고, 6세손 잠()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귀성군(龜城君)에 봉해져 대대로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에 와서는 세현(世賢)의 아들 억령(億齡)과 백령(百齡) 형제가 유명하였는데, 억령(億齡)은 선조(宣祖) 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에 뽑히고 그후 대사헌(大司憲)5, 형조판서(刑曹判書)3회나 역임하였으며, 관직생활 동안 근검․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문장(文章)과 서예(書藝)에 탁월한 재질(才質)이 있었다.

그의 동생 백령(百齡)도 선조조(宣祖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광해군(光海君)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복천군(福川君)에 봉해지고 인조(仁祖) 때 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이들 형제의 후손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문(家門)을 번성시켰는데, 억령(億齡)의 세아들 익(: 승지를 역임)․정()․전(: 교리와 지평을 역임)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한가(文翰家)로 이름을 날렸다.

뿐만 아니라 백령(百齡)의 맏아들 준()이 효종(孝宗) 때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지춘추관사(知春秋官事)가 되어「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그후 대사헌(大司憲)․좌참찬(左參贊)을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문장(文章)과 글씨에 능했으며, 둘째 아들 단()은 인평대군(麟平大君 : 효종의 동생)의 장인(丈人)으로 장령(掌令)․전주부윤(全州府尹)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의 아들 모두가 뛰어나 정일(挺一)은 인조(仁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도승지(都承旨)로서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찬에 참여한 후 각 도() 관찰사(觀察使)․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으며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과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정위(挺緯)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각 도() 관찰사(觀察使)와 각 조()의 판서(判書)를 두루 역임하고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정창(挺昌)은 지평(持平)․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백령(百齡)의 증손들도 매두 뛰어나 정일(挺一)의 아들인 시만(始萬)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교리(校理)와 이조좌랑(吏曹佐郞)․승지(承旨)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고, 정원(挺垣)의 아들 시수(始壽)가 현종(顯宗) 대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수찬(修撰)․교리(校理)․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거쳐 남인(南人)의 거두(巨頭)로 우의정(右議政)을 지냈으며, 정규(挺奎)의 아들인 시복(始復)도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대사간(大司諫)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글씨에 능했다.

이외에도 광운(光運)은 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했으며, 대익(大익益)은 호조 참판(戶曹參判), 덕영(德泳)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2015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동복오씨(同福吳氏)는 전국에 총 72,39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歷代人物)-동복오씨조상인물

오대승(吳大陞):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고려(高麗) 원종(元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官職이 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1269(원종 10) 동복현(同福縣)에 돌아와 48개의 석등(石燈)을 만들어 밤마다 점화(點火)하여 자손(子孫)과 동족(同族)의 융성을 기원하였다. 그 석등은 지금까지 원형(原形)대로 보존되어 문화재(文化財)로 지정되었다.

오광찰(吳光札): 고려 때 조정대부(朝靖大夫)로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오선(吳 璿):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광정대부(匡靖大夫)로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를 거쳐 판판도낭사(判版圖郎事)․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오잠(吳 潛): ()는 흥우(興雨), ()는 동헌(東軒), 시호(諡號)는 문재(文齋).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승지(承旨)․지신사(知申事)․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등을 지냈다. 충선왕(忠宣王) 때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첨의평리(僉議評理)를 역임하였고, 1315(충숙왕 2) 삼사사(三司使)에 이른 후 1322(충숙왕 9)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서 귀성군(龜城君)에 봉하여졌다.

오천(吳 蕆): ()는 희기(希起), 시호(諡號)는 문명(文明). 고려(高麗) 때 삼사좌윤(三司左尹)․개성부 좌윤(開城府左尹)을 지냈다.

오윤감(吳允瑊): 시호(諡號)는 경절(敬節). 고려(高麗) 때 좌윤(左尹)을 역임하였다.

오언(吳 彦): 우왕(禑王) 초에 원수(元帥)가 되어 울주(蔚州)․사주(泗州)에서 왜구를 격파하고, 1380년 전라도에서 왜구를 방어했다. 이듬해 양광도 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로서, 1382년에는 임주 도순문사(林州都巡問使)로서 양광도와 임주의 왜구를 격파하였다.

오식(吳 軾):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고려(高麗) 때 수문전(修文殿)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오유년(吳有年) 시호(諡號)는 문효(文孝).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오승(吳 陞): 초명(初名)은 제부(齊富), ()는 숭지(崇之), ()는 죽헌(竹軒), 시호(諡號)는 정평(靖平).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을 거쳐 1440(세종 22)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오석산(吳石山) ()는 퇴은(退隱). 조선(朝鮮) 개국 후 태조(太祖)가 수차례 집사(執事)를 除授받았으나 매번 사양하고, 전남(全南) 흥덕(興德)에 은거하며 절개(節槪)를 지키니 지금도 그 고을을 고려곡(高麗谷)이라 일컫는다.

오계종(吳繼宗): ()는 백종(伯宗), ()는 귀은(歸隱). 성석린(成石麟)의 문인(門人). 1427(세종 9)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에 이르렀으나, 1455(세조 1) 단종(端宗)이 왕위(王位)에서 물러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하였다.

오덕생(吳德生): 조선조(朝鮮朝)에 전주 판관(全州判官)을 지냈다.

오대권(吳大權): ()는 평숙(平淑). 조선(朝鮮) 때 선공감 주부(繕工監主簿)를 지냈다.

오석산(吳碩山): ()는 의정(義正), ()는 운암(雲岩). 조선(朝鮮)때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오세선(吳世善): ()는 집균(執均). 조선(朝鮮)에서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역임했다.

오세현(吳世賢): ()는 국언(國彦). 조선조(朝鮮朝)에 사옹원(司饔院) 직장(直長)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오억령(吳億齡): 1552(명종 7)1618(광해군 10) ()는 대년(大年), ()는 만취(晩翠),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사옹원(司饔院) 직장(直長) 세현(世賢)의 아들. 1570(선조 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8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에 뽑혔다가 검열(檢閱), 호조․이조의 좌랑(佐郞)을 지냈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집의(執義)․전한(典翰)을 역임, 이때 일본의 도요또미(豊臣秀吉)의 사신 겐소(玄蘇)가 오자 선위사(宣慰使)로서 이를 맞고, 왜병이 대거 침입해 올 것을 예언하여 전직(轉職)되었다. 1591년 진주사(陳奏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오던 길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해 개성(開城)에 이르러 왕을 호종(扈從)하여 의주(義州)에 가서 1593년 이조 참의(吏曹參議), 뒤에 우부승지(右副承旨), 대사성(大司成), 병조․공조․이조 참의(參議),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부접반사(副接伴使)등을 지냈다. 환도(還都) 후 대사간(大司諫)․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등을 역임한 뒤 1601년 부제학(副提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錄選)되었다. 1604년 이조(吏曹) 참판(參判) 겸 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 1607년에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듬해 선조가 죽자, 고부청․시청 승습부사(告訃請諡請承襲副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후 병조(兵曹) 참판(參判)․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대사헌(大司憲)․형조(刑曹) 판서(判書)․우참찬(右參贊)․개성부(開城府) 유수(留守) 등을 역임했다. 문장이 뛰어났고, 초서(草書)․예서(隸書)․전서(篆書)에 능했다. 배천(白川)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오백령(吳百齡): 1560(명종 15)1633(인조 11) ()는 덕구(德耈), ()는 묵재(黙齋), 직장(直長) 세현(世賢)의 아들. 1588(선조 21)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1594(선조 2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으로 등용, 정언(正言)․병조좌랑(兵曹佐郞)․전적(典籍)․필선(弼善)․재령 군수(載寧郡守)․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위수(衛率)․응교(應敎)․사인(舍人) 등을 역임, 광해군(光海君 ) 때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복천군(福川君)에 봉해졌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기용되고, 이어 도승지(都承旨)․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이조 참판(吏曹參判)․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했다.

오익(吳 翊): 1574(선조 7)1618(광해군 10). ()는 필보(弼甫), ()는 월강(月岡), 우참찬(右參贊) 억령(億齡)의 아들. 1603(선조 36) 진사(進士)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임진왜란 때 불탄 실록(實錄)의 재간(再刊)에 참여했다. 1604년 검열(檢閱), 이듬해 대교(待敎)․주서(注書), 1606년 감찰(監察), 이듬해 전적(典籍)․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 1608(광해군즉위) 정언(正言)․수찬(修撰)을 지냈다. 이듬해 병조 정랑(兵曹正郞)․지제교(知製敎)로서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 1614(광해군 6) 검상(檢詳), 다음해 사인(舍人)․승지(承旨)를 역임하고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글씨에 능했다.

오준(吳 竣): 1587(선조 20)1666(현종 7). ()는 여완(汝完), ()는 죽남(竹南), 이조 참판(吏曹參判) 백령(百齡)의 아들. 1618(광해군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620년 주서(注書)를 거쳐 지평(持平)․장령(掌令)․필선(弼善)․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1639(인조 17)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심양(瀋陽)에 다녀왔으며,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썼고, 1643년 등극부사(登極副使)1648년 동지 겸 정조성절사(冬至兼正朝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0(효종 1)에 예조(禮曹) 판서(判書)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그후 형조 판서(刑曹判書)․대사헌(大司憲)․우빈객(右賓客) 등을 거쳐 1660(현종 1) 좌참찬(左參贊)이 되고, 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여러 번 서사관(書寫官)을 지냈다.

오전(吳 立專): 1588(선조 21)1634(인조 12). ()는 경보(敬甫), ()는 인주(麟洲), 우참찬(右參贊)인 억령(億齡)의 아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빙고 별제(氷庫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62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주서(注書)가 되고, 이어 설서(說書)․사서(司書)․교리(校理)․수찬(修撰)․지평(持平) 등을 역임, 1633( 인조 11) 황해도 암행어사(黃海道暗行御史)를 지냈다. 해서(楷書)에 뛰어났다.

오단(吳 端): 1592(선조 25)1640(인조 18). ()는 여확(汝擴), ()는 동암(東巖)․백암(白巖), 이조 참판(吏曹參判) 백령(百齡)의 아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623(인조 1) 음보(蔭補)로 직장(直長)이 되었다가 이듬해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 )을 역임, 1634(인조 12) 둘째 딸을 인평대군(麟坪大君)에게 출가시켰다. 1636년 장령(掌令), 이듬해 전주부윤(全州府尹)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우의정(右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오정일(吳挺一): 1610(광해군 2)1670(현종 11). ()는 두원(斗元), ()는 귀사(龜沙), 관찰사 단()의 아들. 1627(인조 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이 되어 1635년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을 문묘종사(文廟從祀)의 의논이 있자, 반대의 소()를 올리고 퇴관(退官)했다. 1639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164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 1650(효종 1) 승지(承旨)가 되었다. 이어 황해도․경기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 1655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1657년 이조 참판(吏曹參判)에서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1659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1660(현종 1)에 도승지(都承旨)로서 「효종실록(孝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663(현종 4)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오정위(吳挺緯): 1616(광해군 8)1692(숙종 18). ()는 군서(君瑞)․서장(瑞章), ()는 동사(東沙), 관찰사(觀察使) ()의 아들. (立專)에게 입양(入養). 1645(인조 2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52(효종 3) 부교리(副校理)․수찬(修撰), 1659년 승지(承旨) 등을 역임하고, 1664(현종 5)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었다. 그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양주 목사(楊洲牧使)․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을 거쳐 1672년 호조․형조․공조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1677(숙종 3)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예조 판서(禮曹判書)․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무안(務安)에 유배되었다가 삭주(朔州)․보성(寶城)에 이배(移配),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풀려 나와 다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등용되고, 이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오정창(吳挺昌): 1634(인조 12)1680(숙종 6). ()는 계문(季文), 관찰사 단()의 아들. 1662(현종 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說書)․정언(正言)을 거쳐 1672(현종 13) 지평(持平)을 지냈다. 1675(숙종 1) 부사직(副司直)이 되고, 부교리(副校理)에 이러 동부승지(同副承旨)에 특진, 그후 집의(執義)․부응교(副應敎)․부제학(副提學)․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냈고, 1680년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오시수(吳始壽): 1632(인조 10)1681(숙종 7). ()는 덕이(德而), ()는 수촌(水村), 관찰사 정원(挺垣)의 아들. 한성(漢城) 출신. 17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1656(효종 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가주서(假注書)․정언(正言)․문학(文學)․지평(持平) 등을 지냈다. 현종(顯宗) 초 수찬(修撰)․교리(校理)․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내고, 1664(현종 5)에 사복시(司僕寺) ()으로 평안도 암행어사(平安道暗行御史)가 되고, 1666(현종 7)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예빈시 정(禮賓寺正)․승지(承旨)를 거쳐 1670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1672년 이조 참의(吏曹參議)․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등을 지냈다. 1674년 도승지(都承旨)․형조 판서(刑曹判書)․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 1675(숙종 1) 선왕 현종(顯宗)의 죽음에 대한 청나라 조제사(弔祭使)가 재차 왔을 때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이들을 맞았으며, 뒤에 왕에게 조제사가 다시 오게 된 경위를 보고할 때 황해도 관찰사 윤 계(尹 堦)와 내용이 상위하자, 숙종(肅宗)은 그 말이 옳다고 판단, 윤 계를 원배(遠配)했다. 1679(숙종 5)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오시복(吳始復): 1637(인조 15)?. ()는 중초(仲初), ()는 휴곡(休谷), 정규(挺奎)의 아들. 1662(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지평(持平)등을 역임하고, 이조(吏曹)의 낭관(郎官), 사인(舍人) 등을 거쳐, 1676(숙종 2)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680년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파직, 1689(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등용, 16 91년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듬해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수어사(守禦使), 1694년 다시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었으나 이해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유배되었다가 1697년 풀려서 이듬해 우부빈객(右副賓客)을 지내고, 1701년 무고(巫蠱)의 옥()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에 안치(安置)되고, 1712년 영해부(寧海府)에 이배되었다가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글씨를 잘 썼다.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오시만(吳始萬): 1647(인조 25)?. ()는 영석(永錫), ()는 춘헌(春軒), 호조 판서(戶曹判書) 정일(挺一)의 아들. 예조 판서 정위(挺緯)에게 입양(入養). 1666(현종 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76(숙종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전적(典籍)․헌납(獻納)을 역임했다. 1679(숙종 5)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수찬(修撰)․교리(校理)․이조 좌랑(吏曹佐郞)․승지(承旨)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오시대(吳始大): 조선(朝鮮) 때 참판(參判)을 지냈다.

오시익(吳始益):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오광운(吳光運): 1689(숙종 15)1745(영조 21). ()는 영백(永伯), ()는 약산(藥山), 시호(諡號)는 충장(忠章),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상순(尙純)의 아들. 1714(숙종 40)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719(숙종 4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현감(縣監)이 되고, 설서(說書)에 올라 연잉군(延잉君 : 영조)의 서연관(書筵官)이 되었으며, 승지(承旨)를 지냈다. 1728(영조 4)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교리(校理)를 역임하고, 이해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그 방조자의 처벌을 주장하여 이봉상(李鳳祥)․남연년(南延年) 등을 처형케 함으로써 서울에서의 내응(內應)을 미연에 방지했다. 이듬해 영남 안핵어사(嶺南按覈御使)에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1737년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1740년 부사과(副司果), 1743년 예조 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 1744(영조 20) 사직(司直)을 거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이르렀다. 문장에 뛰어났다. 이조판서(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을 추증(追贈)되었다.

오대익(吳大益): 조선 때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오상유(吳尙遊): 조선(朝鮮) 때 장령(掌令)을 지냈다.

오덕영(吳德泳): 조선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오도영(吳道泳): 조선에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오필연(吳弼連): 조선조(朝鮮朝)에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을 지냈다.

오대관(吳大觀): 조선 때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오인영(吳麟泳): 조선(朝鮮)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