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홍주송씨시조(洪州宋氏),송평(宋枰)

작성일 : 2017-04-20 15:15 수정일 : 2018-03-02 11:11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홍주(洪州)는 충청남도 홍성군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운주인데 고려 성종 때 단련사를 두었다가 1012년 (현종 3) 지홍주사로 고치고 후에 홍주로 개칭되었다. 공민 왕 때 목(牧)이 되고 조선 세종 때 진을 두었으며 현종조에는 홍양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895년 (고종 32) 군이 되었다. 1913년 군을 폐하여 일부는 청양군에 속하고 그 나머지는 결 성군 일원과 합하여 홍성군이 되어 지금은 홍성군에 속한 홍성면으로 남아있다.

홍주송씨의 선계는 여산송씨의 시조 송유익의 12세손 말선(末善)이 홍주의 신평에 살며 여산송씨에서 분적하였으나 그 후의 세계를 실전하여 후손들이 홍주와 신평송씨로 칭관하게 되었다.

시조 송평(宋枰)은 조선 세조 때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와 세자익위사 익위(世子翊衛司翊衛) 등을 지내고 향리인 전북 순창으로 돌아가 유유자적 하다가 만년에 전남 담양으로 이거하여 여생을 마쳤다.

후손들은 평(枰)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홍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으며, 시조의 아들 기손(麒孫)이 성종 때 통정대부 (通政大夫)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남평(南平)과 구례(求禮) 등지의 수령을 역임한 후 내직으로 들어와 전중시어사(殿中侍街史)를 지냈고, 그의 아들 대에서 아락당공파 · 우유당공파 · 청심헌공파 등 크게 세 갈래로 갈라져서 가세를 일으켰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을 빛낸 두드러진 인맥을 살펴보면 아락당공파의 준(駿)이 중종 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효렴으로 참봉(參奉)이 되고, 뒤에 별좌(別坐)와 주부(主薄) ·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단성 현감(丹城縣監)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숙(驌 : 우유당공파)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후진 양성에 진 력하며 학행으로 명망이 높았다. 청신헌공파의 구(駒)는 천 품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공양함에 열성을 다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성종 때 생원시에 합격한 그는 학행으로 참봉(參奉)에 천거되었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임피 · 화순 · 구례 · 김제 · 동복 등 12개 고을의 원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 어 백성들이 그 보답으로 대나무 세 그루를 뜰에 심어 주었다. 그 후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게 되자 이름에 죽(竹)자를 넣어 아들 이름을 정순(庭荀: 전주 군수를 역임) · 정황(庭靈)이라 지었다고 하며 그들이 모두 현달하여 가문을 크게 빛냈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한 정순(庭第)은 전적(典籍)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형조(刑曹)와 예조(禮曹)의 좌랑 (佐郞)을 역임하고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었으며, 그의 아우 정황(庭童)은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전라도 도사(全羅道者事)를 지냈다.

한편 토정 이지함(李之函)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제민(齊 民: 정황의 아들)은 호방한 기질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호를 해광(海狂)이라 하고 넓은 바다를 종횡으로 누비며 정처없이 배를 타고 풍파에 쾌감을 느끼곤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수 등과 더불어 창의하여 김천일(金千鎔)과 합세 수원성을 방어했고, 조헌(趙 憲)을 좌의병대장(左義兵大將)을 추대하여 황간(黃磵)과 영동의 왜적을 막게 했다.

왜란이 끝나자 난중의 모든 일과 득실을 논술한 「와신기사(臥新記事)」를 저술했고 만년에 해산에 은거하여 농사를 지으며 후진 교육에 진력했다. 그 의 재민의 맏아들 타(拕)가 뛰어난 학문으로 선조 때 문명을 떨쳤고, 문집으로「화암수록」을 저술, 시조 작품으로는 (화암구곡)과 (매농곡)을 남 겼으며 , 그의 아우 계은(繼殷)은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를 역임하여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使)를 지낸 수(燧 : 타의 아들), 회양도호부사(淮陽都護府使) 두문(斗文: 수익의 아들), 전라 도사(全羅都亭) 익중(益中), 첨지중추부사(僉知中 樞府使) 인하(寅夏) , 군수(郡守) 동식 (東植) 등과 함께 홍주 송씨를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홍주송씨는 남한에 9,679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