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용성송씨시조(龍城宋氏),송엄경(宋嚴卿)

작성일 : 2017-04-19 11:48 수정일 : 2018-03-21 19:47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용성송씨(龍城宋氏)는 중국 경조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호부상서 (戶部尙書)를 지낸 송주은(宋柱殷)의 후손으로 전하는 송엄경(宋嚴卿)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송업경(宋嚴卿)은 본래 양주의 송산에 세거했는데, 조선 조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창성부사(昌城府使)와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나라에 공을 세워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고.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경남 창녕군 길곡면 오가리로 은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 곳에 살면서 엄경을 시조로 받들고 봉군지인 용성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시조의 현손 계빈(季賓)의 아들 대에서 가세가 크게 번성하여 종파(宗派) · 골룡파(骨龍派) · 오호파(五湖派) · 마천파(馬川派) · 광심정파(廣心亭派) · 보림파(寶林派) · 거창파(居昌派) · 옥동파(玉洞派) 등으로 갈라져서 계대하고 있다.

용성(龍城)은 경기도 수원에 속해 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 때 상홀현 또는 차홀현이라 하였다가 신라 경덕왕이 차성을 고쳐 당은군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용성을 개칭되어 1018년(현종 9) 수주군에 편입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으로는 시조의 손자 탄(坦: 문헌의 아들)이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으며, 그의 손자 후빈(後賓: 적순부위 근의 맏아들)은 사직(司直)을 역임했고, 계빈(季賓)은 한강(寒岡) 정구(鄭 述)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이후경(李厚慶) · 박인(朴 細) 등과 함께 교유하며 학문을 깊이 연마하였으며 벼슬은 군자감 침정(軍資監儉正)에 이르렀다.

한편 성리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지일(知逸)은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탐구에만 정진하여 당대에 학명을 떨쳤으며,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 낙동강변의 절벽 위에 정자를 세워 자호를 따서 ‘‘광심정(廣心亭)”이 라 편액하고 유림(儒林)과 더불어 담론으로 여생을 마쳤다.

그 외 선전관(宣傳官)올 지낸 정식(廷賦: 첨정 계빈의 손자. 지원의 아들)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덕수(德秀), 주부(主簿) 덕창(德昌)이 유명했으며, 천기(川祺)는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여, 참판(參判) 천동(天東),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규수(奎秀) 등과 함께 용성송씨를 대표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용성송씨는 남한에 4,1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