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탐진안씨시조(耽津安氏),안원린(安元璘),탐진안씨조상인물,강진안씨

작성일 : 2017-04-21 21:07 수정일 : 2018-02-22 21:58

시조(始祖)의 유래 (由來)

탐진안씨(耽津安氏)는 순흥 안씨(順興安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진 문숙공(文淑公) 목(牧)의 넷째 아들 안원린(安元璘)을 시조(始祖)로 한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를 역임하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탐진군(耽津君)에 봉해져 서 후손들이 순흥 안씨에서 분적하여 탐진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고 한다.


본관(本貫)의 유래 (由來)

탐진(耽津)은 전라남도(全羅南道) 강진군(康津郡)에 속해 있던 옛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동음현(冬音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탐진현(耽津縣)으로 고치고 고려 때 영암(靈岩)․장흥(長興) 등으로 이속 되었다가 1417년(태종 17) 도강현(道康縣)과 합하여 강진으로 고쳤으며, 1895년(고종 32) 강진군(康津郡)이 되었다.


씨족사(氏族史) 개요(槪要)

탐진안씨 시조 원린의 아들 우(祐)가 공민왕(恭愍王) 때 군부판서(軍簿判書)와 상호군(上護軍)․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등을 거쳐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전공(戰功)을 세워 무명(武名)을 떨쳤고, 찬성(贊成) 사종(士宗)의 아들 지(止)는 조선 태종(太宗) 때 명신(名臣)으로 유명했다.

특히 지는 시문(詩文)에 능하고 해서(楷書)에 일가(一家)를 이루어 당대의 명필로 명망이 높았고, 세종(世宗) 때는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왕에게 바쳤으며, 태종(太宗)을 위하여 <금자법화경(金子法華經)>을 썼다. 벼슬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던 그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문교(文交)를 거절했던 일화로 유명했고, 세조(世祖)가 그의 학문을 중하게 여겼으나 민 수(閔수)의 사옥(史獄)에 그가 제조(提調)로 있었기 때문에 연루되어 강진현(康津縣)에 좌천되었다. 세조(世祖)는 그 곳의 감사(監司)에게 글을 내리기를 “진상하는 음식물을 봉한 나머지는 지(止)에게 주고 답례하는 글을 받아서 아뢰어라.”고 하였다.

성종(成宗) 때 일이다. 어느 날 신숙주(申叔舟)와 한명회(韓明澮)를 비롯한 제신(諸臣)들이 조회에 늦게 나와 조반(朝班)에 참석하지 못하고는 왕에게 사죄를 드리기를 “마침 옛 벗이 먼 곳에서 왔으므로 찾아가서 함께 이야기 하다가 늦게 되는 줄 몰랐사오니 죽을 죄 입니다.”하였다. 성종이 “그 이가 누구인가”하고 문자 그들은 대답하기를 “안 지(安 止)입니다”하였다. 성종이 기뻐하면서 “나 역시 그를 보고자 하니 빨리 불러 오라.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리라”하고 종일토록 즐겼다고 소문쇄록에 기록되어 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웠던 안우(安遇)는 학행(學行)으로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에 천거되어 현감(縣監)을 지냈고 효행(孝行)을 떨쳤으며, 찰방(察訪) 기(沂)의 아들 극가(克家)는 정 구(鄭 逑)에게 글을 배우고 삼가 현감(三嘉縣監)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낙동강 변에 정자(亭子)를 짓고 호호정(浩浩亭)이라 이름하고는 학문을 닦으며 풍월을 즐겼다.

그 밖의 인물로는 군자감(軍資監) 정(正)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 휘하로 들어가 유곡(柳谷) 싸움에서 공(功)을 세웠던 기종(起宗)과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낸 용(慵)이 유명했으며, 효제(孝濟)는 한말(韓末)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여 독립운동가로 이름난 희제(熙濟)․창제(昌濟)와 함께 탐진 안씨의 의맥(義脈)을 살렸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탐진안씨(耽津安氏)는 전국에 10,513명이 강진안씨는 15,58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탐진안씨조상인물

안우(安 祐): ?~1362(공민왕 11)

1352년(공민왕 1) 군부 판서(軍部判書)․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 후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거쳐 1358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로서 안주 군민만호(安州軍民萬戶)가 되었다.

이듬해 홍건적이 침입하여 의주(義州)․정주(靜州)․인주(麟州) 등지가 함락되자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적을 대파하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 철주(鐵州)에 이르러 소수의 기병(騎兵)으로 분전하여 크게 적을 무찔렀다.

이어 적이 서경(西京)까지 진출하자 이를 공격, 용강(龍岡)․함종(咸從) 방면으로 물리치고 다시 적을 추격, 2만여 명을 무찌르고 적장 심 랄(沈 剌)․황지선(黃志善)을 사로잡았고 증산(甑山) 방면으로 도망치는 남은 적을 이방실․김득배(金得培) 등과 계속 추격하여 이를 섬멸했다. 이어 각지의 패잔병을 소탕하고 돌아와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에 추충절의정난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이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다시 20만의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김득배․이방실 등과 박주(博州)․개천(价川)등지에서 적을 대파하고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이듬해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하에 이방실․김득배․이성계(李成桂)․최 영(崔 瑩)․한방신(韓芳信)․황 상(黃 裳)․안우경(安遇慶)․이여경(李餘慶)․이귀수(李龜壽) 등 여러 장수와 함께 20만 대군으로 개경(開京) 탈환전에 참전, 적을 섬멸했다.

원래부터 정세운을 시기하던 재상 김 용(金 鏞)의 계략에 빠져 정세운을 죽였으나, 일이 탄로될 것을 두려워한 김용에게 살해당했다.

안예(安 禮): 고려(高麗) 때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안복(安 福):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지냈다.

안현(安 顯): 조선조(朝鮮朝)에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안윤기(安允基): 조선(朝鮮)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안사종(安士宗): 조선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안기(安 起): 조선(朝鮮)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안지(安 止): 1377(우왕 3)~1464(세조 10) 자(字)는 자행(子行), 호(號)는 고은(皐隱),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찬성(贊成) 사종(士宗)의 아들.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가 되고 141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20년(세종 2) 수찬(修撰), 1441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정인지(鄭麟趾)와 함께「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바쳤다. 1446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이조 참판(吏曹參判)․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거쳐 1449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내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시에 능했고 해서(楷書)를 잘 써서 세종(世宗)의 명으로 태종(太宗)을 위해 「금자법화경(金子法華經)」을 썼다.

안우(安 遇): 자(字)는 시숙(時叔), 호(號)는 노계(蘆溪).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518년(중종 13) 유일(遺逸)로 천거를 받아 전생서(典牲暑) 주부(主簿)가 되고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효행(孝行)으로 이름이 높았다. 초계(草溪)의 송원서원(松原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안극가(安克家): 1547(명종 2)~1614(광해군 6) 자(字)는 의지(宜之), 호(號)는 뇌석(磊石), 찰방(察訪) 기(沂)의 아들. 이 정(李 楨)의 문인. 1591년(선조 2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정 구(鄭 逑)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을 거쳐 삼가 현감(三嘉縣監)이 되었으나 곧 사임, 낙동강(洛東江)변에 정자 호호정(浩浩亭)을 지어 학문을 닦으며 풍월을 즐겼다. 초계(草溪)의 송원서원(松原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안기종(安起宗): 1556(명종 11)~? 자(字)는 응회(應會), 호(號)는 지헌(止軒).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군자감 정(軍資監正) 등을 역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유곡(柳谷) 싸움에 공을 세웠다.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안의(安 義): 자(字)는 의숙(宜叔). 호(號)는 물재(勿齋), 병조 판서(兵曹判書) 사종(士宗)의 후손. 이 항(李 恒)의 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혼홍록(孫弘祿)과 함께 의곡 계운 장(義穀繼運將)이 되어 곡식과 면포(綿布)를 행재소(行在所)에 수송했다. 이어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오희길(吳希吉), 류 인(柳 認)과 함께 어용(御容)과 실록(實錄)을 정읍 내장산(井邑內藏山)에 봉안했으며, 후에 별제(別提)가 되었다. 태인(泰仁)의 남천사(藍川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안찬(安 鑽): 1829(순조 29)~1888(고종 25) 자(字)는 경안(景顔), 호(號)는 치사(痴史), 신로(莘老)의 아들. 1867년(고종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은 하지 않았다. 시문(詩文)에 능했다.

안여지(安汝止): 조선(朝鮮) 때 교리(校理)를 지냈다.

안용(安 慵): 자(字)는 인수(仁秀). 조선조(朝鮮朝)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안경효(安景孝): 자(字)는 원여(元汝). 조선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안효제(安孝濟): 자(字)는 순중(舜仲), 호(號)는 수파(守坡). 한말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안희제(安熙濟): 호(號)는 백산(白山). 한말에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활약하였다.

안창제(安昌濟): 호(號)는 송은(松隱). 한말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일본에 항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