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창녕성씨시조(昌寧成氏),성인보(成仁輔),창녕성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8 08:42 수정일 : 2018-03-05 11:54

창녕성씨 연원

성씨(成氏)의 본관(本貫)은 창녕(昌寧)이다.

창녕성씨시조(始祖) 중윤공(中允公)께서 창성(創成)할 시기 이전부터 누대 세거지(累代 世居地)였던 것으로 본다. 그리고 성씨(成氏)는 단본(單本)이다.

인구 규모는 적은 편이지만 고려조와 조선조를 통하여 많은 석학(碩學)과 절신(節臣)이 나오고 벼슬 열력(閱歷)이 뛰어나 조선조의 쟁쟁한 명문(名門)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창녕(昌寧)은 신라 때에는 비자화군(比自火郡)이라 했고, 진흥왕 이후는 하주(下州) 또는 하산(夏山)이라 칭()하다가 고려 태조 때부터 창녕(昌寧)이라 개칭(改稱) 했는데 이곳이 바로 시조 중윤공(中允公) 이후 30여대(三十餘代) 800여년간(八白餘年間) 창녕성씨(昌寧成氏) 모두의 고향이 되었으며 세세부절(世世不絶)의 요람지(搖籃地)가 되었다.

시조(始祖) 중윤공(中允公) () 인보(仁輔)의 출생년대나 창성년대(創姓年代)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창녕성씨가 시조로부터 오늘날까지 꼭 몇 년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조공의 현손(玄孫)이 되는 이헌공(怡軒公) () 여완(汝完)의 출생년대가 고려 충선왕 원년(1309)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 년대를 기준해서 일대(一代)30년으로 역산(逆算)해 보면 대략 고려 명종 19(1189)에 해당된다.

그리고 창성년대는 시조공의 장년성숙기(壯年成熟期)40세 경으로 보면 대략 고려 고종 16(1229)으로 추측(推測)된다고 하였다.


시조 중윤공(中允公)의 묘()는 대지면 모산리(大池面 牟山里) 뒤 맥산(麥山)에 있는데

始祖高麗中允成公仁輔之墓라는 묘갈(墓碣)과 함께 나지막한 봉분(封墳)을 이루고 있다.

시조께서는 고려 중기(中期) 명종고종 때 창녕의 토호(土豪)로서 호장(戶長)이 되어 창녕지역을 다스리며 매년 정초(正初)에 예궐숙배(詣闕肅拜)하거나 경사(慶事)를 맞는다든지 할 때 상경숙배(上京肅拜) 하는 것이 중요(重要) 임무(任務)였으므로 송경(松京) 조정(朝廷)을 래왕(來往)하면서 호장(戶長)으로서 능력(能力)을 인정(認定)받아 동궁(東宮)의 시종예의(侍從禮儀)를 맡아보던 예관(禮官) 중윤(中允)으로 발탁(拔擢)되어 근무(勤務)하시다가 어느 때 갑자기 병을 얻어 동궁(東宮)을 나와 경저(京邸)에 머물면서 치료(治療)를 받던 중 갑자기 서거(逝去)하시니 나라에서 우마차(牛馬車)와 장례비(葬禮費)를 내렸으나 아드님이신 송국(松國)께서는 자식의 효심이 부족하여 돌아가시게 되었다면서 사양하시고 몸소 아버님의 시신을 지고 천리의 먼길을 걸어서 왔으므로 이 일을 천리부시(千里負屍)라고 한다.

여러 날이 걸려서 현풍현(玄風縣)에 당도하니 창녕험리(昌寧險里- 今 昌寧 末屹里)에 있는 거택(居宅)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출발하여 얼마 안 가서 날도 저물고 많은 눈이 쌓여 도저히 더 갈 수가 없어서 창녕청산원(昌寧靑山院- 시추말리) 바깥채 마루에 시신(屍身)을 모시고 밤을 지나 새벽에 보니 시신 주변의 눈 위에 범이 둘러간 발자국이 있어 이상히 여겨 따라가 보니 지금의 맥산(麥山) ()자리까지 와서 범의 발자국은 사라지고 자리 한 장 깔만한 넓이만큼 눈이 녹아 있어 그곳에 안장(安葬)하니 이곳이 바로 자손만대(子孫萬代) 부절(不絶)의 설중호적처명당(雪中虎跡處明堂)이라는 곳이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아드님이신 송국(松國)께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귀하게 되셨으니 사람들은 효성(孝誠)에 감응(感應)되어 그렇게 된 것이라 하며 창녕성씨가 이때부터 중앙조정(中央朝廷)의 관직(官職)에 진출하여 명문(名門)으로 성장(成長)하게 된 것이다.


시중(侍中) () 송국(松國)께서 판서(判書) () 공필(公弼)과 찬성(贊成) () 한필(漢弼) 형제분(兄弟分)을 두셨는데 이 형제분에서 판서공파(判書公派)와 찬성공파(贊成公派), 양파(兩派)로 분파(分派)되어 노상(路上), 노하(路下)가 되었다.

창녕초등학교 동편에 나 있는 길을 사이에 두고 형인 판서공(判書公)은 동편 길 위에 살았다하여 노상(路上)이라 하고 동생인 찬성공(贊成公)은 서편 길 아래 살았다하여 노하(路下)라 했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이후 판서공파(判書公派)에서 10파가 형성(形成)되고 찬성공파(贊成公派)에서 3파가 형성(形成)되어 6세조(六世祖)를 파조(派祖)로 하여 13파로 분파(分派)되었다.

성기(成紀)의 후손은 판서공파(判書公派), 성석린(成石璘)의 후손은 독곡공파(獨谷公派), 성석용(成石瑢)의 후손은 회곡공파(檜谷公派), 성석연(成石珚)의 후손은 상곡공파(桑谷公派), 성석번(成石璠)의 후손은 낭장공파(郎將公派), 성연(成連)의 후손은 판사공파(判事公派), 성준(成遵)의 후손은 시랑공파(侍郞公派),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은 정절공파(貞節公派), 성태준(成台俊)의 후손은 사인공파(舍人公派), 성사준(成士俊)의 후손은 좌랑공파(佐郞公派), 성갑신(成甲臣)의 후손은 평리공파(評理公派), 성을신(成乙臣)의 후손은 검교공파(檢校公派), 성언신(成彦臣)의 후손은 지사공파(知事公派)로 분파(分派)되었다.

여러 사적(史蹟)에 있는 선세(先世)의 명현(名賢)들을 뽑아서 분야별로 분류(分類)해 보면 고려조 때 문과급제(文科及第) 6명을 배출(輩出)하여 정승(政丞) 2, 문형(文衡) 1, 대제학(大提學) 1, 충절신(忠節臣) 3명 등 명신(名臣)이 배출(輩出)되었으며 특히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분이신 성사제(成思齊)와 성부(成溥)는 이름난 고려의 충절신이다.


조선조 문과 방목(文科 榜目)에 보면 138명의 문과 급제자(文科 及第者)를 배출(輩出)하였으며 성석린(成石璘), 성석용(成石瑢), 성석연(成石珚) 3형제가 조선개국(朝鮮開國)에 참여(參與)하여 고관(高官)에 오름으로서 가문(家門)에 번성(繁盛)을 가져왔다.

문묘배향(文廟配享) 1, 종묘배향(宗廟配享) 1, 정승(政丞)5, 문형(文衡) 2, 대제학(大提學) 4, 호당(湖堂) 5, 청백리(淸白吏) 5, 충신(忠臣) 2, 장군(將軍) 1, 임란창의(壬亂倡義) 의병장(義兵將), 조전장(助戰將), 고을 수령(首領) 8, 이 외에도 사()와 원()에 배향된 분이 44, 봉군(封君)을 받은 분이 26, 불천위(不遷位)10, 공신(功臣)72, 경연관(經筵官)과 경연강독관(經筵講讀官)5, 시호(諡號)를 받은 분이 39, 다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절신(節臣)과 석학(碩學)을 배출하여 명문(名門)의 이름을 떨쳤다.

이상과 같이 고관대작(高官大爵)을 많이 낸 벌열(閥閱)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분인 성사제(成思齊)와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 생육신(生六臣) 성담수(成聃壽)와 같은 충절신(忠節臣)을 배출하여 절개(節槪)로 이름난 문중이기도 하다.

우리 성씨(成氏)는 시조 중윤공(中允公)께서 창녕(昌寧)땅에 뿌리를 내리신지 800여년으로20여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推算)되며 258개 성씨(姓氏) 가운데서 36위를 차지하는 동방(東邦)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이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창녕성씨는 남한에 182,3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창녕성씨조상인물

성송국(成松國)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성공필(成公弼) 고려(高麗) 때 전객부령(典客副令)을 역임하였다.

성한필(成漢弼) 고려에서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성여완(成汝完) 1309 (충선왕 1) 1397 (태조 6)

()는 이헌(怡軒),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판도 총랑(版圖摠郞) 군미(君美)의 아들. 1336(충숙왕 5) 문과(文科)에 급제, 예문춘추검열(藝文春秋檢閱)을 거쳐 군부 정랑(軍簿正郞)이 되어 양광도(楊廣道)를 안렴(按廉)하고 상서 우승(尙書右丞)․지형부사(知刑部事)․어사중승(御史中丞)․전법 판사(典法判事)를 지냈다.

그후 해주(海州)․충주(忠州)의 목사(牧使)을 역임하고 공민왕 때 민부 상서(民部尙書)를 거쳐 우왕(禑王) 때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商議)에 이르러 창녕부원군에 봉해졌다.

1392(태조 1)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졌음을 알고 포천(抱川) 왕방산(王方山)에 들어가 은거했다. 조선 개국 후에 노인직(老人職)으로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로 봉해졌으나 사퇴하고 절개를 지켰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성준득(成準得) ()는 동고(東皐). 1370(공민왕 19) 총부 상서(摠部尙書)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악기와 육경(六經)․사서(四書)․통감(通鑑)․한서(漢書) 등의 책을 가지고 돌아와 고려조의 대성악(大晟樂 : 아악) 줄거리를 이룩했다.

또한 앞서 원나라에 시집가서 원나라 멸망과 함께 연경(燕京)에서 실종되었던 장녕 공주(長寧公主 : 충혜왕의 딸)를 이때 찾아내어 데리고 돌아왔다.

성석린(成石璘) 1338 (충숙왕 복위 7) 1423 (세종 5)

()는 자수(自修), ()는 독곡(獨谷), 시호(諡號)는 문경(文景), 부원군 여완(汝完)의 아들. 1357(공민왕 6)에 문과(文科)에 급제, 학유(學諭)․직사관(直史館)․삼사 도사(三司都司)․전의 주부(典議主簿)․전리 좌랑(典理佐郞)․전교 부령(典校副令)․전리 총랑(典 理摠郞)을 지낸 후 신 돈(辛 旽)에 아부하지 않아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나갔다가 다시 불리어 성균사성(成均司成)이 되고, 밀직대언(密直代言)․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

1384(우왕 10)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있을 때 왜구(倭寇)가 승천부(昇天府)에 쳐들어오자,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원수 양백연(楊伯淵)과 함께 출전하여 적을 격퇴하고 수성좌리공신(輸誠佐理功臣)이 되었으며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다.

양백연의 옥사(獄事)에 연루, 함안(咸安)의 수졸(戍卒)로 충군(充軍)되었다가 풀리어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졌다. 그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어 양광도 도관찰출척사(楊廣道觀察黜陟使)가 되고, 이때 의창(義倉)의 설립을 건의하여 각 도에 의창을 설치케 했다.

이어 문하평리 겸 대사헌(門下評理兼大司憲)이 되었고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게 우왕에 뒤이어 창왕을 폐하고 공민왕을 세워 그 공으로 찬화공신(贊化功臣)에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으며,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이 색(李 穡)․우현보(禹玄寶)의 일당으로 한때 추방,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을 거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을 역임, 1399(정종 1)에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평양 부윤(平襄府尹)을 거쳐 문하 우정승(門下右政丞)이 되고 창녕백(昌寧伯)에 봉해졌으며 좌정승에 올랐다.

1401(태종 1) 좌명공신(左命功臣) 3등으로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1415년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시사(詩詞)에 뛰어났고 초서(草書)를 잘 썼다.

성석용(成石瑢) 1352 (공민왕 1) 1403 (태종 3)

()는 백옥(伯玉), ()는 회곡(檜谷),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부원군 여완(汝完)의 아들. 1376(우왕 2) 문과(文科)에 급제, 밀직부사(密直副使)․제학(提學) 등을 지내고 공양왕(恭讓王) 말에 형 석린(石璘)과 함께 이 색(李 穡)․우현보(禹玄寶)의 일파로 몰려 한때 귀양살이를 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책록되어 개성 유후(開城留後)․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다.

성석연(成石珚) ? 1414 (태종 14)

()는 자유(自由), ()는 상곡(桑谷), 시호(諡號)는 정평(靖平), 창녕부원군 여완(汝完)의 아들. 1377(우왕 3) 문과(文科)에 장원, 지평(持平)․경연 강독관(經筵講讀官)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예조 판서(禮曹判書)․대제학(大提學)을 거쳐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 都觀察使)․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우군 총제(右軍摠制)등을 역임, 1406(태종6) 류 관(柳 觀)과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헌(大司憲)․우정승(右政丞)․형조․호조의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성석번(成石璠) 조선(朝鮮) 때 낭장(郎將)을 지냈다.

성사제(成思齊) 시호(諡號)는 정절(貞節).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역임하였다. 1392년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개국하자 탄식하며 「누대에 고려왕조에 은혜를 입은 집안이 어찌 하루아침에 변절하랴. 차라리 왕씨의 귀신이 될지언 정 이가(李家)의 신하는 될 수 없다」하고 가족들과 작별하면서 망국의 한을 품고 동지들과 만수산(萬壽山)으로 들어가 속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세상을 마쳤다. 경남 창녕(昌寧)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 되었으며 정절공파조(貞節公派祖)가 되었다.

성달생(成達生) 1376 (우왕 2) 1444 (세종 26)

()는 효백(孝伯), 시호(諡號)는 양혜(襄惠), 유후(留後) 석용(石瑢)의 아들. 1390(공양왕 2) 생원(生員)이 되고, 음보(蔭補)로 낭장(郎將)이 되었다. 태종(太宗)의 잠저(潛邸) 때부터 총애를 받았고 그가 세자에 책봉되자 그의 추천으로 호군(護軍)에 승진했다.

1402(태종 2) 처음으로 시행된 무과(武科)에 장원, 대호군(大護軍)에 특진되고, 흥덕진 병마사(興德鎭兵馬使)가 되었다. 1408년 왜구(倭寇)가 변경에 침입하자 이를 격퇴했고 1410년 무과중시(武科重試)2등으로 급제, 판예빈사사(判禮賓寺事)에 올랐다.

1413년 판성주목사(判星州牧使)․경성 절제사(鏡城節制使)를 역임하고, 1416(태종 16)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전라도 관찰사(全羅道館察使) 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승진, 1418(태종18) 삼번 절제사(三番節制使)․도총사(都摠使)․별운검(別雲劒)․함길도 병마절도사(咸吉道兵馬節度使) 겸 판길주 목사(判吉州牧使) 등을 거쳐 이듬해 중군 총제(中軍摠制)․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1420(세종 2) 경상우도 수군도안무처치사(慶尙右道水軍都按撫處置使)․경상우도 병마절제사(慶尙右道兵馬節制使)를 겸직했다.

1422년 좌군 총제․평안도 관찰사에 전직되고, 1425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황주 선위사(黃州宣慰使)를 겸직, 1427년 공조 판서, 이어 도총제(都摠制)․함길도 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영길주목사(領吉州牧使) 등을 지냈다. 1435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1440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었다. 서찰(書札)을 잘 썼다.

성암(成 揜) 시호(諡號)는 공도(恭度). 조선(朝鮮) 때 중추원사(中樞院事)를 지냈다.

성억(成 抑) 1386 (우왕 12) 1448 (세종 30)

시호(諡號)는 희정(僖靖), 판서 석연(石珚)의 아들. 음보(蔭補)로 공정고 주부(供正庫主簿)가 되고 감찰(監察)․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공조 좌랑(工曹佐郞)․공조 정랑(工曹正郞) 등을 역임했다.

1414(태종 14) 군자부정(軍資副正)에 이어 동부대언(同副代言)․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공조 참판(工曹參判)․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공조 판서(工曹判書)․우찬성(右贊成) 등을 지냈다.

그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하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딸이 태종의 네째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에게 출가했으나 성녕대군이 일찍 죽자 몹시 애통해한 태종이 세종에게 지시함으로써 성씨(成氏) 일족이 공신(功臣)으로 대우받게 되 었다.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성원규(成元揆) ? 1382 (우왕 8)

시호(諡號)는 간헌(簡憲). 공민왕(恭愍王) 때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선정을 베풀어 1358(공민왕 7)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가 되고, 이어 동북면 병마사에 발탁되었다.

1362년 홍건적(紅巾賊) 침입 때는 전주도 병마사(全州道兵馬使), 이듬해 나주도 병마사(羅州道兵馬使)가 되었다. 1372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성사달(成士達) ? 1380 (우왕 6)

()는 역암(易菴), 시호(諡號)는 문효(文孝), 군수(郡守) 언신(彦臣)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1362(공민왕 11) 홍건적(紅巾賊) 침입 때 판전교시사로서 왕을 호종, 이듬해 돌아와 추충협익공신(推忠協翊功臣)이 되었다.

이해 김 용(金 鏞)의 반란을 평정하여 1등공신이 되고, 1364년 교주도 병마사(交州道兵馬使)가 되어 여진(女眞)의 삼선(三善)․삼개(三介)의 침입을 막았다. 삼중대광(三重大匡)․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으며,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글씨를 잘 썼다.

성 부(成 溥)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 사달(士達)의 아들. 우왕 때 방원(芳遠 : 태종)과 동방(同榜)으로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내외직을 거쳐 형부 총랑(刑部摠郞)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살면서 조선 태조가 대사간에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그후 양주(楊州)․서산(西山)에 은거, 송산(松山)의 조 견(趙 狷), 사천(沙川)의 남을진(南乙珍)과 함께 유양(維楊) 3()이라 불렀다.

성 승(成 勝) ? 1456 (세조 2)

()는 적곡(赤谷),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사육신 삼문(三問)의 아버지. 무과(武科)에 급제, 1440(세종 22) 경상도 병마절제사(慶尙道兵馬節制使), 1466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이 되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51(문종 즉위) 정조 부사(正朝副使)로 또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1453(단종 1) 의주 목사(義州牧使), 1455(세조 1)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고, 이듬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취임하지 않았다.

이해 왕의 고명(誥命)을 가져온 명나라 사신의 송별연이 창덕궁(昌德宮)에서 개최될 때 도총관(都摠管) 유응부(兪應孚)와 함께 운검(雲儉)을 쥐게 되는 기회에 세조를 칼로 베고 상왕 단종의 복위를 계획, 아들 삼문 등과 거사를 도모했다.

그러나 갑자기 자리가 비좁다고 운검을 그만두라는 세조의 명이 내림으로써 거사가 어렵게 되자 삼 문․박팽년 등의 주장을 따라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그러나 김 질(金 礩)의 밀고로 복위 음모가 발각되어 사형되었다. 숙종(肅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홍주(洪州)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성 희(成 熺) ()는 용회(用晦), ()는 인재(仁齋),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의 아들. 학식과 소행이 출중하여 천거를 받아 한성 참군(漢城參軍)이 되었다. 1450(문종 즉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가 되었고 부윤에 이르렀다.

1456(세조 2)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이 상왕(上王)인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형당할 때, 성삼문의 친척이라 하여 10여 차의 극심한 국문(鞠問)을 받았으나 끝내 함구(緘口)하여 김해(金海)에 안치(安置)되었다가 3년 만에 풀려 나와 공주(公州)에서 죽었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성염조(成念祖) 1398 (태조 7) 1450 (세종 32)

()는 자경(子敬), 시호(諡號)는 공혜(恭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의 아들, 석린(石璘)의 조카. 1414(태종 14) 진사(進士)가 되고, 1419(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정언(正言)․지평(持平)․이조 정랑(吏曹正郞)․도승지(都承旨)․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경창 부윤(慶昌府尹)에 이어 병조․형조의 참판(參判)․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등을 역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

성봉조(成奉祖) 1401 (태종 1) 1474 (성종 5)

()는 효부(孝夫)․유행(攸行), 시호(諡號)는 양정(襄靖),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의 아들. 음보(蔭補)로 순승부 행수(順承府行首)가 되고 한성부 소윤(漢城府少尹)․지풍덕 군사(知豐德郡事)등을 거쳐 1438년 장령(掌令)․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1441년 동부승지(同副承旨)․형조․호조․공조의 참의(參議)을 역임, 경상도․충청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1447년 경상도 도절제사(慶尙道도節制使), 이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그후 대사헌(大司憲)․형조 참판(刑曹參判)․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를 역임하고, 1455년 동서(同婿)인 세조가 즉위하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했다.

지돈령 부사(知敦寧府事)․형조와 이조의 판서(判書)․우참찬(右參贊) 등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1471(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진 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성삼문(成三問) 1418 (태종 18) 1456 (세조 2)

()는 근보(謹甫)․눌옹(訥翁), ()는 매죽헌(梅竹軒), 시호(諡號)는 충문(忠文), 도총관(都摠管) ()의 아들. 1438(세종 20)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급제, 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했다.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에 서 집현전 수찬(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을 거쳐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였다.

1442년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석정(李石亭) 등과 더불어 삼각산(三角山)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정음청(正音廳)에서 정인지(鄭麟趾)․최 항(崔 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강희안(姜希顔)․이 개(李 塏) 등과 함게 한글의 창제(創制)를 앞두고 당시 요동(遼東)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 찬(黃 瓚)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서 음운(音韻)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 그 정확을 기한 끝에 1446929일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頒布)케 했다.

1453(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이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집현전 신하들에게 정난공신(定難功臣)의 호를 내리자,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으나 이를 수치로 여겨 혼자 열지 않았다.

1455년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세조가 단종(端宗)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했으며, 이듬해 좌부승지(左副承旨)로서 아버지 승()․박팽년 등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협의, 4월에 명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석상에서 운검(雲劍)을 쥐게 된 아버지와 유응부(兪應孚)가 세조를 죽이고 이어서 한명회(韓明澮)․권 남(權 覽)․정인지(鄭麟趾) 등 일파를 없애기로 했으나, 당일 운검(雲劍)을 그만두게 되어 후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어 같은 모의에 가담했던 김 질(金 礩)이 밀고, 이 개․하위지․유응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車열)의 극형을 받았다. 이어 아버지 승()도 주모자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의 세동생과, 맹첨(孟詹) ․맹년(孟年)․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1676(숙종 2)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 집 옆에 세워진 녹운서원(綠雲書院), 1681년 육신묘(六臣墓)가 있는 노량진(鷺梁津)에 세워진 민절서원(愍節書院) 외에 영월(寧越)의 창절서원(彰節書院), 의성(義城)의 학산 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昌寧)의 물계 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5신과 함께 제향(祭享), 1758(영조 34)에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성담수(成聃壽) ? 1456 (세조 2)

()는 미수(眉叟), ()는 인재(仁齋)․문두(文斗), 시호(諡號)는 정숙(靖肅),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 ()의 아들, 성삼문(成三問)과는 재종간(再從間). 1450(세종 32) 진사(進士)가 되고,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 등을 역임했다.

단종복위(端宗復位) 사건에 성삼문(成三問) 등이 처형되자 이에 연좌하여 심한 고문 끝에 김해(金海)로 유배되었다가 3년 후 풀려 나와 벼슬을 단념하고 선영(先塋)이 있는 파주 문두리(坡州文斗里)에 은거했다. 일생을 독서와 낚시질로 소일했으며, 죽은 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불리었다. 함안(咸安)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창녕(昌寧)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祭享),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성진(成 晋) ()는 보한당(保閑堂)․금음(錦陰). 1465(세조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벼슬이 도정(都正)에 이르렀다.

성임(成 任) 1421 (세종 3) 1484 (성종 15)

()는 중경(重卿), ()는 일재(逸齋)․안재(安齋), 시호(諡號)는 문안(文安),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念祖)의 아들. 1438(세종 2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447(세종2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가 병조 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하고, 1457(세조 3) 예문관(藝文館)으로 전직했다.

이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지내고,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장원 급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올랐다. 그후에 도승지(都承旨)․이조 참판(吏曹參判)․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및 이조․형조․호조의 참판(參判)을 역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어 형조․ 이조․공조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좌참찬(左參贊)에 올랐다가 병으로 휴직, 다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 되었다.

시문(詩文) 중에서 특히 율시(律詩)에 뛰어났고, 글씨는 촉체(蜀體)에 능하여 해서(楷書)․초서(草書)․예서(隸書)에 일가를 이루었다.「태평광기(太平廣記)」를 본뜨고 고금(古今)의 이문(異聞)을 편집하여 「태평통제(太平通제)」를 저술, 「경국대전(經國大典)」․「여지승람( 與地承覽)」의 편찬에도 참여하고, 「오례(五禮)」를 개수(改修) 했다.

성간(成 侃) 1427 (세종 9) 1456 (세조 2)

()는 화중(和仲), ()는 진일재(眞逸齋),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念祖)의 아들. 류방선(柳方善)의 문인. 1441(세종 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451(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53(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수찬(修撰)을 지냈다.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로서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요절했다. 특히 시부(試賦)에 능하여 「궁사(宮詞)」․「신설부(新雪賦)」 등의 작품이 전하며 패관문학(稗官文學)에 속하는 「용부전(慵夫傳)」을 지었다고도 한다. 글씨도 잘 썼다.

성윤문(成允文) ()는 경무(景武), ()의 아들. 1457(세조 3)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사용(司甬)․한성부 참군(漢城付參軍)․정랑(正郞)․사인(舍人) 등을 지내고, 1466년 사간(司諫)으로서 발영시(拔英試)․등준시(登俊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했다. 1473(성종 4)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듬해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1475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

성준(成 俊) 1436 (세종 18) 1504 (연산군 10)

()는 시좌(時佐), 시호(諡號)는 명숙(明肅), 참판(參判) 순조(順祖)의 아들. 1456(세조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4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1469(예종 1) 필선(弼善)․사섬시 첨정(司贍寺僉正)을 지내고 대사간이 되었으며, 1485(성종 16)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이듬해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로 임명되었다.

1488(성종 19) 대사헌(大司憲)․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1490(성종 21)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영안북도 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로 나가 북정 부원수(北征副元帥)로서 도내에 쳐들어 온 야인(野人)을 정벌했다.

1495(연산군 1)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이 되고, 1498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이듬해 삼수군(三水郡)에 야인(野人)들이 침범하자 서정 장수(西征將帥)가 되고, 1500(연산군 6) 좌의정에 올라 영의정(領議政) 한치형(韓致亨), 우의정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시폐 십조(時幣十條)를 주청,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바로잡으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1503년 영의정에 올라 세자사(世子師)를 겸했으나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성종 비의 폐위(廢位)와 사사(賜死)에 관여한 죄로 직산(稷山)에 유배, 이어 배소(配所)에서 잡혀와 교살(絞殺)되었다. 중종 때 복관(復官)되었다.

성현(成 俔) 1439 (세종 21) 1504 (연산군 10)

()는 경숙(磬叔), ()는 용재(慵齋)․부휴자(浮休子)․허백당(虛白堂)․국오(菊塢), 시호(諡號)는 문대(文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念祖)의 아들. 1462(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했다.

박사(博士)로 등용된 뒤에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역임하고 대교(待敎) 등을 거쳐 사록(司錄)에 올랐다. 1468년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예문관 수찬(藝文館修撰)․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을 겸하고 형 임()을 따라 북경(北京)에 갈 때 도중에서 지은 기행시를 엮어 「관광록(觀光錄)」이라 했다.

1474(성종 5) 지평(持平)을 거쳐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고, 이듬해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재차 북경에 다녀와 1476년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제학(副堤學)․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148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동부승지(同副承旨)․우승지(右承旨)․형조 참판(刑曹參判)․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내고, 1488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조서를 가지고 오는 명나라 사신 동 월(董 越)과 왕 창(王 敞)의 접대연(接待宴)에서 서로 시를 주고 받음으로써 그들을 탄복케 했으며, 이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493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으나 음률(音律)에 정통하여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던 그가 외직으로 나감으로서 불편이 많아지자 한 달만에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이해 류자광(柳子光) 등과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여 음악을 집대성했고, 한편 관상감(觀象監)․사역원(司譯院)․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 등의 중요성을 역설, 거기에 딸린 관원을 이전대로 문무관의 대루를 하게 했다.

연산군(燕山君) 즉위 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공조 판서로 대제학(大提學)을 겸했다. 죽은 후 수 개월 만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류자광(柳子光)․어세겸(魚世謙)과 함께 왕명으로 고려가사(高麗歌辭)「쌍화점(雙花店)」․「이상곡(履霜曲)」․「북전(北殿)」을 산개(刪改)하고, 저서 「용재총화(慵齋叢話)」는 조선 초기의 정치․사회제도․문화면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글씨를 잘 썼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성담연(成聃年) ()는 인수(仁叟․仁壽), ()는 정재(靜齋),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 ()의 아들, 담수(聃壽)의 동생, 1470(성종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1477(성종 8)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이어 수찬(修撰)․정언(正言)을 거쳐, 1479(성종 10) 공조 정랑(工曹正郞)이 되었고,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했고, 시주(詩酒)를 즐겼다.

성세명(成世明) 1447 (세종 29) 1510 (중종 5)

()는 여회(如晦), ()는 일로당(佚老堂), 시호(諡號)는 평안(平安), 좌참찬(左參贊) ()의 아들.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75(성종 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483년 정언(正言), 1487년 지평(持平)이 되었다.

1489년 전한(典翰)으로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도 일대를 순찰, 이듬해 집의(執義), 1493년 다시 전한, 이어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堤學)에 올랐다. 1495(연산군 1)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연산군(燕山君)이 경연(經筵)을 폐하고 간신 임사홍(任士洪)을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기용하자 이를 규탄했다. 병조 참지(兵曹參知)․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1498년 도승지(都承旨)․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1502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1504년 형조 참판(刑曹參判)․대사헌(大司憲)․한성부 좌윤 등을 지냈다.

이듬해 진향사(進香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귀국하여 연산군에게 명나라 황제가 경연(經筵)을 권장함을 진언했다가 파직되었다. 중종(中宗) 초에 천거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준(成 浚) 음보(蔭補)로 여러 벼슬을 거쳐 1479(성종 10)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고, 1481년 이조 참의(吏曹參議)․우부승지(右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 다음해 우승지(右承旨)․형조참판(刑曹參判)․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을 지냈다.

1484(성종 15)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가 빈궁한 백성들의 조세를 삭감했다.

성윤조(成允祖) 1459 (세조 5) 1509 (중종 4)

()는 이술(而述), 현령(縣令) 가의(可義)의 아들.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1492(성종 2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검열(檢閱)을 역임, 연산군(燕山君) 때 참교(參校)가 되고, 중종(中宗) 때 집의(執義)․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制學)․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거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이르렀다.

성희안(成希顔) 1461 (세조.7) 1513 (중종 8) ()는 우옹(愚翁), ()는 인재(仁齋), 시호(諡號)는 충정(忠定), 돈령부 판관(敦寧府判官) ()의 아들. 1480(성종 11) 생원(生員)이 되고 1485(성종 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자(正字)․부수찬(副修撰) 등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 겸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1504(연산군 10) 이조 참판에 이르렀으나 양화도(楊花渡) 놀이에서 왕의 횡포를 풍자하는 시를 써 바침으로써 미움을 받아 무신직(武臣職)으로 좌천되었다. 그후 정치가 점점 문란해지므로 박원종(朴元宗)․류순정(柳順汀)과 협의,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추대하는데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이어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로 봉해지고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반정의 경위를 납득시켜 중종의 즉위를 인준받고, 귀국 후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513(중종 8)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중종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성경온(成景溫) 1461 (세조 7) 1504 (연산군 10)

()는 사아(士雅), 영의정(領議政) ()의 아들. 1483(성종 1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498(연산군 4) 빙고 별제(氷庫別提), 이어 감찰(監察)․호조 좌랑(戶曹佐郞)․우사어(右司禦)․도사(都事) 등을 지냈다.

150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이르렀으나 윤씨(尹氏)의 폐위(廢位)에 대해 반대하는 상소를한 아버지가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직산(稷山)에 유배되어 교살(絞殺)되자 형 중온(仲溫)과 함께 유배, 이어 해도(海島)에 이배(移配)되어 사사(賜死)당하였다.

성세순(成世純) 1463 (세조 9) 1514 (중종 9)

()는 태순(太純), 시호(諡號)는 사숙(思肅), 찬성(贊成) ()의 증손, 현령(縣令) 충달(忠達)의 아들. 1492(성종2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부교리(副校理)․교리(校理)․응교(應敎)․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그후 공조 참의(工曹參議)․사간(司諫)․대사성(大司成)을 역임, 연산군(燕山君) 때의 난정(亂政)에 대해 간관(諫官)으로서 직언(直言)했다. 이어 전라도․충청도의 관찰사(觀察使)․호 조․형조․이조의 참판(參判)․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고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성몽정(成夢井) 1471 (성종 2) 1517(중종 12)

()는 응경(應卿), ()는 장암(場巖), 시호(諡號)는 양경(襄景), 담년(聃年)의 아들, 영의정(領議政), 상 진(尙 震)의 매부. 1496(연산군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했으나 연산군의 난정을 보고 벼슬을 단념,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가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이 되었다. 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512(중종 7) 대사헌(大司憲), 이어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내고, 1515년 다시 대사헌(大司憲)으로 장경왕후(章敬王后 : 중종비)의 염()을 조속히하라는 왕명에 반대하여 상례법에 따르게 했다.

이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승진한 후 탄핵을 받았으나 정언(正言) 조광조(趙光祖)의 변호로 무사하게 되었다. 1516년 하산군(夏山君)에 봉해지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이 되었다.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성중엄(成重淹) 1474 (성종 5) 1504 (연산군 10)

()는 계문(季文), ()는 청호(晴湖), 좌찬성 억()의 후손.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생원(生員)․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할 때는 하루에 시 30여편을 지어 함께 공부하던 김일손(金馹孫)․조 위(曺 偉) 등을 놀라게 하였다.

1494(성종2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497(연산군3)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으로 승진된 후 박사(博士) 벼슬에 이르러 경연사경(經筵司經) 및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 「성종실록(成宗 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경연관으로서 명현들의 무고한 화를 변호하다가 인산(麟山)에 유배되었다. 그후 1500년 하동(河東)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과거 홍문관(弘文館)에 있을 때 왕의 후원관사(後苑觀射)를 논계(論啓)했던 죄로 월배(越配)된 후 능지처참(陵遲處斬)당했다. 부안(扶安)이 도동서원(道東書院), 창녕이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성 운(成 雲) ? 1528 (중종 23)

()는 치원(致遠), 시호(諡號)는 경숙(景肅), 담명(聃命)의 아들. 1504(연산군 10) 생원(生員)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장령(掌令)․응교(應敎) 등을 역임하고, 1518(중종 13)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이듬해 병조 참지(兵曹參知)로서 홍경주(洪景舟)․심 정(沈 貞)․남 곤(南 袞) 등과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신진세력인 조광조(趙光祖) 일파를 숙청하였다. 우승지(右承旨)을 거쳐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에 이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어 백성들에게 염장(鹽醬)을 공급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후 예조 참판(禮曹參判)․형조 참의(刑曹參議)․병조 참판(兵曹參判)․공조 판서(工曹判書)․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역임하는 동안 네 번이나 대사헌을 지냈다. 1527년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어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직했으며,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누차 신병(身病)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한채 임지(任地)에서 죽었다.

성세창(成世昌) 1481 (성종 12) 1548 (명종 3)

()는 번중(蕃仲), ()는 돈재(遯齋), 화왕도인(火旺道人), 시호(諡號)는 문장(文莊), 판서(判書) ()의 아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이심원(李深源)에게 역학(易學)을 배웠으며, 당대의 일류 재사들과 교유했다.

1501(연산군 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아버지와 함께 영광(靈光)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로 임명되었다.

1507(중종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박사(成均博士)가 되고,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나서 집의(執義)․사간(司諫)․천문 예습관(天文隸習官)을 거쳐 1519(중종14)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직했다. 1522년 다시 기용되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고 이듬해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성(大司成)․이조참판(吏曹參判)․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부제학(副堤學)이 되었다.

1530년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를 논척(論斥)하다가 도리어 평해(平海)에 유배되었으나 1537(중종 32)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풀려 나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공조 판서(工曹判書)․우참찬(右參贊)을 역임, 이어 현조 판서로서 홍문관 제학(副提學)을 겸했다.

그뒤 이조․형조․예조의 판서(判書)를 지내며 대제학(大提學)을 겸임, 1544(중종 39) 호조 판서에서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1545(인종 1) 좌찬성(左贊成)을 거쳐 우의정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갓다가 돌아오는 도중 좌의정이 되었다. 이해 을사사화로 중추부(中樞府)의 한직(閑職)에 좌천, 이어 장연(長淵)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문장에 뛰어나 당시 사대교린(事大交隣)의 많은 외교 문서를 썼고, 글씨․그림․음률(音律)에도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리었으며, 모간본(摸刊本)으로 「돈재필적(遯齋筆蹟)1권이 전해지고 있다. 1567(명종 22) 관직이 복구되었다.

성수침(成守琛) 1493 (성종 24) 1564 (명종 19)

()는 중옥(仲玉), ()는 청송(聽松), 죽우당(竹雨堂)․파산청은(坡山淸隱)․우계한민(牛溪閒民),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 우계(牛溪) ()의 아버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1519(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스승 조광조가 처형되고 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하자 벼슬길을 단념하고 두문불출, 「대학(大學)」․「논어(論語)」를 읽으며 「태극도(太極圖) 」를 베껴 조화(造化)의 근본을 탐구했다.

그후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파주(坡州) 우계(牛溪)의 처가(妻家) 근처에 은거, 1552(명종7) 내자시 주부(內資寺主溥)․예산 현감(禮山縣監)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으며, 다시 토산(兎山)․적성(積城) 등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높았으며, 문하(門下)에서 많은 석학(碩學)이 배출되었다.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성수종(成守琮) 1495 (연산군 1) 1533 (중종 28)

()는 숙옥(叔玉), 시호(諡號)는 절효(節孝),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 청송(聽松) 수침(守琛)의 아우.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1519(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으나 이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등이 화를 입자 그 문인이라 해서 대간 (臺諫)의 탄핵을 받고 과방(科榜)에서 삭제당했다.

문장이 뛰어나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고, 시도 청아(淸雅)했으며 학문이 깊어 장래 영달(榮達)을 인정받았으나 청빈하게 살다가 일찍 죽었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파주(坡州)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祭享), 직제학(直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성효원(成孝元) 1497 (연산군 3) 1551 (명종 6)

()는 백일(伯一), ()는 어부(漁夫), 부사(府使) 몽선(夢宣)의 아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을 뿐 문과(文科)에 급제하지 못했으나 이조(吏曹)의 천거로 내시 교관(內侍敎官)에 등용, 뒤에 용인 현령(龍仁縣令)에 이르렀다. 공주(公州)․인천(仁川)․용산(龍山) 등지 에 정자를 세워 문인 생활을 했다.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다.

성운(成 運) 1497 (연산군 3) 1579 (선조 12)

()는 건숙(健叔), ()는 대곡(大谷), 부정(副正) 세준(世俊)의 아들. 중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45(인종 1) 형이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화를 입자 보은 속리산(報恩俗離山)에 은거(隱居)했다.

그후 참봉(參奉)로 임명되었으나 사퇴, 선조(宣祖) 때도 누차 임관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이지함(李之菡)․서경덕(徐敬德)․조 식(曺 植) 등 명현들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승지(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성제원(成悌元) 1506 (중종 1) 1559 (명종 14)

()는 자경(子敬), ()는 동주(東洲)․소선(소仙), 시호(諡號)는 청헌(淸憲), 장흥 부사(長興府使) 몽선(夢宣)의 아들. 공주(公州) 출신. 류 우(柳 藕)의 문인. 성리학(性理學)을 비롯하여 산경(山經)․지지(地誌)․의학(醫學)․복술(卜術)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다.

만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지냈다. 제학(提學)에 추증(追贈),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 보은이 상현서원(象賢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성세장(成世章) 1506 (중종 1) 1583 (선조 16)

()는 중회(仲晦), ()는 사암(思菴), 희문(希文)의 아들. 희공(希恭)에게 입양(入養). 김안국(金安國)의 문인. 1540(중종35) 진사(進士)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1544년 헌납(獻納)이 되고, 1545(인종 1) 지평(持平), 이듬해 부교리(副校理)․수찬(修撰)․검상(檢詳) 등을 지냈다.

그후 사도시정(司導시正)으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직, 「중종실록(中宗實錄)」․「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548년 사인(舍人)․집의(執義)․경기도 암행어사(京畿道暗行御史) 이어서 응교(應敎)․사간(司諫)․도승지(都承旨)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참찬관(參贊官)을 겸직, 2년간 승정원(承政院)의 여러 승지(承旨)을 지낸 후 1553년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다음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155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부제학(副提學), 이어 대제학(大提學)․공조 참판(工曹參判)․대사간(大司諫)․병조 참판(兵曹參判) 등을 지내고, 1563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1565년 형조 참판(刑曹參判), 1567년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이듬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 1573(선조 6)에 등극부사(登極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예조와 호조의 판서(判書)에 이어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1576년 다시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성자제(成子濟) 1515 (중종 10) 1573 (선조 6)

()는 언공(彦功), ()는 송재(松齋), ()의 아들. 1562(명종 17) 해서(楷書)에 뛰어나 명종(明宗)이 서예(書藝)에 능한 사람을 뽑아 글씨를 시험할 때 포의(布衣)로 참가, 1등을 했다. 이듬해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벼슬은 사예(司藝)에 이르 렀다. 해서(楷書)․초서(草書)에 능했다.

성세평(成世平) 1516 (중종 11) 1590 (선조 23)

()는 정중(正仲), 종부시정(宗簿寺正) 희주(希周)이 아들. 1546(명종 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6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50세 때 비로소 임관되어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전적(典籍)․공조 좌랑(工曹佐郞) 등을 역임, 어천도 찰방(魚川道察訪)으로 나갔다가 병으로 돌아왔다. 그뒤 여러 벼슬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고, 1590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 병사했다.

성여춘(成汝춘) ()는 형숙(馨叔), 여종(汝種), ()는 서강(西岡), 김상헌(金尙憲)이 문인. 하도(河圖)․낙서(洛書)․선천론(先天論)․음양(陰陽)․도수(度數)․풍수(風水)․성력(星曆)․점상(占相)․의방(醫方)에 이르기까지 널리 연구, 다른 사람이 손대지 않았던 분야를 발굴했다. 「천기대요(天機大要)」를 저술하여 농본(農本)의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이바지하는 한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했다. 인조(仁祖) 때 음보(蔭補)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을 거쳐 한산 군수(韓山郡守)을 역임했으며 80세에 사망하였다.

성수경(成守慶) ? 1592 (선조 25) 직제학(直提學) 사재(思齋)6대손, ()의 아들. 음보(蔭補)로 진주 판관(晋州判官)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 의하여 군무(軍務)를 위임받고 성벽을 개수하며 무기를 수선하는 등 전비(戰備)를 갖추자 피난갔던 백성들이 돌아와 얼마간 군세가 떨치기도 했다.

이해 11월 진주성(晋州城) 싸움에서 적군을 맞아 분전하던 중에, 의병장(義兵將)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과 같이 전사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진주의 충렬사(忠烈祠),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성수익(成壽益) 1528 (중종 23) 1598 (선조 31)

()는 덕구(德久), ()는 칠봉(七峰), 장흥고령(長興庫令) 예원(禮元)의 아들. 1552(명종 7) 생원(生員)이 되고, 경릉 참봉(敬陵參奉)․돈령부 봉사(敦寧府奉事)를 역임, 155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어천도찰방(魚川道察訪)․회양 부사(淮陽府使) 등을 거쳐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일찍이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으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의 옛 집터에 사당을 세우고 서경덕(徐敬德)을 함께 제향(祭享)했다. 또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는 예부(禮部)를 통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했고, 1590(선조 23)에 광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이 되었다.

1595년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졌으며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부총관(副摠菅)으로 왕비를 수안(遂安)에 호종, 과로로 병을 얻어 이듬해 해주(海州)에서 죽었다.

성혼(成 渾) 1535 (중종 30) 1598 (선조 31)

()는 호원(浩原), ()는 우계(牛溪)․묵암(黙庵),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수침(守琛)의 아들. 17세 때 감시(監試) 초시(初試)에 합격했으나 신병으로 복시(覆試)를 못치르자 과거(科擧)를 단념, 백인걸(白仁傑) 문하에서 경학(經學) 연구에 정진했다. 선조(宣祖) 초에 학행으로 참봉(參奉)․현감(縣監)․지평(持平) 등에 계속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580년에는 장령(掌令) 직을 굳이 거절하고 마교(馬轎)를 타고 상경하라는 우례(優禮)까지 받았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右參贊)에 오르고 1594년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러 영의정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고향 파주(坡州)로 돌아갔다. 일찍부터 이 이(李 珥)와 교분이 두터웠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이 황(李 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을 지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주장하는 이 이와 1572(선조5) 부터 6년간에 걸쳐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이 이의 학설을 반박, 유학계(儒學界)의 큰 화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이 이의 문인인 조 헌(趙 憲)․한 교(韓 嶠)․황 신(黃 愼)․이 귀(李 貴)․정 엽(鄭 曄) 등이 그의 문인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 죽은 뒤 반대파들에 의해 한때 관작(官爵)을 추탈당했다가 인조 초에 복관(復官),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海州)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咸興)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坡州)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성영달(成永達) ? 1592 (선조 25)

진사(進士) ()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 1592(선조 25) 임진왜란에 경상우도 병마우후(慶尙右道兵馬虞侯)로 역전(力戰), 많은 공을 세웠고, 그해 11월 진주성(晋州城) 싸움에서 진주 판관(晋州判官) 성수경(成守慶)과 함께 전사했다.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 贈), 진주(晋州)의 창의사(彰義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성팽년(成彭年) 1540 (중종 35) 1594 (선조 27)

()는 이옹(頤翁), ()는 석곡(石谷), 군교(軍校) 한량(漢良)의 아들. 안음(安陰) 출신. 1564(명종 1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으로 있다가 1569(선조 2) 아버지가 죽자 학업을 그만두고 오직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했다.

효행(孝行)으로 천거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시문(詩文)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지평(持平)에 추증(追贈), 안의(安義)의 귀연사(龜淵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성식(成 軾) 1542 (중종 37) 1600 (선조 33)

()는 경보(敬甫), 판서 운()의 손자, 진주 판관(晋州判官) 수국(壽國)의 아들. 1564(명종 19) 생원(生員)이 되고, 1577(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호조․예조의 정랑(正郞)․사예(司藝)․장령(掌令)을 거쳐 사섬시(司贍寺)․군자감(軍資 監)․종부시(宗簿寺)․상의원(尙衣院) 등의 정()을 지내고, 수원 부사(水原府使)․청주 목사(淸州牧使)․춘천 부사(春川府使)․덕원 부사(德源府使) 등을 역임했다.

성호(成 浩) 1545 (인종 1) 1588 (선조 21)

()는 사집(士集), ()는 성암(省庵),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 세강(世康)의 아들. 남언경(南彦經)․김근공(金謹恭)의 문인.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 경전(經傳) 및 제자백가(諸子百家)로부터 불경(佛經)에 이르기까지 독파했다.

1578(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강릉 참봉(江陵參奉)이 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퇴, 1580년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이 되고, 창릉 참봉(昌陵參奉)․왕자 사부(王子師傅)․사섬시 사부(司贍寺司簿)를 거쳐 진안 현감(鎭安縣監)이 되어 당시 화평한 속에서도 비상시에 대비하여 병졸(兵卒)의 교련(敎鍊)에 힘써 1587(선조 20) 침입해 온 왜구(倭寇)의 격퇴에 공을 세웠다.

성여신(成汝信) 1546 (명종 1) 1632 (인조 10)

()는 공실(公實), ()는 부사야로(浮査野老), 부사(桴槎)․조 식(曺 植)의 문인.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떨치고 1609(광해군 1) 64세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진주(晋州)의 임천서원(臨川書院)과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성이문(成以文) 1546 (명종 1) 1618 (광해군 10)

()는 질부(質夫), ()는 은궤옹(隱几翁), 대사헌(大司憲) 세정(世貞)의 증손, 찰방(察訪) 효관(效寬)의 아들. 1573년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종묘서 부봉사(宗廟署副奉事)로서 왕실(王室)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왕을 따라 정주(定州)에 피란,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이 되었다.

159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 등을 거쳐 1607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올랐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경연관(經筵官) 등을 지낸 뒤, 13년간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었다. 광해군 때 정계가 어지러워지자 고향에 은퇴, 세사(世事)와 인연을 끊고 한가한 여생을 보냈다.

성영(成 泳) 1547 (명종 2) 1623 (인조 1)

()는 사함(士함), ()는 태정(苔庭), 세평(世平)의 아들. 157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병조 좌랑(兵曹佐郞) 등을 거쳐 1592(선조 25) 여주 목사(驪州牧使)이 되었다가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 순찰사(京畿道巡察使)3천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 이듬해 경기좌도 관찰사(京畿左道觀察使)가 되었다.

뒤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내고, 1597(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남정양향사(南征糧餉使)로 군량미 조달을 맡아보았다. 1599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1601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고, 이듬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병조 판서(兵曹判書), 1607년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이듬해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 등의 모함으로 파직, 1616(광해군 8) 연일(延日)에 유배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선조(宣祖)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성노(成 輅) 1550 (명종 5) 1616 (광해군 8)

()는 중임(重任), 자중(子重), ()는 석전(石田)․잠암(潛巖)․잠곡(潛谷)․평량자(平凉子),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영국(永國)의 아들. 정 철(鄭 澈)의 문인. ()로 이름을 떨치고, 1570(선조 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방정한 품행으로 천거를 받아 사옹원 참봉(司甕院參奉)․제릉 참봉(齊陵參奉)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서인(西人)인 정철이 동인(東人)에 의해 실각당한 뒤 오직 술로 세월을 보내고 그동안 지은 시고(詩藁)를 모두 불살랐다.

성호선(成好善) 1552 (명종 7) ?

()는 칙우(則優), ()는 월사(月蓑), 예조 참판(禮曹參判) 수익(壽益)의 아들. 서 기(徐 起)의 문인. 병절교위(秉節校尉)1589(선조 2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593년 지제교(知製敎)․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 이듬해 순변사(巡邊使) 이 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영남(嶺南)에 있을 때 근친(覲親)하러 황해도에 가서 기일 안에 돌아오지 않아 탄핵을 받았다. 1595년 형조 정랑(刑曹正郞), 1601년 사성(司成), 정언(正言)․지평(持平)․장령(掌令)을 역임, 이듬해 충주 목사(忠州牧使)이 되었다.

성문준(成文濬) 1559 (명종 14) 1626 (인조 4)

()는 중심(仲深), ()는 창랑(滄浪), ()의 아들. 1585(선조 1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세마(洗馬)를 지내고, 아버지가 무욕(誣辱)을 당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임천(林泉)에서 14년간 은거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사포(司圃)를 거쳐 영동 현감(永同縣監)을 역임했으며, 박학(博學)한 학자로서 글씨도 잘썼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성안의(成安義) 1561 (명종 16) 1629 (인조 7)

()는 정보(精甫), ()는 부용당(芙蓉堂). 정 구(鄭 逑)의 문인. 1591(선조 2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녕(昌寧)에 가서 의병을 모집, 5천명을 거느리고 각지에서 적군과 싸웠다. 1597년 지평(持平), 1600년 영해 부사(寧海府使), 1607년 남원 부사(南原府使)을 지내고, 1612(광해군 4) 광주 목사(光州牧使)이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13년 만에 등용되어 사성(司成)에 이어 상의원(尙衣院)․봉상시(奉常寺)의 정()을 지냈다. 이듬해 이 괄(李 适)의 난 때 왕을 공주(公州)로 호종(扈從),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 1628년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못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에 추증(追贈),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성계선(成啓善) 1566 (명종 21) ?

()는 칙생(則生), 참판(參判) 수익(壽益)의 아들. 1594(선조 2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내외직(內外職)을 거쳐 1601년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고, 1604년 서천 군수(舒川郡守)로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표창받았다.

성우길(成佑吉) 1571 (선조 4) 1623 (인조 1)

()는 자수(自受), 수군절도사 박()의 아들. 1590(선조 23) 무과(武科)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전관(宣傳官)으로 왕을 호종(扈從), 1599년 공조 좌랑(工曹佐郞)․의주 판관(義州判官)을 역임, 1604년 자금은주자(紫金銀冑子)를 하사받았다.

이해 북도 우후(北道虞侯)가 되어 북변에 침입한 야인을 쳐 전공을 세웠고, 1606년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안변 부사(安邊府使), 이듬해 길주 목사(吉州牧使)에 전직, 1613(광해군 5) 서로 방어사(西路防禦使), 1618년 함경도 순변사(咸鏡道巡邊使),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를 역임, 1620년에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되었다.

1622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이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할 것을 권고했으나 이를 거절,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623(인조1) 황 현(黃 玹)의 역모(逆謀) 사건에 연루, 장살(杖殺)되었으나, 이듬해 이 귀(李 貴)의 상소로 복관(復官)되었다.

성대훈(成大勳) 1572 (선조 5) 1636 (인조 14)

()는 중집(仲集), 시호(諡號)는 충장(忠莊). 1605(선조 38)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관서 원수(關西元帥) 장 만(張 晩)의 천거로 평양 별장(平壤別將)이 되었다. 1624년 이 괄(李 适)의 난에 안현(鞍峴)에서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창산군(昌山軍)에 봉해졌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성하종(成夏宗) 1573 (선조 6) 1645 (인조 23)

()는 이건(而建), 참판 수익(壽益)의 손자. 1603(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 광해군(光海君) 때 대정 현감(大靜縣監)을 지내고,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 때 잡혀온 적도들을 함부로 죽이려 함을 강력히 반대, 이를 중지케 했다.

형조 좌랑(刑曹佐郞)․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갑산 부사(甲山府使)․길주 목사(吉州牧使)․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를 지내고 강계 부사(江界府使)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636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창흥군(昌興君)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이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전라도 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가 되어 급히 강화도(江華島)에 수군을 이끌고 갔으나 이미 항복한 후였다.

이어 늦게 도착한 책임을 지고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좌천되었다. 그후 오랑캐들이 계속 북변에서 약탈을 자행하자 특히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그들을 몰아냈다. 경성(鏡城)의 청덕사(淸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성준구(成俊耈) 1574 (선조 7) 1633 (인조 11)

()는 덕보(德甫), ()는 장곡(藏谷), 부제학(副提學) 이문(以文)의 아들. 1599(선조3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설서(設書)를 거쳐 수찬(修撰)․교리(校理)․이조정랑(吏曹正郞)․사인(舍人)․부응교(副應敎) 등을 역임했다.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이이첨(李爾瞻) 등의 모함으로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이산(理山)․양산(梁山) 등지로 이배(移配)되어 16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이후 청송 부사(靑松府使)․재령 군수 (載寧郡守)을 거쳐 서천 군수(舒川郡守)이 되었다가 이듬해 이 괄(李 适)의 난이 일어나자 부안(扶安)에서 의병(義兵)을 규합,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어 선천 부사(宣川府使)이 되어 양서(兩西)의 관향사(管餉使) 및 찬획사(贊획使)를 겸했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하자 명나라 장군 모문룡(毛文龍)에게 양곡을 얻어 구휼(救恤),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판결사(判決事) 등을 거쳐 안동 부사(安東府使)이 되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성직(成 㮨) 1586 (선조 19) 1680 (숙종 6)

()는 자교(子喬), ()는 매변(梅邊)․정옹(鼎翁), 시호(諡號)는 정혜(靖惠), 우계(牛溪) ()의 손자. 양근 군수(楊根郡守)․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 등을 거쳐 1665(현종6)80세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글씨는 특히 대자(大字)를 잘 썼다.

성윤문(成允文) 1591(선조 24) 갑산 부사(甲山府使), 이듬해 임진왜란때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가 되었으며, 뒤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거쳐 1596년에 진주 목사(晋州牧使)이 되었다.

이듬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군공(軍功)을 세웠으며, 제주 목사(濟州牧使)을 거쳐 1605(선조 38)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07년 형장(刑杖)을 엄혹(嚴酷)히 여겨 민폐가 많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통제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兼統制使)로 전임, 이어 같은 이유로 수원 부사 겸 방어사(水原府使兼防禦使)가 되었다가 곧 파직당했다.

성이민(成以敏) 1595 (선조 28) ?

()는 퇴보(退甫), ()는 삼고당(三古堂)․천유(天遊), 효관(效寬)의 아들. 1595(선조 2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이듬해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명나라 유격(遊擊) 진운홍(陳雲鴻)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었고, 이어 심유경(沈惟敬)의 접반관이 되엇다가 도망 쳐 온 죄로 유배, 후에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으로 기용되었다. ()에 뛰어났다.

성이성(成以性) 1595 (선조 28) 1664 (현종 5)

()는 여습(汝習), ()는 계서(溪西), 승지(承旨) 안의(安義)의 아들. 강복성(康復誠)의 문인. 16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1627(인조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헌납(獻納)․사간(司諫) 등을 역임하는 동안 직언(直言)으로 일관하였으며, 진주(晋州)․강계(江界) 등 네 고을을 다스리며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부제학(副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성운한(成雲翰) 1606 (선조 39) 1688 (숙종 14)

()는 붕거(鵬擧), 여용(汝容)의 아들. 1635(인조 13) 성균시(成均試)에 합격, 이듬해의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로는 산촌(山村)에 은거, 몇 번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650(효종 1) 사재감 참봉(司宰監參奉)이 되고, 이어 예빈시 봉사(禮賓寺奉事)․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기린도 찰방(麒麟道察訪)․광흥고 주부(廣興庫主簿)․안협 현감(安峽縣監) 등을 역임, 그뒤 맏아들 호징(虎徵)의 공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이 되고, 1685(숙종 11) 노인직(老人職)으로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使)이 되었다.

성준설(成俊卨) 1615 (광해군 7) ?

()는 자허(子許), 부제학(副提學) 이문(以文)의 손자, 신구(信耈)의 아들. 이춘원(李春元)의 문인, 1642(인조 20) 진사(進士)가 되고, 1651(효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지를 거쳐 홍주 목사(洪州牧使)․의주 부윤(義州府尹) 등을 역임했다.

성호징(成虎徵) 1625 (인조 3) 1694 (숙종 20)

()는 병여(炳如),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 운한(雲翰)의 아들. 1666(현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지평(持平)․장령(掌令)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어 대사헌(大司憲) 민정중(閔鼎重)이 병으로 영릉(寧陵)의 봉천(奉遷)에 참석하지 못한 죄로 사직된 것을 논구(論救)하다가 1673(현종 14) 강계(江界)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 나왔으나 윤 휴(尹 鑴) 등 남인(南人)과 뜻이 맞지 않아 두문불출(杜門不出), 1680(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쫓겨나자 정언(正言)로 복직, 이어 지평(持平)․장령(掌令)을 거쳐 죽산 부사(竹山府使)이 되었다.

1684년 사간(司諫)이 되어, 허 목(許 穆)의 복관(復官)이 부당함을 극론하다가 집의(執義)로 전직, 그뒤 좌승지(左承旨)이 되었다. 1688년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나갔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에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위되자 두문불출, 1694(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다시 실각하자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

성지선(成至善) 1636 (인조 14) 1693 (숙종 19)

()는 여중(汝中), ()는 제안재(制安齋), 우계(牛溪) ()의 현손(玄孫), 현령(縣令) 희적(熙績)의 아들. 윤선거(尹宣擧)․윤 증(尹 拯)의 문인. 1672(현종 13) 천거로 참봉(參奉)이 되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남평 현감(南平縣監)을 거쳐 1686(숙종 12) 진위 현령(振威縣令)을 지냈다. 그뒤 두 스승에 대한 세상의 무고(誣告)가 점점 심해지자 사직하고 파산(坡山)에 돌아가 독서와 수양으로 여생을 보냈다. 남평(南平)의 봉산서원(蓬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성규헌(成揆憲) 1647 (인조 25) 1741 (영조 17)

()는 중일(仲一), ()는 명탄(明灘)․원당(圓塘), 고려의 시중(侍中) 여완(汝完)의 후손.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89(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유학(幼學)으로 많은 선비들을 이끌고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廢位)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시골로 쫓겨 갔다.

1694년 앞서 갑술옥사(甲戌獄事) 때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696(숙종 22) 이현명(李顯命)의 상소문(上疏文)을 대서(代書)했다하여 진도(珍島)에 유배, 2년만에 풀려 나왔다.

그후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을 역임하고, 1705년 남구만(南九萬)․류상운(柳尙運)을 신구(伸救)하려던 상소로 인하여 정언(正言) 이명준(李明俊)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자 수춘산(壽春山)에 들어갔다.

1726(영조 2)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자 시국의 당면 과제 7()를 건의했고, 1736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온갖 기예(技藝)에 능통했고, 글씨도 잘썼다. 춘천(春川)의 곡운서원(谷雲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성헌징(成獻徵) 1654 (효종 5) 1676 (숙종 2)

()는 문무(文武), ()는 동허재(洞虛齋),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호영(虎英)의 아들. 상주(尙州) 출신. 3, 4세에 이미 책을 읽었고, 5, 6세에 연구(聯句)를 해득했고, 12세에 「수석정기(水石亭記)」를 지었으며 15, 6세에 제가(諸家)를 두루 섭렵하여 노불(老佛)의 학(), 음양(陰陽)의 수(), 기문둔갑(奇門遁甲)의 법()에 이르기까지 통달했으나 뒤에 유학(儒學)에 정진, 서재(書齋)를 꾸며 동허(洞虛)라 이름지었다. 영조(英祖) 때 제학(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성환(成 換) 1655 (효종 6) ?

()는 계휘(季輝), 관찰사 준구(俊耈)의 손자, 후주(後周)의 아들. 통덕랑(通德郞)으로서 1690(숙종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내외직(內外職)을 거쳐 영조 초에 공조 참의(工曹參議)가 되었다.

성대중(成大中) 1732 (영조 8) 1812 (순조 12)

()는 사집(士執), ()는 청성(靑城), 찰방(察訪) 효기(孝基)의 아들. 김 준(金 焌)의 문인. 1753(영조 2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75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서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