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제주양씨(濟州梁氏),제주양씨시조,양을나(梁乙那),제주양씨조상

작성일 : 2017-04-22 13:13 수정일 : 2018-01-07 10:33

제주양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

제주(濟州)는 한반도(韓半島)의 남서 해상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대의 섬()으로 명칭은 도이(島夷)․주호(州胡)․탐모라(耽牟羅)․섭라(涉羅)․탁라(乇羅)․탐라(耽羅)․제주(濟州) 등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려왔다. 신라(新羅)의 속국(屬國)이었던 탐라국(耽羅國)938(태조 21) 고려(高麗)의 속국이 되었고, 숙종(肅宗) 때는 군()을 설치하여 직접 다스리다가 1153(의종 7) 군을 현()으로 고쳤으며 1211(희종 7)에 탐라를 제주라고 개칭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대 오랫동안 전래되어온 성주(星主)․왕자(王子)의 칭호가 폐지되고 실질적인 행정력 속에 포함되어, 1416년 한라산을 경계로 산북(山北)을 제주, 산남(山南)을 양분하여 동쪽에 정의현(旌義縣), 서쪽에 대정현(大靜縣)을 설치하여 통치해오다가 1864(고종 1) 대정․정의 양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전라도 관찰사 관할하에 두었다.

그 후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1910(순종 4)에는 정의․대정 양현이 제주군으로 합군되는 동시에 추자면(楸子面)이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분리되어 제주군에 편입되었으며, 한일합방 후인 1915년 도사제(島司制)로 개편, 제주도(濟州島)가 되었고, 1946년 도제(道制) 실시로 전라남도 관할하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현재 2265면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제주양씨(濟州梁氏)의 시조(始祖) <탐라개국설화(耽羅開國說話)>에 나오는 삼신인(三神人)중의 한 사람인 양을나(梁乙那)이다.영주지(瀛州誌)」에 의하면 양을나는 아득한 옛날 제주도 한라산 북족기슭 모흥혈(毛興穴 : 삼성혈이라고도 함)에서 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와 함께 용출(湧出)하여 탐라개국군왕(耽羅開國郡王)이 되었고, 그의 자손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938(고려 태조 28)까지 탐라를 통치해 왔다고 한다.

그후 양을나의 후손 양탕왕자(良宕王子)가 신라(新羅)에 사신으로 예방(禮訪)하니 내물왕(奈勿王 : 17대 왕, 재위기간 356402)이 많은 상을 내리고 성()을 양()으로 하사(下賜)하였다고 하며, 그의 후손 수()682(신문왕 2)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후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양을나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貫鄕)을 제주로 삼게 되었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이부 시랑(吏部侍郞)과 중추부사(中樞副使)를 지낸 진이 상서좌복야로 치사(致仕)했고, 녹사(綠事) 한신(漢臣)의 아들 숙()은 명종(明宗)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한편 지지당(知止堂) 송 흠(宋欽)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던 팽손(彭孫)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소장파 현량(賢良)을 특채, 혁신정치를 실현하려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낙향하였다가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가 실각된 후 복관되어 용담 현령(龍潭縣令)을 지냈다.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한 응정(應鼎)은 팽손의 아들로 공조(工曹)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쳐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으며,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효행이 뛰어나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응정의 아우 응태(應台)는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지냈으며, 응정의 아들 산숙(山璹)은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진주성(晋州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을 따라 남강(南江)에 투신하였고, 그의 처 이씨(李氏)도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목에 칼을 찔러 자살했다.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던 산보(山甫)는 스승이 기묘사화에 화를입자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가 은거(隱居)하며 학문으로 여생을 마쳤으며, 그의 아들 자징(子徵)은 효행(孝行)으로 벼슬에 천거되어 거창(居昌)과 석성 현감(石城縣監)을 역임했고, 장인 김인후(金麟厚)의「하서집(河西集)」에 행장(行狀)을 썼다.

당대의 석학(碩學) 우계(牛溪) 성 혼(成 渾)의 문인(門人)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의 폐모론(廢母論)을 개탄했던 천운(千運)은 감찰(監察)과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를 역임했고, 부호군(副護軍) 우규(愚圭)의 아들 거안(居安)은 박세당(朴世堂)과 윤 증(尹 拯)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으며,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쌍봉(쌍峯)에 살면서 학문에만 전력했다.

한말에 와서는 회일(會一)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화순(和順)과 동복(同福) 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과 항전하다가 강진(康津)에서 체포되어 단식 7일만에 순국했으며, 한묵(漢黙)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하여「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 국민의 항일사상 고취에 앞장 섰던 기탁(起鐸)과 함께 제주 양씨(濟州梁氏)의 의맥(義脈)을 살렸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주양씨(濟州梁氏)는 남한(南韓)142,2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제주양씨조상

양섭천(梁涉川) 692(신라 효소왕 1) 탐라왕(耽羅王)으로서 신라 신문왕(神文王)의 조상(弔喪)을 가니 효소왕(孝昭王)이 귀빈(貴賓)으로 대우하고 성주왕자(星主王子)의 작()을 주었다.

양품(梁 品)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각간(角干)이 되었고 그의 딸은 구족부인(具足夫人)으로 선덕왕비(宣德王妃)가 되었다.

양보숭(梁保崇) 고려조에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올랐다. 유격공파(遊擊公派) 파조(派祖).

양유침(梁有琛) 고려(高麗) 때 충무위 중부사직(忠武衛中副司直)을 지냈으며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사직공파(司直公派) 파조(派祖).

양중덕(梁仲德) 고려(高麗)에서 천호(千戶)를 지냈다. 천호공파(千戶公派) 파조(派祖).

양홍(梁 鴻) 고려(高麗) 때 승의부위(承義副尉)로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중랑공파(中郞公派) 파조(派祖).

양준(梁 峻)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을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양희(梁 羲) ()는 백춘(伯春). 고려(高麗) 원종(元宗) 때 서두봉관(西頭奉官)을 역임하였다. 서두봉관파(西頭奉官派) 파조(派祖).

양진( 木眞) ?~1040(종종 6) 1011년(현종 2) 어사중승(御史中丞), 1014년 이부 시랑(吏部侍郞)․중추부사(中樞副使), 1018년 예부 상서 겸 중추사(禮部尙書兼中樞使)를 역임하고, 1020년 예부상서(禮部尙書)로서 거란(거丹)에 파견되어 왕세자의 책봉(冊封)을 알렸다. 좌복야(左僕야)로 1031년(현종 22) 동경 유수사(東京留守事)를 겸하고, 뒤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야)로 치사(致仕)했다.

양숙(梁 淑) 1165(의종 19) 신호위 대장군(神號衛大將軍) 겸 우위수․부수(右衛率․副率)에 이르렀으며, 1170(의종 24) 이 고(李高)․채 원(蔡 元)이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가담하여 왕을 죽이려 하자 이를 말리고 폐위에 그치게 했으며 1172(명종 2)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양정(梁 禎) 1014(현종 5) 이부 시랑(吏部侍郞)․중추부사(中樞府使)를 지냈으며, 좌복야(左僕射)를 거쳐 동경 유수사(東京留守事)를 역임하였다.

양순(梁 淳) 1271(원종 12) 장원 급제를 하였으며 원()나라에 가서 좌부상서(左部尙書)를 지냈고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에 올랐다. 귀국(歸國)한 후 충숙왕(忠肅王)은 찬명(讚明)이라는 이름을 하사(下賜)하고 찬성사(贊成事)에 임명하였다.

양준(梁 遵) 1303(충렬왕 29)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냈다.

양저(梁 貯) ()는 대후(大厚). 고려(高麗) 때 우위 대호군(右衛大護軍)을 지냈다.

양백익(梁伯益) 1363(공민왕 12) 개성윤(開城尹)으로서 흥왕사(興王寺)의 변()에 적당(賊黨)을 소탕한 공()과 전년에 경성(京城 : 개성)을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고, 1364년 지도첨의(知都僉義)로서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를 겸했다. 1365년 첨의 평리(僉義評理)에 전임되었으나 신 돈(辛 旽)에 의해 춘주(春州 : 춘천)로 유배되었다.

1377(우왕 3) 찬성사(贊成事)로서 서해도 원수(西海道元帥)가 되어 왜구(倭寇)와 싸웠고 뒤에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로 있다가 1379년 창녕(昌寧)에 유배되었다.

양정명(梁井明) 조선(朝鮮) 때 전적(典籍)을 지냈다.

양진손(梁震孫) 조선(朝鮮) 때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양계벽(梁系璧) 조선조(朝鮮朝)에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냈다.

양이하(梁以河) ()는 수목당(睡目堂). 정도(正道)를 창화(唱和)하고 이교(異敎)를 배척하는 대학자(大學者)로 지칭되었다.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고, 능주(綾州)의 삼현사(三賢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양팽손(梁彭孫) 1480(성종 11)~1545(인종 1) 자(字)는 대춘(大春), 호(號)는 학포(學圃), 시호(諡號)는 혜강(惠康), 이하(以河)의 아들.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하여 13세 때 송 흠(宋欽)의 문하에 들어갔고, 1510년(중종 5)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51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정언(正言)을 거쳐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519년(중종 14) 교리(校理)로 재직중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직(削職) 당했다.

1537년 김안로(金安老)가 사사(賜死)된 후 복관(復官)되어 1544년 용담 현령(龍潭縣令)을 지내다 사직했다. 글씨를 잘 섰다.

양산보(梁山甫) 1503(연산군 9)~1557(명종 12) 자(字)는 언진(彦鎭), 호(號)는 소쇄옹(瀟灑翁), 사원(泗源)의 아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창평(昌平) 출신.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 조광조가 화를 입자 은거하며 학문으로 여생을 마쳤다.

양응정(梁應鼎) 1519(중종 14)~? 자(字)는 공섭(公燮), 호(號)는 송천(松川), 교리(校理) 팽손(彭孫)의 아들. 1540년(중종 35) 생원시(生員試)에 장원, 1552년(명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155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이듬해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재직중 김홍도(金弘度)와 함께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에 의해 파직당했다.

1560년 복직되어 1565년 수찬(修撰)을 거쳐 진주 목사(晋州牧使)가 되고 1574(선조 7)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재직중 앞서 진주를 다스릴 때 협잡이 있었다는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578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기용되고,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 나라에 가서 부정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다시 파직당했다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효행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양응태(梁應泰)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양자징(梁子徵) 1523(중종 18)~1594(선조 26) 자(字)는 중명(仲明), 호(號)는 고암(鼓巖), 산보(山甫)의 아들. 창평(昌平) 출신. 김인후(金麟厚)의 딸과 결혼한 후 장인의 문인이 되고, 효자로 천거받아 사관(史官)에 발탁되었다.

이어 거창(居昌)․석성 현감(石城縣監)을 지냈으며「하서집(河西集)」의 행장(行狀)을 썼다. 장성(長城)의 필암서원(筆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양산숙(梁山璹) 1561(명종 16)~1593(선조 26) 자(字)는 회원(會元), 시호(諡號)는 충민(忠愍), 대사성(大司成) 응정(應鼎)의 아들. 성 혼(成 渾)의 문인.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고 경전(經典)에만 전심, 천문(天文)․지리(地理)와 병학(兵學)에도 통하였다.

1591(선조 24) 천상(天象)을 보고 난리가 있을 것을 예언, 상소가지 하여 대비책을 건의했다가 사람들의 배척을 받았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진주(晋州)에서 싸우다 죽었다.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고 나주(羅州)의 정렬사(旌烈祠)․진주(晋州)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양천운(梁千運) 1568(선조 1)~1637(인조 15) 자(字)는 사형(士亨), 호(號)는 영주(瀛洲), 현감(縣監) 자징(子徵)의 아들. 창평(昌平) 출신. 성 혼(成 渾)의 문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동몽교관(童蒙敎官)․감찰(監察)․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 등을 역임한 뒤 사직하고 학문에 정진했다.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廢母 論)을 주청하자 절교했다.

양거안(梁居安) 1652(효정 3)~1731(영조 7) 자(字)는 천백(遷佰), 호(號)는 육화(六化), 부호군(副護軍) 우규(禹圭)의 아들. 박세당(朴世堂)․윤 증(尹 拯)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쌍봉(雙峯)에 살며 학문에 전심했다.

양덕하(梁德廈) 조선(朝鮮)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양만룡(梁曼龍) 조선(朝鮮) 때 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

양회일(梁會一) ()는 행사(杏史). 화순(和順) 출신. 1906년 양열묵(梁烈黙)․이병화(李秉華) 등과 의병을 일으켜 이듬해 의병대장으로 2백여명의 정병을 이끌고 능주(綾州)를 습격, 화순(和順)․동복(同福)으로 진격하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1908년에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다가 강진(康津)에 주둔한 일본 헌병에게 잡혀 15년형을 선고받고 단식 7일 만에 순국했다.

양한묵(梁漢黙) 1862(철종 13)~1919  자(字)는 길중(吉仲), 호(號)는 지강(芝江), 상태(相泰)의 아들. 전라도 해남(海南) 출신. 1881년(고종 18) 화순(和順)에 이사하여 글을 배우고 1894년(고종 31) 탁지부 주사(度支部主事)가 되어 능주(綾州)의 세무관리로 근무, 1897년(광무 1) 사직한 후 중국 북경(北京) 등지를 유람했다.

이듬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국정(國政)과 세계 대사를 통찰, 1902년 나라(奈良)에서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권유로 동학(東學)에 입교하였고,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여 구국 민중운동을 지도했다.

1905년 이용구(李容九) 등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이에 대항하여 이 준(李 儁)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했고, 이듬해 손병희․권동진 등과 서울에 천도교(天道敎) 중앙총부를 결성, 집강 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 우봉도(右奉道)에 취임했다.

1909(융희 3) 법도사(法道師), 1911년에는 직무도사(職務道師)가 되고 서울에 교리강습소를 개설했다. 1919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중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양기탁(梁起鐸) 1871(고종 8)~1938  아명(兒名)은 의종(宜鍾), 호(號)는 설강(雪岡), 시영(時英)의 아들. 평양 출신. 어려서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장성하여 부친과 함께 영국인 선교사 게일의 한여사전」 편찬을 도왔다. 1904년 영국인 베델과 영자신문「코리아 타임즈」를 발간하고, 이듬해 국한문으로「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 주필이 되어 국민의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