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함양여씨(咸陽呂氏),함양여씨시조,여어매(呂御梅),함양여씨유래,함양여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2 16:17 수정일 : 2018-02-06 16:03

함양여씨시조 및 함양여씨유래(본관)

함양여씨(咸陽呂氏)의 시조(始祖) 여어매(呂御梅)는 중국(中國) 내주(萊州) 사람으로 당(唐)나라 희종(僖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였는데,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877년(신라 헌강왕 3년)에 신라(新羅)에 귀화하여 경북(慶北) 성주군(星州郡) 벽진면(碧珍面)에 정착하고 고려(高麗)에서 전서(典書)를 지냈다.

함양(咸陽)은 경상남도(慶尙南道) 서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속함군(涑含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함양군(含陽郡)이 되어 합주(陜州 : 합천)에 속하였다가 함(含)을 함(咸)으로 고쳐서 함양(咸陽)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함양현으로 강등되었으며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 군(郡)이 되엇고, 1914년 안의군(安義郡)의 7개면을 병합하고 1957년에는 석복면(席卜面)을 함양면에 이속시켜 함양읍으로 승격하였다.

어매(御梅)는 두 아들 임청(林淸)과 광유(光有)를 두었는데, 임청(林淸)의 후손 자열(子列)․자장(子章)․존혁(存赫) 3형제와 광유(光有)의 계통 후손들이 함양(咸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어매(御梅)의 8세손 공계(公係)는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고, 공계(公係)의 손자 칭(稱)은 조선(朝鮮)에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으며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서 흠문기거부사(欽問起居副使)가 되어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칭의 증손 자신(自新)은 뛰어난 무신(武臣)으로 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를 두루 거쳐 중종(中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평안도(平安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청백리(淸白吏)에 오른 아들 윤철(允哲)과 함께 부자(父子)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순원(順元)의 아들로 산수(算數)를 잘했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낸 유길(裕吉)과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를 지낸 우길(祐吉) 대(代)에서 함양 여씨(咸陽呂氏)의 가문은 더욱 번성하였다.

유길(裕吉)의 아들 이징(爾徵)은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시문(詩文)에도 뛰어났으며 대사헌(大司憲)․도승지(都承旨)를 거쳐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고, 인길(裀吉)의 아들 이재(爾載)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이량(爾亮)의 아들 성제(聖齊)는 인조(仁祖) 때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병조 판서

(兵曹判書)를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며, 한 말(韓末)에 와서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규형(圭亨)과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활약한 운형(運亨)이 함양 여씨의 가문을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양여씨(咸陽呂氏)는 남한(南韓)에 34,83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함양여씨조상인물

여광유(呂光有) 고려조(高麗朝)에 낭장(郎將)을 지냈다.

여자장(呂子章)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여온(呂 溫) 고려(高麗) 때 감무(監務)를 지냈다.

여상보(呂尙輔) 조선조에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여황(呂 黃) 조선 때 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여위황(呂渭璜) 조선에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냈다.

여주빈(呂周賓) 조선(朝鮮)에서 판도정랑(版圖正郞)을 역임하였다.

여공손(呂公孫) 조선 때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여신수(呂神壽) 조선조(朝鮮朝)에 사과(司果)를 지냈다.

여득양(呂得陽) 조선에서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여의손(呂義孫) 조선 때 한성윤(漢城尹)을 지냈다.

여맹선(呂孟宣)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여득전(呂得全) 조선조에 한성윤(漢城尹)을 지냈다.

여보상(呂寶祥) 조선 때 보승 중랑장(保勝中郞將)을 역임하였다.

여칭(呂 稱) 1351(충정왕 3)~1423(세종 5)

자(字)는 중보(仲父), 호(號)는 화곡(樗谷), 시호(諡號)는 정평(靖平).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전법 총랑(典法摠郞)․전리 총랑(典理摠郞)․공주(公州)의 목사(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양광․경상․전라도 조전부사(楊廣․慶尙․全羅道漕轉副使)가 되고 이어 판합문사(判閤門事)․승추부 우군동지총제(承樞府右軍同知摠制) 등을 역임한 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使)가 되었다.

1402년(태종 2) 태상왕(太上王)이 된 태조(太祖)가 북행(北幸)할 때 동북면 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로 배종했으며, 1404년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 겸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개성 유후사 유후(開城 留後司留後)․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역임, 1412년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서 흠문 기거부사(欽問起居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사직, 은거(隱居)했다.

여계(呂 稽) 조선조(朝鮮朝)에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여뇌 조선(朝鮮)에서 감찰(監察)을 지냈다.

여자근(呂自勤) 조선 때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였다.

여문좌(呂文佐) 조선(朝鮮)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여우(呂 遇) 자(字)는 도행(道行). 1392년 조선 개국 때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고 호조전서(戶曹典書)․검교(檢校)를 거쳐 한성윤(漢城尹)을 역임하였다.

여형(呂 衡) 조선조(朝鮮朝)에 감사(監司)를 지냈다.

여종주(呂宗周) 조선 때 우후(虞侯)를 지냈다.

여종상(呂宗商) 조선(朝鮮)에서 호군(護軍)을 역임하였다.

여효보(呂孝輔)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여충보(呂忠輔) 조선에서 내자시 첨정(內資寺僉正)을 역임하였다.

여명보(呂明輔) 조선(朝鮮) 때 만호(萬戶)를 지냈다.

여호(呂 箎) 1460년(세조 6) 진사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장령(掌令)․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지내고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지평(持平)이 되었다. 그 후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을 거쳐 황해도 도 사(黃海道都事)․자산 군사(慈山郡守)․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역임 하였다.

여승견(呂承肩) 조선(朝鮮)에서 호군(護軍)을 지냈다.

여승감(呂承堪) 조선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여원보(呂元輔) 조선조에 충청도 절도사(忠淸道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여양보(呂良輔)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여자신(呂自新) 초명은 의보(義輔), 시호(諡號)는 정정(貞靖). 무과(武科)에 급제, 1479년(성종 10) 병조 참판(兵曹參判)이 되고, 이어 경기도․강원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 1499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를 지내고 연산군(燕山君) 때 도총관(都摠管), 전라도(全羅道)와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거쳐 중종(中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랐다. 아들 윤철(允哲)과 함께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 았다.

여희화(呂希和)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여희령(呂希寧)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여윤걸(呂允傑) 조선 때 첨지(僉知)를 지냈다.

여윤수(呂允秀) 조선(朝鮮)에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여윤철(呂允哲) 조선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여러 내외직(內外職) 을 거쳐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를 지냈다. 그가 병환으로 누웠을 때 왕(王)이 소식을 듣고 의원과 약을 내렸으나 죽고 말았다. 영변 판관(寧邊判官)으로 있을 때 모든 정사(政事)를 청렴결 백하게 처리했으므로 고을 백성들이 청백비(淸白碑)를 세웠다.

여윤무(呂允戊) 조선(朝鮮) 때 좌랑(佐郞)을 지냈다.

여대림(呂大臨)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여중온(呂仲溫)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여세응(呂世應) 조선(朝鮮)에서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여세홍(呂世弘) 조선 때 사직(司直)을 지냈다.

여세강(呂世綱) 조선에서 사과(司果)를 지냈다.

여세평(呂世平) 조선조(朝鮮朝)에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여희경(呂嬉卿) 자(字)는 충경(忠卿). 조선 때 좌랑(佐郞)을 지냈다.

여문망(呂文望) 자(字)는 주경(周卿). 1552년(명종 7)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갑산(甲山)․동래 부사(東萊府使)를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여담(呂 淡) 자(字)는 약수(若水). 조선 때 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을 지냈다.

여경주(呂敬周) 자(字)는 성좌(聖佐). 조선(朝鮮)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여계선(呂繼先) 1586년(선조 19)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다.

여윤신(呂潤身) 조선 때 사섬시 부정(司贍寺副正)을 지냈다.

여영원(呂瑩元) 자(字)는 희백(希伯). 조선 때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역임하였다.

여응빈(呂應賓) 자(字)는 사은(士恩). 조선조에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을 지냈다.

여정방(呂定邦) 자(字)는 언우(彦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왕(王)이 파천(播遷)할 때 수문장(守門將)으로 호종(扈從)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서훈(叙勳), 함원군(咸原君)에 봉(封)해지고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여순원(呂順元) 자(字)는 복초(復初), 호(號)는 신고재(信古齋). 1595년(선조 28) 사재감 참봉(司宰監參奉)이 되고, 광릉 참봉(光陵參奉)을 거쳐 선공감역(繕工監役)․주부(主簿)를 지냈다.

후에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종친부 전적(宗親府典籍)․사직서령(社稷署令)․사도시 첨정(司導寺僉正) 등을 역임하였으며, 1614년(광해군 6)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여지순(呂持順) 자(字)는 사현(士顯).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여영원(呂榮元) ?~1627(인조 5)

자(字)는 화백(華伯), 시호(諡號)는 양장(襄壯). 1617년(광해군 19)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을 지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後金)이 쳐들 어오자 대신들의 천거로 요충(要衝)인 벽동(碧潼) 수비의 책임을 맡고 현지에 나가 고군분투(孤軍奮鬪)하다가 정세가 불리해지자 자결 했다. 1796년(정조 20)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여수길(呂受吉) 자(字)는 봉서(奉瑞). 조선 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여유길(呂裕吉) 1558(명종 13)~1619(광해군 11)

자(字)는 덕부(德夫), 호(號)는 춘강(春江),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순원(順元)의 아들. 성 혼(成 渾)의 문인.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호조 정랑(戶曹正郞) 등을 거쳐 1593년 헌납(憲納)이 되고, 1599년 공주 목사(公州牧使), 1601년 장령 (掌令), 이듬해 사예(司藝)를 거쳐 양주 목사(楊洲牧使)를 역임하였다. 1604년 군기시정(軍器寺正)으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된 실록(實錄)의 재간(再刊)에 참여, 1606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1607년 사옹원정(司饔院正)․봉상시정(奉常寺正)을 역임했다.

이듬해 선조가 죽자 국장도감 도청(國葬都監都廳)이 되고 1610년 (광해군 2)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승진, 1612년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이르러 노부모를 위해 남양부사(南陽府使)를 자청, 1618년 병으로 사직했다. 산수(算數)를 잘 했다.

여지길(呂祉吉) 자(字)는 수부(受夫). 조선에서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다.

여우길(呂祐吉) 1567(명종 22)~?

자(字)는 상부(尙夫), 호(號)는 치계(稚溪).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순원(順元)의 아들. 성 혼(成 渾)의 문인. 1591년(선조 2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으로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밀양 부사(密陽府使)를 역임했다.

1607년(선조 40)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일본에, 1614년(광해군 6)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618년(광해군 10) 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여위로(呂渭老) 자(字)는 군보(君輔).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내섬시 봉사(內贍寺奉事)가 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병조 좌랑(兵曹佐郞)․비인현감(庇仁縣監)․호조좌랑(戶曹佐郞)․예조 좌랑(禮曹佐郞)을 거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지냈다.

여위량(呂渭良)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여이관(呂爾寬) 조선(朝鮮) 때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여영학(呂盈壑)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판관(判官)으로서 역전(力戰)하다가 순절(殉節)하였다. 후에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여여충(呂汝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들어가 통영(統營)․한산도(閑山島) 싸움에서 많은 공(功)을 세우고 순절(殉節)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그의 충성을 상소(上疏)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추증(追贈)되었다.

여이징(呂爾徵) 1588(선조 21)~1656(효종 7)

자(字)는 자구(子久), 호(號)는 동강(東江),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유길(裕吉)의 아들. 한백겸(韓百謙)의 문인. 1610년(광해군 2) 생원(生員)이 되고, 1616년 경안도찰방(慶安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양강(楊江)에 은거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에 사포서 별좌(司圃署別坐)에 임명 되었으나 사퇴, 1624년(인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162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각각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兵曹)․예조(禮曹)의 참판 (參判)을 역임했다.

1636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내고, 1641년(인조 19)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뒤에 부빈객(副賓客)으로 기용되고, 대사성(大司成)․대사헌(大司憲)․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부제학(副提學)․도승지(都承旨)․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시문(詩文)에 뛰어나 많은 묘비명(墓碑銘)을 찬(撰)했고, 천문(天文)․역산(曆算)․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여이재(呂爾載) 1600(선조 33)~1665(현종 6)

자(字)는 자후(子厚), 호(號)는 해옹(海翁), 시호(諡號)는 숙헌(肅憲), 총관(摠管) 인길(裀吉)의 아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 1619년(광해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37년(인조 15)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이 되고 이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병조의 좌랑(佐郞)과 정언(正言)을 역임, 1644년 심기원(沈器遠)이 모반하자 구인후(具仁垕)를 도와 이를 토평하여 영국공신(寧國功臣) 3등이 되고 지평(持平)에 승진했다가 사직했다.

그후 오위장(五衛將)․병조 참지(兵曹參知)를 거쳐 1646년 형방 승지(刑房承旨)로 류 탁(柳 濯)을 친국(親鞫)할 때 왕을 보좌한 공으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승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낸 뒤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1662년(현종 3) 한성부 판윤(漢城府判 尹)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여성제(呂聖齊) 1624(인조 3)~1691(숙종 17)

자(字)는 희천(希天), 호(號)는 운포(雲浦), 시호(諡號)는 정혜(靖惠), 부사(府使) 이량(爾亮)의 아들. 참판(參判) 이징(爾徵)에게 입양. 1650년(효종 1) 생원(生員)이 되고, 1654년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이해 가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검열(檢閱)에 등용되 었다. 1665년(현종 6) 북평사(北評事), 이어 집의(執義)․동부승지(同副承旨)․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고, 좌부승지(左副承旨)․대사간(大司諫)․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1678년(숙종 4) 강릉 부사(江陵府使)에서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특진, 1680년 보사공신(保社功臣)의 추록(追錄)을 반대하다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앞서 현종(顯宗)의 국상 때 도감(都監)으로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낸 뒤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1684년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고, 이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후 1688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이해 남구만(南九萬)과 함께 동평군(東平君) 항(杭)에 대한 왕의 지나친 총애(寵愛)를 간(諫)하다가 경원(慶源)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으나 곧 풀려 나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다시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승진하여 사직,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전임했다.

이때 남인(南人)들이 성 혼(成 渾)․이 이(李 珥)를 무고하여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하려 하자, 그 불가함을 진소(陳疏)한 후 앞서 성 혼․이 이를 문묘에 배향할 때 관계관이었다 해서 스스로 청죄(請罪)한 후 고향에 갔다가 이해 상경하여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 위(廢位)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여합제(呂合齊) 자(字)는 경삼(景三).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여규제(呂奎齊) 자(字)는 취오(聚五). 조선에서 군수(郡守)를 지냈다.

여익제(呂翼齊) 자(字)는 태서(泰瑞).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여겸제(呂謙齊) 자(字)는 백공(伯恭).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여회제(呂會齊) 자(字)는 여로(汝魯), 호(號)는 동은(洞隱). 1652년(효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후에 직강(直講)을 거쳐 예조(禮曹)․병조 좌랑(兵曹佐郞),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장령(掌令),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하였으며,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다.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여민제(呂閔齊) 자(字)는 여효(汝孝). 1648년(인조 26) 생원(生員)이 되 고, 1649년(인조 2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 조 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 집 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재령 군수(載寧郡守)․강릉 부사(江陵府使)․ 철원 부사(鐵原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여윤제(呂尹齊) 자(字)는 임여(任汝). 조선(朝鮮) 때 철원 부사(鐵原府 使)를 지냈다.

여필중(呂必重) 자(字)는 대이(大而). 조선 때 장령(掌令)를 역임하였다.

여필관(呂必寬) 자(字)는 율경(栗卿). 조선조(朝鮮朝)에 금산 군수(錦山 郡守)를 지냈다.

여필용(呂必容) 자(字)는 휴경(休卿). 1683년(숙종 9) 증광문과(增廣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병조 좌랑(兵曹佐郞)․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집의(執義)를 거쳐,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병조(兵曹)․예 조(禮曹)․공조 참의(工曹參議), 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 참판 (兵曹參判)을 역임하고 강원도 감사(江原道監司)를 지냈다.

여필희(呂必禧) 자(字)는 수경(受卿). 1685년(숙종 11) 알성문과(謁聖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시강원 설서 (侍講院說書)․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고, 암행어사(暗行御史)․ 관서 장시도사(關西掌試都事)․경기도 도사(京畿道都事)를 지냈다.

여광주(呂光周) 자(字)는 사중(師中). 1709년(숙종 35) 알성문과(謁聖文 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교리(校理)․장령(掌令)을 지냈다.

여광세(呂光世)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여광헌(呂光憲) 자(字)는 사장(士章). 1721년(경종 1) 정시문과(庭試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여러 내외직(內外職)을 거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여응주(呂應周) 자(字)는 사여(士餘). 조선(朝鮮) 때 금부도사(禁府都 事)를 지냈다.

여명주(呂命周) 자(字)는 사신(士新).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여필선(呂必善)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 등이 난(亂)을 일으키 자 도순무사(都巡撫使)의 막부록(幕府錄)으로 출정(出征)하여 공(功) 을 세워 공신(功臣)에 녹훈(錄勳)되고, 현감(縣監)․군수(郡守)를 지 냈다.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여영조(呂榮祖) 자(字)는 술보(述甫). 1741년(영조17) 식년문과(式年文 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군수(郡守) 를 지냈다.

여선응(呂善應) 자(字)는 백언(伯言). 1739년(영조 12) 정시문과(庭試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조(兵曹)․이조 좌랑(吏曹佐郞), 병조 (兵曹)․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사간 (司諫),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집의(執義), 시강원 사서(侍講院司 書)․보덕(輔德)․장악원정(掌樂院正)․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지내 고, 춘천(春川)․강진 현감(康津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고,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냈다. 그후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 旨)․의금부 부총관(義禁府副摠管)을 역임하였다.

여선덕(呂善德) 자(字)는 민중(敏中). 1756년(영조 32) 진사시(進士試) 에 합격하여 원릉 참봉(原陵參奉)을 지내고, 1763년(영조 29) 증광문 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임명되어 병조 좌랑(兵曹佐郞)․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함경도 장시도사(咸鏡道掌試都事) 를 지냈다.

후에 병조 참지(兵曹參知)․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고, 문천 군수(文川郡守)․경원 목사(慶源牧使)․능주 목사(綾州牧使) 등을 지 냈다.

여선장(呂善長) 자(字)는 원백(元伯), 호(號)는 어은(漁隱). 1719년(숙종 45) 진사(進士)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예문 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홍문관 수찬 (弘文館修撰)․교리(校理)․응교(應敎), 이조(吏曹)․병조 정랑(兵曹正 郞), 이조(吏曹)․병조 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하고, 승정원 승지 (承政院承旨)에 이르렀다.

여선형(呂善亨) 자(字)는 군회(君會). 1751년(영조 27) 정시문과(庭試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사간 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집의(執義),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필선(弼善)․보덕(輔德) 등을 역임하고, 사복시정 (司僕寺正)에 이르렀다.

후에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우윤(右 尹), 예조(禮曹)․호조 참판(戶曹參判)․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 등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후 외직으로 나가 부안 현감 (扶安縣監)․서산 군수(瑞山郡守)․홍주 목사(洪州牧使)․완주 목사 (完州牧使)를 지냈다.

여만영(呂萬永) 자(字)는 경뢰(景賴). 1771년(영조 48) 생원(生員)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 閱)이 되고, 대교(待敎)를 거쳐 병조 정랑(兵曹正郞)․병조 좌랑(兵曹 佐郞)․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 등을 지냈다.

여춘영(呂春永) 자(字)는 경인(景仁), 호(號)는 헌적(軒適). 조선 때 오 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여동식(呂東植) 자(字)는 우렴(友濂), 호(號)는 만회(晩悔). 조선조(朝鮮 朝)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여동규(呂東奎) 자(字)는 군계(君啓), 호(號)는 만포(晩圃).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여규형(呂圭亨) 1849(헌종 15)~1922

자(字)는 사원(士元), 호(號)는 하정(荷亭). 풍섭(豊燮)의 아들. 경기 도 양근(楊根) 출신. 어려서부터 한학에 정진하였으며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지(承旨)를 거쳐 1895년(고종 32)에 제도 개편 때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다.

한일합방 후 제일고등보통학교(第一高等普通學校 : 경기중학교) 한 문교사를 지냈고, 시․서화․불경에 모두 능통해 살아있는「사문유 취(事文類聚)」로 일컬어졌다.

1916년 오세창(吳世昌)․장지연(張志淵) 등과 「대동시선(大東詩 選)」을 편집했다. 광대들이 부르던 「춘향가(春香歌)」를 중국의 「서상기(西廂記)」문체(文體)를 모방하여 희작(戱作)한 「춘향전(春 香傳)」이 전한다.

여태현(呂泰鉉) 한말(韓末)에 전서(典書)를 지냈다.

여운형(呂運亨) 1885(고종 22)~1947

호(號)는 몽양(夢陽), 정현(鼎鉉)의 아들. 경기도 양평(楊平) 출신. 배재학당(培材學堂)․흥화학교(興化學校)를 중퇴, 우무학당(郵務學堂) 을 졸업, 1909년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청년들을 교육했고, 이 듬해 기독교에 입교한 뒤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했다가 중 퇴, 1914년 중국에 건너가 남경(南京)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 학을 전공하다가 중단했다.

협화서국(協和書局)에 근무하면서 교민단 단장(僑民團團長)에 선임 되고, 1918년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개최된다는 소 식을 듣고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 신한청년당 (新韓靑年黨)을 조직, 총무간사(總務幹事)에 선임되어 김규식(金奎植) 을 파견했고, 이듬해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수립에 참여 하여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이 되었다.

이해 겨울 일본이 조선의 자치문제에 대해 의견을 타진해 오자 장 덕수(張德秀) 등과 일본에 건너가 일본조야(日本朝野)의 각계 인사들 에게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적극 역설하고 돌아왔다.

1920년 고려 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열 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遠東被壓迫民族大會)에 참석하고 돌아와 중 국의 손 문(孫 文)과 협력하여 중국혁명(中國革命)을 적극 추진했고, 1929년 영국의 식민 정책을 비판했다가 영국 경찰에 피체, 일본 경 찰에 인도되어 나가사끼(長崎)를 거쳐 본국에 압송, 제령위반죄(制令 違反罪)로 3년간 복역했다.

1933년 출옥하여 중앙일보(中央日報) 사장으로 있다가 사직, 1944 년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비밀단체 조선 건국연맹(朝鮮建國聯盟) 을 조직하여 위원장에 취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8월 15일 해방되자 건국연맹의 기반을 확대하여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초로 이해 9월 조선인민공화국(朝鮮 人民共和國)을 선포, 스스로 부주석(副主席)이 되었으나 우익(右翼) 진영의 반대를 받은 위에 미 점령군 당국(美占領軍當局)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했다.

12월 인민당(人民黨)을 조직, 이듬해 29개의 좌익(左翼) 단체를 규 합하여 민전(民戰 :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 의장단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좌경(左傾)에 반대하고 이를 탈퇴, 근로 인민당(勤勞人民黨)을 조직하여 당수로서 좌파 온건세력을 규합, 정치활동을 하다가 한지근(韓智根)에 의해 암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