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안동일직손씨(安東一直孫氏),안동손씨,일직손씨,손응(孫凝),안동일직손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8 16:18 수정일 : 2018-02-20 18:08

시 조

일직손씨(一直孫氏)는 안동손씨(安東孫氏)라고도 칭(稱)하며, 그 선계(先系)는 고려(高麗) 때 중국(中國) 송(宋)나라의 나세를 피하여 우리나라에 귀화(歸化)해온 손응(孫 凝)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본성(本姓)이 순씨(荀氏)였으나 고려(高麗) 현종(顯宗 : 제8대 왕, 재위기간 : 1009~1031)의 이름이 순(詢)이어서 그 음(音)이 같다고 하여 손씨(孫氏)의 성(姓)을 하사(下賜)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그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은 고려 때 장군(將軍)을 지낸 간(幹)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복주(福州 : 지금의 안동군 일직면 송리동)에 자리잡아 살면서 본관(本貫)을 일직(一直)으로 삼게 되었다.

본관의 유래

일직(一直)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군(安東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일직현(一直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일녕(一寧)을 고쳐서 고창군(古昌郡)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고려(高麗) 초에 다시 일직이라 하고, 1018년(현종 9) 안동(安東)에 편입하여 지금도 안동군에 속한 일직면(一直面)으로 남아 있다.

대표적인 인물

일찍이 고려시대에 일직(一直) 고을의 주인(主人)으로서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져온 일직손씨는 중시조 간(幹)의 6세손 홍량(洪亮)이 1287년(충렬왕 13) 일직에서 출생하여 6대의 왕조(王朝)를 거쳐면서 벼슬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고 복주 부원군(福州府院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특히 그는 40여 년의 벼슬길에서 나라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사양(斜陽)이 뉘엿거리는 고려 말기의 어려운 국정(國政)에 크게 이바지하다가 1351년 (충정왕 3) 65세로 치사(致仕)하여 향리(鄕里)에서 운학(雲鶴)을 벗하여 여생을 보냈으며,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복주(福州)에 피란하는 공민왕(恭愍王)을 중도에서 평복으로 맞이하여 난국에 대한 수습책을 진언하니 왕이 그의 충의에 감탄하여 “충정이 하나같이 곧은 사람이 늙을수록 나라 위한 마음이 더하도다(子誠一直人 老而益篤)”라는 어시(御詩)와 함께 정평공(靖平公)의 시호(諡號)를 하사하였다.

1364년 난의 평정을 축하하러 개경(開京)에 갔더니 왕은 영정(影幀)과 구절산호용장(九節珊瑚龍杖 : 용을 아로새긴 아홉 마디의 산호 지팽이)을 내리며 “경의 두 아들도 나를 섬기도록하라”고 당부했다. 그후 그의 맏아들 득수(得壽)는 정순대부(正順大夫)로 밀직사 좌대언(密直司左代言) 등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초계 군수(草溪郡守)를 지낸 아들 웅발(雄發)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으며, 차남 득령(得齡)은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전공 판서(典工判書) 겸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지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가맥(家脈)을 이은 인물로는 복주부원군 홍량(洪亮)의 증손 관(寬 : 영유의 아들)이 진성 현감(眞城縣監)을 지내고 밀양(密陽)의 용평리(龍坪里)로 이거(移居)하여 그 곳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어 오늘날 밀양군 산외면 다원리(密陽郡 山外面 茶院里)를 비롯한 영천(永川), 김해(金海) 등지에 취락(聚落)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조서(肇瑞)가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병조 정랑(兵曹正郞) 등을 거쳐 봉산 군수 (鳳山郡守)로 나갔다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은거하며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학문(學問)이 뛰어나고 경전(經典)과 도학(道學)에 정통하여 「심경연의(心經衍義)」와「근사록연의(近思錄衍義)」를 저술했으며 시문(詩文)의 대가로서 당대의 석학(碩學) 김종직(金宗直)과 친교가 두터웠고, 문하(門下)에서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 등과 같은 거유(巨儒)를 배출하여 명망이 높았다.

그가 죽은 먼 훗날 정조(正祖) 임금은 예조(禮曹)에 명하기를 “한림 손조서는 드높은 명망과 절조가 있어 일컬을 만한데, 어찌하여 인물조에 올려 상세히 주를 달지 않은가(翰林孫肇瑞 卓卓有名節 可稱而何不入人物條, 詳細懸注也)”라는 유시(諭示)를 내렸으며, 1812년(순조 12)에는 이조 참의(吏曹參議)와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증직하고 그 자손에게 잡역(雜役)을 면하게 하였다.

그 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모아 왜적(倭賊)과의 싸움에서 눈부신 훈공을 남긴 처눌(處訥)과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단성 현감(丹城縣監)을 지내고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한 인(遴 : 덕운의 아들)이 유명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필억(必億)의 아들 명대(命大)는 숙종(肅宗) 때 선전관(宣傳官)과 진도군수(珍島郡守)를 지내고 영조(英祖) 때 역신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에 승진하였으며 훈련도감 별장(訓練都監別將)과 선천 방어사(宣川防禦使)를 역임하여, 현감을 지낸 처신(處愼)․숙(璹) 좌랑(佐郞) 단(湍) 등과 함께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전통가문(傳統家門)인 일직손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안동손씨(安東孫氏)는 16,922명 일직손씨(一直孫氏)는 10,2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안동일직손씨조상인물

손간(孫 幹) 고려조(高麗朝)에 장군(將軍)을 지냈다.

손홍량(孫洪亮) 1287년(충렬왕 13) ~ 1379년(우왕 5)

시호(諡號)는 정평(靖平). 충선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 충숙(忠肅)․충혜(忠惠) 양조에 벼슬하고, 1348년(충목왕 4)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349년(충정왕 1) 추성보절좌리공신(推誠保節佐理功臣)에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고, 이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으며, 이듬해 복주부원군(福州府院君)으로 봉해지고, 1351년 치사(致仕)했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紅巾賊)의 난으로 복주(福州)에 피란하는 왕(王)을 중도에서 평복으로 맞아 치하를 받았고, 1364년 난의 평정을 축하하러 서울에 갔다가 왕으로부터 궤장(几杖)과 자기 초상화를 받았으며, 돌아올 때 이제현(李齊賢)․이 색(李 穡) 등 학자들이 시를 지어 전송했다.

손득수(孫得壽) 정평공(靖平公)의 맏아들.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문과(文科)에 급제, 정순대부(正順大夫)로 밀직사 좌대언(密直司左代言)을 거쳐 지삼사(知三司)를 역임했으나, 고려(高麗)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손득령(孫得齡) 정평공(靖平公)의 둘째 아들. 고려조(高麗朝)에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전공판서(典工判書) 겸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지냈다.

손영유(孫永裕) 좌대언(左代言) 득수(得壽)의 아들. 조선조(朝鮮朝)에 검교(檢校)․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르렀다

손웅발(孫雄發) 좌대언(左代言) 득수(得壽)의 아들. 고려말(高麗末)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초계 군수(草溪郡守)를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자 은퇴하였다.

손원유(孫元裕) 조선조(朝鮮朝)에 나라에 공을 세워 일직군(一直君)에 봉해졌다.

손관(孫 寬) 영유(永裕)의 아들. 조선조(朝鮮朝)에 진성 현감(眞城縣監)을 역임하였다.

손조서(孫肇瑞) 자(字)는 인보(引甫), 호(號)는 격재(格齋), 초호(初號)는 면재(勉齋), 현감(縣監) 관(寬)의 아들. 학문과 시문(詩文)의 대가로서 김종직(金宗直)과 친교가 있었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등의 제자를 두었다.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을 지내고 집현전(集賢殿)에 보직, 봉산 군수(鳳山郡守)에 이르렀다. 1456년(세조 2)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던 성상문(成三問) 등이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隱居),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대구(大邱)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손처눌(孫處訥) 조선 때 기사(騎射)에 능(能)한 무사(武士)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아 의병장(義兵將)으로 추대(推戴)되어 의병을 이끌고 왜적(倭賊)과 싸워 많은 공(功)을 세웠다. 대구(大邱)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손인(孫 遴) 1566년(명종 21) ~ 1628년(인조 6)

자(字)는 계진(季進), 호(號)는 문탄(聞灘), 덕운(德雲)의 아들, 정 구(鄭 逑)의 문인. 대구(大邱) 출신.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11년 이 황(李 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 권신(權臣) 정인홍(鄭仁弘)을 공박함으로써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혔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단성 현감(丹城縣監)이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활약했고, 대구의 봉암사(鳳巖祠)에제향(祭享)되었다.

손처신(孫處愼)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손단(孫 湍) 조선 때 좌랑(佐郞)을 지냈다.

손필억(孫必億) 조선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손명대(孫命大) 1675년(숙종 1) ~ 1733년(영조 9)

자(字)는 칙천(則天),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필억(必億)의 아들. 1697년(숙종 23)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며, 진도 군수(珍島郡守)를 거쳐 1727년(영조 3) 여산 부사(礪山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 겨울 운봉 영장(雲峰營將)에 취임,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에 승진했다. 훈련도감 별장(訓練都監別將)․선천 방어사(宣川防禦使) 등을 거쳐 1733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부임 도중 강진(康津)에서 병사했다.

손숙(孫 壽)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