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경주순창설씨(慶州․淳昌薛氏) ,경주설씨시조,순창설씨시조,설무신(薛武信),설호진

작성일 : 2017-04-18 00:56 수정일 : 2018-02-06 15:43

경주설씨의 본관 창성 유래

경주설씨시조 설무신(薛武信)공은 박혁거세 탄생설화에 나오는 초기 신라의 6촌중 명활산 고야촌의 촌장이었다.

시조공은 좌명공신으로 박혁거세가 왕이 된 뒤에 좌거 1대등공신 대사마 겸 대원수 개국도임관 대보 좌명공신 총재태재태사 보국천 좌보승보의 벼슬에 오르고 군부와 내치의 업무를 장악하였으며, 서기 32년에 고야촌설씨(薛氏)로 사성받아 서기 516년에 무신으로 시호가 내려지고, 서기 656년에 장무왕(壯武王)으로 추봉되었으니, 시조의 탄생지가 본관이라면 당연히 고야촌설씨나 혹은 계림, 월성이라야 옳지만 기사보에 의하면, 시조공으로부터 14세손 곡때 515년경 본관을 경주설씨로 하게 되었다는 기록은 450여년을 소급하여 표시한 것 같다.

경주라는 지명은 935년 신라가 폐망하고 처음으로 생겼다. 그 이전에는 서라벌→사로→사라→ 계림(65 )→신라(307)→경주(935)→ 동경(987)→낙랑군(1008)→ 다시 동경(1030)→고려 충렬왕 때 계림부→조선 태종 때(1413) 경주지명 부활→ 경주군(1895)→ 경주시 승격(1955)하였다.

이상과 같이 경주 지명 변천사를 볼때, 이 땅에 경주 지명이 있기 전에 우리 설씨는 서기 515년 경에 경주 본관을 기록했다 함은 후학들에게 의심스러울 일이나 실은 신라시대에는 본관제도가 통용되지 않았다.

서기 1047년 고려 문종 때 과거제도가 발달하면서 신분 파악을 위해 귀족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성씨와 본관을 기록하게 되었으며, 특히 조선의 문예부흥시대라 할 수 있는 영·정조 때인 17세기에 우리나라 성씨의 80% 이상이 족보를 간행하게 되어 소급해서 서기 515년 경부터 경주설씨가 기록하게 되었다고 본다.

순창설씨의 본관 창성 유래

신라 6부촌장 중 습비부장 무신공 설호진(薛호진)을 시조로 받들고 14세손 설곡(설곡) 선조 때 경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다가 36세손 설자승(子升) 선조께서 고려 인종 을사년(1125)에 이자겸의 난을 피하여 예부시랑의 벼슬을 사직하고 경남 하동군에 소재한 목화산에 잠시 우거하시다가 처향(妻鄕)인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에 정착하였다.

후일 증손자 설신(愼)께서 추밀원부사, 형부상서 순화백(淳化伯; 순창의 옛지명)에 봉작되고 현손 설공검(公儉)은 도첨의중찬의 최고 관직을 봉직하여 문량(文良)의 시호를 받아 종묘(宗廟; 고려 역대왕과 덕망 높은 신하의 위패를 모신 곳. 개성에 있음) 배향공신이 되니 설자승 선조를 추존하여 순화백에 봉작하고 순창설씨로 본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순창설씨로 처음 기록된 문헌은 1251년 설신이 서거하실 때 부장품으로 묘에 같이 묻었던 묘지석(墓誌石; 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고, 다음은 《고려사 열전》의 설공검 편에 순창설씨라 되었으며, 조선 태조 1년(1392)에 간행된 《국조문과방목》(문과 급제자 명단)과 《문화류씨 가정보》(1480.1570), 《궁원록》(窮源錄; 1600), 《씨족원류》(氏族源流; 1640), 《기사보》(1749)의 서문에 경주 본관을 순창으로 개관하였으니 경주나 순창으로 본관을 받드는 종족은 순화백의 자손이라고 되어 있다.

개관 경위를 예측하면, 고려 태조 18년 신라 경순왕이 항복하자 나라는 없어지고 경주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가, 고려 헌종 때 신라 복귀의 반란이 일어나 경주를 해체하여 안동과 상주에 예속시켜 사실상 경주라는 지명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뒤 조선 태종 때(1413) 경주란 옛이름이 부활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근거로 미루어 보아 문량공 순화백 선조 시대에 시대 변천에 따라 본관을 개관하지 않았는가 짐작해 본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창설씨는 남한에 총 35,825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신라시대(新羅時代) 인물(人物)

설거백(薛居伯) : 한무제(漢武帝) 천수 6년 기원전 117년 갑자년에 하늘로부터 진한 땅에 금강산(현재 경주의 금강산)에 처음 내려오셔서 명활산 고야촌(高耶村: 현재 경북월성군 천북면 화산 물천, 동산리, 안강읍)을 다스렸던 촌장(村長)으로써 한선제(漢宣帝) 오봉 원년 기원전 69년 알에서 깨어난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양육시켜 기원전 57년 혁거세를 신라(新羅) 초대(初代)왕(王)으로 추대(推戴)하는데 많은 공을 세우고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며 역사적(歷史的)으로 유명(有名)한 화백제도(和白制度)를 시행하여 오늘날 민주주의(民主主義) 제도를 구현시킨 선각자(先覺者)이다. 신라 유리왕 9년 서기 32년 진한(辰韓)의 6촌을 6부로 개칭(改稱)할 때 고야촌(高耶村)을 습비부(習比部)라 하고 습비부장 호진에게 설씨의 성을 사성하였으니 설호진으로 호칭하였으며 법흥왕 3년 서기 516년 시호(諡號)가 무신(武信)으로 내려졌고 태종 무렬왕 3년 장무왕(壯武王)으로 추존(追尊)되었다.

설곡(薛 嚳) : 처음 이름은 삼복(三福)이고 법흥왕조(法興王朝)에 지천(至川) 대구장(大丘長)을 지내고 진흥왕조에 대사도에 이르러 습비후(習比侯)에 피봉(皮封)되었고 습비(習比)가 경주에 속했으므로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설교(薛 喬) : 처음 이름은 준경(俊京)이고 신라(新羅) 대아찬(大阿湌)을 역임했다.

설이금(薛伊琴) : 처음 이름은 건정(建(正)이고 신라(新羅朝)에 아찬(阿湌)을 역임(歷任)했다.

설수진(薛秀眞) : 신라(新羅) 문무왕조(文武王朝)의 군사(軍事)전략가(戰略家)로 육두품(六頭品) 출신(出身)으로 관등(官等)은 아찬(阿湌)에 이르렀다. 그는 진법을 연구하여 이정(李靖)이 제갈량(諸葛亮)의 8진법에 의거하여 만든 6진병법(6陣兵法:6花陣法)에 조예(造詣)가 깊었는데 이는 대진(大陣)이 소진(小陣)을 싸며 곡절(曲折)하는 진법(陣法)이었다. 문무왕(文武王) 14년 서기 674년 9월 국왕(國王)이 영묘사(靈廟寺) 앞을 행차(行次)하여 열병식(閱兵式)을 거행(擧行)하고 그의 6진(陣)을 관람(觀覽)하였다.

설요(薛 搖) (?~693) : 신라(新羅) 사람으로 당(唐)나라 고종(高宗)때 당(唐)에 건너가 좌무장군(左武將軍)을 역임(歷任)한 설승충(薛承沖)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얼굴이 고와서 소호(小號)를 선자(仙子)라 하였다. 1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낙망(落望)한 나머지 불교(佛敎)에 귀의(歸依)하려고 출가(出家)하였으나 6년이 지나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시체(古詩體)로 반속요(返俗謠)를 지어 불계(佛界)를 버리고 환속(還俗)하였다. 그 뒤 곽원진(郭元振)의 처(妻)가 되어 여생을 보내다가 당(唐)나라 통천현(通川縣) 관사(官舍)에서 생(生)을 마쳤다.

설오유(薛烏儒) : 신라(新羅) 문무왕조(文武王朝)의 장군(將軍)으로 관등(官等)은 사찬(沙湌)이다. 문무왕(文武王) 8년 서기 668년 고구려(高句麗)가 멸망한 뒤 신라(新羅)는 그 부흥군을 도와 당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하였다. 문무왕(文武王) 10년 서기 670년 3월 신라(新羅)의 사찬(沙湌)으로 고구려 태대형(太大兄)을 역임한 고연무(高延武)와 더불어 각각 날쌘 병사 1민을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옥골(屋骨)전투(戰鬪)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설계두(薛罽頭) (?~645) : 신라(新羅)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활약한 무인(武人)이다. 그는 6두품(6頭品) 가문(家門)에서 출생(出生)하여 진골(眞骨) 출신(出身)이 아니면 대신(大臣)과 장군(將軍)이 될 수 없는 자신(自身)의 처지(處地)를 분통(憤痛)이 여겨 중국(中國)에 가서 크게 출세(出世)할 것을 기약(期約)하고 진평왕(眞平王) 43년 서기 621년 몰래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 건너가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 서기 645년 당(唐) 태종(太宗)이 고구려(高句麗)를 침략(侵略)할 때 종군(從軍)을 자청(自請)하여 좌무위과의(左武衛果毅)가 되어 요동(遼東) 안시성(安市城) 부근 주필산(駐蹕山) 밑에서 고구려(高句麗) 군대(軍隊)와 격전(激戰)을 벌이다 전사(戰死)하였다. 당(唐) 태종(太宗)은 그가 신라인(新羅人)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의(御衣)를 벗어 시신(屍身)을 덮어주고 대장군(大將軍)의 관직(官職)을 내렸다. 그의 이야기는 당시 신라(新羅)의 골품(骨品)제도(制度)가 6두품(6頭品) 이하(以下) 하급(下級) 귀족(貴族)들의 불만(不滿)의 대상(對象)이었음을 말해주는 좋은 사례(事例)이다.

설사(薛 思) (617~686) :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고 법명(法名)은 원효(元曉)이고 호(號)는 화쟁(和諍)이며 내마(柰麻) 설담날(薛談捺)의 아들이다. 하상주(下湘州:경북 경산군 자인면)출생(出生)으로 그의 어머니 꿈에 유성이 품속에 드는 것을 보고 원효(元曉)를 잉태(孕胎)하여 만삭(滿朔) 몸으로 압량군(押梁郡)의 남불지촌(南佛地村) 율곡(栗谷) 마을을 지나다가 사라수(娑羅樹) 아래에 이르러 갑자기 아이를 낳았는데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28세에 승려(僧侶)가 되어 황룡사(黃龍寺)에 들어갈 때 집을 희사(喜捨)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고 사라수(娑羅樹)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娑羅寺)라 하였다. 영취산(靈鷲山) 의 낭지(郎智), 흥륜사(興輪寺)의 연기(緣起)와 고구려(高句麗) 반룡산(盤龍山)의 보덕(普德) 등을 찾아다니며 불도(佛道)를 닦으니 뛰어난 자질(子姪)과 총명(聰明)이 드러났다. 34세에 동학(同學) 의상(義湘)과 함께 불법(不法)을 닦으려 당(唐)나라에 가던 중 요동(遼東)에 이르러 어느 무덤사이에서 하루 밤을 자게 되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한 그릇 마셨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보니 해골 속에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吐)하다가 깨닫기를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事物)과 법(法)이 태어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해골이나 다름이 없도다(필생칙종(必生則種)종법생(種法生) 심멸칙촉(心滅則髑)촉불이(髑不二) 부처님 말씀에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 뿐이라 한 것을 어찌 잊었더냐 하면서 유학(留學)을 포기(抛棄)하고 본국(本國) 신라(新羅)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분황사(芬皇寺)에 있으면서 독자적(獨自的)인 통불교(通佛敎:원효종, 분황종, 해동종이라고 함)를 제창(提唱)하여 민중(民衆)속에 민중불교(民衆佛敎)를 보급(普及)하는데 노력(努力)하엿다. 하루는 마음이 들떠 거리에 나가 노래하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라 하였다.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 듣고 대사(大師)가 귀부인(貴婦人)을 얻어 슬기로운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하고 요석궁(瑤石宮)에 홀로된 공주(公主)를 짝이 되게 하니 과연(果然) 공주(公主)가 아이를 배어 설총(薛聰)을 낳았다. 스스로 실계(失戒)한 원효(元曉)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自稱)하면서 속세(俗世)의 복장(服裝)을 하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다가 우연(偶然)히 한 광대(廣大)가 괴상(怪狀)한 박(瓠)을 가지고 춤과 민담(民譚)을 벌이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은 물건을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의 일체무애인(一切無㝵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에서 무애(無㝵)를 따다가 박의 이름을 짓고 무애가(無㝵歌) 라는 노래를 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에 세상(世上) 사람들 중 염불(念佛)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원효(元曉)의 교화(敎化)가 그렇게 성과(成果)가 있었다. 그 는 불교사상(佛敎思想)을 종합(綜合)하여 실천(實踐)한 정토교(淨土敎) 선구자(先驅者)이며 98종 240권(卷)의 책(冊)을 저술(著述)한 저술가(著述家)이기도 하였다. 70세 되는 해 혈(穴)사(寺)에서 생(生)을 마쳤다. 고려(高麗) 숙종조(肅宗朝)에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諡號)를 주었다.

설총(薛 聰) : 자(字)는 총지(聰智)이고 호(號)는 빙월당(氷月堂)이며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요석궁(瑤石宮) 공주(公主)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라(新羅) 10현의 한 사람으로 관직(官職)은 한림(翰林)을 지내고 주로 왕의 정치(政治) 자문(諮問)을 맡았다. 유학(儒學)과 문학(文學)을 깊이 연구(硏究)한 학자(學者)로써 일찍이 국학(國學)에 들어가 학생(學生)을 가르치고 유학(儒學)발전(發展)에 기여(寄與)했다. 그가 창제한 이두(吏讀)는 중국(中國)의 한문(漢文)에 토를 다는 것으로 당시(唐詩) 한문(漢文)을 배우고 익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가 이두(吏讀)를 창제(創製)했다고 하나 진평왕(眞平王) 시대의 서동요(薯童謠)와 선덕여왕(善德女王) 시대의 풍요(風謠) 등이 이두(吏讀)로 기록되어 있는 점을 미루어 보아 그가 창제(創製)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集大成)한 것으로 보인다. 화왕계(花王戒)로서 신문왕(神文王)을 충고(忠告)한 일화(逸話)도 전한다. 고려(高麗) 현종 13년 서기 1022년 홍유후(弘儒侯)에 추봉(追封)하고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경주(慶州) 서악서원(西岳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설중업(薛仲業) : 신라(新羅) 혜공왕(惠恭王)과 선덕왕(善德王) 시대(時代)에 활약(活躍)한 외교가(外交家)이며 설총(薛聰)의 아들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설총전(薛聰傳)에 일본국(日本國) 진인(眞人)이 증신라설판관시(贈新羅薛判官詩)를 지어주었는데 그 서(序)에 일찍이 원효거사(元曉居士)가 지은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보고 “그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이 깊은 한(恨)이였는데 신라(新羅) 국사(國使) 설공(薛公)이 곧 거사(居士)의 포손(抱孫)임을 듣고 비록 그 조(祖)는 보지 못했지만 그 손자(孫子)를 만난 것을 기뻐하여 이 시(詩)를 지어준다” 하였다. 그 시가 지금까지 남아 있으나 그 자손을 알지 못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고선사 서당화상 탑비(高仙寺誓幢和尙塔碑)에는 대력(大曆:당 대종의 연호(年號)로 서기 766~779년) 봄에 대사의 손자 한림 자(字) 중업(仲業)이 바다를 건너 사신(使臣)으로 일본(日本)에 갔다라고 기록(記錄)되어 있고 속일본서기(續日本書記)에는 선덕왕 원년 서기 780년 정월(正月)에 일본(日本)에 사신(使臣)이 왔는데 대판관(大判官) 한나마(韓奈麻)로서 일본(日本) 광인왕(光仁王)으로부터 종오품하(從五品下) 일본(日本) 관직(官職)을 받았다고 한다.

설명린(薛命鱗) : 신라조(新羅朝)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설균지(薛均之)下) : 신라조(新羅朝)에 시중낭(侍中郎)을 역임했다.

설이순(薛履舜) : 신라조(新羅朝)에 시중낭(侍中郎)을 역임했다.

 

고려시대 시대 인물

설경(薛 鏡) : 처음 이름은 경(京)이고 고려(高麗)조(朝)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고 부원군(府院君)에 皮封되었다.

설지화(薛枝華) : 고려조(高麗朝)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歷任)하였다.

설인손(薛仁孫) : 고려조(高麗朝)에 상서(祥瑞)를 역임(歷任)했다.

설봉조(薛奉조) : 고려조(高麗朝)에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했다.

설서담(薛瑞澹) : 고려조(高麗朝)에 도감(都監)을 역임했다.

설영순(薛影洵) : 고려조(高麗朝)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설계영(薛繼永) : 고려조(高麗朝)에 상서(尙書)를 역임했다.

설계문(薛繼文) : 고려조(高麗朝)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중서령(中書令)을 역임했다.

설계두(薛繼斗) : 고려조(高麗朝)에 문하성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歷任)했다.

설자승(薛子升) : 상서 설계영(薛繼永)의 아들로 고려조(高麗朝)에 출사(出仕)하여 호부(戶部)와 예부(禮部)시랑(侍郞)을 역임했다. 관직에 재임시 이자겸(李資謙)이 고려(高麗) 왕조(王朝)를 뒤집어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흉모(凶謀)를 미리 짐작하고 관직을 버리고 하동(河東) 목화산(木花山)에 은거(隱居)한 후(後) 인종 5년 서기 1126년 이자겸(李資謙)이 궁궐을 불태우고 왕을 시해(弑害)하려다가 발각(發覺)되어 대역죄(大逆罪)로 처형(處刑) 당한 후 정국이 안정되자 처향(妻鄕)인 순창(淳昌) 율북리(栗北里)로 이거(移居)하고 순창군(淳昌郡) 사호(司戶)가 되어 호장(戶長)의 감독하에 누대(累代) 벌문(閥門)으로서 지방 호족의 세력을 견제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지방자치를 효율적으로 수행한 공으로 순화백에 피봉되어 후손들은 순창설씨 시조로 모시고 있다.

설정숙(薛挺淑) : 고려조(高麗朝)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사문(四門) 박사(博士)를 역임(歷任)했다.

설선필(薛宣弼) : 고려조(高麗朝)의 문신(文臣)으로 순창설씨(淳昌薛氏) 시조(始祖) 설자승(薛子升)의 손자(孫子)이다. 사문(四門) 박사(博士) 설정(薛挺)의 아들이다. 신종조(神宗朝)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여 진사(進士)가 된 후(後) 여러 관직(官職)을 거쳐 희종조(熙宗朝)에 병부(兵部)시랑(侍郞), 강종조(康宗朝)에는 첨사성(詹事省) 첨사(詹事)를 거쳐 검교(檢校) 군기감(軍器監)을 역임(歷任)했다. 부인(婦人) 옥천조씨는 유방(乳房)이 4개였는데 아들 8명을 모두 쌍둥이를 네 번 낳았다고 하는데 그 중 세 아들이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피봉(皮封)되었다.

설신(薛愼) (1196~1251) : 자(字)는 신지(愼之)이고 충렬왕조의 찬성사를 역임한 공검(公儉)의 아버지이다. 고려조(高麗朝) 무신(武臣)정권(政權) 시(時) 문신(문臣)으로 20세에 문과에 등과(登科)하여 함풍현(咸豊縣)의 감무(監務)로 나가 많은 치적(治積)을 쌓아 최충헌(崔忠獻)의 표창을 받는 등 일찍부터 뛰어난 이재(吏才)를 발휘(發揮)하였다. 그 후 식목(拭目)도감(都監)의 녹사(綠事) 대관승(大官丞) 비서관 추밀원 당후관 감찰어사 등을 거쳐 고종(高宗) 14년 서기 1227년 예부(禮部) 원외랑(員外郞)으로 용주(龍州)에 외보(外補)되었으며 다시 병부(兵部), 이부(吏部) 원외랑(員外郞)을 역임하고 몽고(蒙古) 침입기(侵入期)인 고종(高宗) 19년 서기 1232년 시어사(侍御史)로 몽고(蒙古)에 사행(使行)하여 과중(過重)한 공물(供物) 징구(徵求)에 대한 고려측의 입장을 전하였다. 그해 고려(高麗)를 재침입한 살례탑(撒禮塔)에게 억류(抑留)되어 몽고군(蒙古軍) 지휘부를 따라 갔다가 살례탑(撒禮塔)이 처인성(處仁城)에서 고려(高麗)의 김윤후(金允侯) 장군과 부민들에게 사살되자 비로소 방환(方環)되었다. 대부(大府)소경(少卿)과 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쳐 고종 21년 서기 1234년에 충주(忠州)부사(府使) 이어 호부(戶部)와 예부(禮部)시랑(侍郞), 경상도(慶尙道) 안찰사(按察使)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예빈성(禮賓省) 판사(判事) 국자감(國子監) 대사성(大司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등을 역임하고 추밀원 부사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8형제 가운데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하여 어머니 조씨가 국대부인에 피봉되었다. 성격은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었다고 김백일(金百鎰)이 지은 묘지명이 전하고 있다.

설원경(薛元敬) : 고려조(高麗朝)에 좌정언(左正言)과 지제고(知制誥)를 역임했다.

설공검(薛公儉) (1224~1302) : 자(字)는 상검(尙儉)이고 호(號)는 경제(敬齊)이며 관직은 추밀원(樞密院使) 설신(薛愼)의 아들이다. 고려(高麗) 고종조(高宗朝)에 도병마록사(都兵馬錄事)로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예부(禮部) 낭중(郎中)이 되고 원종조(元宗朝)에 군기감(軍器監)이 되어 원나라로 가는 세자(世子:뒤에 충렬왕)를 호종(扈從)한 공(功)으로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다. 충렬왕조(忠烈王朝) 초기(初期)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승진(昇進)하여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참리(參里)를 거쳐 찬성사(贊成事)로써 치사(致仕)한 후(侯) 중찬선사(重贊成事) 치사(致仕)가 더해졌다. 충렬왕 묘정에 배향(配享)되고 개성의 송애서원(宋崖書院)과 순창(淳昌)의 무이서원(武夷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설경성(薛景成) (1237~1313) : 고려조(高麗朝)에 의(醫人)이다. 설총의 후인으로 처음에는 상약(尙藥) 의좌(醫佐)에 직무를 수행했으나 군부총랑(軍簿聰郞),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도첨의사사(都僉議司事)에 이르렀으며 충렬왕(忠烈王)이 병환(病患)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러 치료(治療)하게 하여 더욱 유명(有名)하다.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가 병으로 고려(高麗)의 의원(醫員)을 청했을 때 안평(安平)공주(公主)가 그를 원나라에 보내어 치료(治療)케 하여 효과(效果)를 보게하였다. 세조가 기뻐서 관름(官凜)을 내리고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가 바둑두는 것을 친히 보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2년 동안 머물다가 본국으로 귀환했는데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세조(世祖)가 다시 불러 몇 차례 왕래(往來)하였으며 그 때마다 후(厚)하게 대접(待接)을 받았다. 그 뒤 원(元)나라 성종(成宗)의 병(病)으로 다시 원(元)나라에 가서 머물렀으며 관직(官職)은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그는 신체(身體)가 장대(壯大)하고 풍의(風儀)가 아름답고 천성(天性)이 근후(勤厚)하여 제왕(諸王)에게도 은혜(恩惠)를 구하지 않았다.

설인검(薛仁儉) : 자(字)는 이검(而儉)이고 호(號)는 근제(謹齊)이며 고려(高麗) 충렬왕조(忠烈王朝)에 합주부사(陜州府使)와 사재시(司宰寺) 경(卿)을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다.

설덕(薛 德) : 충선왕조(忠宣王朝)에 직장(直長)과 대사헌(大司憲)을 역임(歷任)하였다.

설지충(薛之沖) : 설지충(薛之忠)으로 도 표기(表記)된다. 첨의(僉議)참리(參里) 설공검(薛公儉)의 아들이다. 충렬왕(忠烈王) 5년 서기 1279년 독로화(禿魯花)로 원(元)나라에 다녀왔으며 낭장(郎將)이 되었다. 충렬왕(忠烈王) 12년 서기 1286년 독호화(禿魯花)로 원(元)나라에 머물다 왔으며 그 뒤 관직(官職)이 첨의(僉議) 찬성사(贊成事)이르렀으며 첨의정승(僉議政丞) 판전리사사(判典理司使) 상호군(上護軍)을 역임(歷任)했다.

설봉(薛 縫) : 고려조(高麗朝)에 대호군(大護軍)과 병부(兵部)시랑(侍郞)을 역임(歷任)했다.

설안통(薛安統) : 고려조(高麗朝)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을 역임(歷任)했다.

설영임(薛永任) :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25년 서기 1300년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歷任)하고 충렬왕(忠烈王) 31년 서기 1305년 도첨의(都僉議)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뒤에 아들과 함께 방출(放黜)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 서기 1310년 다시 기용(起用)되어 1312년 찬성사(贊成事)로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다.

설문우(薛文遇) : 자(字)는 정숙(正叔)이고 호(號)는 죽정(竹亭)이다. 당대(當代)의 명의(名醫) 설경성(薛景成)의 아들이다. 여서(女婿) 이인복(李仁復)이 쓴 묘지문(墓誌文)에 의하면 충숙왕조(忠肅王朝)에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시문(詩文)에도 능(能)하고 많은 작품(作品)에 있으나 모두 실전(失傳)되고 그 중(中) 1률(律)만 남아있다.

설현고(薛玄固) (?~1349) :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6년 서기 1319년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가 사신(使臣)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충혜왕 1년 1330년 4월 경주부윤에 부임하고 뒤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역임했다.

설사덕(薛思德) (?~1380) :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23년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재임(在任) 중(中)에 공민왕(恭愍王) 시해사건(弑害事件)이 발생하자 후사(後嗣) 문제(問題)가 일어나자 이인임(李仁任)은 여흥왕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태후(太后)와 경복흥(慶復興)과 설사덕(薛思德) 등은 국내외 정세가 긴박한 상황이라 어린 왕자를 세우느니 종친(宗親)을 세우는 것이 옳다고 여겨 이를 강력히 추진하였으나 이인임에게 몰려 마침내 경복흥(慶復興)과 아들 중랑장(中郞將) 설군(薛群)과 상호군(上護軍) 설회(薛懷)가 함께 청주(淸州)로 유배(流配)되었다가 길가에서 좌주(坐誅)되었다.

설응(薛 凝) : 호(號)는 암곡(巖谷)이고 고려(高麗) 말(末) 중낭장(中郎將)을 거쳐 참지문하성사(參知門下省事)를 역임했으나 고려(高麗)의 국운이 기울어 짐에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요 열여(烈女)(烈女)는 불갱이부(不更二夫)라 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설빙(薛 憑) 호(號)는 송헌(松軒)이고 고려(高麗)가 국운(國運)이 다하고 새로운 왕조(王朝) 조선(朝鮮)이 일어나자 죽산(竹山)으로 돌아가 자정(自靖)하고 있는데 태종조(太宗朝)에 병조(兵曹) 참의(參議)를 삼아 불렀으나 불사(不仕)했다.

설지유(薛持維) : 호(號)는 문산(文山)이고 고려조(高麗朝) 말(末) 지신사(知申事)에 재임(在任) 중(中) 조민수(曺敏秀)와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으로 여흥왕(驪興王:우왕(禑王)이 폐위(廢位)되어 강화도(江華島)로 추방(追放)됨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물러났다. 선생은 주자의 성리학에 정명(精明)하여 정포은(鄭圃隱)과 도의(道義)로 친분(親分)이 돈독(敦篤)하였다. 일찍이 정포은(鄭圃隱)이 이르기를 설형(薛兄)의 학로(學路)는 바르고, 분석(分析)함이 밝아서 두려워하고 감탄(感歎)했다고 하였다. 방직범(方直範) 범세동(范世東) 등과 함께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에 원천석(元天錫)의 집에 모여 치악산 정상(頂上)에 다 제단(祭壇)을 만들어 열성을 비롯 수의부강(守義扶綱)하다가 피화(被禍)한 충현(忠賢)들에게 제사(祭祀)를 올리고 변고(變故)를 고하고 통곡(痛哭)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7일을 이곳에 머물면서 충효(忠孝)와 절의(節義)에 대한 참다운 이치를 논하고 그 망복(罔僕)의 뜻을 면려(勉勵)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운월제(雲月齊) 신문정(申文貞) 선생의 학설과 고사를 인용하여 설명하며 “인(仁)한 자는 성쇄로서 절을 고치지 않고 의로운 자는 존망으로써 마음을 버꾸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설칭(薛 稱) :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23년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조선조 태종(太宗) 3년 서기 1403년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을 역임(歷任)하고 태종(太宗) 4년 서기 1403년 원자(元子) 좌유선(左諭善)이 되고 태종(太宗) 7년 서기 1407년 명(明)나라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다녀오고 태종 8년 서기 1408년 예조(禮曹) 참의(參議) 동년 10월에 좌우(左右)보덕(輔德)태종 10년 서기 1410년 공안(恭安)부윤(府尹)과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양광도(楊廣道) 안렴사(按廉使)를 역임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인물(人物)

설훈(薛 纁) :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여 음사(蔭仕)로 창덕궁(昌德宮) 직장(直長)을 역임(歷任)하고 단종(端宗) 3년 서기 1455년 아들 계조(繼祖)가 정난공신(靖難功臣) 옥천군(玉川君)에 피봉(皮封)됨으로 순충보조공신(純忠輔助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吏曹)참판(參判) 옥천군(玉川君)에 추증(追贈)되었다.

설위(薛 緯) : 자(字)는 중민(仲敏)이고 호(號)는 백정(栢亭)이다. 조선(朝鮮) 문과에 등과(登科)하여 만경(萬頃) 현령(縣令)을 역임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시문(詩文)이 뛰어났다.

설집(薛 緝) : 자(字)는 충민(忠敏)이고 호(號)는 덕봉(德峰)이다.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음사(蔭仕)로 직강시윤(直講侍尹)을 거쳐 지방관(地方官) 여산(礪山)군수(郡守)와 음성(陰城)군수(郡守)를 역임(歷任)했다.

설경(薛 經) : 음사(蔭仕)로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을 역임(歷任)했다.

설효조(薛孝組) (1414~?) : 세종 17년 서기 1436년 4월 20일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별시위(別侍衛)를 거쳐 여러 관직을 거쳐 세조 4년 서기 1458년 안무사(按撫使)오 재임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策祿)되었고 세조(世祖) 4년 서기 1459년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거쳐 공조(工曹)참의(參議)와 호조(戶曹)참판(參判)을 역임했다.

설계조(薛繼祖) (?~1467) :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단종(端宗) 원년(元年) 서기 1453년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을 제거(除去)하는데 공(功)을 세워 정난공신3등(靖難功臣3等)에 책록(策祿)되고 세조(世祖) 원년(元年) 서기 1455년 옥천군(玉川君)에 피봉(皮封)되고 용양시위사(龍驤侍衛司) 후령호군(後領護軍)이 되었으며 이듬해 군기시(軍器寺) 부정(副正)이 임명(任命)되었다. 세조(世祖) 3년 서기 1457년 내자시(內資寺) 소윤(少尹)을 역임하고 이어 안주(安州)목사(牧使) 경상우도(慶尙右道) 수군(水軍) 도안무사(都按撫使)와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歷任)하고 시호(諡號)는 안양(安襄)이다.

설영조(薛榮祖) (1422~1489) :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 태안군사(泰安郡事)를 역임했으며 내직으로 참의(參議)를 역임했다.

설순조(薛順祖) (1427~1496) : 자(字)는 창윤(昌胤)이고 호(號)는 삼지당(三知堂)이다. 단종(端宗) 2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 세조(世祖) 원년(元年) 서기 1455년 12월 27일 좌익원종2등공신에 책록되었으나 뿌리치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호(自號)를 삼지거사(三知居士)라 하고 당(堂)을 지어 삼지당(三知堂)이란 현판(懸板)을 걸었다. 삼지란 그 뜻을 알고 나아갈 줄 알고(知進), 만족할 줄 알며((知足), 그칠 줄을 안다(知止)는 뜻이다. 낙향한 다음해 단종(端宗)이 영월(寧越)에서 죽음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5일간 식음(食飮)을 전폐(全閉)하고 귀래정(歸來亭) 신말주(申末舟)와 더불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27년만인 성종(成宗) 14년 서기 1483년 성종의 간곡(懇曲)한 부름에 절충장군(折衷將軍) 부산포(釜山浦) 첨절제사(僉節制使)에 임명(任命)되어 부임(赴任)하자 부산진(釜山鎭)을 총점검(總點檢)하고 주진(主鎭)을 부산포(釜山浦)에 설치(設置)할 것을 상소(上疏)하였으며 성종(成宗) 17년 서기 1486년 통정대부 상주(尙州)목사(牧使)와 광주(光州)목사(牧使)에 부임하고 객사(客舍)를 중수(重修)하였고 성주(星州)목사(牧使) 김해(金海)부사(府使) 황주(黃州)목사(牧使)를 역임하고 69세의 나이가 고령(高嶺)임을 자처(自處)하고 사직서(辭職書)를 내었으나 성종(成宗)이 하서(下書)하기를 무릇 장이된 자는 재주만 귀중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정직한데 달려있을 뿐이다. 하고 그대는 사양치 말고 더욱 진장(鎭將)에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삼지당(三知堂) 당기(堂記)에는 좌찬성(左贊成) 손순효(孫舜孝), 부윤(府尹) 신말주(申末舟), 참판(參判) 권경우(權景佑) 정낭(正郎) 안심(安深), 판관(判官) 최영(崔榮), 전적(典籍) 안기(安璣), 등의 시문 60수가 전하며 금부도사(禁府都事) 송병순(宋秉珣)이 묘비문(墓碑文)을 지었다.

설맹손(薛孟孫) (1461~1524) : 연산조(燕山朝)에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중종(中宗)반정(反正) 이후(以後) 이과(李顆)의 옥사(獄事) 사건(事件)을 잘 처리(處理)하여 가정대부(嘉靖大夫) 안천군에 봉해졌다.

설인조(薛仁祖) : 현감(縣監)을 역임(歷任)했다.

설성길(薛性吉) :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설정신(薛丁新) (1405~1468) :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문종(文宗) 원년(元年) 서기 1451년 증산현감(甑山縣監)과 평안도(平安道) 진무(鎭撫)를 거쳐 세조(世祖) 원년(元年) 서기 1455년 호군으로 좌익원종공신3등(佐翼原從功臣3等)에 책록(策祿)되고 세조(世祖) 5년 서기 1459년 전라(全羅)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로 승진(昇進)하여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거쳐 세조(世祖) 10년 서기 1464년 판경원도호부사(判慶源都護府使)가 되었다. 나이 60에 혼기(婚期) 늦은 딸 3명이 되고 하혈병(下血病)을 이유(理由)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세조(世祖) 11년 서기 1465년 갑산(甲山)부사(府使)에 임명(任命)되고 세조(世祖)13년 서기 1467년 의주(義州)목사(牧使)에 재직(在職) 중(中) 이시애(李時愛)의 반란군(叛亂軍)에 의해 관부(官府)에서 향년(享年) 64세로 순국(殉國)하였다.

설갑인(薛甲仁) (1410~?) : 자(字)는 자문(子이고 호(號)는 마암(磨巖)이다. 세종조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음사(蔭仕)로 통례원(通禮院) 찬의(贊儀)를 역임(歷任)했다. 종제(從弟)인 설순조(薛順祖)의 삼지당기(三知堂記)에시 4수가 전하고 이조(吏曹)참판(參判) 민병승(閔丙承)이 묘비문(墓碑文)을 지었다.

설창신(薛昌新) : 진용교위(進勇校尉)로 좌익원종2등공신에 책록(策祿)되고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를 역임햇다.

설주(薛 柱) (1451~1515) : 세조(世祖) 5년 서기 1459년 강의(講義)생도(生徒)로 충순당(忠順堂)에서 중국(中國)의 음운(音韻)을 강의(講義)했으며 성종(成宗) 24년 서기 1494년 사도시(司導寺) 주부(主簿)를 거쳐 임피(臨陂)현령(縣令)을 역임했다. 연산조(燕山朝) 6년 서기 1500년에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로 승진(昇進)했다.

설추(薛 楸) (1466~1537) : 자(字)는 여수(汝秀)이고 조선(朝鮮) 중종조(中宗朝)에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다.

설초(薛 礎) (1471~1531) : 조선 중종조에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옥구(沃溝)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설맹기(薛孟基) :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歷任)했다.

설성(薛 成) : 조선(朝鮮) 중종조(中宗朝)에 부사(府使)를 역임(歷任)하고 좌익원종공신2등(佐翼原從功臣) 2等)에 책록(策祿)되었다.

설강(薛 江) (1481~1531) : 자(字)는 원서(元瑞)이고 조선(朝鮮) 중종조(中宗朝)에 판관(判官)과 나주(羅州) 목사(牧使)를 역임(歷任)했다.

설확(薛 確) (1491~1547) : 자(字)는 의서(義瑞)이고 조선(朝鮮) 중종조(中宗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이다.

설건(薛 健) (1487~1555) : 호(號)는 운은당(雲隱堂)이고 조선(朝鮮) 중종조(中宗朝)에 음사(蔭仕)로 경차관(敬差官)으로 상주(尙州)목사(牧使)를 역임햇다. 아버지 삼지당의 유훈을 받들어 관직(官職)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가 임실군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설공순(薛公淳) : 호(號)는 미암(眉巖)이고,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사위로 정여창(鄭汝昌)의 문하(門下)에서 사사(私事)하였고 음사(蔭仕)로 참봉(參奉)을 역임했다. 연산조(燕山朝) 10년 서기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스승이자 장인인 정여창(鄭汝昌)이 사사(賜死)되자 통곡(痛哭)하기를 3년 같이 죽지 못함을 후회(後悔)하면서 순창군 금과면 설산(雪山)에 숨어살며 자호(自號)를 미암일사(眉巖逸士)라 하였다.

설공성(薛公誠) : 조선(朝鮮) 중종조(中宗朝)에 00군수(郡守)를 역임(歷任)했다.

설홍윤(薛弘允) (1515~1583) : 자(字)는 공신(公信)이고 호(號)는 청취정(淸翠亭)이고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유학자(儒學者)이다. 중종(中宗) 32년 서기 1537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관직(官職)에는 뜻이 없고 후진(後進)교육(敎育)에만 힘을 쓰니 율곡(栗谷)이 공을 일러 고상한 선비라 격찬(激讚)였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先生)은 집대성(集大成)이라 허였다. 서하(西河) 이상민(李相敏) 선생(先生)은 은거(隱居)군자(君子)라 칭(稱)하였다.

설구지(薛球芝) : 조선(朝鮮) 중종조(中宗朝)에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를 역임(歷任)했다.

설명(薛 冥) : 자(字)는 미숙(美叔)이고 조선(朝鮮) 00조에서 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를 역임(歷任)했다.

설연(薛 衍) : 자(字)는 윤보(潤甫)이고 통덕랑(通德郞) 품계(品階)에 오르고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설순범(薛舜範) : 고조선 조에 충의위(忠義衛)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00를 역임(歷任)했다.

설구인(薛求仁) (?~1618) : 광해조(光海朝) 10년 유학(儒學) 한보길(韓輔吉), 박몽준(朴夢俊), 한천정(韓天挺) 등과 함께 이홍로(李弘老)의 심복(心腹) 이(李)각(覺)을 죽이고 양사(兩司)를 귀양보내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부(父) 김제남(金悌男)을 역모죄(逆謀罪)로 처형(處刑)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폐출(廢黜)시키라는 연명(連名) 상소(上疏)를 올렸다. 또 서궁폐출에 참석하지 않는 대신(大臣) 박승종(朴承宗) 이경전(李慶全)에 대한 탄핵(彈劾)과 유간(柳澗)의 치죄(治罪)와 서궁(西宮)을 폄삭(貶削)하는 절차(節次)를 천자(天子)에 상주(上奏)하여 폐출(廢黜)하는 소(疏)로 말미암아 역적(逆賊)으로 몰려 유생들과 함께 처형(處刑)당했다.

설적(薛 適) : 조선(朝鮮) 종중조에 호조(戶曹) 참의(參議)를 역임(歷任)했다.

설윤(薛 潤) : 조선(朝鮮) 선조조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역임(歷任)햇다.

설의조(薛義祖) : 자(字)는 군직(君稙)이고 호(號)는 태연(太淵)이고 조선(朝鮮) 00조에 00군수를 역임했다.

설귀립(薛貴立) : 자(字)는 화백(和伯)이고 조선 숙종조에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역임(歷任)했다.

설효선(薛孝善) : 자(字)는 선항(善恒)이고 조선 숙종조에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역임(歷任)했다.

설우범(薛禹範) : 자(字)는 국균(國均), 호(號)는 모촌(茅村)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시 고성(固城)현감(縣監) 조응도(趙凝道)와 함께 창의(倡義)하여 조응도(趙凝道)가 전사(戰死)하자 잔여(殘餘)병력(兵力)을 이끌고 남원(南原)에서 크게 승리(勝利)하였다. 다시 거제(巨濟), 옥포(玉浦) 싸움에서 전과(戰果)를 올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어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할 때와 환도(還都)할 때 호종(扈從)하여 서기 1604년 효총장의협력선무원종공심(效總仗義協力宣武原從功臣)에 책록(策祿)되고 다음해 훈련원(訓練院) 정(正)에 제수(除授)되었다.

설함(薛 諴) : 자(字)는 여침(여침)이고 호(號)는 삼성제(三省齊)이다. 명종조(明宗朝)에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를 역임(歷任)하고 선조조(宣祖朝)에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를 역임(歷任)했다.

설규징(薛奎徵) : 자(字)는 문서(文瑞)이고 호(號)는 복제(復齊)이다. 현종(顯宗) 15년 서기 1674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고 음사(蔭仕)로 성균관(成均館) 장의(掌儀)가 되어 인종비(仁宗妃)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問題)가 거론(擧論)되자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 등(等)과 함께 3년 설을 주장(主張)하다가 서인(西人)의 기년(朞年)설이 채택(採擇)되자 학업(學業)을 중단(中斷)하고 귀향했다.

설응정(薛應貞) : 자(字)는 여간(汝幹)이고 선조(宣祖) 36년 서기 1603년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경력(經歷), 의금부(義禁府) 판사(判事),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등 여러 관직(官職)을 거쳐 간성(杆城)군수(郡守) 겸(兼) 수군방어사(水軍防禦使)를 역임했다.

설관도(薛貫道) (1612~1689) : 자(字)는 일이(一以) 호(號)는 미제(眉齊)이다. 인조(仁祖) 17년 서기 1637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숙종 13년 서기 1687년 천거(薦擧)로 동몽(童蒙)교관(敎官)을 거쳐 상의원(尙衣院) 주부(主簿)를 역임(歷任)하고 숙종(肅宗) 15년 서기 1689년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귀향(歸鄕)하여 여러 가지 사회사업(社會事業)을 하였다.

설찬유(薛纘儒) : 자(字)는 백술(伯述)이고 조선(朝鮮) 00조에 00만호(萬戶)를 역임(歷任)했다.

설승유(薛繩儒) : 자(字)는 계술(季述)이고 조선(朝鮮) 00조의 사람으로 효자(孝子)로 칭송(稱頌)을 받았다.

설만동(薛萬東) : 자(字)는 성오(盛吾)이고 호(號)는 정제(情齊)이다. 갈암(葛庵) 이현일(利玄逸)의 문인(門人)으로 숙종(肅宗) 13년 서기 1687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여 진사(進士)가되었다. 흉년(凶年)에 재물(財物)을 풀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매화목(梅花木)을 심어 가꾸는데 취미(趣味)를 삼아 자호(自號)를 세매헌(世梅軒)이라 칭하고 그를 만나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아들 설세구(薛世龜)가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를 밭아 호조(戶曹) 참판(參判) 겸(兼) 의금부(義禁府) 동지사(同知事)에 증직(贈職)되었다.

설세구(薛世龜) : 자(字)는 낙서(洛瑞)이고 수직(壽職)으로 정헌대부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에 제수(除授)되었다.

설하신(薛夏臣) : 자(字)는 예숙(禮叔)이고 조선 영종조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설범유(薛範儒) : 자(字)는 수선(守先)이고 호(號)는 무위제(武爲齊)이다. 조선(朝鮮) 00조(00朝)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설 구(薛 榘) : 자(字)는 원규(元規)이고 조선(朝鮮) 정조조에 개성부분교관을 역임(歷任)하였다.

설 영(薛 榮) : 자(字)는 중원(中元)이고 호(號)는 금(錦)소(素)이다. 조선(朝鮮) 순조조에 개성부분교관을 역임(歷任)하였다.

설창후(薛昌垕) : 자(字)는 성여(盛與)이고 경종(景宗) 3년 서기 1723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영조(英祖) 4년(年) 서기 1728년 이인좌(李麟佐) 정희량(鄭希亮) 등이 반역(反逆)을 하여 호서(湖西) 호남(湖南) 영남(嶺南)에서 병대(兵隊)를 일으키자 병조판서(兵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의 관리영기(管理營騎) 별장(別將)으로 기사(騎士) 3백을 이끌고 출정(出征)하여 전주(全州)에서 박필현(朴弼顯)을 베고 난(亂)을 평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워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책록(策祿)되고 여러 관직(官職)을 거쳐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역임했다.

설염조(薛念祖) : 자(字)는 윤신(允信)이고 조선(朝鮮) 정조조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설익주(薛翊周) : 자(字)는 좌보(左甫)이고 조선(朝鮮) 고종조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설효석(薛孝錫) : 자(字)는 백원(百源)이고 조선(朝鮮) 고종조에 참서관(參書官)을 역임(歷任)했다

설보석(薛寶錫) : 자(字)는 사현(士賢)이고 조선(朝鮮) 고종조에 경성판관을 역임(歷任)했다.

설세범(薛世範) : 조선(朝鮮) 고종조에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역임했다.

설희주(薛熙周) : 조선(朝鮮) 고종조에 돈령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역임했다.

설경관(薛慶觀) : 자(字)는 국빈(國賓)이고 호(號)는 내빈(乃賓)이다. 정조(正祖) 10년 서기 1786년 식년(式年)문과(文科) 병과(丙科)에 등과(登科)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 등 여러 관직(官職)을 거쳐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역임했다. 효행(孝行)이 특출(特出)하고 형제간 우애가 돈독(敦篤)하였다.

설술남(薛述男) : 조선(朝鮮) 선조조)에 제용감(濟用監) 판관(判官)을 역임했다.

설흥범(薛興範) : 조선(朝鮮) 선조조에 호조(戶曹) 정랑(正郞)을 역임했다.

설보종(薛普鐘) : 조선(朝鮮) 선조조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설병규(薛秉奎) : 자(字)는 승제(承齊)이고 호(號)는 학암(鶴巖)이다. 조선(朝鮮) 순조조에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역임했다.

설광윤(薛光潤) : 자(字)는 여희(汝希)이고 조선(朝鮮) 순조조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설창훈(薛昌纁) : 조선(朝鮮) 고종조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설광욱(薛光旭) : 자(字)는 소일(小日)이고 호(號)는 심제(心齊)이다. 효행(孝行)이 특출(特出)하여 9세에 외환(外患)을 당해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어머니 병환(病患)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기를 10여 차례나 하였다. 돌아가신 후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유학(幼學) 소택진(蘇宅進)외 경상도(慶尙道) 유림(儒林) 780인이 천장(薦狀)하여 효자각(孝子覺)을 세웠다.

설무성(薛武成)의 배위(配位) 김영김씨(金寧金氏) : 김씨(金氏) 부인(婦人)께서는 효성(孝誠)이 극진(極盡)하고 남편(南便)이 병(病)들어 누워 있을 때는 온갖 열행(烈行)을 다하여 당시(唐詩) 도(道)의 감사(監司)와 중앙(中央)정부(政府) 대신(大臣)들까지 표창(表彰) 완의문(完議文)에 서명(署名)을 하여 효열각(孝烈覺)을 겅립하엿고 예조판서(禮曹判書) 민경호(閔京鎬)가 열행(烈行) 비문(碑文)을 찬(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