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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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18 18:21 수정일 : 2018-01-02 14:25

밀양손씨(密陽孫氏)의 연원

밀양손씨는 신라 6부촌장의 한분 이시고,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이시며. 신라 건국좌명(新羅 建國佐命)으로 충열군(忠烈君)의 시호(諡號)를 받고. 문의왕(文義王)으로 추봉(追封)되신 손씨독성원조(孫氏得姓元祖) 구례마(i具禮馬)의 원손(遠孫)으로 신라 42대 홍덕왕대의 대 효자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지고. 문효공(文孝公)의 시호(盆號)를 받으신 손순(孫順)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손순(孫順)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세가 기울어서 아내인 우잠태수(牛本太守) 백영(白永)의 따님 백씨(白氏)와 함께 늙으신 어머님(運烏)을 봉양하면서 가난하게 살아 갔는데 어린 아들(孫富)이 항상 노모의 음식을 뺏어 먹음으로 난처하기 그지 없었다.

손순은 아내 백씨와 의논하고 아이를 묻으려고 모량리(牟梁里) 북쪽 취향산(醉鄕ill)기슭에 업고 가서 묻으려 다가 땅에서 석종(石鐘)을 얻었다. 아내인 백씨가 땅에서 석종을 얻은 것은 어린 아기의 복인 듯하니 묻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하여 손순은 어린 아들을 업고 석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석종을 대들보에 매어 달고 두들겨보았더니 그 은은한 종소리가 대궐까지 둘려서 홍덕 왕이 그 종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들리는데 알아보라고 하여 사자가 알아본 후 왕에게 고하니 왕이 ‘‘옛날 한나라 곽거(郭巨)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이 금솥을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孫順)이 아들을 묻자 석종(石鐘)이 나왔으니 전세의 효와 후세의 효를 천지가 함께 살핀 것이다." 하고 집 한 채와 세급미 50석을 내리고, 벼슬을 주어 그 지극한 효도를 표창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시-에 기록되고, 명심보감 효행편에 실려서 전한다.

그 후 손순(孫順)은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지고 문효공(文孝公)의 시호(溫號)를 받았으며, 손순의 장남 손부(孫 富)는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이 되었으며. 손부(孫富)의 세 아들 중 장남인 손익감(孫翼減)은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관향을 밀양으로 삼아서 밀양손씨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밀양손씨는 시조 손순(孫順)7세손인 손공훈(孫競訓)이 중시조로 가문을 중흥시켰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밀양손씨는 남한에 306,89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신라시대 인물

손순(孫 順)(). 사구(士久) () 월성군(月城君) 시호(諡號) 문효(文孝) 득성원조 손구례마(孫供禮馬)31세 손이며, 손학산(孫鶴山)의 아드님이고 경주모량부 사람으로 신라 42대 홍덕왕때의 대 효자로서 기록 이 삼국유사와 명심보감 효행편에 실려서 그 아름다운 효행을 후세에 전하고 있는 손씨 시조이다.

손부(孫 富)손순(孫順)의 장남으로 이부상서의 벼슬을 지내고 청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손익감(孫翼減)손순(孫順)의 장손으로 응천군(凝川君: 密陽古號)에 봉해졌음으로 후손들이 밀양을 관향으로 삼았다.

 

고려시대 인물

손공훈(孫競訓)광리군(廣理君) 시호(論號) 무열(武烈) 손순(孫順)7세손으로 밀양손씨의 중시조이다. 밀양 호족으로 신라 말 왜구가 횡행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자 추화산성에서 왜적을 방어하니 국내가 편안하였고, 그 후 고려 대장군으로 고려태조를 도와서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개국에 공훈을 세워 개국 벽상공신이 되었으며,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에 추증되고, 광리군에 봉해졌다.

손형(孫 迪)시호(論號) 문열(文烈) 고려 태조원년 6월에 물장성령(物藏省令)에 이르고, 고려 태조 10년 에 대상이 되었으며, ()으로 사명(賜名)을 받았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通鑑)

손변(孫 抃): 개휘(改諱) 습경(襲卿)일휘(一諱) () 수주(樹州) 출신으로 고려 명종 27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이부정랑으로 출세한 이래 예부시랑 상서를 거쳐 천안부 판관이 되고, 신종 2년에는 역서승(驛署丞)을 지냈다. 고종 38년에 경상도 안렴사를 거치면서 명판관(名判官)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추밀원사와 참지정사를 거쳐 좌복야와 사공(司空)을 지내고 고종 38년에 세상을 떠나니 청백리에 녹선된 명신이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通鑑)

손빈(孫 貸)손순(孫順)19세손으로 고려 원종 (元宗)4년에 문과에 등과한 이래 누진하여 병부상서로 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을 겸직하여 여진토벌에 공을 세웠다. 그 후 이부상서를 거쳐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 에 오르고 수문전 대학사 감수국사에 이르고 승배하여 사도(司徒)를 제수받았으며,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지신 밀양손씨의 현조(顯祖)이다. (增補文獻備考. 東史. 密州誌)

손영(孫 榮)초휘(初諱) () 총열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 군사(郡事)를 지냈다.

손계견(孫季堅)일휘(一諱) 계경(季卿) 광정대부(匡靖大夫) 문하평리( 門下評理)를 지냈다.

손약수(孫若水)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 규정(司憲府 料正)을 지냈다.

손귀린(孫貴麟)문과에 급제하고 의주목사(宜州牧使)를 지냈다.

손기(孫 琦): (1282- ? ) 충숙왕 원년에 호군이 되고 이어 충숙왕 4년에는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충숙왕 14년에는 밀직사로 충숙왕을 시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어 재상에 올랐으며. 충혜왕 2년에는 강릉대군(공민왕)을 수행하여 충정왕 3년 평해부원군(平海府院君)에 책봉되고. 공민왕 원년 70세 되던 해에 연저수종공신으로 일등공신 녹훈을 받고 전민(田民)을 하사 받았으며 공민왕 원년 7월에 정승으로 치사(致仕)하였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通鑑. 增補文獻備考. 人名辭典 )

손책(孫 策)고려말에 문과에 급제. 수주목사(樹州牧使, 富平)를 지냈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이에 불복하여 처형되었다. 그의 처 원주이씨가 호남으로 피난하여 내려와 장남 검경(儉敬)은 나주에, 차남 유경(有敬)은 보성에. 삼남 계경(季敬)은 정읍에 세거 하였다.

손속재(孫淑才): () 사예(士藝). () 숙재(淑齋). 국자진사(國子進士)

손언(孫 彦)고려 우왕 때 밀직부사(密直副事)를 지냈다. (高麗史)

손수경(孫守卿)고려 충숙왕 때 첨의부 참리로 임명되고, 충숙왕 8년에 대호군이 되었으며, 충혜왕이 원나라에 피략 되었을 때에 호종한 공로로 일등공신의 녹공(錄功)을 받고, 충목왕 원년에 정2품 문하성 찬성사에 오르고, 충정왕 원년에 선력익대정원공신 판삼사사가 되고, 좌정승에 올라 의창부원군(義昌府院君)에 봉해졌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손윤주(孫允柱)고려에서 오위(五衛)의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손효정(孫孝貞)() 양지(養誌) () 남은(南隱) 우왕 11년 을축에 문과에 급제하고, 3품 중정대부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냈다.

 

조선시대 인물

손을봉(孫乙逢)사명(賜名) 을봉(乙逢) () 봉성군 (鳳城君) 조선 태조 7년 무인에 병조참판을 지 냈다.

손서륜(孫敍倫) ()는 돈중(敦中) 세종 때 문과에 급제 하여 집현전의 성삼문 등과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단종의 복위를 위하여 이보흠과 의거를 하려다가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손태좌(孫台佐) () 학음(鶴陰) 조선 중중조에 현감(縣監) 손순(孫順)25세손이며 대종가(大宗家)의 주손(胄孫)으로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거쳐 외재(外宰)로 현감(縣監)을 지내고 봉천사(鳳泉寺) 등에 세평(世評)에 관한 유시(遺詩)를 남겼다.

손인갑(孫仁甲): () 원백(元伯)() 후지당(後知堂) 조선 중종조에 무과에 급제 후 북보만호(北堡萬戶)를 거쳐 무국만침사로 가덕진첨절제사를 지냈으며 선조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규합 경상도관찰사 막하에 들어가 의병장으로 우지령(牛旨嶺)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마진전투에서 전사하여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밀양의 충효사에 모셔졌다.

손비장(孫比長) : () 영숙(永叔)() 입암(笠巖) 세조 9년에 온양별시(溫陽別試) 문과 을과에 급제하고 성종 7년에 문과중시갑과에 합격하여 예문관 직제학과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으며, 승정원 승지 이조참의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과 경연 참찬관 겸 상호군이 되고, 서거정 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찬진하고, 공조참의와 장예원(掌隸院) 판결사를 지냈다.

손상장(孫尙長) () 유구(j慈久), () 이암(頤菴) 진사(進士)로 있다가 성종 2년 신묘에 문과에 오른 이래 경산현령(慶山縣令)을 거쳐 가산군수(嘉山郡守)와 양산군수(梁山君守) 통례원 상례 (通禮院 相禮)를 지냈다.

손세응(孫世雍) : ( 1464 1526) () 시경(時卿), () 용강(龍岡) 연산군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부정(校書館 副正)으로 임관 후 누진하여 한산군수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다.

손수산(孫壽山)부과에 급제. 훈련원 첨정을 지냈다.

손집경(孫執經)성종 11년 문과에 오른 이후 누진하여 성균관 대사성 교리 박사(校理 博士)에 오르고 예조판서를 지냈다.

손화숙(孫和叔): (1371-1435) 세종때에 황강도 역승을 지냈다.

손양계(孫良桂) : () 춘우(春雨) 태종조에 문과에 올라 순천부사(順天府使)를 했다.

손유(孫 幼) () 중보(中甫) 고원군수를 지냈다.

손주(孫 湊) : 세종 때에 의주부윤을 지냈다.

손윤생(孫潤生): () 신지(身之), () 명천(明泉)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손사(孫 侯): () 효장(孝章)호 심제(審齋)시호 문헌 (文憲) 문과에 올라 평택 감무를 거 쳐 누진하여 예조판서에 올랐다.

손녹개(孫祿介)일휘(一諱) 수개(壽介) 무과에 급제. 병조시랑을 거쳐 병조참판에 올랐다.

손영제(孫英濟)() 鄒川 조선조의 문신(文臣)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도산서원을 중수하는데 사재를 헌상하였다.

손구회(孫龜希)선조조에 무과에 올라 부장이 되고,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전공을 세웠다.

손옹호(孫應虎): () 관백(寬伯) 선조때에 주부를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터져서 왜적이 진주성을 공략하자 김 천일과 협력하여 진주성을 사수하는데 층의 무략 보국 의 공훈을 세우고 남강에서 순사(殉死)했다. 조정에서 그 공로를 삼강지(三綱誌)에 고징(考徵)하고, 고종 때에 좌승지 겸 경연 참참관이 증직하였다.

손응록(孫應祿): () 수지(緩之)() 노천(蘆川) 선조때에 정유재란이 터지자 창의 군병을 이끌고 이순신 진영으로 들어가 종사관(從事官)으로 선단주사(船團舟師)가 되어 안골포해전에서 왜적을 크게 격침시켜서 전공을 세웠다. 그 공적을 기려서 고종 10년에 자헌 대부 호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손기양(孫起陽): (1559-1617) () 경징(景徽), () 오한(盤漢) 초호(初號) 송간(松磵) 선조 18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선조 21년에 식년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관된 후 경주제독(慶州提督)과 울 주판관을 거쳐, 영천군수와 창원부사를 지냈다. 광해군 4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그 후 상주목사를 제수받고 성리학자로서 역학에 전심했다.

손수(孫 洙)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를 거쳐 이조정랑을 했다.

손여흥(孫汝興): () 언술(彦述)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손여익(孫汝益): (1564-1633) () 군술(君述) 군자 감정을 거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손석윤(孫錫胤) 사헌부 지평, 병자호란 때 창의 하였고 충효정려를 받았다.

손상억(孫尙億) : () 화중(和中) 가선대부로 행용양위부호군 겸 한성판윤을 지냈다.

손기윤(孫起胤): (1605-1672) () 자승(子承) 현종때에 가선대부 이조참의를 역임했다.

손여양(孫汝揚) : (1572-1632) () 중술(仲述) 인조 때에 통정대부 어모장군으로 행훈련원주부를 지 냈다.

손상융(孫尙隆): () 덕미(德美), () 야옹(野翁) 숙종 때에 부사과(副司果)에서 용양위부호군 절충장군을 지냈다.

손흥적(孫弘韻): (1510-1549) () 언선(彦善)() 도봉(道峰) 중종 5년 경오에 출생하여 명종 4년 을사사화의 필화로 위원(淸原)의 적소(議所)에서 졸(하였다. 중종 35년에 진사가 되고, 389월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과 국제한림(國制翰林)을 지냈다.

손홍록(孫弘祿)임진왜란 때 오의(吳義)와 더불어 전주 사고의 왕조실록과 태조대왕 영정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보존하여 우리 문화사에 큰 공을 남겼다. 선조로부터 지평의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향리에서 평생을 마쳤다.

손승경(孫承憬): 임진왜란 때 당숙 손홍록을 따라 왕조실록 과 태조 영정을 보관하고 금산의 전투에서 조중봉(趙重峰)과 함께 전사하였다.

손익(孫 翼)명종때 강진현감을 거쳐 우후(處候)를 지냈다.

손응지(孫應智)주부(主簿)로서 임진왜란에 목사(牧使) 남유(南瑞)와 더불어 관음포(觀音浦)에서 싸우다가 남유가 적탄을 맞아 전사하자 대장(代將)으로 맞아 싸워 큰 공을 세웠다.수사(水使)에 증직 되었다.

손홍립(孫興立)수사(水使) 손응지 장남. 임진왜란 때 왕을 행재소(行在所)까지 호종하여 원종공신이 되었고 첨정(僉正)을 지냈다.

손실(孫 實) : (1608-1671) () 약허(若虛), () 손곡(遜谷) 무과에 급제 병자호란 때에 선봉장이 되어 용인 광교산 전투에 서 적을 대파 큰 공을 세웠다.

손창린(孫昌麟): (1796-1851) () 성로(聖魯) 헌종 때에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 부부총관을 지냈다.

손병직(孫秉直): (1823-1890) () 일여(一如) 고종 때에 오위장(五衛將)으로 가선대부 행용양위부호군을 지냈다.

손초상(孫楚相): (1711~1777) () 여현(汝賢) 3품 통정대부로 행용양위부호군을 지냈다.

손병문(孫秉文) : (1813~ ? ) 무과에 급제, 가덕진첨절제사로 통정대부를 지냈다.

손명래(孫命來) () 창사(昌舍) 문과에 금제하여 종6품 찰방(察訪: 역승)을 지 냈다.

손인필(孫仁弼)() 백일(百一)() 운계(雲溪) 봉직랑으로 수군자감첨지(守軍資監儉知)를 지냈다. 임진왜란에 큰 공을 세웠다.

손영조(孫永祚)() 여창(汝昌) 선략장군으로 호분위호군을 역임했다.

손인걸(孫仁傑): (1510-1563) () 회영(懷榮) 명종 때에 안골포만호를 지냈다.

손홍조(孫興祚)군위 현감으로 권농병마단련판관(勸農 兵馬團練判官)으로 통훈대부를 지냈다.

손원사(孫元嗣): () 여원(汝元) 진사로 있다가 문종 때에 종4품 사복시소경을 지냈다.

손혁(孫 突)() 대지(大之) 단종 때에 조봉대부로 익산군수와 고성군수를 지냈다.

손계조(孫綿祖)성종때에 무과에 급제. 남포수군첨절제사 와 창성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손형(孫 衡): 0499-1578) () 중향(仲香) 중종 때에 어모장군으로 충무위부사직을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 경연참찬에 증직되었다.

손확(孫 確)() 자고(子固), () 매당(梅當) 정략장군으로 행용양위부호군을 지냈다.

손축(孫 軸)성종 때에 통훈대부 승정원 좌승지가 되었고, 후에 증직을 받아 정헌대부 겸 의금부사 춘추관 성균관 홍문관 대제학이 되고,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 賓客)을 지냈다.

근대 인물

손정도(孫貞道) : (1872-1931) () 호건(浩乾) () 석해(石海) 평남 강서 출생.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 한 후 1912년 만주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길림에서 독립투사 가족과 영세농민들의 생계와 영농에 크게 기여 하는 한편 종교활동을 통한 교육사업을 하다가, 만주 하르빈에서 일본수상 가쯔라(桂太郞)를 암살하려다 왜경에 체포되어 진도에 감금되었고 1914년에 석방되었다. 3.1운동 후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의정원의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2년 도산 안창호(安昌浩)와 흥사단에 참여하여 주요한(朱曜翰) 등과 흥사단보를 간행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였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 되었다.

손일민(孫一民): (1888-1940) () 매당(梅當)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 회인현(滿洲 懷仁縣)으로 이주하여 광복회에 참가 1918년 만주주재 한민족 대표 39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 1931년 중국 중경에서 한국독립단, 신한독립단, 조선혁명단, 의열단, 미주한인독립단을 통합하여 1935년 민족혁명단을 결성했으며,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다.

1963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손병희(孫秉熙): (1861-1922) () 의암(義庵)

철종 12년에 충북 청주 북이면 대주리에서 출생. 3.1 민족독립선언 민족대표. 1882년 고종 922세 때에 동학에 입교 최시형 선생의 수제자가 되고 189434 세에 동학교 통령(統領)으로 북접의 동학군을 총지휘하여 남접의 동학군 전봉준 장군과 합세하여 관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과 강계 등지로 은신했다. 189737세에 동학교주 최시형으로부터 도통(道統)을 계승받아 3년동안 지하에서 교세를 확장. 1901년 일본 경유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으로 개명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오세창, 박영효 등을 만나 국내정세를 듣고 토론 끝에 1903년 귀국하여 청년들을 2차에 걸쳐서 일본으로 유학시켰다. 190444세때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단발령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했다.

1906년 진보회와 일진회(一進會)를 합병하고, 동학의 명칭을 천도교(天道敎)로 고치고 제3대 교주로 취임 했다. 190848세시 천도교 대도주직(大道主職)을 춘암 박인호(春菴 朴寅浩)에게 전수하고, 1910년 한일합 방이 되자, 보성 전문학교와 보성고보를 인수하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를 부설하고 천도교 월보를 발간했다. 191931일을 기해 조선독립 만세운동을 일으켜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왜경 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고문의 간고를 치루 고 이듬해 10월에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192262세로 작고하였다. 196231일날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손화중(孫華仲): 동학의 접주(接主)로서 갑오동학혁명에 전봉준과 더불어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척양척왜에 헌신하다 동학혁명의 실패로 순국하였다.

손호(孫 澈) : ( 1897-1936) () 목여 (穆汝)() 경암(敬菴) 광무 원년에 출생 1936년에 39세로 옥중에서 사망. 1919년 기미독립만세 이후 상해임시정부 국내모금원으로 활약하여 1928년 군자금 조달 차 출국하다가 신의주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어 1929년 경성지법 에서 10년형을 확정받고 경성형무소에 투옥되어 193677일 옥중에서 사망했다. 광복 후 독립유공자로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