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의령여씨시조(宜寧余氏),여선재(余善才),의령여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2 16:40 수정일 : 2018-02-19 15:30

의령여씨(宜寧余氏)의 연원(淵源)

의령여씨는 백제국(百濟國) 왕가의 후예인 고려조(高麗朝) 의춘군(宜春君) 여선재(余善才)공의 후손이다.

여씨 성(姓)은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하면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여을(余乙) 여루(余婁) 두 분의 임검이 있었고 제삼세 임검 가륵(嘉勒) 십년에 예(濊)의 군장을 지내고 치안을 담당하는 여수기(余守己) 장군이 반역을 도모한 두지주예읍(豆只州濊邑)의 추장 소시모리(素尸牟犁)를 참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일본서기(日本書紀) 백제부국군(百濟復國軍)편에 백제 말기 의자왕(義慈王)의 왕자를 여풍장(余豊璋) 왕숙을 여충신(余忠信) 정승을 여의수(余宜受) 여자신(余自信)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여씨(余氏)는 단군조선 이전부터 한반도(韓半島)에 살았던 토착성씨일 뿐 아니라 백제국 말기 왕가의 왕성(王姓)이였음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었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와 송서(宋書) 백제전(百濟傳) 일본서기(日本書紀)등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패망한 후 왕후장상(王侯將相) 일만 이천여명이 당장 소정방(蘇定方)에게 붙들려가 당(唐)나라 수도 장안에 백제촌(百濟村)을 이루어 살았고 일본에 볼모로 있든 왕자 여풍장(余豊璋)은 부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부흥군과 함께 고구려(高句麗)로 피신하였다는 기록과 그 뒤 부왕(父王)이 왕족일행과 군거하는 당의 백제촌으로 잠입 합류하여 후일을 기(期)하였다는 학설 등 백제역사(百濟歷史)에 관한 각종 문헌(文獻) 저술(著述)등의 사료(史料)를 종합 고찰하였는바, 백제국(百濟國) 여씨 왕가가 의령 여씨(宜寧余氏)의 선대(先代)라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졌다.

따라서 시조(始祖) 선재(善才)공은 백제 패망 후에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 定方)에게 붙들려가 당의 백제촌에 군거하든 백제국 여씨 왕가와 왕자 여풍장(余 豊璋)의 후예로서, 그 뒤 송(宋)나라의 과거에 등과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라는 높은 관직에 올랐으나 항시 선조국(先祖國) 백제를 멸몰(滅沒)한 한계(漢系) 송나라에 봉직하고 있음에 가책(苛責)을 받아 오든 중 황제(皇帝)께 충언을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연(決然)한 각오로 선대의 유훈(遺訓)에 따라 선조국 고려로 동래 입조하니 국왕께서는 공의 쾌거(快擧)를 가상히 여기어 최고관등인 의춘군(宜春君)의 작위(爵位)를 내리시고 의령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하니, 이분이 의령(宜寧) 여씨(余氏)의 시조(始祖)이다.

의령여씨는 시조 의춘군(宜春君)이 동래한 이후 일천여년에 자손들은 현창(顯彰)하여 문과 무과에 높은 벼슬과 국가에 크게 공헌한 조상의 은덕으로 받은 음사들이 인끈을 이어 왔으며 특히 막동장군 죽헌공 등 구공신이 임난공신 사당(壬亂功臣祠堂)에 모셔져 있으며 지금도 의령 여씨 가문이 배출한 많은 인사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봉사하고 있다.

의령 여씨는 경향각지(京鄕各地)에 흩어져 이만천여명이 살고 있는 희성이지만 백제국 왕가의 후예라는 높은 기백(氣魄)과 자긍심(自矜心)을 가진 명문가(名門家)이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령여씨는 남한에 17,78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의령여씨조상인물

고려시대(高麗時代)이전의 인물(人物)

여을(余乙) 여루(余婁); 단군세기 임검으로 여씨 성을 최초로 사용한 역사적 인물임.

여수기(余守己); 단군세기 장군으로 제삼세 임검 가륵 십년에 반역을 도모한 두지주예읍의 추장 소시모리를 토벌하여 큰 공을 세웠다.

여풍장(余豊璋); 백제국 의자왕의 왕자로 일본에 볼모로 있다가 백제 부국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부흥군과 함께 고구려를 거쳐 당으로 피신하였다.

여충신(余忠信); 백제국 의자왕의 왕제로 일본에 볼모로 가 있었다.

여자신(余自信); 백제국 말기 정승으로 부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여선재(余善才); 백제국 말기에 당에 붙들려간 왕가의 후예로 송나라 간의대부를 지냈고 고려국으로 동래하여 의춘군(宜春君)의 작위를 받았으며 의령(宜寧)여씨(余氏) 시조(始祖)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인물(人物)

여중부(余仲富); 고려조 보승랑 여문정의 자로 조선조 태조조에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를 지냈다.

여흥열(余興烈); 태종조에 무과에 등과하여 삼척부사 강원도첨절제사 삭주부사 황해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여성열(余成烈); 태종조인으로 통정대부 행숙천부사 안주진병마절도사 병조정랑을 지냈다.

여효온(余孝溫); 조선조 문과에 알성장원을 하여 병조좌랑을 지냈으며 오형제가 모두 등과하였다고 하여 오릉이라 칭하기도 한다.

여원경(余元暻); 조선조 무과에 등과하여 중랑장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여건(余 健); 조선조 무과에 등과하여 이조정랑 승지 자헌대부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여춘(余 春); 자는 수구 가정 갑인생으로 무과에 등과하여 임난 당시 망우당을 도와 큰 공을 세워 선교랑별시위 의영고봉사 통정대부 병조참의를 제수받았다.

여만석(余晩錫); 선조조 문신으로 통훈대부 이조정랑을 지냈다.

여은(余溵); 고종조인으로 자는 경심이며 동학난 평정에 크게 공헌하여 숭정대부용양위상호군의 벼슬을 지냈다.

여대남(余大男); 선조조 임진왜난 당시 일본군에 붙들려가서 일본 동대사 주지가 된 고선사로 조선 부모에게 보낸 서간문은 일본의 국보(國寶)로 지정되어 보관하고 있다.

여막동(余莫同)외 팔 공신; 임진왜란 시 의병장으로 충무공을 도와 큰 공을 세운 구공신중 여막동 여호개장군은 선무원종공신 2등으로 여문규 여세랑 여응천 여정수 여천계 여춘 여태백은 3등 공신으로 녹훈되었다.

근대(近代)의 인물(人物)

여세병(余世柄); 자는 사견 호는 만송으로 1919년 3월 약관 22세에 종형 인엽(璘燁)등과 동지를 규 합하여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대구. 마포등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광복을 맞은 독립투사이다.

여찬엽(余燦燁); 자는 응순 호는 도와이다. 여세병과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공로로 대 통령 표창을 받은바 있다.

여익환(余益煥); 1919년 3월 여 세병 구 여순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일제에 검거 투옥되었된바 있으며 일본에 밀항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1953년 일본 땅에서 영민 하자 정부에서는 제일동포사회장으로 영혼을 위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