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신평송씨시조(新平宋氏),송구진(宋丘進)

작성일 : 2017-04-18 22:17 수정일 : 2018-02-24 13:51

시 조

신평송씨(新平宋氏)는 여산송씨(礪山宋氏)의 시조(始祖) 송유익(宋惟翊)의 12세손 말선(末善)이 홍주(洪州) 의 신평(新平)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며 여산송씨에서 분적(分籍)하였으나 병화로 인하여 중간계대(中間系代)가 실전(失傳)되자 후손들이 홍주(洪州)와 신평(新平)으로 갈라져서 각각 달리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다.


본관의 유래

신평(新平)은 충청남도(忠淸南道) 홍성군(洪城郡)에 속해 있던 옛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사평현 (沙平縣)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신평(新平)으로 고쳐서 혜성(면천)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1018년(현종 9) 홍주(洪州)에 편입되었다. 조선 세종(世宗) 때 진(鎭)을 두었으며 뒤에 홍양현(洪陽縣)으로 강등되었고, 1914년 홍성군(洪城郡)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연산(連山)에 세거(世居)하며 고려조에서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서운관정(書雲觀正) 겸 습사도감판관(習射都監判官)을 지낸 송구진(宋丘進)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신평송씨(新平宋氏)는 그의 6세손 희경(希璟: 기주관 현덕의 아들)이 조선 세종(世宗)때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에 이르러 병조참판(兵曹參判) 구(龜)의 증손인 흠(欽: 찰방 가원의 아들) 희경의 현손(玄孫) 순(純) 등과 함께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급제한 흠(欽)은 승문원(承文院)에 있다가 연산군(燕山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후진교육에 전념,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로 복직하여 저작(著作) · 수찬(修撰) · 병조좌랑(兵曹佐郞) · 지평(持平) 등을 거쳐 담양(潭陽)과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내고 노모(老母)를 봉양하기 위하여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다가 여러 고을의 원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고을 원이 되어 부임할 때 말을 수십 필씩 몰고 부임하는 여느 수령과는 달리 꼭 말 세 필만 몰고 다녔으므로 ‘‘삼마태수(二馬太守)” 로 별칭 되었다. 한 마리는 자신이 타고, 다른 두 마리에는 어머니와 아내를 태웠고. 나머지 아들 손자들은 걷게 하여 부임했다고 하며, 효성이 지극하여 101세를 산 어머니로 해서 전후 7회에 걸쳐 효렴(孝廉)으로 상을 받았다.

그 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과 이조(吏曹) · 병조 판서(兵曹判書) · 우찬찬(右參贊) 등을 지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명성을 떨쳤다.

그가 여산군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고을 관아가 큰 길 옆에 있어서 높은 손님이 오가는 바람에 그들의 접대가 큰 골치거리였다. 일일이 크게 대접할 것이 없어 특별한 방법으로 술(酒: 속전에 감자술이 라고도 함) 을 만들어 고을에서 나는 특수한 산채로 안주 삼아 소찬으로 대접하곤 하였다.

이 흠(欽)의 청백(淸白)한 기지가 오히려 환심을 사고, 술 이름이 ‘‘호산춘(壺山春)”이라 하여 팔도에 유명해졌으며 먼 훗날에도 이 곳을 찾는 선비들이 여산 ‘‘호산춘”을 찾을 만큼 명주로 손꼽혔다. 한편 복천(福川 : 희경의 손 자)의 손자 순(純. 태의 아들)은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명종(明宗) 때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어 이기(李芑)의 탄핵을 받아 서천(舒川)으로 귀양갔다가 돌아와 선조(宣祖) 때 대사헌(大司l憲) ·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특히 그는 구파 사림(士林)으로서 이황(李混) 등의 신진사류와 대립했고,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로서 개성(開城)의 명기 황진이(黃眞伊)와 함께 시조문학(時 調文學)의 정수를 계승하여 명작을 남겼다. 만년에 치사(致仕)하고 담양의 제원봉 아래에 석림정사(石林精舍)와 면앙정(俛仰亭)을 짓고 독서와 가곡(歌曲)으로 소일하다가 91세로 여생을 마쳤다.

순(純)의 아들 해용(海容)이 현감을, 흠(欽)의 아들 익 침(益l"k)은 병조 참의를 각각 역임하고 공조 참의 지원 (之遠: 부사 현식의 7세손),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 事) 해령(海寧: 신의 아들), 감찰 석과(碩果),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 덕미(德美: 해룡의 아들)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으며, 참의 문설(文節)의 아들 징(徵)은 현종 (顯宗) 때 파당(派黨)의 분쟁이 격렬해지자 벼슬을 단념 하고 사림 (士林)에 묻혀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그 밖의 인물로는 현종 때 전시문과(殿試文科)에 급제하여 찰방(察訪)을 지낸 상문(尙問)과 감찰을 역임한 환국(煥國) · 한욱(漢旭)등이 유명했고, 한재(漢在)의 아들 생식(生植)은 참의(參議)를 역임하여 한말(韓末)의 독립투사 진우(鎭禹)와 함께 신푱송씨를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신평송씨는 남한에 13,91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