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파주염씨(坡州廉氏),파주염씨시조,염형명,파주염씨유래,파주염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4 10:45 수정일 : 2018-01-29 16:41

파주염씨시조 및 파주염씨유래(본관)

파주염씨(坡州廉氏)는 서기 25년경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였던 염사치(廉斯鑡, ‘염사착이라고도 함)가 살기 좋다고 하는 낙랑(樂浪)으로 무리를 이끌고 이주한 후 공을 세워 성씨와 관모(冠帽) 및 전택(田宅)을 하사 받았다는 위략(魏略)과 해동역사(海東繹史)를 근거로 염사치를 최초의 득성조(得姓祖)라고 본다.

시조염형명(廉邢明)으로 고려(高麗)의 후삼국(後三國) 통일(統一) 공로(功勞)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봉되고 대사도(大司徒)를 지내신 분이다. 이 분부터 후손(後孫)의 계대(系代)가 뚜렷하여 이 분을 시조(始祖)로 모신다.

중시조(中始祖)염제신(廉悌臣)으로 자()는 개숙(愷叔), ()는 매헌(梅軒), 시호(諡號)는 충경(忠敬)이시다. 고려 충렬왕 30(1304) 10월에 출생했고, 6살 때 부친 세충(世忠)이 돌아가시고, 11살 때 원()나라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인 고모부 말길(末吉)의 집에서 성장하며 훌륭한 스승 밑에서 10년을 수학하여 학덕(學德)과 기국(器局)이 당세에 걸출하였다. 원나라 태정(泰定) 왕에게 발탁되어 숙위(宿衛)로 있던 중,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고국에 혼자 계신 어머니를 잊지 못해 왕에게 간청하여 낭중(郎中)벼슬로 돌아온 후, 고려의 다섯 왕(충숙, 충목, 충정, 공민, 우왕)30여 년간 섬기면서 도첨의, .우정승, 판군부사사 상호군 도총도감 영삼사사 곡성후 판개성겸 춘추관사 문하시중 영문하사 판문하사(都僉議, .右政丞, 判軍簿司事 上護軍 都摠都監 領三司事 曲城候 判開城兼 春秋館事 門下侍中 領門下事 判門下事) 등을 역임했으며, 공민왕이 친히 공()의 초상(肖像)을 그려 하사하였다.

1382년 임술(壬戌) 318일 향년 79세에 졸()하시니 충성수의 동덕론도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부원군(忠誠守義 同德論道輔理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曲城府院君)이고 시호는 충경(諡號 : 忠敬)이다. 묘소(墓所)는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 항동에 배위(配位) 진한국대부인 안동권씨(辰韓國大夫人 安東權氏)의 묘와 한 계곡에 있고, 전국 여러 곳에서 매년 향사(享祀)하고 있다.

중시조 제신(悌臣)의 첫 배위(配位)인 완산군부인 배씨(完山郡夫人 裵氏)는 일찍 별세(別世)하여 후손이 없고, 다음 배위(配位)인 진한국대부인 안동권씨(辰韓國大夫人 安東權氏)35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국보(國寶), 흥방(興邦), 정수(廷秀)로 삼형제가 모두 과거 급제하였다. 서출(庶出)로는 22녀를 두었는데 김씨 소생의 아들 혜주(惠珠)는 통제원 주지(通濟院 住持)이고, 이씨 소생의 아들 광원(廣元)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였다.

아래의 역대인물염제신란에 자세한 내용 있음.


본관(本貫)은 처음에는 시조의 세거지(世居地)인 봉성(峯城; 지금의 파주)이었는데, 중시조가 곡성부원군에 봉해지자 본관을 곡성(曲城)으로 개관(改貫)하였다. 그 후 봉성이 서원(瑞原)으로 개칭(改稱)되어 서원(瑞原)으로 하였고, 조선 세조 때에 서원(瑞原)이 파주(坡州)로 개칭(改稱)되어 파주(坡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염씨(廉氏)의 본관은 파주(坡州)를 포함하여 광주(廣州개성(開城순창(淳昌담양(潭陽) 70여 본()으로 알려졌지만 이들 모두 파주염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 또는 조상의 유업지(遺業地)일 뿐이다. 염씨는 시조 형명(邢明)과 중흥조 제신(中與祖 悌臣)을 축으로 하는 단일본이다. 염씨들이 서기1388년 무진지화 이후 더 이상의 화()를 피해 전국 각지(全國各地)로 흩어져 숨어 살던 중 새 호적을 만들 때 각기 살던 고장을 본관으로 삼아서 본관이 많아 졌다. 그러나 파주이외의 본관을 가진 집안의 가첩(家牒)이나 가승보(家乘譜)를 보면 상계(上系)에서는 충경공 제신(忠敬公 悌臣), ()등 파주염씨(坡州廉氏)의 상계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염씨(廉氏)는 파주 단일본(單一本)이다.

파주염씨는 ()를 구분하지 않는데, 이는 타 성씨(他姓氏)에 비해 인구수가 많지 않은 집안이므로 분파(分派)의 구분(區分)이나 그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분류(分類) 한다면 국파공파(菊坡公派), 동정공파(東亭公派), 청강공파(淸江公派)의 셋으로 나눌 수도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염씨는 57,5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파주염씨조상인물

삼국사기 신라본기((三國史記 新羅本紀)시조 형명(始祖 邢明)이전의 인물로서는 선덕왕 때의 염종(廉宗)염장(廉長), 또 신라 구산선문 가지산문(九山禪門 迦智山門)의 도의국사(道義國師)의 법을 계승한 염거(廉居, 국보 제104호 前興法寺 廉居和尙塔의 장본인)등과 같은 염씨들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분들을 염문의 선조로 추정할 수 있는 계대(系代)는 알지 못하고 있다.

염씨(廉氏)는 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을 배출시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는데, 특히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시조 제신(悌臣)과 그 아들 3형제인 국보, 흥방, 정수를 꼽을 수 있다. 맏아들 국보(國寶)가 공민왕(恭愍王)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후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졌다. 둘째 아들 흥방(興邦)도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진 후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냈고, 여러 번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셋째 아들 정수(廷秀)도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그런가 하면 1388년 무진지화(戊辰之禍) 이후에도 염씨(廉氏)를 빛낸 분들이 있었다. 바로 그분들이 임진왜란 때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언상(彦祥) 말경(末卿) 장군과 () 세경(世慶) () 제립(悌立) 홍립(弘立) 등이다.


고려시대 인물

염형명(廉邢明) 고려(高麗) 초기(初期)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봉되고 대사도(大司徒)를 지낸 분이다. 그런데 시조 염형명(廉邢明)의 활동 당시의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왕건(王建)이 고려를 개국할 때의 공로로 개국이등공신(開國二等功臣)이 된 염상(廉湘)이 있고, 또 서기943년 왕건의 임종과 유언을 받든 유명재상(遺命宰相) 염상(廉相)이 있는데 의 한자가 다르다. 여기서 공신과 재상을 지낸 분들의 이름이 단 한번씩만 거론되었다는 것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염상의 기록에서 한자가 오기(誤記)된 것인지? 아니면 당시 왕건의 행적으로 볼 때 공신이나 장군들에게 성씨(姓氏)나 이름을 하사한 기록이 많은데 혹시 위의 세 분도 그런 경우로 동일인이 아닌지 추정하기도 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시조 이후의 계대(系代)군기감(軍器監) ()의 子 가칭(可偁)을 삼한공신 사도 형명(邢明)의 손()”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염위(廉位) 군기승(軍器丞)을 지냈다.

염가칭(廉可偁) 군기승(軍器丞) 염위의 아들이고, 삼한공신 사도 염형명의 손자인데, 서기 1010년 병사(兵吏)로서 서북방(西北方)을 방어하다 거란군(契丹軍)의 포로가 된 이후 1055년에 아들 한 명을 데리고 도망하여 돌아왔다. 이에 문종(文宗)은 염가칭(廉可偁)이 공신의 후손인데다 그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영업전사(永業田舍)를 하사(下賜)하였다.

염현(廉顯) 1032년 우습유(右拾遣)로서 처음 실시된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시관(試官)이 되어 많은 인재를 뽑아 유명하였다. 그리고 1046년에는 정종(靖宗)이 죽자 문종(文宗)의 명에 의해 학문 높은 재신(宰臣)으로서 선왕(先王)의 묘호(廟號)를 지어 바친 기록이 동문선에 전해져 온다.

염한(廉漢) 1073(문종 27) 영군도부서장군(領軍都部署將軍)으로서 동경(東京:경주) 지방에 침입한 동번(東蕃)의 해구(海寇)를 격퇴하고, 1080년 동번(東蕃)에서 병란이 나자 병부상서(兵部尙書)로서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정주(定州 : 정평)에서 동번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워 은()50량과 성정향(盛丁香)을 포상(褒賞)으로 하사(下賜)받았다. 다음해에는 연로해서 글을 올려 퇴직하려 했어도 허락하지 못할 만치 나라의 기둥이었다. 그리고 병부상서 상주국(兵部尙書上柱國)을 역임하였다.

염덕방(廉德方) 관직이 검교우복사태부소경(檢校右僕射太府少卿)에 이르고 의종원년(毅宗元年) 정묘(丁卯) 1147년에 졸()하였으며, 경성동인효원 동북강(京城東因孝院 東北岡)에 묘()가 있다고 전해진다. 배위(配位) 의령군대부인 심씨(宜寧郡大夫人 沈氏)1083년에 출생하여 모범적인 현부양처(賢婦良妻)로서 덕망(德望)이 높았다. 116280세로 졸()하였는데, 심씨부인의 지석(誌石)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해지고 있다.

염신약(廉信若) 1118(예종 13) ~ 1192(명종 22)

덕방(德方)4(四男)으로 자는 공가(公可), 시호는 효문(孝文). 인종(仁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 광주 장서기(廣州掌書記)가 되고, 부친상 때는 3년간 여막(廬幕)에 살아 마을에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다. 1173년 장작감(將作監)으로서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시관이 되어 인재를 뽑았으며 또 1177년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인재를 선출하였다. 그리고 1178년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당시 반란을 일으킨 조위총(趙位寵)이 금나라에 허위사실을 들어 지원을 요청하자, 사람을 보내어 그 허위임을 밝힌 다음 조위총의 사신으로 금나라에 갔던 자를 영청현(永淸縣)에서 처형하였다. 이듬해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고 1183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와 정당문학 예부상서(政堂文學 禮部尙書)를 거쳐 나라의 원로(元老)인 태사(太師)에 이르렀다고 이색(李穡)이 봉교찬(奉敎撰)한 충경공 신도비문(忠敬公 神道碑文)에 기록 되었다. 한서(漢書)에 밝았으며 1192년에 75세로 다난(多難)했던 생을 마쳤다. ()는 풍덕군 백마산록에 있다.

염경애(瓊愛) 신약(信若)의 누이로 1100년에 출생하였고 당대 이름난 효자인 최루백(崔婁伯)에게 시집가 시부모에 효성을 지극히 하고 부군(夫君)에게도 가난한 살림을 슬기롭게 내조하여 후세에 까지 그 덕망(德望)이 높고 부부간에도 금술지락이 남달랐다고 후세 에 전해지며 1146년에 47세 로 졸()하니 부군이 손수 쓴 애절한 지석문(誌石文)이 국립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염극권(廉克鬈) 1197년 최충헌(崔忠獻) 형제를 모주(謀誅)하려다 실패하여 영남지방에 유배(流配)되었다고 고려사에 전한다. 그러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최충헌이 염극권을 계획적으로 제거 하려고 꾸민 일이라고 기록되었다.

염수장(廉守藏) 고려 때 태자소부(太子少傅) 예빈경(禮賓卿)을 지냈고,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저명(著名)하였다

염극모(廉克髦) 신약(信若)의 차자(次子)로서 공부할 기회가 없어 음직으로 벼슬길에 올라 1180년 마장별감(馬場別監). 1205년에 예빈소경(礼賓少卿)으로 나주(羅州)로 출사(出仕)하고 1215년에 호부시랑(戶部侍郎)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이르러 비록 말직에서 생()을 마쳤으나 청백(淸白)하고 예의(禮儀)에 벗어난 일이 없어 날짐승도 그 덕()을 감동할 만큼 착했다고 지석문(誌石文)에 전한다.

염후(廉珝) 극모(克髦)의 아들()로 고종(高宗) 2(l215)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다.

염순언(廉純彦) 소부시승(小府寺丞)을 지내고, 문하시 랑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郞平章事 判吏部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염승익(廉承益) ? ~ l302(충렬왕 28)

()는 유직(惟直), 시호(諡號)충정(忠靖).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로부터 본국(木國)에 돌아와 악질(惡疾)을 불공으로 고친 후부터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이지저(李之氐)의 천거로 충렬왕의 총신(寵臣)이 되었고, 1278(충렬왕 4) 박항(朴恒) 등과 함께 필도지가 되었다.

1280년 승지(承旨)로 있을 때 왕명에 의해 현화사불전(玄化寺佛殿)을 짓고 남계원 칠층석탑(南溪院 七層石塔-국보 제100)을 세웠으며, 1284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경상 · 전라 · 충청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고, 1287년 첨의평리(僉議評理), 이듬해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1291년에 판판도사사 세자보(判版圖司事 世子保)에 임명(任命)되고, 1293년 판감찰사(判監察事)로서 왕의 일행을 따라 원나라에 갔으며, 1295년에 병으로 감찰사사(監察司事)직을 사임하였고 1302년 흥법좌리공신 도첨의중찬 상호군 판전리 감찰사사(興法佐理功臣, 都僉議中贊 上將軍 判典理 監察司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후 축발(祝髮)하고 중이 되었다.

염세충(廉世忠) 중시조 제신(悌臣)의 부()로 벼슬이 중현대부 감문위 대호군(中顯大夫 監門衛 大護軍)에 이르렀으나 1309년에 젊어서 졸()하였다.

염효신(廉孝臣) 중시조 제신(悌臣)의 형()으로 삼사좌윤(三司左尹)이었다.

염제신(廉悌臣) 1304(충렬왕 30 ~ 1382(우왕 8)

파주염씨의 중흥1세조(中興一世祖)로 자는 개숙(愷叔), 호는 매헌(梅軒), 시호는 충경공(忠敬公)이다. 충정공 승익의 손자, 부친은 세충, 아명은 불노(佛奴).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에 봉해지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문무(文武)를 겸비한 고려의 명신(名臣)이다.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원나라 고모부 말길(末吉-중서평장사)의 집에서 공부하며 자랐다. 총명한 관계로 원()의 태정황제(大定皇帝)에게 발탁되어 총애를 받으며 금중의 숙위, 상의사(尙衣使), 정동성낭중(征東省郎中), 익정사승(품계; 봉훈대부) 등을 제수 받았다. 원에서 귀국한 후 충숙왕의 신임을 받으며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1346(충목왕 2) 광정대부 삼사우사 상호군에 제수된다. 134744세 때 중대광 수성익대 공신호를 받고, 곧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 12월에 찬성사(贊成事)에 제수된다. 1348년 판판도사사에 승진되고 원에 다녀왔다. 1349년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판판도가 됨. 조일신의 사감(私感)으로 등용치 못하다가 1353년 공민왕이 찬성사에 복직시킨다. 1354(공민왕 3) 좌정승(左政丞) ·우정승(右政丞)을 지내고 이해 7월 원나라의 요청으로 내란의 평정을 돕기 위해 2천의 군사를 이끌고 지휘관으로 갔다가 10월 공민왕(恭愍王)의 부름을 받고 귀국, 곡성백(曲城伯)에 봉해진다. 한국 관료로는 최초로 프랑크제국(독일) 사신을 접견한 분이라고 전해온다.

1355년 맏아들 국보 과거에 급제하였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으로 기철(奇轍) 등 친원파(親元派) 처단한 후 원나라의 공격 대비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가 되었고, 곧 수문하시중(守門F侍中) 겸직. 13572흥방이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했고, 1357년 판리부사 영효사관사로 승진. 1361년 신돈(辛旽)에게 아부하지 않아 한 때 파직. 1362년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후가 되었다. 1363년 시중(侍中)에 기용되었으나, ()의 모친상으로 사직하였다. 1364년에 영도첨의사사가 되고. 9월에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가 되었다. 1369년 서북도통사에 보국이 더해졌다. 그 후 삼중대광(三重大匡)에 특진, 곡성백(曲城伯)에 봉해졌다. 딸이 공민왕의 부인 신비(愼妃)로 책봉 되었다. 13713정수가 과거에 급제하여, 세 아들 모두가 급제함에 따라서 부인권씨가 진한국대부인에 봉해졌다. 1374(우왕즉위) 영문하사 영서연사 제수 문하시중(門下侍中) 중임(重任). 공민왕 사망 후 잠시 광주 유배, 137572세에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 영삼사사가 되고 나머지도 종전과 같게 하였다. 1376년 원나라에서 공()에게 자덕대부 장작원사 벼슬을 내렸다. 1379년 판문하사, 부원군으로 다섯 임금을 섬긴 원로가 되심. 1380년 영삼사사가 되고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다섯 임금을 모시면서 출장입상(出將入相)한 공으로 공민왕이 그려준 초상화는 보물 제1097호로 지정(국립중앙박물관 소장)되었다. 1382(우왕 8) 31879세로 별세하니, 충경(忠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1384년 목은 이색이 왕명에 따라 봉교찬한 비문을 새긴 충경공신도비를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 묘소 앞에 건립하였다. 충경공의 신도비(神道碑)는 삼절(三絶)로 유명하다. 그 첫째는 공()의 뛰어난 위대한 업적이요, 둘째는 당대(當代)의 최고 문장가인 목은 이색(李穡)이 왕명을 받들어 신도비문을 짓고, 셋째는 글씨의 대가인 청성군 한수(韓脩)의 글씨라 하여 삼절(三絶)이라고 하며, 이는 목은 문집(牧隱 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신도비와 묘소는 이북에 있어 실존 또는 훼손이 염려되나 비문의 탁본(拓本)은 몇몇 후손과 한국정신문화원에 충경 염공제신지묘란 제호로 소장되어 있다. 강화 냉정면의 강화사단(江華祀壇), 나주 충경서원(忠敬書院), 보령 수현사(水絃祠), 보성 청계영당(淸溪影堂), 청도 구연사 등지에서 매년 제향(祭享)된다. 정실 자녀 35녀와 서출 22녀를 두었다. 아들 삼형제는 국보,흥방,정수이고, 서자는 혜주,광원이다. 큰따님은 홍길동(洪吉童)의 조부(祖父) 홍징(洪徵)에게, 둘째는 임헌(봉익대부 판내부시사 진현관제학)에게, 셋째는 정희계(추성좌리공신 봉익대부밀직사사 상호군)에게, 4녀가 신비염씨로 공민왕의 다섯째 부인이고, 5녀가 이송(숭정대부 판중추 군부판서)에게 시집갔다.

염국보(廉國寶) 중시조 제신(悌臣)의 맏아들이며 호는 국파(菊坡)이고 성품이 원만, 온화(圓滿, 溫和)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했으며 학문(學問)이 높아 공민왕 4(1355)에 급제(及第)하여 지공거(知貢擧)로서 후세(後世)의 학자 변계량(卞季良) 등 많은 인재를 뽑았으며, 성리학을 잘했고, 명나라의 3년 복제를 도입하였다. 벼슬이 추충보리공신 중대광예문관대제학 서성군(推忠輔理功臣 重大匡藝文館大提學 瑞城君)이고 묘는 영천시 금호읍 약남동 산에 있어 매년(每年) 향사(享祀)를 모시며, 강화 냉정면의 강화사단(江華祀壇), 나주 충경서원(忠敬書院), 보령 수현사, 보성 청계영당(淸溪影堂), 청도 구연사 등지에서도 매년 제향(祭享)된다.

염흥방(廉興邦) 중시조 제신(悌臣)의 둘째 아들로 호는 동정(東亭) 혹은 어은(漁隱)이라 했으며, 공민왕 6(1357)에 문과 장원급제(壯元及第)할 만치 학문(學問)이 높았고 시문(詩文)에도 능달(能達)하여 좋은 작품을 남긴 동정집(東亭集)은 후세에 전해오지 못했고 무예(武藝)에도 걸출했다. 상호군(上護軍)으로 여러 전역(戰役)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지신사(知申事)로는 홍건적(紅巾賊)을 대파하고 서울을 탈환하여 2등공신(二等功臣)이 되고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제학(提學)이 되었다. 1374년 탐라(耽羅: 제주도), 목호(牧胡)의 난에 양광(楊廣), 전라(全羅) 경상도 도병마사(慶尙道都兵馬使)로 최영 등을 데리고 출전하여 이들을 진압했다. 우왕(禑王) 때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거슬려 한때 유배되었으나 이어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지고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동지공거(同知貢擧)를 여러 번 하여 맹사성, 길재 심온 등 인재를 뽑았으며, 승국명류표방록(勝國名流標榜錄)에는 변안열(辺安烈) 조민수 등과 함께 구충(九忠)”의 한 분으로 되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여주편과 동문선(同文選)이 전해온다. 여러 벼슬을 역임(歷任)되었으며 관직(官職)이 충근익대 섭리찬화공신 중대광 성균관대사성 예문관대제학 상호군 삼사좌사 서성군(忠勤翊戴 燮理贊化功臣 重大匡 成均館大司成 藝文館大提學 上護軍 三司左使 瑞成君)이었으나 신군부세력(新軍部勢力)의 역성혁명(易姓革命)때 고려를 지키려는 굳은 의지가 그들에겐 걸림돌이 되어 모함으로, 1388년 무진(戊辰) 정월(正月)에 형과 동생 및 매부 등 일족 1,000여명이 화를 입는다.

염정수(廉廷秀) 중시조 제신(悌臣)의 셋째 아들로 호는 청강(淸江) 혹은 훤정(萱庭)이며 1371년 문과에 급제, 특히 문필(文筆)에 능달(能達)하고 시문(詩文)에도 능했으며 학문이 높았다. 1383년 지신사(知申事)때 국자감시(國子監試)로 시관이 되어 우홍명(禹洪命) 99명의 인재를 뽑았고, 한때 전주(銓注)를 맡았으며,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호복(胡服)을 폐지하고 중국의 제도를 따르자고 했다. 벼슬은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영록대부 우문관대제학 사헌부대사헌(榮祿大夫 右文館大提學 司憲府大司憲)에 이르렀으나 무진(戊辰)년에 피화(被禍)되었고 묘()가 함경도 단천에 있다고 전한다.

중시조의 세 아들 국보, 흥방, 정수(國寶 興邦 廷秀)는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학문(學文)이 높아 문형(文衡)에 이르고 정승(政丞)의 반열에서 나라에 동량(棟樑)이었다. 그러나 고려말에 쇠퇴(衰退)하는 국운(國運)에서도 끝내 나라를 중흥(中興)코자 했으나 이성계와 최영 등의 신군부(新軍部)의 혁명세(革命勢)에 떠밀림으로써 동정공(東亭公)이 부정축재(不正蓄財)를 했다는 누명을 쓰고 무진(戊辰 1388) 정월에 이성계와 최영 등에 의해 다섯 가문 친.인척 1천여 명이 목숨을 잃게 된다. 이 사실은 그들 혁명세력(革命勢力)이 지은 고려사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조선 중기(中期)이전부터 그 학살의 부당성을 양식이 있는 학자들은 인정하고 신원(伸寃)의 당위성(當爲性)을 역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現代)의 일부 학자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외면하고 있으니 한탄스럽다. 무진년(戊辰年)이후 염씨들은 더 이상의 화()를 피해 옛날부터 모여 정들어 살던 고향 파주(坡州)를 떠나 전국 각지로 몸을 피해 숨어살며 조선시대에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려 말 호족(豪族)들에 대한 반목도 약해지고 또 나라에 위기가 왔을 때인 임진왜란(壬辰倭亂)이나 벙자호란(丙子胡亂)때는 일족이 궐기하여 의병을 일으켜 항거하며 적을 물리치는데 공()이 많았다. 그 중에도 간혹 일가들은 출사(出仕)는 안했어도 향리(鄕里)에 공헌하고 부모에 효성(孝誠)을 다하여 정려(旌閭)될 때 증직(贈職)되는 경우도 많았다.

염치중(廉致中) 국파공(菊坡公)의 장자(長子)로 호는 송은(松隱)이다. 어릴 때부터 영민(英敏)하고 충효(忠孝)를 근본으로 삼고 덕행(德行)이 바르고 문장(文章)이 높아 1375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관직이 동지밀직사 상의회 도감사 상호군 판종부사사(同知密直司事 商議會 都監事 上護軍 判宗簿寺事)였으며 목은(牧隱) 길재(吉再)등과 도의(道義)로써 교우했고 무진(戊辰)의 화()는 요행히 피하여 아들 ()를 데리고 만수산(萬壽山 서두문동, 현릉 근처)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성계가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출사(出仕)케 하려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자 그의 절의(節義)를 가상하게 여기고 문과급제(文科及第)하였던 동생 치용(致庸 일명 和庸)을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제수(除授)케 하였다. 송은공(松隱公)은 영송시(詠松詩) 등으로 공()의 높은 절의(節義)를 표현하여 정충대절(貞忠大節)함을 짐작케 한다. 나주의 금강서원(錦江書院), 보성의 청계영당(淸溪影堂)에서 유림(儒林)에 의하여 제향(祭享)된다.

염치용(廉致庸) 일명(-名) 화용(和庸), 호는 경은(耕 隱). 1388년 무진화(戊辰禍)가 있은 뒤 경기도(京畿道) 광주군 염곡동에 24년간 은거하여 그의 절의(節義)와 덕행(德行)으로 이름을 떨치니 태종(太宗)이 그를 공조참의(工曹參議)에 발탁하였다. 그 후 중국 변무사(中國辨誣使)로 다녀와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지낼 때 황해도 감사(黃海道監司)와 의견 대립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사헌부 · 형조 대간들이 그를 논척(論斥) 하였으나 태종(太宗)과 세종의 신임과 보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염치함(廉致誠) 고려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염원보(廉元輔) 고려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염치성(廉좼誠) 고려 좌사(左司)를 역임하였다.

염이(廉怡) 송은공(松隱公)의 아들로 호는 폐와(閉窩), 1386년 문과에 급제하고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첨지 통례문사(僉知通禮門事)를 지냈다. 1388년 무진지화 이후 고려의 국운(國運)이 쇠퇴(衰退)해 감을 알고 부친을 따라 은거하며 채미가(採薇歌)와 황국시(黃菊詩)를 짓고 높은 절의(節義)를 표하였고 끝내 출사(出仕)하지는 않았다.(麗朝忠烈錄錄 景覽祠誌 참조).

승국명류 표방록(勝國名流 標榜錄)에는 친구 등과 함께 팔판(八判)“의 한 분으로 지목된다.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가 정권을 잡자 지은 시()차라리 죽어서 왕씨(王氏)의 귀신이 되리라 살아서 무엇 하리 죽음이 오히려 빛나도다하였고, 후손에게 가훈을 남겼는데 충효로 근본을 삼고 경학으로 업을 삼아 욕된 관작과 영달을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인물

염증(廉憎) 조선 세종 때 행의(行誼)로 지평(持平)에 천거 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그 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除授) 되었으며, 사후(死後) 예장(禮葬)이 명()해졌다.

염각(廉恪)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을 지냈다.

염수(廉收) 조선에서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염저(廉詝) 호는 물망(勿忘), 조선 때 예조시중(禮曹侍中)을 역임하였다.

염정(廉情)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염순량(廉順良)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을 지냈다.

염순온(廉順溫) 제용감 직장(濟用監直長)을 역임.

염순검(廉順儉)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역임하였다.

염응동(廉應東)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를 지냈다.

염영동(廉榮東)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다.

염순의(廉順義) 종사랑(從仕郎)에 올랐다.

염효달(廉孝達)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첨정(僉正)을 지냈다.

염중(廉仲) 좌랑(佐郎)을 지내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염흥(廉興) 참봉(參奉)을 거쳐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을 역임하였다.

염상항(廉尙恒) 상산(商山)에 은거하며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숭원(李崇元)과 함께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였고, 5형제(상항, 귀항, 익항, 유항, 종항)가 모두 학문(學問)에 능했다. 행의(行誼)와 학문이 뛰어나 진사(進士)가 되고, 서산군수(瑞山郡守), 단천부사(端川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염귀항(廉貴恒) 김해부사(金海府使)를 역임하였다.

염익항(廉益恒) 사정(司正)을 지냈다.

염유항(廉有恒) 정언(正言)을 지냈다.

염종항(廉從恒)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염재(廉縡) 성종 때 생원(生員)이 되었고, 송화현감(松禾縣監)을 거쳐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염기(廉紀) 성종 때 어모장군(禦侮)으로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을 역임하였다.

염계극(廉桂克) 서산군수(瑞山郡守)를 지냈다.

염만을(廉萬乙) 좌윤(左尹)을 역임하였다.

염사항(廉士恒) 지평(持平)을 지냈다.

염신손(廉愼孫)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을 지내고,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염효건(廉孝騫)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역임 하였다.

염춘형(廉春亨) 자는 형지(亨之), 첨정(僉正)을 지냈다.

염환지(廉桓智)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다.

염경학(廉景鵝) 군기시정(軍器寺正)을 지냈다.

염세선(廉世選)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을 역임하였다.

염재유(廉載裕)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훈련원정(訓鍊 院正)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염정달(廉正達) 자는 덕일(德一), 형조정랑(刑曹正郎)을 지냈다.

염주(廉宙) 자는 백환(伯還), 1531(중종 26)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단성(丹城), 경성(鏡城) 등지의 현감(縣監)을 지냈다. 단성 현감(丹城縣監)으로 재임 중 청렴하였으므로 청백비(淸白碑)가 세워졌다.

염목동(廉穆東) 자는 언경(彦卿), 병절교위(秉節校尉)로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을 역임하였다.

염자정(廉自淨)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를 역임하였다.

염언경(廉彦敬) 자는 여신(汝愼), 조선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염국강(廉國江)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 하였다.

염언호(廉彦琥)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을 지냈다.

염사범(廉師范)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염치도(廉致濤)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염춘악(廉春嶽) 1624년 창의(倡義)하여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염웅현(廉應賢) 자는 의현(儀賢),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염치(廉治)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염백령(廉百齡)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염경홍(廉暻洪)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염업귀(廉業龜) 좌윤(左尹)을 지냈다.

염광(廉光)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염철문(廉哲文) 판관(判官)을 지냈다.

염우단(廉友端) 자는 여정(汝貞), 판관(判官)을 지냈다.

염진명(廉振名) 현감(縣監)을 지냈다.

염재설(廉在卨) 자는 우삼(禹三), 호는 취은(醉隱지당(池堂).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염재훈(廉在勛) 자는 자흠(子欽), 호는 초은(樵隱),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추증(追贈)되었다.

염성화(廉星華) 자는 성화(成化). 강화도령 철종(조선 25)임금의 외조부로 둘째따님이 철종의 어머니이다.


임진왜란때 활동한 중요인물

염희(廉喜) l542(중종 37) ~ l636(인조 14)

자는 계응(季膺), 호는 금포(錦圃),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 왜병에 대항하여 공()을 세웠다.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追贈)되었다.

염세응(廉世應) 자는 기백(起伯), 호는 판교(板橋), 종친부주부(宗親府主簿)를 지내고,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에 추증되었다.

염말경(廉末卿) 충경공(忠敬公)9세손이며 자()는 경옥(慶玉)이고 1553년 경주 자인(慶州 玆仁)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1584년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였으나 출사(出仕)하지 않고 권신(權臣)들의 횡포에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後學)들을 선도하였다. 임진란(壬辰亂)때는 의병을 모으고, 가재(家財)를 털어 군비에 충당하였다. 추풍령(秋風嶺)에서는 왜병을 포위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고, 마침 홍수(洪水)로 전의를 상실한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15937월에 향년 4l세로 순국(殉國)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과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고 구연사(龜淵詞)에서 매년 향사(享祀) 한다.

염세경(廉世慶) 1566(명종 21) ~ 1646(인조 24)

자는 유선(由善), 호는 양산(梁山), 임진왜란 때 박광전(朴光前), 문세(文世)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금무(錦茂)의 적을 대파(大破)하였고, 영남(領南) 성개(星開)에 적세(敵勢)가 왕성하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제립(悌立)과 함께 선봉장(先鋒將)으로 진격하여 커다란 공을 세웠다. 그 후 봉정대부(奉政大夫)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제수(除授)받고, 보성의 청계영당(淸溪影堂)에 제향(祭享)되었다.

염개립(廉介立) 자는 공직(公直),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염제립(廉悌立) 자는 여의(汝誼), 호는 죽림(竹林). 1581년 무과에 급제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다. 보성(寶城)의 청계영당에 제향 되었다.

염우혁(廉末卿) 충경공(忠敬公)11세손으로서 호는 만산(晩山)이고 162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정언(正言)을 거쳐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출전(出戰)했으며 여러 고을의 수령을 맡아 선정(善政)을 두루 베풀고 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후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안변읍지(安邊邑誌)에 의하면 신축(辛丑) 7월에 장연(長淵) 고을에서 별세(別世)하였는바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정려(旌閭)가 세워졌다고 기록되었고 함남 단천의 송산사(松山祠)에 충경공과 함께 향사(享祀) 되었었다.

염흥세(廉興世) 자는 성필(聖弼), 호는 동암(東巖), 행장례원 판결사(行掌隸院判決事),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염걸(廉傑) 충경공(忠敬公)12세손으로 자()는 국충(國忠)이고 호는 퇴은당(退隱堂)이다. 1545년 강진군 칠량면 율변리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천품(天品)이 뛰어나고 무예(武藝)에도 탁월하여 아우 ()() 아들 홍립(弘立)에게도 국가 유사시에 대처하라며 무술을 강론했다. 마침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향리(鄕里)에 침입한 왜적을 격퇴하여 이순신 장군에게도 알려져 159711월에는 의병장(義兵將)이 되고 장흥(長興), 회령진대흥교(會寧鎭大興郊)와 예교(曳橋), 몰운대(沒雲臺) 등지에서 대승을 거뒀다. 충무공과 함께 노량해전(露粱海戰)에 참전하고 이어 거제(巨濟)에서 싸우다가 159811월에 향년 54세로 순국(殉國)하고 이 해 동생들과 아들도 모두 순국(殉國)하였는데 이 네 분을 4(四忠) 장군이라 하며, ()에게는 선무원종공신 병조판서(宣武原從功臣 兵曹判書), 아우 염서(廉瑞)에게도 선무원종공신과 병조참의(兵曹參義), 염경(廉慶)에게는 동부승지(同副承旨), 아들 염홍립(弘立)에게는 이조참의(吏曹參義) 벼슬이 공신록권(功臣錄券)에 추증되었고 칠량면 불무동에 안장하고, 정려(旌閭)가 명하여 졌으며, 매년 유천사(柳川祠)에서 향사(享祀)한다.

염언상(廉彦祥) 충경공(忠敬公) 12세손이고, 자는 경미(景美), 1552년 금성(金城)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별서(兵書)읽기를 좋아했으며 무예(武藝)를 연마하여 명종(明宗)때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를 지낸 후 사임하고 낙향(落鄕)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에서 순천, 옥포, 한산 등 해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워 훈련원 첨정(訓練院 僉正)에 오르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권율(權慄)장군 막하로 출전하여 하동, 악양곡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遊擊將)이 되어 곽재우와 더불어 의령, 함안(宜寧 咸安)을 지키고, 추풍령(秋風嶺)을 방어하고 청안(淸安)으로 진격하다 적대군(大軍)의 총탄에 맞아 15979월에 향년 46세로 순국(殉國)했다. 벼슬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1861년엔 어모장군 병조참의(禦侮將軍 兵曹參議)가 추증되었고 통영시 정량동에 묘와 사당(祠堂)이 있어 매년 향사(享祀)한다. ()4대후손 덕승(德升)과 그 아들 국범(國范) 낙범(樂范) 극범(極范) 석범(碩范) 택범(宅范) 5형제와 국범(國范)의 아들 협권(協權)으로 이은 자손(子孫)들이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孝誠)과 선행(善行)으로 철종(哲宗) 237(三世七孝)로 명정(命旌) 되었고 5대손 공범(公范) 역시 효성으로 헌종(憲宗) 14년 무신(戊申)에 명정(命旌)되었다.


일제침략(日帝侵略) 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항일독립(抗日獨立) 투쟁을 하는데 그 실상(實相)의 전체를 바르게 종합한 기록이 각각이고 또 그 평가의 시각도 여러 가지라 수용하기가 어려운 실정인데 우리 염씨에서의 투쟁인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염온동(廉溫東) 호는 추정(秋汀) 3.1운동 때 3차례나 투옥되어 가며 남만주를 내왕하였고, 남경(南京)에서는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간부로 활약하였으며, 1921년 상해(上海)로 건너가 중일전쟁(中日戰爭)때는 중경(重慶) 임시정부와 광복군 사령부에서 서무과장으로 재임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염석산 1905년 충남 홍성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동년 6. 4일에 체포되어 순국했다.

염석하(廉錫河) 한말(韓末)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다.

염승필(廉承弼) 영월 출신으로 19193월 태극기 만 여장을 제작하여 논산보통학교에서 국민들께 배포하다 체포되어 순국했다.

염성오(廉成五) 강화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 되어 순국하였다.

염흥미(廉興味) 광복군대원으로 192011월 동지들과 입국하여 갑산 대평리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국했다.

염재항(廉宰恒) 광복군에서 활약하다 귀국하여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염동현(廉東鉉) 의병으로 호남에서 전공을 세웠다.

염천봉(廉天奉) 황해도 연백인으로 호남에서 전공을 세웠다.

염동규(廉東圭) 는 보성인으로 3.1운동 때 항일운동 중 순직했다.

염용수(廉龍洙)는 보성인으로 3.1운동 때 항일운동 중 순직했다.

염재보(廉在輔) 보성인으로 한말(韓末)에 민비살해(閔妃殺害) · 을사조약(乙巳條約) 등 일본의 침략행위에 의분을 참지 못하고 항의하며, 1906년 최익현(崔益鉉) 등 동지(同志)를 규합, 안규홍(安圭洪)의 부장(副將)으로 의병대(義兵隊)를 조직하여 전남 각지에서 20여 차례 왜군과 싸워 전공을 세웠고 1909년 체포되어 42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염동진(廉在震) 본명은 염응택(廉應澤)으로 1902년 평양에서 출생하고, 6.25전쟁 때 납북도중 사망한 것으로 전한다. 백의사(白衣社) 총사령으로 일제치하에서는 광복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에는 공산당과 싸웠다.

염상섭(廉想涉) 호는 횡보(橫步)이고 충경공(忠敬公) 22세손으로 1897년 서울에서 출생하고 일본경응대 문과(文科)에 입학하여 수학 중 기미 3.1운동 전후에 휴학하고 대판(大阪) 노동자를 대표하여 독립선언문을 채택하여 19193월 천왕사(天王寺)에서 궐기하려다 36일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옥고를 치르고, 1920년 폐허(廢墟) 동인에 참가, 1921년 첫 작품(作品)표본실의 청개구리가 개벽지에 발표되었고 계속된 문필활동으로 소설, 단편 등 500여 편의 작품을 썼다. 주간종합지 동명(東明)의 기자를 거쳐, 현진건과 함께 시대일보, 매일신보의 기자로 활약하며 평론을 썼다. 1928년에는 조선일보학예부장으로 있었고 1936년에는 육당(六堂)이 고문으로 있던 만선일보(滿鮮日報)의 편집국장을 했으며 해방 후 경향신문 편집국장이 되었고, 1951년에는 해군으로 복무하다 1954년 중령(中領)으로 예편하였다. 그 후 예술원 종신회원과 서라벌 예술대학 초대학장으로 있으면서 작품(作品)활동을 계속하여 서울문화상(文化賞), 아세아자유문화상, 1957년 예술원공로상, 19623.1문화상, 대한민국문화훈장 등을 수상한 한국 근대(近代)문학 운동의 중심인물로 그의 문학사적 공로는 사실주의 문학의 확립에 이바지한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