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신죽산안씨시조(新竹山安氏),안원형(安元衡),신죽산안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1 21:05 수정일 : 2018-04-19 11:12

시조(始祖)의 유래(由來)

신죽산안씨(新竹山安氏)는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의 17세손이며 순흥 안씨(順興安氏)의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의 7세손인 안원형(安元衡)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진 목(牧)의 셋째 아들로, 1341년(충혜왕 복위 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후 벽상삼한삼중대광보국(壁上三韓三重大匡輔國)에 올라,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역임하면서 나라에 공(功)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策錄)되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순흥 안씨에서 분적(分籍)하여 죽산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관향(貫鄕)의 유래(由來)

죽산(竹山)은 경기도(京畿道) 용인군(龍仁郡)과 안성군(安城郡) 일부에 속해 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이었는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에 죽주(竹州)로 고쳤다가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음평(陰平) 또는 연창(延昌)이라 하였으며 현종(顯宗) 때는 광주(廣州)에 속하였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 죽산(竹山)으로 개칭,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한 후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었다가 1913년 일부는 용인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안성군에 폐합(廢合)되었다.


씨족사(氏族史) 개요(槪要)

신죽산안씨의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 안원형(安元衡)의 아들 면(勉)이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과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대승상(大丞相)에 올라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노생(魯生)과 정생(廷生)이 관찰사(觀察使)와 직제학(直提學)을 각각 역임하여 가통(家統)을 지켰다.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 와서는 문과 급제하여 검열(檢閱)과 충청 감사(忠淸監司)를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한 철손(哲孫)과 단종(端宗) 때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지낸 신손(信孫)이 유명했었다. 추조(追祖)는 군수(郡守)를 역임하여 참의(參議)를 지낸 승(勝), 형조 좌랑(刑曹佐郞) 구(矩), 감찰 양보(良輔) 등과 함께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중종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충달(忠達)은 창평 현감(昌平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여근(汝謹)은 명종 때 무과에 올라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를 지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군(倭軍)과 싸우다가 진주(晋州)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수륜(秀崙)의 아들 축(舳)은 병조와 호조의 좌랑(佐郞), 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거쳐 영광 군수(靈光郡守)를 지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파직되었다가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다시 등용되어 춘추관(春秋館)의 편수관(編修官)을 지냈으며, 감찰 양보(良輔)의 손자 연룡(연龍)은 태천 현감(泰川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현민(縣民)들이 그의 치적(治積)을 칭송하여 비(碑)를 세웠다.

그 외 정묘(丁卯)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방준(邦俊)이 공조 좌랑(工曹佐郞)과 지평(持平)을 거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고 성리학(性理學)에 밝아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효종(孝宗) 때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역임한 여지(汝止)는 숙종조(肅宗朝)에 현령(縣令)과 예조의 정랑(正郞)을 지낸 민유(敏儒), 찰방(察訪) 절(節)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규홍(圭洪)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광양(光陽)의 백운산(白雲山)을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옥사하여 신죽산 안씨의 의맥(義脈)을 이었다.


인 구

2000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신죽산 안씨(新竹山安氏)는 남한(南韓)에 총 2,407가구, 7,666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신죽산안씨조상인물

안면(安 勉): 호(號)는 쌍청당(雙淸堂),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등을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정당문학(政堂文學)․대승상(大丞相)에 오르고 흥령군(興寧君)에 봉하여졌다.

안노생(安魯生): 호(號)는 춘곡(春谷). 1391년(공양왕 2) 군자감(軍資監) 소윤(少尹)으로서 서북면 찰방별감(西北面察訪別監)이 되어 명나라와의 밀무역(密貿易) 자(者)를 처단(處斷), 국경지대의 기강(紀綱)을 바로잡았고, 문하사인(門下舍人)을 거쳐 이듬해 병조총랑(兵曹摠郞)으로 정몽주(鄭夢周)가 피살(被殺)되자 그 일파로 몰려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조선(朝鮮) 개국 후 다시 등용되어 태종(太宗) 때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좌사간(左司諫)을 지내고 예조 참의(禮曹參議)로서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1408년(태종 8) 귀국했고,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개성유후사 부유후(開城留後司副留後)로 경기도 도관찰사(都觀察使)를 겸직, 1410년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가 되었다.

안정생(安挺生): 조선(朝鮮) 때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안복초(安復初): 조선조(朝鮮朝)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안복지(安復志): 조선조(朝鮮朝)에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안복언(安復言): 조선조(朝鮮朝)에 감사(監司)를 역임하였다.

안갑겸(安甲謙): 조선(朝鮮) 때 소윤(少尹)을 지냈다.

안을겸(安乙謙):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안철손(安哲孫): 1441년(세종 23) 문과에 급제한 후 검열(檢閱)․충청 감사(忠淸監司) 등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안신손(安信孫): 1453년(단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한 후 예문관 시교(藝文館侍敎) 겸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이르렀다.

안추조(安追祖):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안승(安 勝): 자(字)는 백언(伯彦), 시호(諡號)는 탁경(卓景). 조선(朝鮮)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안극흠(安克欽): 자(字)는 국현(國玄). 조선 때 감사(監司)를 역임하였다.

안도(安 道):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안극종(安克終): 자(字)는 승부(承父).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안극장(安克長): 조선(朝鮮) 때 병마 우후(兵馬虞候)를 역임하였다.

안구(安 矩): 조선에서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냈다.

안국상(安國相): 자(字)는 방보(邦寶). 조선에서 이름난 학자(學者)였다.

안기(安 琦): 조선(朝鮮) 때 만호(萬戶)를 역임하였다.

안양보(安良輔):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안희(安 禧): 자(字)는 태형(泰亨), 호(號)는 퇴은(退隱). 조선조(朝鮮朝)에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안수잠(安守岑): 자(字)는 사위(思危). 조선조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안수금(安秀嶔): 자(字)는 탄지(坦之).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안수홍(安守洪): 자(字)는 대이(大而). 조선(朝鮮) 때 내금위 장(內禁衛將)을 지냈다.

안충달(安忠達): 자(字)는 효언(孝彦), 호(號)는 하곡(荷谷). 1534년(중종 2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창평 현감(昌平縣監)에 이르렀다.

안여근(安汝謹): 자(字)는 옹윤(雍允), 호(號)는 외리정(外里亭). 1561년(명종 16) 무과에 급제한 후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에 올랐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병(倭兵)에 대항하다가 진주(晋州) 싸움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이로 인해 선무원종1등공신(宣武原從1等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안여지(安汝止): 자(字)는 자정(子定). 조선시대에 부정(副正)을 지냈다.

안효남(安孝男): 자(字)는 이숙(而淑).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안축(安 舳): 자(字)는 해빈(海濱), 호(號)는 둔암(鈍庵). 1542년(중종 3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병조․호조 좌랑(兵曹․戶曹佐郞) 및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등을 거쳐 영광 군수를 역임하였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화(禍)를 당하여 파직되었으나 다시 관직이 회복되어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거쳐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이르렀다.

안언룡(安彦龍): 자(字)는 운경(雲卿). 1525년(중종 20) 문과에 급제한 뒤에 태천 현감(泰川縣監)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푸니 현민(縣民)들이 비(碑)를 세워 그의 치적(治績)을 칭송하였다.

안경귀(安敬龜): 자(字)는 몽징(夢徵), 호(號)는 겸헌(謙軒). 조선(朝鮮)때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역임했다.

안응조(安應釣): 자(字)는 여량(汝亮). 1556년(명종 11) 중시문과(重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장연 부사(長淵府使)에 이르렀다.

안방준(安邦俊): 1573(선조 6)~1654(효종 5) 자(字)는 사언(士彦), 호(號)는 은봉(隱峰)․우산(牛山), 시호는 문강(文康),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중관(重寬)의 아들. 중돈(重敦)에게 입양(入養). 보성(寶城) 출신. 박광전(朴光前)․박종정(朴宗挺)에게서 수학(修學)하다가 1591년(선조 24) 판산(坡山)에 가서 성 혼(成渾)의 문인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광해군(光海君) 때 이이첨(李爾瞻)이 그 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했으나 거절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보성(寶城) 북쪽 우산(牛山)에 들어가 후진을 교육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교유(交遊)가 깊던 공신(功臣) 김 유(金 瑬)에게 글을 보내 당쟁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여 공사(公私)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을 건의했다. 이듬해 동몽 교관(童蒙敎官)․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학문에 전심하면서 정묘호란(丁卯胡亂)․병자호란(丙子胡亂)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켰다. 효종(孝宗) 초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거절, 후에 지평(持平)․장령(掌令)․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정몽주(鄭夢周)․조 헌(趙 憲)을 가장 숭배, 이들의 호를 한 자씩 빌어 자기의 호를 은봉이라 했다. 이조(吏曹) 판서(判書)에 추증(追贈), 보성의 대계서원(大溪書院), 동복(同福)의 도원서원(道源書院), 능주(綾州)의 도산사(道山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안구(安 構): 자(字)는 여긍(汝肯), 호(號)는 한탄(寒灘). 조선(朝鮮) 때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안여지(安汝止): 자(字)는 경부(景夫). 1654년(효종 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역임하였다.

안여기(安汝器): 자(字)는 대재(大哉). 1669년(현종 10) 문과에 급제한 후 직강(直講)을 지냈다.

안치택(安致宅): 1739년(영조 1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후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여러 벼슬을 지냈다.

안준유(安俊儒): 자(字)는 사호(士豪). 1687년(숙종 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현령(縣令)을 역임하였다.

안민유(安敏儒): 자(字)는 여행(汝行). 1692년(숙종 18)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현령(縣令),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안절(安 節): 자(字)는 형보(亨甫). 1696년(숙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한 뒤에 전적(典籍)․찰방(察訪) 등을 지냈다.

안장환(安璋煥): 자(字)는 주한(周翰). 1875년(고종 12) 성균 진사(成均進士)가 되었으며 학행(學行)이 탁월하였다.

안규홍(安圭洪): 1879(고종 16)~1909(융희 3) 보성(寶城) 출신. 1908년 신남일(申南一)과 함께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여명을 인솔하고 일본군 수비대 및 기병과 교전하여 적 5명을 사살, 이듬해 다시 일진회원(一進會員)을 죽이고, 의병 278 명으로 순천(順天)을 습격했다. 부하 3백 명으로 광양군(光陽郡)의 백운산(白雲山)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다가 보성에서 체포되어 광주(光州)․대구(大邱)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고 옥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