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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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19 14:31 수정일 : 2018-01-03 10:12

은진송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

은진(恩津)은 충청남도 논산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덕은(德恩) · 시진(市津) 두 현의 합명인데, 덕은현은 본래 백제의 덕근군을 신라 경덕왕이 덕은으로 고치고 고려 초에 덕은으로 개칭였다.

시진현(市津縣)은 본래 백제의 가지내현(加知奈縣)인데 경덕왕이 시진으로 고치고 덕은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덕은과 시진을 모두 공주에 편입시켰으며, 1397년(태조 6)에 덕은(德恩) · 시진(市津)을 합쳐 덕은으로 하고 감무를 두었다. 세종 때 은진(恩津)으로 개명하고 1895년(고종 32) 군이 되었다가 1913년 논산군에 병합하여 은진면으로 남아 있다.


은진송씨는 중국 경조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송주은(宋柱殷)의 후예로 전하며 , 그 의 7세손 송순공(宋舜恭)의 후손 자영(自榮)이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유익(惟翊)은 여산송씨의 시조가 되었고 둘째 아들 천익(天翊)이 은진송씨의 연원을 이룬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선계를 고증할 문헌이 없어 고려조에서 판원사(判院事)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진 송대원(宋大原)으로부터 세계를 잇게 되었다. 그 후 대원의 증손 명의 (明誼)가 1362년(공민왕 11) 문과에 급제하고 경상도 안련사(慶尙道接廉使)를 거 쳐 사헌부 집단(司慮府執端)에 이르렀으며 고려가 망하자 불사 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충남 대덕군 동면 신촌리에 낙향하여 절의를 지켰다.

그의 아들 극기(克己)는 젊은 나이에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에 선발되어 개성에서 살았는데 단명하였다. 나이 스물 둘에 청상과부가 된 부인 고흥류씨(高興柳氏: 고홍백 류 준의 딸)의 부모들이 그녀의 뜻을 빼앗아 개가시키려 하자 부인은 죽음을 맹세하고 어린 외아들 유(愉)를 업고 송도에서 회덕까지 5백 여 리를 걸어서 내려왔다.

그러나 시부모는 기쁘게 받아주지 않고 ‘‘여자가 부모의 명올 듣지 않는 것은 삼종의 의가 아니다” 라고 나무라니, 그녀가 울면서 말하기를 ... 저의 삼종의 도는 지금 등 위의 아이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하며 3일 동안 떠나지 않자 감동한 시부모는 딱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그 뒤 류씨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 아들 유(倫)를 훌륭히 키웠으나 1446년(세종 28) 아들 유마저 세상을 등지자 거듭 당하는 슬픔을 억제하며 손자 계사(繼祀)와 계중(繼中)을 훌륭하게 길러 은진송씨의 가맥을 이었고, 1452년(문종 2) 82세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그로부터 문호가 열리게 된 은진송씨는 특히 조선조에 와서 훌륭한 인물들을 대거 배출시켜 명문으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은진송씨조상인물

가문의 기백을 지켜온 인맥을 살펴보면 쌍청당(雙淸堂) 유(倫)의 증손 여해(汝諧 : 예조 정랑 순년의 아들) 가 1494년(성종 25)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성종의 자문에 응했고, 그의 맏아들 세충(世忠)은 군수(郡守)와 장령(掌令)을 지 냈으며 선비들이 이상으로 삼았던 집불고생(十不顧生)”을 몸소 실천한 학자로도 명망이 높았다.

세충(世忠)의 아들 기수(轄壽)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진력하여 《제자백가)에 정통했고 윤원형(尹元衡)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도승지로 위사삼등공신(衛社三等功臣)에 책록 되었으며, 4조(朝)의 임금을 섬기며 대사헌 (大司憲) ·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한편 기수의 사촌 인수(麟壽:참봉 세량의 아들)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었고. 장가들던 날 저녁에도 불을 밝혀놓고 글을 읽었으므로 사람들은 글에 미쳤다고 하여 “서음(書淫)" 이란 말까지 생기게 되었으며, 『패관잡기』에는 “인자하고 정성스러워 착한 일을 보면 기갈 들린 사람이 음식 탐내듯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그는 성리학의 대가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대사헌과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한성부 좌윤(漢城 府左尹)에 올랐으나 윤원형과 이기의 미움을 받아 을사 사화에 사사(賜死) 되었다. 금부도사가 오던 날 마침 그의 생일이었으므로 일가 친척과 제자들이 많이 모였다가 온 집안이 크게 울부짖는데도 그는 얼굴빛도 변하지 아니하고 꿇어 앉아 임금의 명을 받았으며, 목욕하고 의 관을 정돈하는 동작이 평소와 같았다. 스스로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무엇 때문에 내가 죽는지 모르겠다” 하고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하더니, 큰 글씨로 쓰기를, “하늘과 땅이 이 마음을 알아 주리라” 하고, 그것을 아들에게 주면서 “나를 보고 징계를 삼지 말고 부지런히 글을 읽고 주색을 조심하여 혼을 위로하여 다오. 장사는 검소하게 지내되 예법을 어기지 말라. 부끄러운 마음을 지니고 사는 것은 부끄러움 없이 죽는 것만 못하니라” 하고, 종제(從第) 기수(麒壽)에게 전해 주라는 편지에, “자식 하나를 그대에게 부탁하니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글씨가 힘이 있어 펄펄한 생기가 풍겼다.

금부의 군졸이 집안 사람을 시켜 명주 수건을 드리게 하고 마침내 말의 밧줄로 목을 조르니 눈을 감지 못하고 죽자, 이날 밤에 구름도 없이 천둥이 치고 폭풍이 크게 일어났다고 『장빈호찬(長貧胡撰)』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을 계기로 부패한 국사를 비판하는 젊은 사류들의 기풍을 길러 놓은 죄로 사사 당했으나,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의롭게 죽음을 당한 거물이었다. 기수의 아들 응개(應漑)와 응형(應洞)도 선조 때의 명신으로 대사간(大司陳)과 황주 목사(黃J州牧使)를 각각 역임했으며, 귀수의 손자 방조(邦祚: 의금부 도사 응기의 아들)와 갑조(甲祚)의 형제가 뛰어났다.


임진왜란 때 현감(縣監) 한명윤(韓明胤)과 의병을 모집했던 방조는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후 전적(典籍)이 되어 영남지방의 향시(鄕試)를 관장했고, 병조좌랑(兵曹佐郞)과 고산도 마승(高山道,馬承)을 거쳐 평안도 병마평사(平安道兵馬評事)를 지냈다.

그의 아우 갑조(甲祚)는 광해군 때 성균관의 유생(儒 生)으로서 인목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유적에 삭제되었고, 인조반정으로 강릉 참봉(江陵參奉)에 천거되었으며, 이괄(李适)의 난에 왕을 공주로 호종했다. 정묘호란 때는 남하하는 세자를 따라 완산에 내려갔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비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가했으며. 그의 아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조선조에서 주자학의 거유로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일찌기 김장생(金長生) · 김집(金集) 부자에게 글을 배웠던 송시열(宋時烈)은 평소 강직한 성품으로 벼슬에 있는 동안 많은 정적(政敵)을 가졌으나, 뛰어난 학문으로 문하에서 많은 학자를 길렀고, 13촌 숙질 간인 준길 (浚吉)과 함께 동문수학하여 뛰어난 학문으로 노론(老論)의 쌍벽올 이루었다. 군수(郡守) 이창(李 昌)의 아들 동춘당(同春堂) 준길(浚吉)은 우암(尤庵)과 같은 학통의 성리학자로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율곡(栗谷) 이이(李 珥)의 학설을 따랐다. 문장과 필법에도 능했던 그는 『동춘당집』과 『어록선』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고, 학문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학자로서 대성하여 우암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 밖의 인물로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목매어 순절 한 시영(時榮: 방조의 아들)과 학문이 뛰어나 우암 · 동춘당과 함께 ‘‘삼송(三宋)”으로 일컬어졌던 규렴(奎濂 : 이조 판서 국전의 셋째 아들)이 유명했으며, 시열의 손자 주석(疇錫)은 『향동문답(香洞問答)』을 저술하여 정조 때 이조 판서를 지낸 덕상(德相: 무원의 아들)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 외 영조 때 묘향산에서 학행으로 명성을 떨 쳤던 능상(能相), 인상(寅相)의 아들로 이조 판서와 우찬성(右贊成)을 지내고 『성담집』을 저술했던 환기(煥 箕), 환명(煥明)의 아들로 이기일도설(理氣一途說)을 지지했던 치규(穉圭), 철종 때 승지(承旨)를 거쳐 이조참의를 역임했던 달수(達洙: 홍학의 아들)와, 고종 때 좌의정(左議政)으로 개화정책에 반기를 들었던 근수(近 洙)의 형제가 가통을 이었고, 병선(秉濬)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하여, 1926년 순종의 죽음을 조상하러 오는 일본 총독 사이또오를 암살하려 했던 학선(學先: 성근의 아들)과 함께 명문 은진송씨를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은진송씨는 남한에 226,05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