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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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19 11:36 수정일 : 2018-03-13 22:36

 여산송씨의 연원

우리나라 송씨의 본관은 여산(礪山), 은진(恩津), 진천(鎭川), 연안(延安), 홍주(洪州), 신평(新平), 서산(瑞山), 야성(冶城), 청주(淸州) 등 제(諸) 송씨가 있고, 고문헌에 나타난 송씨의 관향은 무려 172본이나 된다. 그러나 대부분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면서 관적을 상실(喪失)했거나 특수한 사정에 의해 그들의 현주지(現住地)를 관향으로 하고 그중에 걸출(傑出)한 인물을 관향조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남양송씨를 제외한 우리나라의 모든 송씨는 중국의 당조(唐朝)에서 귀화(歸化)한 것으로 보인다.


여산송씨는 송유익(宋惟翊)을 시조로 모시고 동생인 송천익(宋天翊)의 후손에서 은진군(恩津君) 송대원(宋大原)을 시조로 하는 은진 송씨가 있고 그 와 서산, 신평 야성 등 10여개의 관향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여산, 은진, 진천에서 분파(分派)된 성 본들이다.

여산송씨의 시조 송유익(宋惟翊: 일명 有益)은 고려조의 진사로 상계와 자세한 세적은 전하지 않으며 관직에 나가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향(故鄕)에 은거(隱居)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 송숙문(宋淑文)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름으로써 추은(推恩)이 내려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에 증직(贈職)되었다. 본관(本貫)은 증손(曾孫) 송송례(宋松禮)가 여량(礪良:지금의 여산)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諡號)는 정렬(貞烈)로 3대 추은(推恩)으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추증(追贈)되었다. 여산송씨(礪山宋氏)는 송유익(宋惟翊)을 시조(始祖)로 모시는 성씨(姓氏)로 2015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全國)에 294,788명명이 거주(居住)하는 명문(名門) 거족(巨族)으로 중흥(中興)하였다.


시조(始祖) 송유익(宋惟翊)의 후손(後孫)들의 분파(分派)를 살펴보면 시조(始祖)의 5대손(代孫)에 이르러 좌부승지(左副承旨) 송방영(宋邦英), 광정소윤(匡靖少尹) 송원미(宋元美), 지신사(知申事) 송인(宋璘)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시(諡) 정가(正嘉)인 송서(宋瑞) 등 5개 파로 분파(分派)되었고 이들의 세거지(世居地)를 고찰(考察)해보면 시조(始祖) 송유익(宋惟翊)은 전북(全北) 익산시(益山市) 여산(礪山)에 은거(隱居)하고 묘소(墓所)가 그곳에 있고, 3世 송희식(宋希植) 이래(以來)로 수도(首都)인 개성(開城), 장단(長湍), 양주(楊洲) 등 경기(京畿) 지역(地域)에 선산(先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개성(開城) 부근(附近)에 세거(世居)한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원윤(元尹) 송운(宋惲)의 장남 송선(宋璿)은 태종비(太宗妃)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외조(外祖)로 (송선(宋璿)의 여식(女息)이 閔霽대감의 부인으로 민제(閔霽)의 여식이 원경왕후임) 삼중대광 여량군에 피봉 되었고, 그 후손들은 대구(大邱)에 세거(世居)했다.

송선의 8대손 송익필의 선조들은 황해도 배천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송익필은 경기도 고양에 거주하면서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의 피화시 형제인 부필, 한필을 잃고 유배생활을 하다가 사면되어 충남 당진군 당진읍 원당리 마양촌에서 졸(卒)하셨다. 후손들은 점차 산거하여 당진 송악면에 거주하고 있다. 원윤 송운의 6세손 시(諡) 충강(忠剛) 송간(宋侃)은 단종(端宗) 손위(遜位) 때에 영월에 복명하고 계룡산에서 단종의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후 흥양(전남 고흥)으로 낙향해 살았으나 그 후 후손(後孫)들은 전남 고흥에 집성촌을 이루는 등 많은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송간의 아우 송시(宋偲)와 송희(宋僖)는 형과 함께 흥양에 가 은거(隱居)하여 그 자손들은 강진에 세거하고 있다. 송간의 재종(再從) 송경원(宋慶元)은 단종 손위(遜位) 때 전북 임실에 잠적하여 그 후손들은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송운의 증손 충정공(忠靖公) 송거신(宋居信)은 태종이 잠저에 있을 때 구명지공(救命之功)으로 대현하고 그 자손들이 파주, 고양, 단산, 장흥 등지에 터를 굳혔다. 송운의 손자 송빈(宋贇)은 이조(吏曹)판서(判書)를 역임했으며 전북 부안에 예장하였으니 그 자손들이 부안 제주 등지에 뿌리를 내렸다. 송운의 5세손 송문은 덕산군에 봉해졌으며 그 후 영남에 터를 잡아 후손들은 영주, 봉화 횡성에 산거하였다. 송운의 손자 송극명(宋克明)은 단종 손위시 부산동래로 물러 나 그 후손들은 동래 부산 김해 등지에 산거하고 있다.


밀직공파는 밀직(密直) 송방영(宋邦英)의 손자 송인수의 사손은 강원도 철원으로 옮겨 갔으며, 송방영의 5세손 송승은(宋承殷)은 단종조 서기 1453년 처자(妻子)를 이끌고 남하하여 경남 김해 하계에 살기 시작해 이 지역에 산거하였고 송방영의 9세손 송득길(宋得吉)은 청송 진보에 이거하여 후손들이 그곳에 산거하고 있다.


소윤(少尹)공파는 송원미(宋元美)의 6세손 송석종(宋錫宗)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을 피하여 고부에서 화순 동면 천운산에 들어가 살았고 송원미의 4세손 증 도승지(贈都承知) 송륜(宋倫)의 아들 송극창 송득창 형제들은 단종조 계유정란을 목격하고 김제 금구에 은거하여 그 후손들이 이 지역에 산거하고 있다. 송득창의 후손들 가운데 송설(宋薛)은 만년에 김제에서 옥구로 이거한 뒤 그곳에서 터를 잡았고 송방영의 14세손 가운데 평안도 위원(渭原)에 정착(定着)한 자손(子孫)들도 있다.


지신공파는 지신(知申) 송인(宋璘)의 차남(次男) 수운(睡雲) 송교(宋郊)가 만년(晩年)에 전북 정읍에 속해있는 고부(古阜)로 퇴거한 이래 그 곳에서 많은 자손들이 살았고 송인의 10세손 송천종 대의 일부가 전남 무인으로 옮겨가 후손들이 양분되어 살았다. 수운(睡雲) 송교의 아우 송령(宋玲)은 여말(麗末) 농보진(籠堡鎭)에 유배(流配)되었다가 고려(高麗)가 망하자 그곳에 자리를 굳혔고, 송정(宋珵)의 후손(後孫)들은 강원도 강릉(江陵), 경상도 동래(東萊), 평안도 평원(平原)에 산거(散居)하였다.


정가공파(正嘉公派)는 정가공 송서(宋瑞)의 9세손(世孫) 송춘부(宋春富)의 후손들은 수원(水原)에 송서의 7세손(世孫) 송식(宋軾)의 후손(後孫)들은 충남 아산에, 송서의 11세손 송덕동(宋德東)의 후손(後孫)들은 연기 전동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송서의 11세손 송유경이 흥양에 살다가 영남지역으로 옮겨갔고 그의 아들 대에서부터 진주(晉州)에 정착했다. 송서의 7세손 회양(淮陽)부사(府使) 송자강(宋自剛) 이후 일부는 경북(慶北) 예천(醴泉)에 살다가 송서의 10세손 송경승(宋敬勝)의 자손들은 충남 당진으로 이거(移居)하였고, 송흥여(宋興礪)는 경주에 살기 시작했다. 송서의 12세손 송신량(宋愼良)은 제주도(濟州島)에 유배(流配)되어 그곳에서 자손들이 세거(世居)하게 되었고 송서의 6세손 송세휘(宋洗輝)는 연산조(燕山朝)의 정란 때 경상도 상주(尙州)로 피신(避身)하여 그곳에 자리를 잡았으며, 송철석(宋鐵石)은 충청도(忠淸道) 연산(連山)에서 함경도(咸鏡道) 길주(吉州)로 이거(移居)한 후 그곳에서 살았다.

집성촌(集成村)은 강원도 화천군 일원과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경북 칠곡군 북삼면, 제주도 남제주군, 평남 용강군 일원에 많은 자손들이 모여 살고 있다.


역 대 인 물

고려시대 인물

송유익(宋惟翊) : 고려조(高麗朝) 진사(進士)로 출사(出仕)를 하지 않고 향리(鄕里)에 은거(隱居)하였으나 아들 숙문(淑文)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름으로써 추은(推恩)이 내려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에 증직(贈職)되었고, 여산송씨(礪山宋氏)의 시조(始祖)이다.

송숙문(宋淑文) : 고려조(高麗朝) 중엽(中葉) 종이품(從二品) 관(官)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했다.

송희식(宋希植) : 관직은 삼재(三宰)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판호부사(判戶部事)를 추증(追贈)받고 묘(墓)는 개성군(開城郡) 서면(西面) 풍류동 유좌(酉坐)이다.

송송례(宋松禮) : 자(字)는 인립(仁立)이고 고려(高麗) 희종(熙宗) 3년(年) 서기 1207년 출생하고 관직(官職)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 상장군(上將軍) 판전리사(判典理司) 사(事) 거쳐 중찬(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으며 고려 중엽 왕실의 권위가 해이해져 정중부, 최충헌 임유무 등의 무단정치로 고려국의 왕정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권신(權臣) 최의(崔竩)를 토벌(討伐)하고 홍문계(洪文系)와 모의하여 송염(宋琰), 송분(宋玢)으로 하여금 역신(逆臣) 임유무(林惟茂)를 목베어 왕정을 복고하였자. 원종(元宗)을 몽고(蒙古)에서 맞아들여 왕정복고에 공을 세워 공신에 책록(策祿)되어 추성익재보리동덕좌명공신(推誠翊載輔理同德佐命功臣)의 호(號)가 내려졌고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피봉(皮封)되었다. 식읍(食邑) 1천호(千戶)의 철권(鐵券)을 내리고 운대(雲臺)에 도상(圖像)되었다. 충렬왕 2년 기축 서기 1289년 졸하였다.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이며 시양사(始陽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송 염(宋 琰) : 송송례의 장자이며 관직은 평장사다. 아버지 송송례의 뜻에 따라 임유무(林惟茂)를 토벌에 동참하여 고려의 왕정복고에 기여한 공으로 안사공신 낭산부원군에 피봉(皮封)되었고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며 시양사(始陽祠)에 배향되었다.

송 운(宋 惲) : 고려조(高麗朝) 관직(官職)은 광정(匡正)원윤(元尹)을 역임(歷任)했다. 문하시중 송송례의 손자이며, 문숙공 송염(宋琰)의 장자이다. 개성원윤을 지냈기로 그의 후손들은 원윤공파라고 한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기로 원윤(元尹)이란 요즘으로 말하면 서울특별시장에 해당된다.

송방영(宋邦英) : 고려의 대신, 상장군 송염의 아들, 1298년(충렬왕24) 장군으로 정절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오고 1300년 좌부승지, 이듬해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1303년 밀직(密直)부사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들어가 충선왕의 귀국을 방해한 죄로 구금되었다가 7월에 풀려 귀국했다. 이해12월에 다시 동지밀직부사(同知密直司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되었다. 1307년 卒하였다.

송원미(宋元美) : 고려조(高麗朝)에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역임했다.

송분(宋 玢) : 송송례(宋松禮)의 차자(次子)로 관직은 우중찬(右中贊)에 이르렀다. 사백(舍伯) 송염(宋琰)과 함께 고려(高麗)의 무단정치(武斷政治)를 종식(終熄)시키고 왕정복고(王政復古)에 동참(同參)하여 안사공신(安社功臣) 낙랑부원군(樂朗府院君)에 피봉(皮封)되고 시호(諡號)는 양의(良毅)이다. 시양사(始陽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송인(宋 璘) : 고려조(高麗朝)에 지신사를 역임했다.

송서(宋 瑞) : 송분(宋玢)의 아들로 재예(才藝)가 출중(出衆)하였고 조정(朝廷)에 출사(出仕)하여 여러 관직(官職)을 역임(歷任)하고 충혜왕(忠惠王) 원년(元年)에 감찰대부(監察大夫), 공민왕(恭愍王) 원년(元年) 보국익찬공신(輔國翊贊功臣).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피봉(皮封)되고 시호(諡號)는 정가(正嘉)이고 시양사(始陽祀)에 배향(配享)되었다.


조선조(朝鮮朝) 인물(人物)

송거신(宋居信) : 문숙공(文肅公) 송염(松琰)의 고손자(高孫子)이다.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이 임금이 되기 전(潛邸)에 사냥을 나갔다가 맹호(猛虎)를 만나 위기(危機)에 처(處)했을 때 이를 가로막아 김덕생(金德生)의 활에 맞아 범을 죽이니 호환(虎患)으로부터 태종(太宗)을 구하였다. 그 공(功)으로 태종(太宗)이 즉위(卽位)하여 원년(元年)에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大佐命功臣)에 책록(策祿)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우군도총제부사(右軍都摠制府事) 여산부원군(礪山府院君)에 교지(敎旨)를 내리고 시호(諡號)는 충정(忠靖)이다. 태종(太宗)의 어필(御筆) 교서(敎書)가 예술(藝術)의 전당(殿堂)에 보존(保存)되어 있고 시양사(始陽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송문림(宋文琳) : 충청도(忠淸道) 감사(監司) 송인산(宋仁山)의 아들이다. 세조(世祖) 3년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전라(全羅) 감사(監司) 병조(兵曹) 및 예조(禮曹) 참판(參判)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예종(睿宗)의 부고(訃告) 겸(兼) 시장사(諡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성종 3년 서기 1472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여성군(礪城郡)에 피봉(皮封)되고 성종(成宗) 7년 서기 1476년 졸(卒)하자 조정(朝廷)에서는 예장(禮葬)하고 공무(恭武)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시양사(始陽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송 간(宋 侃) : 개성(開城)원윤(元尹) 송운(宋惲)의 6세손(世孫)이다. 세종(世宗), 문종(文宗), 단종(端宗) 3대를 치사(致仕) 형조(刑曹)참판(參判) 왕명(王命)으로 호남순무사(湖南巡撫使)로 직무 수행 중에 수(首)양(陽)대군(大君) 이유(李瑜)가 고명대신(顧命使臣)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참살(慘殺)하는 계유정란(癸酉靖難)으로 집권(執權)하면서 단종(端宗)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감봉(減封)하여 영월(寧越)로 유배(流配)되자 그 곳에 가서 복명(復命)하고 여산(礪山)에 가 두문불출(杜門不出)하던 중 단종이 시해되자 재종(再從) 제(弟) 송경원(宋慶元)과 함께 계룡산(鷄龍山)에 들어가 초혼제(招魂祭)를 올리고 통곡(痛哭)하였다. 김시습(金時習), 조상치(曹尙治), 조여(趙旅), 정지산(鄭之産), 이성희(李成喜), 이번(李蕃) 엄흥도(嚴興道) 등(等)과 복상팔절(服喪八節)로 세인들의 숭상(崇尙)을 받았다. 흥양마륜촌에 숨어 살다가 생을 마치니 동학사의 초혼각 동서원 숙모전 시양사에 배향되고 숙종조에 충강(忠剛)으로 증시(贈諡)되었다.

송천희(宋千喜) : 좌찬성(左贊成) 송원의(宋元義)의 현손(玄孫)이며 예빈시(禮賓寺) 부정(副正) 송극창(宋克昌)의 아들이다. 형조(刑曹)참판(參判)과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고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로 재임(在任) 중(中) 경상도(慶尙道) 함양(咸陽)에서 미신(迷信)으로 백성(百姓)을 현혹(眩惑)시킨 무당(巫堂)을 장살(杖殺)하여 기강(紀綱)을 세웠으며 그 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고 청백리로 녹선 되었다. 시호(諡號)는 문(文)절(節)이고 대구(大邱)에 영당(影堂)이 있고 매동사(梅洞祀)와 시양사(始陽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송세림(宋世琳) : 군수(郡守) 송연손(宋演孫)의 2남으로 연산조(燕山朝) 임술(壬戌) 서기 1502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 등과(登科)하여 중종(中宗) 원년(元年) 병인(丙寅) 서기 1506년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策祿)되었다. 능성(綾城) 현령(縣令) 재임(在任) 이도(吏道) 쇄신(刷新)과 지방행정(地方行政) 개혁(改革)을 상소(上疏)하여 시행(施行)하였으며 문장(文章)과 서화(書畵)에도 뛰어나「어안질(禦眼木質)」을 저술(著述)허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조정(朝廷)에서 공(公)의 재략(才略)을 중(重)히 여겨 7차례나 천거(薦擧)하였으나 신병(身病)으로 불응(不應)했다. 정읍(井邑)에 있는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송세형(宋世珩) : 호(護)는 반곡(盤谷)이고 송세림(宋世琳)의 아우이다. 학행(學行)이 뛰어나 명종(明宗) 즉위(卽位) 후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策祿)되고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처벌(處罰)할 것을 상소(上疏)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계(他界)하자 왕이 특별히 치부(致賻)하고 예장(禮葬)을 치러주셨다.

송현수(宋玹壽) :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 송복원(宋復元)의 셋째아들이다. 단종(端宗) 갑술년 딸이 단종비(端宗妃)로 가례(嘉禮)를 치르자 돈령부(敦寧府) 지사(知事) 여산군(礪山君)이 되고 옛 친구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즉위(卽位)하자 돈령부(敦寧府) 판사(判事)가 되었으나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대간의 탄핵으로 처벌(處罰)의 대상(對象)이 되었으나 세조(世祖)의 두둔으로 무사(無事)했다. 그러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사사(賜死)된 후 정창손(鄭昌孫) 등 양사(兩司)의 주청(奏請)으로 주살(誅殺)되었다. 정조조(正祖朝)에 신원(伸寃)이 되고 정민(貞愍)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시양사(始陽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송질(宋 軼) : 도사(都事) 송공손(宋恭孫)의 아들이다. 임지성(林之盛)의 변란(變亂)을 미리 알고 진압(鎭壓)하여 형조(刑曹)참판(參判)이 되고 천추사(千秋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연산군 12년 서기 1506년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고 9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參與)하여 그 공(功)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었다. 우찬성(右贊成) 여산부원군(礪山府院君)에 피봉(皮封)되고 중종(中宗) 7년 서기 1512년 이조판서(吏曹判書) 우의정(右議政)에 다음해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시호(諡號)는 숙(肅)정(靖)이다. 셋째 사위 홍언필(洪彦弼) 외손(外孫) 홍(洪暹) 등(等)이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그의 딸이 영의정(領議政)의 딸로 영의정(領議政)의 부인(婦人)으로 영의정(領議政)의 어머니로 조선왕조(朝鮮王朝) 500년 내에 가장 행복(幸福)한 부인(婦人)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