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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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21 17:35 수정일 : 2018-01-03 09:37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청송심씨(靑松沈氏)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를 청송심씨시조(始祖)로 받들고, 그의 증손 덕부(德符)가 우왕(禑王)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러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가 청성충의백(靑城忠義伯)에 진봉되어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청송(靑松)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중부 동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청기현(靑己縣)인데 신라(新羅) 때 적선(積善)으로 고쳐서 야성군(野城郡 : 현 영덕군)에 속했다가 고려(高麗) 초에 부이현(鳧伊縣)이 되고 운봉(雲鳳)으로 개칭하여 예주(禮州 : 영해)에 속했다.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 진보현(眞寶縣)에 합하였고 1419(세조 원년)에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 후에 진보와 분리되고 송생현(松生縣)과 합하여 청송(靑松)으로 개칭하였으며, ()로 승격하고 1895(고종 32) ()이 되었다.

덕부(德符)는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使)와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정종 즉위년에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원부(元符)는 고려 말에 여러 관직을 거쳐 전리판사(典理判事)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王朝)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후손들도 그의 유훈을 받들어 <선훈불사(先訓不仕)>라 하여 대대로 벼슬을 멀리 하였다.

일찍이 조선 개국(開國)을 시작으로 명문벌족(名門伐族)의 지위를 굳혀온 청송 심씨는 덕부의 아들 7형제 대()에서 가세(家勢)가 크게 융성하여가장 화려한 인맥(人脈)을 이루었다.

세종(世宗)의 장인이면서도 상왕(上王)인 태종(太宗)의 비위에 거슬려 끝내 왕명(王命)으로 죽음을 당했던 온()은 청성군 덕부의 다섯째 아들이다.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 병권(兵權)만을 장악하고 있었다. 온의 막내 아우인 청(氵正)이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를 상왕이 쥐고 흔드는 것을 부당하다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박 습(朴 習)에게 불평한 것이 상왕의 위에 들어가 옥사가 일어났다.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박 은(朴 訔 : 당시 좌의정)심 온에게 인심이 쏠린다고 고변하여, 영의정(領議政)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피체되어 한양에 압송된 후 수원에서 사사되었다.

죽음에 임하여 온은 내 자손들은 대대로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그후 심씨는 대대로 그 유언을 지켜 박씨와 혼인을 논하지 않다가 온의 현손(玄孫) (: 부사맹 의창의 아들)와 융(: 경력 의겸의 아들)이 박씨와 혼인했는데 후손에 아들이 없거나 자손이 융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온의 아우 종()이 태조의 부마로 청원군(靑原君)에 봉해졌고, 온의 둘째 아들 회()는 세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여 부자 영상의 영예를 누렸다.

회의 아들 3형제 중 막내 원(: 내자시 판관을 역임)의 아들 순문(順門)은 장령(掌令)으로 연산군의 어의에 대하여 크기를 논한 것이 화근이 되어 갑자사화 때 개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참형을 당했다.

「정암연주(靜庵筵奏)」에 의하면 그는 임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는 죄목으로 화를 입었다고 하며, 그의 죄업은 죽음을 두고 대간들이 무척 논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일설(一說)에는 순문(順門)이 무척 사랑했던 기생을 연산군이 강탈해 간 일이 있었는데 이같은 관계를 둔 연적(戀敵)에 의한 대립감정이라고 한다. 또 그의 할아버지 회()가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尹氏)에게 사약을 내릴 때 영의정이었다는 연유로 관작이 추탈되고 부관참시 되었으며, 그에 연좌되어 죽음을 당했다고도 한다.

순문의 아들로 명종(明宗) 때 영의정에 올라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진봉되었던 연원(連源)은 아버지 순문이 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형을 당했으므로 일생동안 그 앞을 지나다니지 않았다고 하며, 항상 왕실의 외적됨을 경계하여 그의 손자 이름들을모두 겸() 자 돌림으로 지었다고 한다.

영원의 아우 봉원(逢源)은 명종 때 사예(司蘂)를 지내고 동지돈령부사(同知敦零府事)에 이르렀으며, 그림․글씨․음률․의술에 능통하여 시문(詩文)에도 조예가 깊었다.

심기안정법(心氣安定法)을 터득하여 태화산(太華山) 기슭에서 집을 짓고 살며 자호(自號)를 효창노인(曉窓老人)으로 하여 하얀 수염을 날리며 산수(山水) 틈에서 여생을 살았는데, 옷은 반드시 무게를 달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지어 입었으며 밥도 숟갈을 세어서 먹었고, 씹는 것도 그 속도나 회수가 저애져 있다고 하며 동작도 휴식도 조절하였고 마음쓰는 것도 그 심도의 분량을 근량으로 재는듯 하였다.

막내 아우인 통원(通源)은 명종(明宗) 때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과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연원의 아들 강()이 명종비(明宗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버지로 활인서 별좌(活人署別坐)를 거쳐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돈령부사(領敦零府使)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권귀 속에서도 가풍을 지켜 신진사류로서 화를 당하려던 박 순(朴 淳) 등을 아들 의겸(義謙)과 함께 구하고 권신 이 양(李 樑)을 제거하여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의 아들 의겸은 서인의 거두로서 선조 때 좌부승지(左副承旨)와 대사간(大司諫)․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낸는 동안사림의 명망이 높았으며, 아우 충겸(忠謙)은 임진왜란 때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청림군(靑林君)에 추봉되었다.

한편 중겸의 아들 열()은 인조 때 경제에 능한 정치가로 명망이 높았으며 좌․우의정과 영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에 이르렀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동지돈령부사 봉원의 손자 희수(喜壽)는 선조 말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좌․우찬성(左․右贊成)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한 후 권신 이이첨의 전횡이 심해지자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右議政)에 전임되어, 1614(광해군 6) 영창대군의 신원을 상소했다가 사형을 당하게 된 정 온(鄭 薀)을 구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특히 그는 상신의 벼슬을 지내면서도 허물어져 가는 집 안 채밖에 없어서 임금이 대궐의 말 한 마리를 보내어 팔아서 집을 고치라고 시켰을 만큼 가난하게 살았으며, 만년에 둔지산(屯之山)에 들어가 시로써 여생을 보냈다.

부사(府使) 종심(宗沈)의 손자이자 설()의 아들로 효종조(孝宗朝)의 영상이던 지원(之源)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아들 익현(益顯)과 함께 필명(筆名)을 떨쳤으며, 지원의 중손 사정(師正)이 산수화(山水畵)에 새로운 화풍을 이루어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저명했다.

영조 때 영의정으로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 달력을 만드는 신법을 연구해 오게 했던 수현(壽賢 : 응교 유의 아들)의 아들 육(: 찬선을 지냄)은 효자로 이름을 떨쳤다.

선조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했던 달원(達源)의 손자 우승(友勝)은 호조 참판에 올라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사의 행패를 다스리다가 무고를 당했고, 그후 한성부 우윤을 거쳐 사후(死後)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흥원(興遠)의 손자 우신(友信)은 임진왜란 때 가재를 팔아 수천명의 의병을 일으켜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진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순절하여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으로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졌던 기원(器遠)이 좌의정을 역임하여, 정조 때 좌의정에 오른 환지(煥之 : 교리 태현의 손자. 진의 아들)와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예조 참판 염조(念祖)의 아들 상규(象奎)는 순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당시의 제 1인자로 손꼽혔다.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용맹을 떨쳤던 우정(友正)의 아들 현(言見)이 인조 때 여러 군현(郡縣)의 수령(守令)을 지내고 돈령부 도정(敦零府都正)에 이르러 병자호란 이 일어나자 종사(宗社)를 따라 강화(江華)에 피난가서 청병(淸兵)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묘(家廟)의 위패(位牌)를 땅에 묻은 후 국난의 비운을 통탕하는 유소(遺疎)를 쓰고 부부가 함께 자결했다.

역사상 이들 부부처럼 태연하고 절도있는 죽음은 없었다고 하는데, 그때 부부의 나이가 70세였다. 조카 심동구(沈東龜)가 배를 대놓고 피난할 것을 발을 구르며 재촉하고 있는데 현은 애써 돌려보내고 조복을 입은 다음 동향사백을 하고 임금에게 올리는 유소를 지었다.

<() (言見)은 동향사배하고 남한산성에 계신 주상전하에게 올리옵나이다>로 시작된 이 글의 내용은 임금에 대한 보은의 죽음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그 유소를 외손자 박장원(朴長遠)에게 주어 배를 태워 보낸 다음 부인 송씨를 돌아보며 ()은 백년을 같이하고 의()는 한번 죽음을 같이하니 내가 충신(忠臣)이 되고 그대는 충신의 아내가 되지 않겠는가하며 함께 죽을 것을 권유하자, 송씨는 종용당고사(從容堂故事 : 죽음이 주는 생리적 고통이나 정신적 갈등을 무화시킨다는 뜻)을 본받겠나이다하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서로 마주보며 갑시다하고는 목을 매었는데, 서로의 어깨를 짚고 편안히 운명에 종용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고 한다.

구한말에 와서는 철종 때 한성부 판윤과 대사헌(大司憲)․예조 판서 등을 지낸 경택(敬澤), 형조 판서 의면(宜冕), 공조 판서를 거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의원(宜元), 고종 때 영의정에 올라 청․일 강대국 사이에 끼인 한국의 갖가지 어려운 정치적 고비를 겪었던 순택(舜澤), 예조 판서 이택(履澤),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상학(相學)이 유명했으며, 상훈(相熏)은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와 이조 판서를 거쳐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을 역임하여, 농촌문학의 선구자인 훈(: 본명 대섭, 상록수 저자)과 함께 명문 청송 심씨를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송심씨(靑松沈氏)는 남한(南韓)240,7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송심씨조상인물

심연(沈 淵): 시조 홍부(洪孚)의 큰아들로 고려조(高麗朝)에서 궁중의 조례(朝禮)와 의식(儀式)을 관장하는 합문((閤門)의 지후(閤門祗侯)를 지내고 산청현감(山淸縣監)을 역임하였으며 퇴임후에는 산청땅 석답촌(石踏村) 자연동(紫烟洞)에서 여생을 보내며 안분음(安分吟)이라는 시()를 남겼다. 산소는 1377(우왕 3) 산청에서 익산시 함열읍 남당산(南堂山)으로 천장하였다. 임진왜란 후 실전하였다가 1715(숙종 41) 다시 찾아 비석과 상석을 세웠으나 상̦̇̇·(·) ()이 고·(·)간 불명(不明)이다.

심성(沈 晟): 시조 홍부(洪孚)의 작은아들로 고려조(高麗朝)에서 봉익대부(奉翊大夫)를 지냈으나 행적과 묘소등은 모두 실전되었고, 후손들은 철원(鐵原)과 함경도 단천(端川)지방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1993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에 봉익공(奉翊公)과 그 후손 다섯 분의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제향을 받들고 있다.

심용(沈 龍): 합문지후공 심 연(沈 淵)의 아들로 고려조(高麗朝)에서 전리정랑(典理正郞)을 지냈으며 아들 청성백(諱 德符)의 귀()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증직되고 조선조에 들어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묘소는 안성시 당왕동에 있으며 16세기 중엽 명종(明宗)때에 그 자손이 대진(代盡)하여 위패를 묻고 궐사(闕祀) 하였으나, 명종왕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가 명하여 봉사(奉祀)할 수 있도록 부조묘(不祧廟)를 하사하였다. 임진왜란 후 일시 실전하였다가 1608(선조 41) 다시 찾아 묘갈과 상석을 개수(改竪)하였다.

심덕부(沈德符) 1328 (충숙왕 15) 1401 (태종 1)

()는 득지(得之), ()는 노당(蘆堂) 허강(虛江), 시호(諡號)는 정안(定安)이며 정랑(正郞) ()의 아들. 충혜왕(忠惠王) 말 음보(蔭補)로 좌우위참군(左右衛參軍)에 올라 소부윤(小府尹)을 거쳐 공민왕 때에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를 지냈다. 1375(우왕 1) 예의판서(禮儀判書)로 강계도만호(江界都萬戶)를 겸직했고 밀직부사(密直府使) 의주부원수(義州副元帥)를 거쳐 1377년 서해도부원수(西海道副元帥)를 역임, 이듬해 밀직사(密直使)에 올라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올라 여러 차례 왜구(倭寇) 방어에 공을 세웠다. 1385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다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가 되어 1388년 요동정 벌에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출정, 위화도 회군 후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고,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경기좌우도도통사(京畿左右道都統使)에 올랐다. 이듬해 무고를 받아 한때 토산현(兎山縣 : 황해도 금천)에 유배, 그 후 좌시중(左侍中)으로 왕자 석()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어 문하시중(門下侍中) 판도평의사사사(判都評議使司事)가 되고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에 봉해졌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고 1397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이듬해 영삼사사(領三司事) 1399(정종 1) 좌정승(左政丞)에 올라 이듬해 사직했다.

심원부(沈元符) ()는 악은(岳隱).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수직랑(修職郎)을 비롯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장성(長城)의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다.

심지백(沈之伯) 고려조의 문신으로 사재시 부령(司宰寺副令)을 역임하였다. 1392(태조 즉위) 조선개국원종공신으로 책록되고 봉렬대부(奉列大夫)에 올라 사재시 소감(司宰寺少監)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제수되었다. 하사(下賜)된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은 대한민국 국보 제69호로 지정(指定)되었다.

심인봉(沈仁鳳)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장자로 여말(麗末)에 출사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두루 관직을 거쳤으며 1408(태종 8)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동북면진무(東北面鎭撫)에 임명되어 난()을 평정하였다. 이어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전임되었으나 관찰사 윤사수(尹思修)의 모함을 받아 면직되었다가 다시 동북면도절제사(東北面都節制使)에 등용되었고 세종 즉위년에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에) 제수되었다. 무술옥사(戊戌獄事)가 일어나 아우 온()과 정( )이 피화(被禍)를 당할 때 연좌되어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가 1420(세종 2) 본인의 원에 의해 청주로 옮겨 여생을 보냈다.

심의구(沈義龜) ()는 낙서(洛瑞) 호는 송파(松坡),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둘째 아들. 태종 때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를 역임하였다. ()하는 말에 공()이 어렸을 때 태종대왕(太宗大王)과 함께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선생을 스승으로 동문수학(同門修學)하였다고 하며 말년에는 여생을 지평현(砥平縣, 지금의 楊平)에서 보냈다.

심계년(沈繼年) ()는 서일(瑞日) 호는 둔재(遁齋),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셋째 아들. 138417세 때 무관으로 투신하여 중랑장(中郞將)에 승차하고 지성주사(知成州事)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하자 안성(安城) 실왕사(實旺寺)에 둔거하였으나 무술옥사(戊戌獄事)에 연좌되어 용진(湧珍)으로 유배되었다. 1420(세종 2) 대사면령에 의거 중도부처하라는 명에 따라 가족이 있는 진원현(珍原縣, 전남 장성)에서 가까운 용진산湧珍山)을 부처지로 하였고 1422(세종 4) 신원(伸寃)이 되자 다시 안성 실왕사로 왔으며 1434년 별세하였다.

심징(沈 澄) ? 1434 (세종 16)

()는 청옥(淸玉),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넷째 아들.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1392년 음보(蔭補)로 군위(軍衛)에 출사하여 호군(護軍)을 거쳐 대장군(大將軍)에 승진되었다. 태종(太宗)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인수부(仁壽府)를 설치하여 징()을 부윤(府尹)으로 발령하였다. 무술옥사(戊戌獄事)에 연좌되어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었다가 1420년 대사령(大赦令)에 따라 여산(礪山)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된 후 1422년 신원(伸寃)되었으며 그 곳에서 우거(寓居)하다 1432(세종 14) 별세하였다.

심온(沈 溫) 1375 (우왕 1) 1418 (세종 즉위)

()는 중옥(仲玉) 시호(諡號)는 안효(安孝),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다섯째 아들. 고려말 12(우왕 12)에 진사(進士)가 되고, 1392년 조선 개국 후 병조(兵曹) 공조(工曹)의 의랑(議郞)을 거쳐 정종 때 대호군(大護軍), 1404(태종 4) 상호군(上護軍) 겸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로 승진, 1407년 좌부대언(左副代言)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를 역임했다. 태종 8년 세종(世宗)이 잠저에 있을 때 장녀(長女 : 昭憲王后)가 충녕군(忠寧君)의 배위로 간택되었고 1411년 풍해도관찰사(豊海道觀察使) 대사헌(大司憲), 1414년 형조판서(刑曹判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를 역임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다. 1418년 태종의 선위로 세종이 즉위하자 국구(國舅)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에 봉군되고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 불경사건(不敬事件 : 戊戌獄事)이 발생하였다. 아우 도총제 정( )이 병조참판 강상인과 만났을 때 내금위(內禁衛)에 군사의 결원(缺員)이 심하여 시위(侍衛)가 허소(虛疎)하다고 한 말이 빌미가 되어 상왕(上王)께 무고(誣告)하고 국문(鞠問)하니 심 정이 고문에 못 이겨 형을 끌어들여 말하기를 ()의 형이 말하기를 군사는 마땅히 한 곳으로 귀결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박 은(朴 訔)이 끝까지 모함(謀陷)하고 주청(奏請)하여 병조판서 박 습(朴 習) 참판 강상인(姜尙仁) 동지총제 심 정()을 주살하고 심 온(沈 溫)을 그 수괴로 몰아 명나라에서 귀국할 때 의주(義州)에서 피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수원에서 자진(自盡)하였다.. 그 뒤 1451(문종 1) 신원복작(伸寃復爵)되고 안효(安孝)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심종(沈 淙) 1378 (우왕 4) 1418 (태종 18)

()는 성옥(聲玉)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여섯째 아들. 태조 2년 경선궁주(慶善宮主)에 장가들어 청원군(靑原君)에 봉해졌고 1398(태조 7) 왕자의 난에 진압공훈(鎭壓功勳)으로 안사공신(安사功臣)에 녹훈되고 1408(태종 8)에 시위군절도사(侍衛軍節度使)를 역임하였으며 1416(태종 16) 회안군(懷安君) 방간(芳幹)과 비밀 사통(私通)하였다고 하여 청원군 직첩과 공신녹권을 거두고 폐서인하여 교하(交河)에 자원안치(自願安置)되었고 1418(태종 18) 항해도 토산현(兎山縣)에서 별세하였다. 슬하에 딸이 하나 있는데 덕수이씨(德水李氏)이다.

심호(沈 灝) () 는 호연(浩然) 도총제(都摠制) 인봉(仁鳳)의 아들. 평산부사(平山府使)를 역임하였다.

심구(沈 溝) 1394 (태조 3) 1493 (성종 24)

()는 위수(渭叟) ()는 면암정(面巖亭), 판사(判事) 의구(義龜)의 아들. 공조.예조.이조의 좌랑(吏曹佐郞)을 역임했으며 함창.홍산.홍천.태인등의 현감을 지냈다. 1448(세종 30)에 숙부 안효공(安孝公)의 피화를 항의 직언했다가 간신들의 미움을 받아 남방(南方)에서 5년간 귀양살이를 했으며 보성(寶城)땅으로 옮겨 살다가 사면(赦免)되었다. 단종이 손위(遜位)했다는 소식을 듣고 은둔하여 외출을 금하고 살았으며 세조가 세 차례나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고, 종제(從弟) 공숙공(恭肅.)이 조정에 나올 것을 강력히 권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임천거사(林泉居士)라 이름하고 세상을 멀리하고 살았으며 1493(성종 24) 마침내 100세를 일기로 별세하니 성종께서 애석하게 여기고 장례를 돕고 특별히 좌승지(左承旨)를 증직하니 이는 이례적인 은전(恩典)이었다.

심연(沈 涓) 1392 (태조 1) 1426 (세종 8)

()는 성철(成綴) ()는 애암(愛菴), 지성주사(知成州事) 계년(繼年)의 아들. 1414(태종 14)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1424(세종 6) 어사(御使)의 명을 받고 중앙관서 정사를 순찰하던 중 1425년 일이 생겨 사임하고 귀향하여 후진을 양성하다 졸하였다. 성종 7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고 1834(헌종 원년) 양계사(良溪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심석준(沈石雋) 시호(諡號)는 양혜(良惠), 인수부윤(仁壽府尹) ()의 아들. 음보로 출사하여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역임하였으며, 무술옥사에 연좌되어 낙안(樂安)으로 유배되었다가 1420년 중도부처(中途付處)되고 1422년 신원(伸寃) 복관(復官)되었다.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이 증직되었다.

심준(沈 濬) ? 1448 (세종30)

()는 심부(深夫) 영의정 온()의 장자. 소헌왕후의 동생으로 양주(,, 현재 왕십리)에서 태어났다. 무술옥사(戊戌獄事) 때에는 나이가 어려 귀양에서 제외되었다. 1451(문종 1) 아버지 온()이 사면복권 되었는데 이미 준()은 별세한 후이다. 증직이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이다.

심회(沈 澮) 1418 (태종 18) 1493 (성종 24)

()는 청보(淸甫) 시호(諡號)는 공숙(恭肅), 영의정(領議政) ()의 아들. 세종비(世宗妃)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우. 세종(世宗) 원년 아버지 온()이 태종에게 피화(被禍)되자 오랫동안 등용되지 못하다가 문종(文宗)이 즉위한 후 돈령부주부(敦寧府主簿)에 등용되었다. 이어서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공조판서(工曹判書)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형조판서(刑曹判書)등을 두루 거쳐 1466(세조 11)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에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使)가 되었다.

1468(세조 14) 남 이(南 怡)의 모반 사건이 처리된 후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청성군(靑城君)이 되었고 관제가 바뀌면서 다시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471(성종 2)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었다. 1474(성종5) 양모(養母) 천안전씨(天安全氏)가 죽자 관직을 사임하고 3년 시묘(侍墓)를 마쳤다. 1476년 좌의정(左議政)에 복직, 그 해 윤비(尹妃)의 왕비 책봉을 명나라에 고하는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1486년 나이를 핑계로 사직할 것을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1491(성종 22)에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윤비의 폐출(廢黜)에 동조했다는 죄로 연산군(燕山君)에 의해 관직이 추탈(追奪)되고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화를 당했으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신원복작(伸寃復爵)되었으며 묘소는 파주 영태리에 의리장(衣履.) 하였다. ()는 태어나면서 아버지 온()이 피화(被禍)됨에 경상도 선산(善山)으로 피신하여 주부 강거민(主簿 康居敏)과 천안전씨의 양자로 성장하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양모의 슬하에서 수학(修學)하였는데 천안전씨는 족고모(族故母)이다.

심결(沈 決) 1419 (세종 1) 1470 (성종 1)

()는 통지(通之) 시호(諡號)는 정이(靖夷), 영의정 온()의 아들.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 아버지가 무술옥사로 피화(被禍)됨에 따라 오랫동안 등용길이 막혔다가 1451(문종 1) 아버지 온()이 신원복작(伸寃復爵)되어 처음으로 돈령부주부(敦寧府主簿)로 출사하게 되었다. 이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공조판서(工曹判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두루 거쳐 1470(성종 1)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은 온()3자로 유복자이다. 이로 인해 임금이 특별히 생각하여 대궐안에서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숙부라고 불렀으며 또 한번은 집안에서 일이 생겼는데 사헌부에서 벌 줄 것을 주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다시 벌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명하여 사헌부의 관리를 의금부에 가두고 국문케 하였으니 숙부를 생각하는 임금의 마음이 그러 하였다.

심선(沈 璿) ? 1467 (세조 13)

()는 윤부(潤夫) ()는 망세정(忘世亭), 양혜공(良惠公) 석준(石雋)의 아들. 1435년 진사시에 장원하고 녹사(錄事)로 관직에 올라 내.외직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와 경기도관찰사(慶幾道觀察使)를 지내고 이듬해 중추원부사(中樞院府事)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했을 때는 관직을 버리고 풍양(豊壤)으로 내려가 정자를 지어 망세정(忘世亭)이라 하고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추증되고 장릉(莊陵)의 조사단(朝士壇)과 옥과(玉果)의 구암사(龜巖祠)에 배향되었다.

심미(沈 湄) ()는 해원(海源). 음보(蔭補)로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올랐다.

심한(沈 瀚) 1434 (세종 16) 1480 (성종 11)

()는 제옹(濟翁) 시호(諡號)는 이경(夷敬), 영의정(領議政) ()의 아들. 1454(단종 2) 문음(門蔭)으로 군위록사(軍衛錄事)로 출사하고 무과에 장원하였다. 1467(세조 12)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는데 참여하였고, 예종이 승하하자 성종(成宗)을 옹립하는데 기여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성종 5년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고 청천군(靑川君)에 봉군되었으며 이어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1480(성종 11) 어머니 병환을 보살피다 지쳐서 득병(得病)하여 졸하였으며 부조묘(不祧廟)에 배향되었다.

심안인(沈安仁) 1435(세종 17) 1488 (성종 19)

()는 성도(聖道) 망세정(忘世.) ()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고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와 승정원 우승지를 거쳐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헌하였다. 경원부사를 거쳐 전라우수사 경상우도 좌병사를 역임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재직 중 병영(兵營)에서 순직하였으며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심안의(沈安義) 1437(세종 19) 1476 (성종 7)

()는 정이(正履) 시호(諡號)는 안도(安悼), 망세정(忘世亭) ()의 아들. 세종의 둘째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결혼, 세종의 부마로서 청성위(靑城尉)에 봉해졌고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역임하였으며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심원(沈 湲) 1437 (세종 19) 1467 (세조 13)

()는 도원(道源) 영의정 회()의 아들. 음보(蔭補)로 내자시판관(內資寺判官)으로 재직 중 1467(세조13) 함길도에 점마별감(點馬別監)으로 출장 중 이시애의 난으로 관병과 함께 싸우다가 함흥에서 순절하였다.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에 책록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증직되었으며 뒤에 손() 연원(連源)의 귀()로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 추증되었다.

심빈(沈 濱) 1455 (단종 3) 1502 (연산군 8)

()는 기수(磯叟) 병마절도사 안인(安仁)의 아들. 1469년 진사시에 합격, 사헌부 감찰에 발탁되어 판관 형조정랑 군기시첨정을 역임하고 안성군수에 등용되었으나 임지에서 별세하였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심순도(沈順道) 1459 (세조 5) 1533 (중종 28)

()는 가행(可行) 판관(判官) ()의 아들. 1495(연산군 1)에 충훈부도사(忠勛府都事) 숙천부사(肅川府使)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역임하고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심순경(沈順徑) 1462 (세조 8) 1542 (중종 37)

()는 가준(可遵) 시호(諡號)는 호양(胡襄). 1492(성종 23)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내사복시(內司僕寺)의 벼슬을 지내고,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功臣)으로 연산군(燕山君)을 강화 교동도까지 압송하였으며 1506(중종 1)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에 책록되고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이르렀으며,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졌다.

심순문(沈順門) 1465 (세조 11) 1504 (연산군 10)

()는 경지(敬之) 영의정 회()의 손자. 1486(성종 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491년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으로 대신 윤필상(尹弼商)을 논핵한 죄로 한때 의금부(義禁府)에 투옥되었다. 1495(연산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발탁, 1499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이어 정언(正言) 부교리(副校理) 지평(持平)을 거쳐 1501년 사인(舍人)으로 재직 중 연산군의 어의(御衣) 크기에 대해 논한 것이 화근이 되어 개령현에 유배되었다가 참형되었다. 중종반정 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심광언(沈光彦) 1490 (성종 21) 1568 (선조 1)

()는 언지(彦之) ()는 둔암(鈍庵) 시호(諡號)는 호안(胡安), ()의 아들. 1519(중종 14) 생원․진사(生員․進士) 양시에 합격하고, 1525년 식년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正言) 전적(典籍)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1529년 장령(掌令)을 지내다가 김안로(金安老)에게 미움을 받아 수년간 벽지로 좌천되었다. 다시 창원부사(昌原府使), 1538년 파주목사(坡州牧使)가 되어 치적을 올려 표리(表裏)를 하사받고, 뒤에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559(명종 14)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심연원(沈連源) 1491 (성종 22) 1558 (명종 13)

()는 맹용(孟容) ()는 보암(保庵) 시호(諡號)는 충혜(忠惠), 영의정(領議政) ()의 증손 사인(舍人) 순문(順門)의 아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1516(중종 11) 생원(生員)이 되고, 152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검열(檢閱) 대교(待敎) 봉교(奉敎)를 역임하였다. 152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531년 검상(檢詳)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을 거쳐 진휼경차관(賑恤敬差官)에 뽑혀 기민(飢民)을 구제했고, 1533년 의주부사(義州府使)에 올랐다. 1537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2년 후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병조참의(兵曹參議) 대사간(大司諫)을 역임, 1541년 대사성(大司成) 이듬해 특진관(特進官) 형조참판(刑曹參判), 1543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다음해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1545(인종 1)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직, 이해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으로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진 후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547(명종 2) 좌참찬(左參贊) 예조판서(禮曹判書) 우찬성(右贊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좌찬성(左贊成)을 역임, 1548년 우의정이 되고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다음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1551년 영의정에 올랐다. 명종(明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심달원(沈達源) 1494 (성종 25) 1535 (중종 30)

()는 자용(子容) ()는 만창(晩窓). 1517(중종 1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역임하고, 1519(중종 14) 부수찬(副修撰)으로 숙직하던 중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당이라 하여 제1착으로 투옥된 후 유배되었다. 1522년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에 등용 중국어에 능통하여 1528년 명나라에 가는 성절사(聖節使)를 수행했다. 호군(護軍) 판교(判校)를 거쳐 좌통례(左通禮)에 이르렀다. 아들 전()의 귀()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손() 우승(友勝)이 공신이 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심봉원(沈逢源) 1497 (연산군 3) 1574 (선조 7)

()는 희용(希容) ()는 효창(曉窓), 순문(順門)의 아들 영의정(領議政) 연원(連源)의 아우. 1537(중종 3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성균관 권지학유(成均館權知學諭)로 사록(司錄)을 겸했다. 이듬해 탁영시에 발탁, 1550(명종 5) 사예(司藝)를 지내고, 뒤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에 제수되었다. 그림 음률 글씨 의술에 능했으며, ()에도 조예가 깊었다.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심통원(沈通源) 1499 (연산군 5) 1572 (선조 5)

()는 사용(士容) ()는 만취당(晩翠堂) 욱재(勗齋), 순문(順門)의 아들. 영의정(領議政) 연원(連源)의 아우, 1537(중종 3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급제한 후 1546(명종 1)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부응교(副應敎) 시강관(侍講官) 직제학(直提學) 병조참지(兵曹參知)를 지내고, 1548년 우승지(右承旨) 좌승지(左承旨)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했다. 1550년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이어 대사헌(大司憲) 형조참판(刑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치사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심의흠(沈義欽) ()는 흠지(欽之), 현감 광종(光宗)의 아들. 1513(중종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로 급제하고 전한(典翰)을 지냈다.

심영(沈 苓) 1513 (중종 8) 1547 (명종 2)

()는 천로(天老) ()는 우청(雨晴), 현감(縣監) 종원(宗元)의 아들. 1534(중종 29)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3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검열(檢閱) 설서(說書) 사서(司書)를 지내며 세자(仁宗)의 총애를 받았다. 1544년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정언(正言)에 올랐으나 이듬해 인종이 죽고 명종(明宗)이 즉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자 이를 반대하여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로 좌천되었다가 윤원형(尹元衡)의 소윤(小尹) 일파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대윤(大尹)을 제거할 때 벽동(碧潼)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투옥된 뒤 옥사(獄死)했다.

심강(沈 鋼) 1514 (중종 9) 1567 (명종 22)

()는 백유(伯柔) 시호(諡號)는 익효(翼孝), 영의정(領議政) 연원(連源)의 아들. 명종(明宗)의 장인, 1543(중종 3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활인서별좌(活人署別坐)가 되고 1546(명종 1)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에 봉군되었으며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하였다.

1563년 신진사류로서 화를 당하려던 박 순(朴 淳)등을 아들 의겸(義謙)과 함께 구하고 권신 이 양(李 樑)을 제거하게 하여 칭송을 받았다.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 증직되었다.

심진(沈 鎭) ()는 계양(季陽) 좌통례(左通禮) 달원(達源)의 아들. 임천군수(林川郡守)를 역임하였다.

심자(沈 鎡) 1518 (중종 13) 1578 (선조 11)

()는 중시(仲時) 좌통례(左通禮) 달원(達源)의 아들.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역임하고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에 이르렀다.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되었다.

심건(沈 鍵) 1519 (중종 14) 1550 (명종 5)

()는 중계(重啓) ()는 경성헌(警省軒) 동돈녕 봉원(逢源)의 아들. 1548(명종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옥당(玉堂)을 거쳐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역임하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심전(沈 銓) 1520 (중종 15) 1589 (선조 22)

()는 숙평(叔平), 좌통례(左通禮) 달원(達源)의 아들. 1546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1556년 중시(重試)에도 합격, 전주부윤(全州府尹) 경기감사(京畿監司)를 역임하였다. 한때 일이 잘못되어 파직되었다가 신원 복작되고 청파부원군(靑坡府院君)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심수(沈 鐩) 1522 (중종 17) 1580 (선조 13)

()는 중양(仲陽 ) 진사(進士) 흥원(興源)의 아들. 곡산군수(谷山郡守)를 역임하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심뇌(沈 鐳) 좌의정 통원(通源)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냈다.

심횡(沈 鈜) 좌의정 통원(通源)의 아들.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심순(沈 荀) 1525(중종 20) 1572 (선조 5)

()는 이로(頤老) 현감 종원(宗元)의 아들. 1561(명종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병조정랑(兵曹正郎)을 거쳐 풍덕군수(豊德郡守)를 역임하였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되었다.

심금(沈 錦) 1531 (중종 26) 1565 (명종 20)

()는 미중(美仲) 좌참찬 광언(光彦)의 아들. 155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직장(直長) 주부(主簿) 호조좌랑(戶曹佐郞)과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과천현감(果川縣監) 재직 중 관사에서 순직(殉職)하였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심인겸(沈仁謙) 1533 (중종 28) 1580 (선조 13)

()는 양숙(讓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의 아들. 1558(명종 13)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호조(戶曹) 형조정랑(刑曹正郎)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천안․풍덕․온양군수(溫陽郡守)를 역임하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追贈) 되었다.

심의겸(沈義謙) 1535 (중종 30) 1587 (선조 20)

()는 방숙(方叔) ()는 손암(巽庵),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인. 1555(명종 10)에 진사(進士)가 되고, 156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이듬해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정언(正言) 부수찬(副修撰) 교리(校理)를 역임, 그 해 외숙 이 양(李 樑)이 사화를 일으켜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사림들을 숙청하려고 하자 왕의 밀지를 받아 이 양(李 樑)을 탄핵, 유배하도록 하여 사람들을 보호했다.

1564년 지평(持平) 검상(檢詳) 사인(舍人), 이듬해 사간(司諫) 부응교(副應敎) 1566년에 집의(執義) 직제학(直提學)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 1569년 좌승지(左承旨) 대사간(大司諫), 1572년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내는 동안 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척신 출신이지만 사림(士林)들 간에 명망이 높아 선배 사류들에게 촉망을 받았다. 이때 김종직(金宗直) 계통의 신진세력으로서 김효원(金孝元)이 정계에 등장하여 김계휘(金繼輝)에 의해 이조정랑(吏曹正郎)으로 천거되자, 김효원(金孝元)이 일찍이 명종조(明宗朝)의 권신이던 윤원형(尹元衡)의 집에서 기숙한 사실을 들어 권신에게 아부했다 하여 이를 반대했다. 1574(선조 7) 결국 김효원(金孝元)이 이조정랑(吏曹正郎)에 발탁되고, 이듬해 그의 아우 충겸(忠謙)이 이조정랑(吏曹正郎)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金孝元)이 전랑(銓郞)의 직분이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하여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구세력은 그를 중심으로 서인, 신진세력은 효원(孝元)을 중심으로 동인이라 하여 동서분당이 발생하였다. 이에 부제학 이 이(李 珥)1575년 그를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효원(孝元)을 부령부사(富寧府使)로 전직시켜 당쟁을 조정하려했으나, 이미 뿌리박힌 양당의 대립은 해소되지 못했다. 그 후 사직하고 파산(破山)에 내려가 있다가 1580년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등용,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전직되어 정인홍(鄭仁弘)의 탄핵을 받았으나 이 이(李 珥)의 변호로 무사했고, 1582년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 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에 배향되었다.

심원해(沈源海) 1536 (중종 31) 1597 (선조 30)

()는 비용(丕容) ()의 아들. 1567(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군기시정(軍器寺正)을 역임한 뒤 철원부사(鐵原府使)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의 군공으로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심예겸(沈禮謙) 1537 (중종 32) 1598 (선조 31)

()는 문숙(文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의 아들. 1570(선조 3)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개성부(開城府)에 재직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군량보급(軍糧補給)에 공을 세워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심지겸(沈智謙) 1540 (중종 35) 1568 (선조 1)

()는 공달(公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의 아들.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역임하였으며 효()로 호조정랑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내렸다.

심원하(沈源河) 1540 (중종 35) ?

()는 명보(明甫) ()의 아들. 1582(선조 1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로 급제, 장령(掌令)을 지냈다.

심신겸(沈信謙) 1542 (중종 37) 1596 (선조 29)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의 아들.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역임하였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심우신(沈友信) 1544 (중종 39) 1593 (선조 26)

()는 공택(公擇) 군수(郡守) ()의 아들. 1567(명종 22)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든 가재를 팔아 수천명의 의병을 모집, 수원에서 적의 선봉을 무찌르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진주에 가서 함께 지켰으나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金千鎰)의 뒤를 이어 강에 뛰어 들어 죽었다.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고, 영광의 표의사(彪義祠)에 배향되었다.

심충겸(沈忠謙) 1545 (인종 1) 1594 (선조 27)

()는 공직(公直) ()는 사양당(四養堂) 시호(諡號)는 충익(忠翼),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의 아들. 인순왕후(仁順王后 : 명종비)의 동생, 1564(명종 19)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72(선조 5)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 정언(正言)에 발탁되고, 이듬해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이어 예조좌랑(禮曹佐郞)를 거쳐 1575년 이조정랑(吏曹正郎)에 천거되었으나 앞서 형 의겸(義謙)의 배척을 받은 김효원(金孝元)에 의해 이조(吏曹)의 벼슬이 척신들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는 반대가 제기됨으로써 등용되지 못하고 동서 분당이 더욱 촉진되었다. 그 후 지평(持平) 헌납(獻納)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승진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가 되어 선조를 평양에 호종했고, 병조판서(兵曹判書)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의주에 피난할 것을 역설, 이어 분조를 설치한 세자(光海君) 호위의 명을 받아 왕과 헤어져 성천에 이르러 세자를 모시고 일본군의 방위에 힘썼다. 1593년 호조와 병조의 참판으로 우빈객(右賓客)을 겸직, 군량미의 조달에 큰 활약을 했고, 이듬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특진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청림군(靑林君)에 추봉되었다. [저서] 사양당집(四養堂集)

심기일(沈紀一) 1545 (인종 1) ?

()는 남중(南仲) 직장(直長) 대원(大源)의 아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의 의병에 가담, 정암진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심대(沈 岱) 1546 (명종 1) 1592 (선조 25)

()는 공망(公望) ()는 서돈(西墩)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경력(經歷) 의검(義檢)의 아들. 1572(선조 5)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사인(舍人) 보덕(輔德)을 역임,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여 의주에서 승지(承旨)를 지냈으며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어 서울 탈환작전에 성중의 백성들을 내응(內應)케 하려는 등 대담한 계획을 짜고 남하하다가 삭령(朔寧)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청원군(靑原君)에 봉해지고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영의정과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이 추봉되었다.

심우정(沈友正) 1546 (명종 1) 1599 (선조 32)

()는 원택(元擇) 호 빈죽(賓竹),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 ()의 아들. 1564(명종 19) 진사(進士)가 되고 158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 전적(典籍)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지평(持平) 정언(正言) 예조정랑(禮曹正郎)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해운판관(海運判官)을 역임했다. 1589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으로 상관에게 미움을 받아 선천군수(宣川郡守)로 좌천당했다가 신병으로 사임하였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으로 한강과 임진강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패하였다. 이천(伊川)에 왕세자를 찾아가서 필선(弼善)이 되었다가 이어 강원도에 들어가 군대를 모집했다. 그 후 군기시정(軍器寺正) 파주목사(坡州牧使) 사간(司諫) 헌납(獻納)을 역임, 1597(선조 30)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어 산성을 수축했다. 다음해 영남에 있는 명나라 군사의 군량을 조달하는 직책을 맡고 원활히 수행했다. 죽은 뒤 여러 번 벼슬이 추증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까지 이르렀다.

심효겸(沈孝謙) 1547 (명종 2) 1600 (선조 33)

()는 공술(公述)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의 아들. 1576(선조 9)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신천군수(信川郡守)를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심희수(沈喜壽) 1548 (명종 3) 1622 (광해군 14)

()는 백구(伯懼) ()는 일송(一松) 수뢰누인(水雷累人)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정자(正字) ()의 아들. 노수신(盧守愼)의 문인. 1568(선조 1) 성균관에 입학 1570년 이 황(李 滉)이 죽자 성균관 대표로 제사에 참여했고, 1572(선조 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1583(선조 16)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1589년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려다 조정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직하였다가 이듬해 부응교(副應敎)로 등용, 1591년 응교(應敎)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동래에서 일본 사신을 맞았으며, 이어 간관으로서 수차 직언을 하다가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사성(司成)으로 전직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로 왕을 호종(扈從)했다. 그때 마침 중국 사신이 오게 되자 중국어에 능통하여 도승지(都承旨)로 임명되어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을 영접했다. 이해 겨울,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어 접반사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맞았고, 1597년 대사헌(大司憲), 1599년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어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겸임, 우찬성(右贊成)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1606년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여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장악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右議政)에 전임, 1614(광해군 6) 영창대군의 신원을 상소했다가 사형을 당하게 된 정 온(鄭 薀)을 구하여 유배에 그치게 했다. 1615(광해군 7)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에 다녀온 허 균(許 筠)이 중국 야사(野史)와 와전된 우리 종계(宗系)를 시정했다고 보고하여 조정에서 축하연(祝賀宴)의 개최 여부가 논의될 때 이를 반대하다가 축출, 둔지산(屯之山)에 들어가서 독서와 시로써 소일했다. 상주(尙州) 봉암사(鳳巖祠)에 배향되었다.

[저서] 일송집(一松集)

심우승(沈友勝) 1551 (명종 6) 1602 (선조 35)

()는 사진(士進) ()는 만사(晩沙), 관찰사(觀察使) ()의 아들. 1573(선조 6)에 진사가 되고, 158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형조정랑(刑曹正郎) 정언(正言)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1593(선조 26)에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구원을 청하고 돌아와 승지(承旨) 춘천부사(春川府使) 호조참의(戶曹參議)를 거쳐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승진했다. 이때 서울에 주둔한 명병(明兵)의 행패가 심하므로 명나라 경리(經理) 양 호(楊 鎬)에게 이를 항의하고 그 시정을 촉구하여 그들의 미음을 받아 파직되었다. 1600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고, 죽은 뒤 1604(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에 추록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심종침(沈宗忱) 1553 (명종 8) 1614 (광해군 6)

()는 사성(士誠), 현감(縣監) ()의 아들. 숙천부사(肅川府使)를 역임하였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심종민(沈宗敏) 1554 (명종 9) 1618 (광해군 10)

()는 사눌(士訥) ()는 청만(晴灣), 증대사헌(贈大司憲) ()의 아들. 생부는 현감(縣監) (),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의 문인. 1576(선조 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89년 북부참봉(北部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주 행재소를 찾아가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가 되고, 이어 검찰사(檢察使) 최 황(崔 滉)의 종사관으로 활약, 그 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을 역임하다가 명나라 제독 이승훈(李承勛)의 휘하에 종군하여 공을 세워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가 되었다. 그 뒤 감찰(監察)을 거쳐 연천(漣川)․정읍(井邑)․산음(山陰)․이천(利川) 현감(縣監)을 역임하고 1617(광해군 9) 개천군수(价川郡守)가 되었으나 병사했다.

심언명(沈彦明) 1554 (명종 9) 1592 (선조 25)

()는 휘서(暉瑞) 참봉 억귀(億貴)의 아들.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으로 재직 중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장락원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심경(沈 憬) 1556 (명종 11) 1616 (광해군 8)

()는 중오(仲悟) 부사과(副司果) 지겸(智謙)의 아들. 이 이(李 珥)의 문인. 1589(선조 22) 친교가 있던 이 발(李 潑) 형제가 기축옥사에 연류, 처형되었을 때 관을 마련하여 장사를 치렀다는 죄로 부령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풀려 나왔다. 1615(광해군 7) 처음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나 이때 정인홍(鄭仁弘)등이 정권을 잡고 폐모론을 일으키자 그 흉계를 규탄하다가 경성(鏡城)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심언청(沈彦淸) 1556 (명종 11) 1592 (선조 25)

()는 국보(國輔) 참봉 억귀(億貴)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로 재직 중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전투에서 순절하였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추증되었다.

심대승(沈大承) 1556 (명종 11) 1606 (선조 39)

()는 덕보(德甫) ()는 이안(伊安), 통정(通政) ()의 아들.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선봉장(先鋒將)으로 정암진(鼎巖津)과 장현(長峴)에서 왜적을 격퇴했고, 이해 진주대첩(晋州大捷) 때도 구원군의 선봉장으로 참전했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심극명(沈克明) 1556 (명종 11) ?

()는 백회(伯晦) ()는 취면(醉眠), 좌의정 통원(通源)의 손자. 1579(선조 12) 진사(進士)가 되고, 1583년 알성문과(文科)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 때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를 지낸 후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 회령부사(會寧府使)를 역임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 그림 거문고 활쏘기 말타기에도 뛰어났다. 선조가 명하여 시서화(詩書畵) 삼기(三奇)를 뽑을 때 그 한사람으로 뽑혔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심종직(沈宗直) 1557 (명종 12) 1632 (인조 10)

()는 사경(士敬) ()는 죽서(竹西), 현감(縣監) ()의 아들. 율곡(栗谷)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의 문인,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판결사(判決事)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이르렀고 시에 능했다. [편서] 비선구봉시집(批選龜峰詩集)

심종명(沈宗明) 1559 (명종 14) 1592 (선조 25)

()는 공회(公晦) 진사 화()의 아들. 1583(선조 16) 무과(武科)에 급제,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를 역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는 도중 특명으로 독전독운사(督戰督運使)가 되어 임진강(臨津江)을 수호하다가 순절하였으며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심언명(沈彦明) 1561 (명종 16) ?

()는 사회(士晦) ()는 금은(琴隱), 진사 화()의 아들. 1586(선조 19)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승지(承旨)가 되었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심흔(沈 忻) 1561 (명종 16) 1595 (선조 28)

()는 구이(懼而) 병조판서 충겸(忠謙)의 아들. 1590(선조 23) 문과에 급제, 대교(待敎)를 지냈다.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고 청송군(靑松君)에 봉해졌다

심탁(沈 鐸) 1562 (명종 17) 1592 (선조 25)

()는 진원(振遠) 선무랑(宣務郞) 광보(光寶)의 아들. 1588(선조 21)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으로 비변사 낭관(備邊司郎官)을 겸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출전,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이 되어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 입(申 砬)의 휘하에 들어가려고 출발했으나 신 립(申 砬)이 달천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 할(申 硈 : 신립의 아우)의 휘하에 들어가 임진강 방어전투에서 전사했다.

심현() 1568 (선조 1) 1637 (인조 15)

()는 사화(士和)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목사(牧使) 우정(友正)의 아들. 후릉참봉(厚陵參奉)을 거쳐 여러 군현의 수령을 역임하고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종사(宗社)를 따라 강화(江華)에 피난가서 가묘(家廟)의 위패(位牌)를 땅에 묻은 후 국난의 비운을 통탄하는 유소(遺疎)를 쓰고 자결했다. 익사원종훈(翼社原從勳)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심열(沈 悅) 1569 (선조 2) 1646 (인조 24)

()는 학이(學而) ()는 남파(南坡) 시호(諡號)는 충정(忠靖), 부사(府使) 예겸(禮謙)의 아들. 생부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충겸(忠謙), 1593(선조 26) 진사(進士)가 되고, 이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이듬해 검열(檢閱)이 되고, 뒤에 전적(典籍)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다. 인조반정(1623) 후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승진, 1638(인조 16) 염철사(鹽鐵使)가 되어 심양(瀋陽)에 가서 물물을 교환했다. 이 해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 방일주의(放逸奏議) 남파상국집(南坡相國集)

심집(沈 諿) 1569 (선조 2) 1644 (인조 22)

()는 자순(子順) ()는 남애(南崖) 시호(諡號)는 효간(孝簡), 목사(牧使) 우정(友正)의 아들. 1596(선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 예문관(藝文館) 벼슬에 보직, 한때 사직하였다가 1601년에 검열(檢閱)이 되고, 수원부판관(水原府判官)에 올라 정홍익(鄭弘翼)과 함께 무고를 받은 성 혼(成 渾)을 변호하다 옹진현령(饔津縣令)으로 좌천, 광해군 초에 장령(掌令)으로 직언하다가 다시 면직되었다. 그 후 은계찰방(銀溪察訪) 보덕(補德)을 지내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직,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재등용 되어 병조참지(兵曹參知) 여주목사(驪州牧使)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도승지(都承旨) 예조와 형조의 참판(參判)을 역임하고, 1629(인조 7)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162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왕을 호종(扈從), 화친의 조건이 되는 볼모로서 왕족인 능봉군(綾峯君)을 왕의 동생으로, 자신은 대신으로 가장하고 회담에 참가했으나 발각되어 실패, 이듬해 이로 인해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638(인조 16) 신원(伸寃)되었으며 163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심민겸(沈敏謙) 1570 (선조 3) 1646 (인조 24)

()는 사윤(士允) ()는 두암(杜菴),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이 되어 수원에서 권 율(權 慄)을 도와 군량(軍糧) 공급에 힘썼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의병을 이끌고 역전(力戰)했으며 이듬해 순천예교(順天曳橋) 싸움에서 군량보급을 맡았다. 그 공으로 주부(主簿)가 되고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이 난을 일으키자 또다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세자(世子)를 모시고 피난,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량을 모아 강화(江華)에 수송했다. 옥과(玉果)의 구암사(龜巖祠)와 나주(羅州)의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

심설(沈 偰) 1570 (선조 3) 1630 (인조 8)

()는 자경(子卿)) 부사(府使) 종침(宗忱)의 아들. 감역(監役)의 지냈으며 아들 지원(之源)의 귀()로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심지(沈 榰) 1570 (선조 3) ?

()는 하경(廈卿) 원회(源淮)의 아들. 1612(광해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정랑(正郞)을 지냈다.

심액(沈 詻) 1571 (선조 4) 1654 (효종 5)

()는 중경(重卿) ()는 학계(鶴溪) 시호(諡號)는 의헌(懿憲), 감사(監司) 우승(友勝)의 아들. 생부는 진사 우준(友俊), 1589(선조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9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이듬해에 설서(設書) 정언(正言)을 지냈다. 1598년 경성부판관(鏡城府判官)에 이어 1644(인조 22)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1647년 형조(刑曹)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고 청송군(靑松君)에 봉해졌으며, 1652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호성원종훈(扈聖原從勳)

심광세(沈光世) 1577 (선조 10) 1624 (인조 2)

()는 덕현(德顯) ()는 휴옹(休翁), ( )의 아들. 1601(선조 3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 감찰(監察) 해운판관(海運判官)을 거쳐 설서(設書)로 있을 때 무설(巫說)을 믿는 세자 광해군을 간()했다가 미움을 받고 사직했다. 1604년 전적(典籍)으로 다시 기용되고 1611(광해군 3) 정언(正言) 수찬(修撰)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었다. 1613(광해군 5) 문학(文學)을 거쳐 교리(校理)로 있을 때 계축옥사(癸丑獄事)로 고성(固城)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교리(校理)가 되고 응교(應敎)를 거쳐 이듬해 사인(舍人)이 되었다. 이해 이 괄(李 适)의 난으로 피난한 왕의 행재소(行在所)로 가던 도중 부여(扶餘)에서 병사했다.

[저서] 휴옹집(休翁集), 해동락부(海東樂府)

심대부(沈大孚) 1586 (선조 19) 1657 (효종 8)

()는 신숙(信叔) ()는 가은(嘉隱) 범재(泛齋), 관찰사(觀察使) ()의 아들. 정 구(鄭 逑)의 문인, 1613(광해군 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선행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이듬해 중림도찰방(重林道察訪)이 되고, 1630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예조좌랑(禮曹佐郞) 정언(正言)을 역임했으나 왕자 인성군(仁城君) ()의 사사(賜死) 문제로 보령현감(保寧縣監)에 좌천되자 취임하지 않다가 이듬해 송화현감(松禾縣監)으로 나갔다. 1688(인조 16) 삼남에 흉년이 들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 겸 진정사(賑政使)가 되어 백성을 구제했고 이후 수찬(修撰) 헌납(獻納) 종부시정(宗簿寺正) 응교(應敎) 필선(弼善) 사간(司諫)을 역임했다. 인조(仁祖)가 죽자 묘호(廟號) 문제로 한때 회양에 부처되었다가 곧바로 사면되었다. 문경(聞慶)의 소양사(瀟陽祠)에 배향되었다. [저서] 가은집(嘉隱集)

심연(沈 演) 1587 (선조 20) 1646 (인조 24)

()는 윤보(潤甫) ()는 규봉(圭峰), 진사(進士) 대형(大亨)의 아들.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仁祖)를 공주(公州)에 호종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 또 왕을 모시고 강화에 들어가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이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이 되었다. 1633년 광산현감(光山縣監)으로 부임, 선정(善政)을 베풀어 현()으로 강등되었던 것을 다시 주로 승격시키고 목사(牧使)가 되었다. 1635(인조 13)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승진되어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군대를 이끌고 쌍령(雙嶺) 싸움에 나갔다가 패배, 이어 문경(聞慶)에 이르러 군사를 모아 재기를 도모하던 중 강화가 성립되었다. 뒤에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임피(臨陂)에 유배되었다가 1638년 재등용되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 선정을 베풀어 비변사 당상이 되었다. 이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승지(承旨) 도순찰사(都巡察使) 평안도와 경기도 관찰사(觀察使)를 역임, 1644(인조 22)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부임하여 임지에서 병사했다.

심기원(沈器遠) 1587 (선조 20) 1644 (인조 22)

()는 수지(遂之) 군수(郡守) ()의 아들. 권 필(權 韠)의 문인. 유생(儒生)으로 이 귀(李 貴)등과 협력하여 1623(인조 1)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으로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지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이 괄(李 适)의 난이 일어나자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가 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 도순검사(都巡檢使)가 되어 세자를 모시고 남하했다. 1628년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역임하고 1634년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승진되어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서울을 방위, 1642년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1644(인조 22)에 회은군(懷恩君) 사건에 연루되어 피화(被禍)되었다.

심명세(沈命世) 1587 (선조 20) 1632 (인조 10)

()는 덕용(德用)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현감(縣監) ( )의 아들. 인조의 종모제(從母弟). 광해군의 난정(亂政)에 출세의 뜻을 버리고 은거하던 중 1623(인조 1)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청운군(靑雲君)에 봉해지고 부총관이 되었다. 이듬해 이 괄(李 适)의 난 때 인조(仁祖)를 공주(公州)로 호종(扈從), 그 공으로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어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했다. 그 후 세자빈의 가례를 반대하다가 충주로 유배되어 1년 만에 풀려 나왔다.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 왕을 호종하여 강화에 피난했고, 내섬시제조(內贍寺提調)를 지낸 뒤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역임하였으며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다. 진무원종훈(振武原從勳) 영사원종훈(寧社原從勳)

심민각(沈民覺) 1589 (선조 22) 1648 (인조26)

()는 숙선(叔先) ()는 구암(龜巖), 동중추 언겸(彦謙)의 아들.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 때 의병(義兵)과 가동(家僮) 900여명을 이끌고 창기(倡起)하여 운봉현감 황일호(黃一皓)와 함께 왕을 공주(公州)로 호종하고 안현(鞍峴)싸움에서 승전을 거두니 왕이 그 공을 포상하여 청안현감(淸安縣監)과 증산현감(甑山縣監)을 제수하였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호서(湖西)지방을 지키면서 강화도에 물자를 운반했으며 화친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뒤에 영유현감(永柔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유명(遺命)으로 병자(丙子) 후의 관직을 쓰지 못하도록 가족에게 당부하였다. 옥과(玉果)의 구암사(龜巖祠)에 배향되었다.

심택(沈 澤) 1591 (선조 24) 1656 (효종 7)

()는 시보(施甫) ()는 취죽(翠竹), 진사(進士) 대형(大亨)의 아들. 1616(광해군 8) 진사(進士)가 되고, 1635(인조 1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사관을 거쳐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지냈다.

1650(효종 1) 의주부윤(義州府尹)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1652년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내고, 1654년 승지(承旨)를 거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어 관내를 순시 중 곽산(郭山)에서 병사했다. 글씨에 뛰어났다.

심지원(沈之源) 1593 (선조 26) 1662 (현종 3)

()는 원지(源之) ()는 만사(晩沙), ()의 아들. 1620(광해군 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승문원 정자(正字)에 등용되었으나 광해군의 폭정과 권신 이이첨(李爾瞻)의 대북파 횡포가 심해지자 낙향하여 은거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듬해 검열(檢閱)에 기용되고 저작(著作)겸 설서(設書)를 지냈으며 정언 (正言) 수찬(修撰)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쳤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에 인조(仁祖)를 호종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노모를 간호하다가 왕이 피신한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성문이 닫혀 들어가지 못하고 조익(趙翼) 윤계(尹棨)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려 했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 조정관리 중 직접 왕을 호위하지 못한 자를 논박할 때 삭출 당하여 영남의 봉로처(奉老處)의 객사에 부치어 무척 곤궁하였다. 1638년에 죄가 없음을 인정받아 홍주목사(洪州牧使)에 임명되었고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와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를 지냈으며, 1653년 정조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이듬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1657년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영의정(領議政)겸 세자사(世子師)에 올랐다. 글씨에도 능했으며 영천(永川)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 만사고(晩沙稿)

심동구(沈東龜) 1594 (선조 27) 1660 (현종 1)

()는 문징(文徵) ()는 청봉(晴峰), 판서(判書) (諿)의 아들. 1615(광해군 7) 진사가 되고, 1624(인조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집의(執義)에 올랐을 때 탁남(濁南)인 남이공(南以恭)이 청남(淸南)의 영수인 김상헌(金尙憲)을 탄핵하려 하자 남이공(南以恭)의 부당함을 상소하고 사직했다. 4년간 고향에 은거하다 1641(인조 19) 교리(校理)로 등용되어 종부시정(宗簿寺正) 응교(應敎) 집의(執義) 사인(舍人)을 역임, 서장관(書狀官)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와서 1644년 사간(司諫)에 올랐다. 심기원(沈器遠)의 옥사에 인척으로서 연좌되어 장흥(長興)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초에 풀려났으며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저서] 청봉집(晴峰集)

심장세(沈長世) 1594 (선조 27) 1660 (현종 1)

()는 덕조(德祖) ()는 각금당(覺今堂) 시호(諡號)는 정민(貞敏), 현감(縣監) ( )의 아들.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이 일어나자 포의로 공주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하여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제수되었고, 1627(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왕을 강화로 호종하였으며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사원종훈(靖社原從勳)

심선(沈 譔) 1595 (선조 28) 1650 (효종 1)

()는 술지(述之) 감찰 우단(友端)의 아들. 1642(인조 20)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갑과로 급제, 부사(府使)를 지냈다.

심지청(沈之淸) 1596 (선조 29) 1658 (효종 9)

()는 자성(子聖) ()는 한죽당(寒竹堂), 군수 협()의 아들. 1615(광해군 7)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그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다.

심지한(沈之漢) 1596 (선조 29) 1657 (효종 8)

()는 자장(子章) ()는 창주(滄洲), ()의 아들. 정엽(鄭燁)의 문인. 1613(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나자 생원으로서 아버지와 함께 이를 반대. 1618년 조경기(趙慶起)8명과 함께 폐모를 주장하는 이위경(李偉卿) 정 조(鄭 造) 윤 인(尹 訒)등을 극형에 처하도록 상소했다가 아버지와 함께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1623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 나와 1629(인조 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학유(學諭) 사관(史官)을 지낸 후 정언(正言) 지평(持平) 수찬(修撰) 교리(校理) 사간(司諫) 집의(執義)를 역임하였고 연안부사(延安府使)를 거쳐 승지(承旨)에 임명되고 호조 병조 공조의 참의(參議)를 지냈다.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으로 실록청 도청낭청(實錄廳都廳郎廳)이 되어 「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효종(孝宗)에게「시전(詩傳)」「서전(書傳)」「대학(大學)」「주례(周禮)」의 골자를 따라「사도(四圖)」를 편찬하여 바쳤다. [저서] 창주집(滄洲集) 월괘도설(月卦圖說)

심정호(沈挺豪) 1597 (선조 30) 1658 (효종 9)

()는 사수(士秀) 찰방 작()의 아들. 1645(인조 2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사예(司藝)를 지냈다.

심광수(沈光洙) 1598 (선조 31) 1663 (현종 4)

()는 희성(希聖) ()는 노연(魯淵), 이조판서 액()의 아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31(인조 9) 이 귀(李 貴) 최명길(崔鳴吉)등이 원종(元宗 : 인종의 생부)의 추존(追尊)을 주장하자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들을 이끌고 상소 이를 반대했다.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고, 이듬해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 들어가 화의를 반대 최명길(崔鳴吉)등 주화파(主和派)의 처형을 상소했으며, 화의 성립 후 은거하여 여러 번 기용되었으나 사퇴했다. 1650(효종 1) 장령(掌令)을 지내고, 1659년 현종(顯宗)이 즉위하자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이듬해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어 남인으로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만2년제로 하자고 주장, 송시열(宋時烈)등 서인의 기년설(朞年說 : 1)에 대항하다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했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고 청안군(靑安君)에 봉해졌다.

심지명(沈之溟) 1599 (선조 32) 1685 (숙종11)

()는 자우(子羽) ()는 농암(聾巖), 참봉 준()의 아들. 1618(광해군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예문관 검열(檢閱) 도승지(都承旨)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고, 1661(현종 2) 진위(進慰) 진향사(進香使)로 심양(瀋陽)에 다녀왔다. 치사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심세탁(沈世鐸) 1601 (선조 34) 1643 (인조 21)

()는 천이(天以) ()는 동리(東籬), 참판 후()의 아들. 1634(인조 1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지평(持平)을 지냈다.

심희세(沈熙世) 1601 (선조 34) 1645 (인조 23)

()는 덕휘(德輝) 영의정 열()의 아들. 생부는 엄( ), 1639(인조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사원종훈(靖社原從勳)

심유행(沈儒行) 1606 (선조 39) 1660 (현종 1)

()는 여수(汝修) () 취성당(醉醒堂), 군수 창()의 아들. 1646(인조 2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병조정랑(兵曹正郎)으로 재직 중 1652(효종 3)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심양에 다녀와서 옥당(玉堂)에 보직되고 사간을 거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

심황(沈 榥) 1606 (선조 39) 1666 (현종 7)

()는 문백(文伯) 청성군(靑城君) 정화(廷和)의 아들. 1650(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예조좌랑으로서 춘추관(春秋館)을 겸하여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수에 참여했으며 1659년 사복시(司僕寺正)이 되어 다시 춘추관을 겸직하고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수에도 참여하였다. 1664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고 다음해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청평군(靑平君)에 추봉되었다.

심세정(沈世鼎) 1610 (광해군 2) 1668 (현종 9)

()는 중숙(重叔) 증이조참판 후()의 아들. 1641(인조 1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서 1654(효종 5) 인평대군과 같이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와서 옥당(玉堂)에 들고 부제학(副提學) 승지(承旨)를 거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올랐다. 영국원종훈(寧國原從勳)

심유(沈 攸) 1620 (광해군 12) 1688 (숙종 14)

()는 중미(仲美) ()는 오탄(梧灘), 응교(應敎) 동구(東龜)의 아들. 23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1650(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뒤 주서(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에서 사퇴, 뒤에 전적(典籍) 병조좌랑(兵曹佐郞) 용안현감(龍安縣監)을 지냈다. 현종(顯宗) 초에 지평(持平)을 거쳐 장령(掌令) 헌납(獻納) 사간(司諫) 집의(執義)를 역임, 한때 옥천군수(沃川郡守)로 나갔다가 사복시정(司僕寺正) 필선(弼善) 보덕(輔德) 안변부사(安邊府使)를 지냈다.

1674(현종 15) 사간으로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유배중인 송시열(宋時烈)을 변호하여 광주(廣州)에 귀양 갔다가 풀려서 1682(숙종 8) 수찬(修撰)이 되었다. 뒤에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여러 조()의 참의(參議)를 역임했다. 그동안 대간(大諫)에서 소론인 윤 증(尹 拯)을 구출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했고, 김수항(金壽恒) 이단하(李端夏)등 노론(老論)을 변호했다. [저서] 오탄집(梧灘集)

심재(沈 梓) 1624 (인조 2) 1693 (숙종 19)

()는 문숙(文叔) ()는 양졸재(養拙齋), 유행(儒行)의 아들. 1654(효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현종 때 교리(校理) 승지(承旨)를 거쳐 1675(숙종 1)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고, 1677년 사은 겸 동지부사(謝恩兼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귀국하여 대사간(大司諫)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도승지(都承旨) 공조판서(工曹判書)등 요직을 역임했다. 대사간(大司諫)으로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자 속세를 떠나 안산의 달산촌(達山村)에서 살았고 이듬해 풀렸으나 당화(黨禍)가 참혹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남인(南人)의 과격파로서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세자(世子 : 경종) 책봉을 반대한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등을 강력히 탄핵하여 유배케 했고, 이해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며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1693(숙종 19)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치사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익사원종훈(翼社原從勳)

심백(沈 栢) 1627 (인조 5) 1671 (현종 12)

()는 후조(後凋) 승지 광수(光洙)의 아들. 생부는 광사(光泗), 1662(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심약기(沈若沂) 1630 (인조 8) 1661 (현종2)

()는 영이(詠而) ()는 외삼재(畏三齋), 부윤(府尹) ()의 아들. 9세 때 이미 사서(四書)와 시()에 통달, 김 집(金 集) 송준길(宋浚吉)등에게 사사(師事)하고, 1650(효종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생(儒生)들의 신망을 받았다. 이때 부친이 웅천(熊川)에 유배되자 대신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여 그 면죄를 호소하고 부친의 배소(配所)에 따라가 성심껏 위로하고 부친 피화(被禍)의 전말을 기록한「원통록(寃痛錄)」을 저술했으며 32세에 분사(憤死)했다.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심사주(沈師周) 1631 (인조 9) 1697 (숙종 23)

()는 성욱(聖郁) ()는 한송재(寒松齋), 영의정(領議政) 지원(之源)의 증손.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 정 협(廷 協)의 아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고 1679(숙종 5) 49세에 음보(蔭補)로 의릉 참봉(懿陵參奉)이 된 후 봉사(奉事) 도사(都事)로 승진, 호조좌랑(戶曹佐郞) 영덕현령(盈德縣令) 사어(司禦) 공조좌랑(工曹佐郞) 함흥판관(咸興判官)을 거쳐 전주부사(全州府使)에 이르렀다.

심사홍(沈思泓) 1632 (인조 10) 1693 (숙종 19)

()는 백함(伯涵) 감사 세정(世鼎)의 아들. 1680(숙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검열(檢閱) 응교(應敎)를 지냈으며.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심즙(沈 楫) 1634 (인조 12) 1689 (숙종 15)

()는 대재(大材) 도사(都事) 지치(之治)의 아들. 1666(현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군수(郡守) 목사(牧使)를 거쳐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고, 국방(國防)에 공헌한 공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심상(沈 相) 1639 (인조 17) 1690 (숙종 16)

()는 여필(汝弼) 증참판 광한(光漢)의 아들. 생부는 광사(光泗), 1679(숙종 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심유(沈 濡) 1640 (인조 18) 1684 (숙종 10)

()는 성윤(聖潤) 약한(若漢)의 아들. 1662(현종 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6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사관(史官)을 거쳐 설서(設書) 사서(司書) 정언(正言) 수찬(修撰) 헌납(獻納) 교리(校理) 사간(司諫)을 역임하고 이어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집의(執義)에 올라 지제교(知製敎)를 겸했다. 1680년 경신대출척 때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남인 윤 휴(尹 鑴)등의 처단과 복창군(福昌君) 형제의 안치를 주장하는 등 여러 번 큰 논쟁이 있었고 그때마다 대신들의 깊은 미움을 사서 때를 만나도 진급하지 못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보사원종훈(保社原從勳)

심익현(沈益顯) 1641 (인조 19) 1683 (숙종 9)

()는 가회(可晦) ()는 죽오(竹塢), 영의정 지원(之源)의 아들. 효종의 사위. 1650(효종 1) 효종의 셋째 딸 숙명공주(淑明公主)와 결혼, 청평위(靑平尉)에 봉해졌다. 이로부터 자유롭게 궁중(宮中)에 출입,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여러 차례 지내고 만년에는 내섬시제거(內贍寺提擧)에 올랐다. 세 차례나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그때 받은 하사품을 모두 부하에게 나누어 주어 청렴함을 칭송받았다. 글씨에 뛰어나 많은 산릉지(山陵誌) 옥책문(玉冊文) 교문(敎文)을 썼으며 특히 촉체에 능했다.

심평(沈 枰) 1642 (인조 20) 1704 (숙종 30)

()는 여기(汝器) 증참판 정로(廷老)의 아들. 생부는 정석(廷碩), 1680(숙종 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부제학(副提學)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를 거쳐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재직 중 1702(숙종 28) 사은사(謝恩使) 임창군(臨昌君) ()의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올랐다.

심권(沈 權) 1643 (인조 21) 1697 (숙종 23)

()는 성가(聖可)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희세(熙世)의 아들. 1675(숙종 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82(숙종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가 정언(正言) 지평(持平)을 역임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1694(숙종 20) 풀려 나왔다. 수찬(修撰) 교리(校理) 헌납(獻納) 이조좌랑(吏曹佐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