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경주설씨시조(慶州偰氏),설손(偰遜),경주설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8 01:20 수정일 : 2019-08-11 04:35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설씨(偰氏)는 회골계(回鶻系)의 후예(後裔)가 설련하(偰輦河)에 세거(世居)하면서 성(姓)을 설(偰)로 삼게 되었다고 하며, 원(元)나라 태부(太傅)인 극직(克直)의 6세손 설문질(偰文質)이 원조(元朝)에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후 설문질의 손자 설손(偰遜)이 원(元)나라 순제(順帝 : 마지막 왕, 재위기간 1333 ~ 1368) 때 학문(學問)과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치고 단본당 정자(端本堂正字)로 있으면서 황태자(皇太子)에게 「경전(經典)」을 강론했으나 승상(丞相)의 비위에 거슬려 단주 유수(單州留守)로 좌천되었다가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대령(大寧)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홍건적(紅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피하여 1358년(고려 공민왕 7) 고려에 망명하자 공민왕(恭愍王)은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친히 사귄 친구 사이므로 그를 부원후(富原侯)에 봉하고 논과 밭을 내려주어 우대하였다. 이듬해 아들 5형제가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귀화하여 맏아들 장수(長壽)가 1362년(공민왕 11)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공양왕(恭讓王) 때 정난공신(定難功臣)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지공거(知貢擧)를 겸했으며, 정몽주(鄭夢周)가 화(禍)를 입을 때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 었으나 태조(太祖)에 의해 풀려나와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복직,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지고 계림(鷄林)을 사적(賜籍)받아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경주(慶州)로 하게 되었다.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그는 전후 8차례나 사신(使臣)으로 명(明)나라를 다녀왔고 시(詩)․서(書)에 일가(一家)를 이루어 안렴 부사(按廉副使)을 역임한 아우 경수(慶壽)․미수(眉壽)와 함께 가문(家門)을 반석(盤石) 위에 올려놓았다.

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미수(眉壽)는 태종(太宗) 때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의 전서(典書)를 거쳐 전후 다섯 차례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둔전제(屯田制)의 실시를 건의하여 실시토록 했고, 여러 조(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검교우참찬(檢校右參贊)에 이르렀다.

1408년(태종 8)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순(循 : 경수의 아들)은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로 세종 때 인동 현감(仁同縣監)을 지내고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왕명(王命)으로 「효행록(孝行錄)」을 증수(增修)했으며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수했다. 역사(歷史)에도 정통(精通)하였으며 문장(文章)으로 명망이 높았고, 윤 회(尹 淮) 등과 함께 「통감훈의(通監訓義)」를 저술하여 더욱 학명(學名)이 떨쳤다.

그 밖의 인물로는 좌참찬(左參贊) 미수(眉壽)의 아들 유(猷)가 동래 부사(東萊府使)을 지냈으며, 부승(副丞) 동인(同寅 : 순의 아들)의 아들 침(琛)은 군수(郡守)을 역임하여 장사랑(將仕郞)에 오른 종한(宗漢), 통덕랑(通德郞) 만구(萬耈) 등과 함께 경주 설씨를 대표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설씨(慶州偰氏)는 남한(南韓)에 총 2,8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경주설씨조상인물

설장수(偰長壽) 1341년(충혜왕 복위 2) ~ 1399년(정종 1). 자(字)는 천민(天民), 호(號)는 운재(芸齋), 시호(諡號)는 문량(文良), 부원후(富原侯) 손(遜)의 아들. 본래 위그르 사람으로 1359년(공민왕 8) 아버지를 따라 귀화했다. 1362년 문과(文科)에 급제,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거쳐 밀직사 제학(密直司提學)을 역임,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1387년(우왕 13)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1389년(창왕 즉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우왕(禑王) 손위(遜位)의 표문(表文)을 가지고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0년(공양왕 2)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지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승진, 이듬해 정난공신(定難功臣)으로 추록(追錄)되고, 1392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했다. 이해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될 때 그 일당으로 몰려 해도(海島)에 유배되었으나 조선 초 태조(太祖)에 의해 등용되어 1396년(태조 5)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복직, 계림(鷄林 : 경주)을 본관으로 하사받았고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398년에 정종(定宗)이 즉위하자 계품사(計稟使)로 명나라에 가던 도중 명나라 황제가 죽었으므로 진향사(進香使)로 사명이 바뀌어 북경(北京)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전후 8차례나 사신으로 명나라에 왕래했고, 시(詩)와 글씨에도 능했다.

설경수(偰慶壽) 자(字)는 천우(天佑), 호(號)는 충재(충齋). 조선(朝鮮)때 안렴부사(按廉副使)을 지냈다.

설미수(偰眉壽) ? ~ 1415년(태종 15). 자(字)는 천용(天用), 시호(諡號)는 공후(恭厚), 부원후(富原侯) 손(遜)의 아들. 장수(長壽)의 아우. 원나라 고창(高昌) 출신. 1359년(공민왕 8)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귀화, 18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 1401년(태종 1) 판각문사(判閣門事)가 되었다. 1403년 호조와 병조의 전서(典書)를 거쳐 계품사(計稟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특히 중국어에 능통하여 1406년 성절사(聖節使)로, 이듬해 천추사(千秋使)로, 이어 사은사(謝恩使)로 두번, 전후 다섯 차례에 걸쳐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중군 총제(中軍摠制)․병조 참지 (兵曹參知) 등을 거쳐 1407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재직중둔전제(屯田制)의 실시를 건의하여 실시토록 했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듬해 호조․공조의 판서(判書)를지내고, 1410년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듬해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141 4년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검교우참찬(檢校右參贊)에 이르렀다.

설순(偰 循) ? ~ 1435년(세종 17). 자(字)는 보덕(輔德), 손(遜)의 손자, 경수(慶壽)의 아들. 고려 때 귀화한 위그르 출신. 1408년(태종 8) 생원(生員)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1420년(세종 2) 교리(校理), 이듬해 좌사경(左司經), 1425년 시강관(侍講官)을 거쳐 인동 현감(仁同縣監)이 되었다. 1427년(세종 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이듬해 왕명으로 「효행록(孝行錄)」을 증수(增修), 1431년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堤學)으로서「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를 편수, 1432년 이조우참의(吏曹右參議)이 되어 윤 회(尹 淮) 등과 함께 「통감훈의(通監訓義)」를 저술하였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박학(博學)하고 역사(歷史)에 뛰어났으며,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설유(偰 猷) 조선(朝鮮) 때 동래 부사(東來府使)을 역임하였다.

설동인(偰同寅) 호(號)는 춘파(春坡). 조선(朝鮮)에서 저창부승(儲倉副丞)을 지냈다.

설침(偰 琛) 호(號)는 송반(松盤). 조선조에 군수(郡守)을 지냈다.

설종한(偰宗漢) 조선(朝鮮) 때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순창파(淳昌派)의 파조(派祖).

설만구(偰萬耈) 자(字)는 원로(元老), 호(號)는 송석(松石). 조선(朝鮮)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곡성파(谷城派)의 파조(派祖).

설지순(偰智淳) 9대(九代)를 효행(孝行)으로 이어 온 가문에서 태어났다. 친환 때 밤늦게 약을 지어 오는데 호랑이가 길을 인도하고 귀신이 불을 밝혀 길을 인도하는 기적이 일어났고, 상을 당해 3년 동안여막에서 시묘하였다. 향리 유림의 추천으로 포상되었고 행적이 효행록(孝行錄)에 실려있다.

설봉원(偰琫源) 자(字)는 내진(乃珍), 호(號)는 삼악당(三樂堂). 조선조에서 참봉(參奉)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