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남원양씨시조(南原梁氏),양우량(梁友諒),남원양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2 13:03 수정일 : 2018-02-19 18:08

시 조

남원양씨시조(南原梁氏)는 양우량(梁友諒)이며 양탕(良宕)의 후손 우량(友諒)이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공(功)을 세워 남원백(南原白)에 봉해졌으므로 제주(濟州)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남원(南原)으로 하였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능양(能讓 : 병부공계)․주운(朱雲 : 용성군계)․윤위(潤渭 : 장영공계)를 각각 일세조(一世朝)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의 유래

남원(南原)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고룡군(古龍郡)인데 후에 대방군(帶方郡)으로 고쳤고,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 때 소경(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남원소경(南原小京)으로 개칭하였다. 고려(高麗) 태조조(太祖朝)에 남원부로 삼았다가 다시 대방군으로 하였으며, 후에 남원군으로 고치고 1360년(공민왕 9) 부(府)로 승격, 1739년(영조 15)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고 다시 부로 복구, 1895년(고종 32) 남원군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대표적 인물(人物)로는 고려 때 견(堅)이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책록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진현관 대제학(進賢冠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동국(東國)의 백이숙제(伯二叔薺)라 불렸던 우(祐)가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에 올라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에서는 관료파(官僚派) 학자로서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았던 성지(誠之)가 유명했는데, 그는 세종(世宗) 때 신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세조(世祖)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대사헌(大司憲)․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의 손자 연(淵)은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이조 판서(兵․吏曹判書)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증손 구신(久信)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순절(殉節)하였다.

이외에도 희(喜)가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구국전선에 앞장선 대박(大樸)과 홍주(弘澍), 그리고 몽열(夢說)과 황(榥),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어영대장(御營大將)과 형조․공조 판서(刑曹․工曹判書)를 역임한 헌수(憲洙) 등이 가문을 빛냈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의병장(義兵將) 상기(相基)와 한규(漢奎), 독립운동가로 광복군 사령부(光復軍司令部)의 총사령관을 역임한 세봉(世奉) 등이 있다.

인 구

2015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양씨(南原梁氏)는 남한(南韓)에 17,3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양부(梁 夫): 진한(辰韓) 6부(部) 때 바다를 건너 신라 건국(新羅建國) 초기부터 공훈을 많이 세웠고 석씨왕조(昔氏王朝)인 첨해왕(沾解王) 시대에 공을 세워 이찬(伊湌)을 지냈으며 석(昔)․김(金)․양조(兩朝)의 교체기에 공을 세워 서불한(舒弗邯) 겸 내외 병마사(內外兵馬使)에 이르렀다.

양질(梁 質): 281년(신라 미추왕 20) 일길찬(一吉湌)이 되었고, 283년(미추왕 22) 백제(百濟)가 변방을 침략하여 괴곡성(槐谷城)을 포위하자 국왕(國王)이 발탁하여 그에게 방어(防禦)하도록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워 큰공을 세웠다.

양수(梁 首): 신라(新羅) 태종(太宗) 때 율법(律法)을 제정하였으며 신라 유리왕(儒理王) 때 제정된 17등급의 직제(職制)를 받아들여 정하였고 60여 조(條)의 법전(法典)을 수정(修正)하여 완성하고 이방부(理方府) 영(令)에 올랐다.

양신(梁 臣): 신라 태종무열왕 때 일길찬(一吉湌)을 지냈으며, 삼국통일(三國統一) 때 당(唐)나라 장수 고보(高保)와 합세하여 싸우다 석문(石門)에서 전사하였다.

양열(梁 悅): 신라(新羅)의 국학생도(國學生徒)로 견당숙위 학생(遣唐宿衛學生)에 선발되어 당(唐)나라에 유학(留學)하였다. 당시(當時)의 황제 덕종(德宗)이 봉천(奉天)에 행행(幸行 : 임금이 궁중 밖으로 거동함)할 때 그가 종난(從難)하여 공(功)이 있었던 까닭에 덕종(德宗) 은 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의 벼슬을 주어 본국으로 돌려 보냈으므로 왕은 그를 뽑아 등용하였다.

양만춘(梁萬春): 고구려 때 안시성(安市城) 성주(城主)로 645년(보장왕 4) 당태종(唐太宗)이 30만의 대군으로 침입하여 안시성(安市城)을 23개월간 걸쳐 포위하여 하루에 6~7회씩 맹렬히 공격하였으나 이를 격퇴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양길(梁 吉): 신라(新羅) 진성여왕(眞聖女王) 때 왕실의 부패로 국정(國政)이 문란해지자 북원(北原 : 지금의 원주)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국원(國原 : 충주) 등 30여 성(城)을 공취(攻取)하여 세력을 폈다. 891년(진성여왕 5) 궁 예(弓 裔)를 부하(部下)로 맞아 여러 지방(地方)을 공략, 판도를 넓혔으나 궁예(弓裔)의 세력이 커짐을 두려워하여 그를 없애려다가 역습을 받고 대패(大敗)했다. 궁예(弓裔)가 강릉(江陵)․철원(鐵原)을 점령하고 성주(城主)를 칭(稱)하자 그를 토벌(討伐)하였고 나중에는 신라(新羅)가 고려에 투항(投降)하자 북원경(北原京)은 고수(固守)하였으니 신라에 순국(殉國)한 충신(忠臣)이다.

양능양(梁能讓): 호(號)는 돈암(돈菴). 976년(경종 1) 봉사(奉事)를 지낼 때 송(宋)나라에 들어가 국자감(國子監)에서 김행성(金行成)과 같이 전례(典禮)와 경의(經義)를 강(講)하고,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으며 귀국(歸國)하여 학교를 설립, 영재육성(英才育成)에 힘썼다. 성종(成宗) 때 중봉대부(中奉大夫)에 올라 병부 낭중(兵部郎中)을 거쳐 동궁내 시강학사(東宮內侍講學士)에 이르렀다. 1003년(목종 6) 김치양(金致陽)이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씨(皇甫氏)와 사통(邪通)하여 낳은 아들로 왕위(王位) 계승을 꾀하며 대양원군(大良院君) 순(詢)을 죽일 음모를 꾀하는 난정(亂政)을 피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호남(湖南) 용성(龍成)의 풍악산(楓岳山) 아래 중산동(中山洞)에 은거(隱居)하여 평생을 살았으며, 용장서원(龍章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병부공파(兵部公派) 파조(派祖)이다.

양능길(梁能吉): 고려(高麗) 경종(景宗)․성종(成宗)․목종(穆宗) 때에 삼중삼한대장군(三重三韓大將軍)에 이르렀고 예성군(蘂城君)에 피봉(皮封)되었다.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파조(派祖)이다.

양수정(梁水精): 고려(高麗) 때 공을 세워 대방(帶方 : 남원) 부원군에 봉해졌다. 대방군파(帶方君派) 파조(派祖)이다.

양주운(梁朱雲): 자(字)는 효직(孝直), 호(號)는 삼강(三江). 고려 원종(元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태자 중윤(太子仲允)이 되었고, 중국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정주의주(程朱儀註)」를 가지고 와서 널리 포교(布敎)하는데 공을 세웠다.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김방경(金方慶)과 토벌한 공으로 찬화공신(贊化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용성파(龍城派) 파조(派祖)이다.

양윤위(梁潤渭): 시호(諡號)는 장영(章榮).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진현관 대제학(進賢冠大提學)에 이르렀다. 장영공파(章榮公派) 파조이다.

양득황(梁得璜): 고려 때 국자진사(國子進士)에 합격한 뒤 중현대부(中顯大夫)로 병부 의랑(兵部議郞)을 역임하였다.

양견(梁 堅): 호(號)는 월정(月亭).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후 광정대부(匡靖大夫)로 밀직사사(密直司事)를 거쳐 진현관 대제학(進賢冠大提學)․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역임하였다.

양중규(梁仲奎):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낭중(吏部郎中)을 거쳐 진현관 대제학(進賢冠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양준(梁 俊): 자(字)는 중걸(仲傑).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중현대부(中賢大夫)로 성균관(成均館) 제주(祭酒)를 지내고 한림 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지제교(知製敎)에 이르렀다.

양일(梁 溢): 시호(諡號)는 문인(文仁).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때 광정대부(匡靖大夫)로 판군기감(判軍器監)을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였다.

양우(梁 祐): 자(字)는 구인(求仁), 호(號)는 묵재(黙齋). 고려 때 대과(大科)에 급제한 후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라 판도판서(版圖判書)로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겸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개구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니 세인(世人)이 동국 (東國)의 백이숙제(伯夷叔薺)라 하였다.

양서(梁 瑞): 자(字)는 윤식(允軾), 호(號)는 경재(敬齋).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 제주(國子祭酒)에 이르렀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 임명을 반대하여 영변(寧邊)으로 유배되었다. 성리학(性理學)에 능통하여 관서지방(關西地方)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보급하였다. 영변(寧邊)의 경문서원(敬文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양사도(梁思道): 시호(諡號)는 문절(文節). 고려(高麗) 때 병조 전서(兵曹典書)를 지냈다.

양사귀(梁思貴): 전서(典書) 사도(思道)의 동생. 고려(高麗)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양사철(梁思哲): 자(字)는 성인(成仁), 호(號)는 호은(澔隱). 고려조(高麗朝)에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하였다.

양의생(梁宜生): 시호(諡號)는 충민(忠愍). 고려(高麗) 때 우정승(右政丞)을 지냈다.

양여공(梁汝恭): 1378(우왕 4)~1431(세종 13). 자(字)는 경지(敬之), 호(號)는 유정(柳亭), 숙(肅)의 아들. 1405년 (태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1418년(태종 18)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병사(兵使)를 상왕(上王 :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은 죄를 핑계 삼아 외척(外戚) 심온(沈溫)을 제거(除去)하기 위해 강상인(姜尙仁) 옥사(獄事)를 일으켜 병조 판서(兵曹判書) 박 습(朴 習) 등과 함께 함안(咸安)에 장류(杖流)되었다가 1431년 류연생(柳衍生)의 유언비어(流言蜚語)에 연루(連累)되어 처형(處刑)되었고 문종(文宗) 원년(元年)에 신원(伸寃)되었다. 효성이 지극하고 시와 글씨에 능했다.

양권(梁 權): 조선(朝鮮) 때 부정(副正)을 지냈다.

양지손(梁芝孫): 조선 때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양관(梁 灌): 자(字)는 옥지(沃之), 호(號)는 일로당(逸老堂). 1457년 (세조 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460년(세조 6)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의주 판관(義州判官)․장흥 부사(長興府使)를 거쳐 덕천 군수(德川郡守)로 재임 중(在任中) 선정을 베풀어 의주 부사(義州府使)로 특진, 성종(成宗)의 어찰(御札)이 하사(下賜)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그후 회령 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를 거쳐 동지돈령부사 겸 부총관(同知敦寧府事兼副摠管)에 올랐다. 함양(咸陽)의 귀천서원(龜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양성지(梁誠之): 1415(태종 15)~1482(성종 13). 자(字)는 순부(純夫), 호(號)는 눌재(訥齋)․송파(松坡), 시호(諡號)는 문양(文襄). 증우찬성(贈右贊成) 구수(九壽)의 아들. 1441년(세종 23) 진사(進士)․생원(生員) 양시(兩試)에 합격, 이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경창부승(慶昌府丞)․성균관(成均館) 주부(主簿)를 역임했다. 훈구파(勳舊派)의 중진(重鎭)으로서 이듬해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 등을 지내며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았고,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고려사 수사관(高麗史修史官)을 겸직하여「고려사(高麗史)」의 개찬(改撰)에 참여했다. 이어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승진, 1453년(단종 1) 왕명으로「조선도도(朝鮮都圖)」․「팔도각도(八道各圖)」를 작성했고, 다음해「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찬진(撰進), 1455년(세조 1)「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하였다. 이듬해 집현전이 폐지되자 좌보덕(左輔德)에 전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1463년 왕명으로「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 이해 홍문관(弘文館)의 설치를 건의하여 역대의 서적을 보관케 하고 제학(提學)으로 취임, 이듬해 구현시(求賢試)에 급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으며, 대사헌(大司憲)에 재직 중「오륜록(五倫錄)」을 찬진(撰進)했다. 이듬해 발영시(拔英試)에 급제, 서적의 보전과 간행을 건의하는 10조의 상소문을 올려 학문의 발전을 꾀하도록 했고, 다음해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을 찬진했다. 1469년(예종 1)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직하며 「세조실록(世祖實錄), 1470년(성종 1) 「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471년(성종 2) 좌리 3등공신(佐理三等功臣)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1477년 대사헌(大司憲)에 재임했다가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었고 1481년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으로「여지승람(與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1482년 서적의 인간(印刊)․수장(收藏)에 대하 12조의 건의문을 올렸다.

양순석(梁順石): 조선(朝鮮)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양순경(梁順卿): 조선 때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양하(梁 賀): 조선조(朝鮮朝)에 지평(持平)을 지냈다.

양자해(梁自海): 조선 때 전적(典籍)을 지냈다.

양취영(梁就盈): 조선에서 전적(典籍)을 역임하였다.

양철견(梁鐵堅): 조선 대 전적(典籍)을 지냈다.

양연(梁 淵): ?~1542(중종 37). 자(字)는 거원(巨源), 호(號)는 설옹(雪翁), 성지(誠之)의 손자.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장령(掌令)․집의(執義)․직제학(直提學)을 거쳐 1535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537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김안로(金安老)․채무택(蔡無擇)․허 항(許 沆) 등 삼흉(三兇)을 탄핵하여 이들을 처형케 했다. 뒤에 좌승지(左承旨)․병조 판서(兵曹判書)․이조 판서(吏曹判書)등을 역임, 1541년(중종 36)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양의(梁 儀): 조선조(朝鮮朝)에 목사(牧使)를 지냈다.

양응태(梁應胎):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양가(梁 嘉): 조선(朝鮮) 때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였다.

양희(梁 喜): 1515(중종 10)~1580(선조 13). 자(字)는 구이(懼而), 호(號)는 구졸암(九拙菴), 첨정(僉正) 응곤(應鵾)의 아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지내고, 1568년(선조 1) 예빈시(禮賓寺) 정(正)으로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겸직(兼職)하여「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573년 사간(司諫)․의주 목사(義州牧使)를 역임, 승지(承旨)를 거쳐 1580년 판결사(判決事)에 오르고, 이듬해 동지사(冬至使)로 청(淸) 나라에 갔다가 옥하(玉河)의 객관(客館)에서 병사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함양(咸陽)의 귀천사(龜川祠)에 제향되었다.

양대박(梁大樸): 1544(중종 39)~1592(선조 25) 자(字)는 사진(士眞), 호(號)는 송암(松巖)․죽암(竹巖)․하곡(荷谷)․청계도인(靑溪道人),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목사(牧使) 의(艤)의 아들. 학관(學官)으로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50여 명을 모아 담양(潭陽)에서 고경명(高敬命)을 만나 맹주(盟主)로 삼고 5월에 군사를 동원, 전주(全州)에서 의병 2천 명을 모았다. 의병 모집 때의 과로로 발병하여 진산(珍山)의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글씨를 잘 썼다. 정조 때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양주(梁 澍): 1550(명존 5)~1597(선조 30). 자(字)는 윤경(潤卿), 호(號)는 석계(石溪), 군수(郡守) 준(峻)의 4세손, 홍제(弘濟)의 장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우고 순절(殉節)하였다. 선조(宣祖)가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을 제수(除授)하였다.

양홍주(梁弘澍): 1550(명종 5)~1610(광해군 2) 자(字)는 대림(大霖), 호(號)는 서계(西溪), 참판(參判) 희(喜)의 아들. 조 식(曺 植)․성 혼(成 渾)․이 이(李 珥)의 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김성일(金誠一)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아들 황(榥)의 건의로 가재를 팔아 많은 화살을 배에 싣고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왕에게 바쳐 이듬해의 평양(平壤) 탈환전에 사용했다. 왕을 호종(扈從)하여 환도(還都), 1595년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어 잠시 근무하다가 곧 사임했다.

양몽열(梁夢說): 1565(명종 20)~1627(인조 5) 자(字)는 천뢰(天賚), 국량(國樑)의 아들. 전주(全州) 출신. 1597년(선조 3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해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왜적이 순천(順天)에서 전주(全州)로 육박해 올때 의병장 이정란(李廷鸞)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전주성(全州城)을 함께 지키던 중 부사(府使)가 도망하므로 의병을 해산했다. 뒤에 벽사도(碧沙道) 찰방(察訪)을 잠시 지낸 뒤 7, 8년간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했고 삼가(三嘉)․해미(海美)의 현감(縣監)을 거쳐 강계판관(江界判官)․흥덕 현감(興德縣監)․성환 독우(成歡督郵) 등을 역임했다.

양지(梁 誌): ?~1592(선조 25). 자(字)는 언신(彦信), 시호(諡號)는 충민(忠愍), 성지(誠之)의 후손. 음보(蔭補)로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오르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삭녕(朔寧)에 와 있던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심 대(沈 岱)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적의 야습을 만나 끝까지 항전하다가 순사(殉死)했다. 1796년(전조 20)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삭녕(朔寧)의 표절사(表節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양응록(梁應祿): ?~1592(선조 25). 자(字)는 영국(榮國), 호(號)는 상촌(橡村), 능양(能讓)의 후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향의 5의사(義士)와 함께 왜적과 싸워 수십 명을 죽이고 전사했다. 순조(純祖) 때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고, 구례(求禮)의 남전사(藍田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양사원(梁士元): 조선(朝鮮) 때 좌랑(佐郞)을 지냈다.

양경우(梁慶遇): 1568(선조 1)~? 자(字)는 자점(子漸), 호(號)는 제호(薺湖)․점역재(點易齋)․요정(寥汀)․태암(泰巖), 대박(大樸)의 아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 1597년(선조 30) 참봉(參奉)으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죽산(竹山)․연산(連山)의 현감(縣監)에 이어 판관이 되었다. 1616년(광해군 8)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를 거쳐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에 이르렀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양응심(梁應深): 1570(선조 3)~1632(인조 10) 자(字)는 언용(彦容), 참봉(參奉) 은(誾)의 아들. 1600년(선조 33)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으로서 비변랑(備邊郞)을 겸했고, 이천현감(利川縣監)․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명천 부사(明川府使)․형조 좌랑(刑曹佐郞) 등을 거쳐 선조(宣祖) 말년에 평양 판관(平壤判官)을 지냈다. 대북파(大北派)의 폭정(暴政)으로 사임했다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를 강화(江華)에 호종(扈從)한 후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이 되고, 평안도 병마우후(平安道兵馬虞候)를 거쳐 1629년 영변 부사(寧邊府使)가 되었다. 서예(書藝)에 뛰어났다.

양근(梁 謹):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양유인(梁有仁):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양우경(梁禹卿): 호(號)는 청강(淸江).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공신(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경서(經書)에 능하여 유학(儒學)을 중흥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양응락(梁應洛): 1572(선조 5)~1620(광해군 12) 자(字)는 심원(深源), 호(號)는 만수(漫叟), 군수(郡守) 근(謹)의 아들. 1590년(선조 23) 진사(進士)가 되고,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자원, 전적(典籍)을 거쳐 호조․예조 좌랑(佐郞)을 역임, 이듬해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병조 정랑(兵曹正郞)이 되었다. 1617년(광해군 9) 희천 군수(熙川郡守) 재임시 선정(善政)을 베풀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이듬해 승정원(承政院) 승지分承旨)가 되었다가 서변(西邊)이 위태(危殆)해지자 평산 현감(平山縣監)으로 나가 임지에서 죽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양극선(梁克善):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양의(梁 毅): 조선(朝鮮) 때 전적(典籍)을 지냈다.

양형우(梁亨遇): 조선(朝鮮) 때 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양덕수(梁德壽): 1610년(광해군 2) 우리 나라 고가(古歌) 연구에 귀중한 악보(樂譜)의 하나인 「양금신보(梁琴新譜)」를 만들었다.

양황(梁 榥): 1575(선조 8)~1597(선조 30) 자(字)는 학기(學器), 호(號)는 진우재(眞遇齋), 홍주(弘澍)의 아들. 성 혼(成 渾)의 문인. 1592년(선조 25) 아버지가 의병을 일으키자 아버지에게 건의하여 경상도 의병대장(慶尙道義兵大將) 정인홍(鄭仁弘)의 휘하(麾下)에 들지 않고 수하 의병을 이끌고 김성일(金誠一)의 휘하에 들게 했고, 가재를 팔아 많은 화살을 준비, 해로(海路)로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바치도록 건의하여 이듬해 평양(平壤) 탈환전에 유효하게 사용케 했다.

양진국(梁晋國): ?~1627(인조 5) 자(字)는 백경(伯卿). 일찍이 향주(鄕州)의 좌수(座首)를 역임하고 30세로 무과(武科)에 급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안주(安州)의 수성 중군(守城中軍)으로 절도사(節度使) 남이흥(南以興) 등과 결사적으로 항전했으나 성이 함락 당하자 5영(營)의 여러 장수와 함께 분사(焚死)했다. 훈련원 도정(訓練院都正)에 추증(追贈)되고 안주(安州)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양칙(梁 侙): 조선(朝鮮) 때 수사(水使)를 지냈다.

양수(梁 壽): 조선(朝鮮) 때 교리(校理)를 지냈다.

양중이(梁重履): 조선조(朝鮮朝)에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양성규(梁聖揆): 조선(朝鮮)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양우순(梁禹旬):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양정호(梁廷虎): 조선(朝鮮)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양응규(梁應奎): 1702(숙종 28)~1770(영조 46) 초명(初名)은 취연(就連), 자(字)는 내성(乃聖).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을 감동시켜 세상사람들이 중국의 효자 왕상(王祥)에 비하였다. 남원부(南原府)에서 여러 번 감영(監營)에 보고하여 예조(禮曹)에 아뢰어 세상사람들의 귀감이 됨을 효시(嚆矢)하였다.

양처해(梁處海): 1733(영조 9)~? 초명(初名)은 처혁(處赫), 자(字)는 사빈(士彬). 1763년(영조 39)에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양성시(梁聖時):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양주우(梁周羽): 조선조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양치혁(梁致赫): 조선(朝鮮)에서 교리(校理)를 지냈다.

양우준(梁禹濬): 조선(朝鮮)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양봉제(梁鳳濟): 조선(朝鮮)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양헌수(梁憲洙): 1816(순조 16)~1888(고종 25) 자(字)는 경보(敬甫), 시호(諡號)는 충장(忠莊), 수봉관(守奉官) 종임(鍾任)의 아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1848년(헌종 14)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철종(哲宗) 때 참상(參上)으로 승진,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천총(千摠)으로 좌선봉장(左先鋒將)이 되어 강화도(江華島) 정족산(鼎足山)에 침입한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오즈 소장이 지휘하는 해군을 대파, 무기 다수를 노획한 공으로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특진했다. 그 뒤 보수적인 척화론자(斥和論者)로서 신임을 얻어 어영대장(御營大將)․금위대장(禁衛大將)․포도대장(捕盜大將) 등을 거쳐 1875년 형조 판서(刑曹判書), 1884년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양원(梁 榞): 1590(선조 23)~1650(효종 1) 자(字)는 군실(君實), 호(號)는 순수(順受)․임천(任天),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홍주(弘澍)의 아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변경에 유배, 1619년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등용되어 효릉 참봉(孝陵參奉)이 되고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거쳐 의령 현감(宜寧縣監)을 지내다가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의해 파면되자 관찰사(觀察使)․통제사(統制使)․절도사(節度使) 등이 모두 그의 억울함을 상소 한 결과 복직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양상기(梁相基): 1883(고종 20)~?. 전라도 광주(全羅道光州) 출신. 광주경찰서(光州警察署) 순사(巡査)로 근무하다가 1908년(융희 2) 약 80명의 동지를 규합, 광주를 근거로 의병을 일으켰다. 광주(光州)를 비롯하여 담양(潭陽)․창평(昌平)․동복(同福)․장성(長城) 등지에서 일본 기관을 파괴하고 친일파를 죽이는 등의 전과를 올리고, 이듬해 3월 담양군 정면(潭陽郡貞面)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하다가 많은 동지를 잃고 체포되었다.

양한규(梁漢奎): 1844(헌종 10)~? 아명(兒名)은 월서(月瑞), 자(字)는 문찬(文贊), 맹석(孟錫)의 아들. 1891년(고종 28) 부사과(副司果)를 지내고, 이듬해 초계 군수(草溪郡守) 겸 내금위 장(內禁衛將)이 되었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광무 10) 남원(南原)에서 영남․호남의 의병 1천여 명을 모아 각지의 진위대(鎭衛隊)를 기습하여 북으로 진격하다가 1907년 일본군에게 패전, 뒤에 체포되어 진도(珍島)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 나왔다.

양기하(梁基瑕): 1878(고종 15)~1932. 호(號)는 하산(荷山). 한말에 공주 군수(公州郡守)를 지내다가 한일 합방 후 만주로 망명, 1919년 대한독립단 교통부장(交通部長),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의 선전부장(宣傳部長)을 역임하고 이듬해 광복군참리부(光復軍參理部) 정보국장(情報局長),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 교육위원장(敎育委員長) 등을 지냈다. 1922년 김 구(金 九) 등과 독립에 필요한 군인 양성과 전비 조성(戰費造成)을 목적으로 노병회(老兵會)를 발기했다. 1927년 임시정부 임명을 받아 참의부(參議府)의 교육위원장(敎育委員長), 1929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정치부 책임자가 되어 활동하다가 1932년 환인현(桓仁縣)에서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아 전사(戰死)히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양세봉(梁世奉): ?~1932. 호(號)는 벽해(碧海). 평북 철산(平北鐵山) 출신. 3․1 운동 후 최시흥(崔時興)이 이끄는 천마산대(天麻山隊)에 소속되어 행정기관의 파괴, 일본의 밀정 암살, 일본인 사살등 항일운동을 했다. 1920년 일본 경찰의 습격을 피하여 천마산대를 따라 남만주로 망명, 육군 주만 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중대장이 되고, 1923년 제 3중대장을 역임하다가 조선혁명당군(朝鮮革命黨軍)의 총사령(總司令)에 취임했다. 뒤에 중국 의용군총사령(中國義勇軍總司令) 이춘윤(李春潤)과 함께 한중 연합군(韓中聯合軍)을 조직, 1932년 흥경(興京) 영릉가(永陵街)에서 일만 연합군(日滿聯合軍)을 격파, 흥경현성(興京縣城)을 함락했다. 이해 다시 영릉가(永陵街)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왕청문(汪淸門)으로 퇴각, 재기를 도모하던 중 일본 첩자(諜者)의 유인으로 통화 현두도구(通化縣頭道溝)에서 일본군(日本軍)에 포위되어 독립군 전원과 함께 순국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