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충주홍주석씨(忠州洪州石氏),충주석씨시조,석린(石鄰),충주석씨유래,충주석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7 23:18 수정일 : 2018-02-03 21:08

충주홍주석씨(忠州洪州石氏)의 연원(淵源)-충주석씨유래

충주석씨시조는 린()이며 고려중엽에 중국으로부터 고려에 와서 의종(毅宗) 경인(庚寅 서기1170)년에 이의방(李義昉)의 발탁으로 낭장(郎將)이 되고 명종(明宗) 6년 병신(丙申 서기1176)년에는 두경승(杜景升)을 따라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한공으로 서북병마사(西北兵馬使)가 되시고 이어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지니 예성은 지금 충주의 옛이름이다.

봉지인 충주를 본관(本貫)으로 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 석양선(石良善)은 시조 석린(石)6세손이다. 배는 영흥최씨(永興崔氏)니 영흥백(永興伯)정효공 최한기(崔閒奇)의 딸로 의혜왕후(懿惠王后)의 매제이다.

이태조(李太祖)탄생한지 다섯달만에 의혜왕후가 돌아가시니 이모 최씨가 젖을 먹여 길렀다. 서기 1392년 태조가 등극하여 유양의 은혜로 崔氏를 경창옹주(慶昌翁主)로 봉하고 석양선을 홍양부원군으로 추봉하였다.

석양선(石良善)의 자 석천을(石天乙)星伯이요 호는 香山이며 관()이 중낭장(中郎將)인데 홍성군(洪城君)에 추봉되었다. 홍성군 석천을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아들 수명(壽明)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의 벼슬을 지내시고 조부 홍양부원군을 따라 홍양(洪陽)으로 분관하였고, 홍양은 지금 홍주의 옛이름이며, 둘째 여명(汝明)는 윤립(胤立), 호는 화원(花園)이며 공민왕 갑인(恭愍王甲寅)에 성균관생원으로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관이 주서(注書)였으며 지금 충주석씨의 중시조이시다.

충주석씨는 시조 린()이 상장군으로 이땅에 뿌리를 내린 이래 만사백가구로 사만사천명정도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며 한국성씨가운데 66위를 차지하는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는 성씨로 알려져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충주석씨는 남한에 총 41,802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역대(近代) 인물(人物)-충주석씨조상인물

고려시대(高麗時代) 인물(人物)

석인(石鄰):고려중엽에 중국으로부터 고려에 와서 1170년 의종(毅宗) 경인(庚寅)란에 이의방의 발탁으로 랑장(郞將)이 되고, 1176년 명종(明宗) 병신(丙申)란에 두경승을 따라 조위총의 란을 평정한 공으로 서북병마사가 되고 이어 상장군에 올라 예성군에 봉해지시니 충주석씨의 시조이다. 예성은 지금 충주의 옛이름이다.

석정(石靖):밀직제학(密直提學)

석달(石墶):밀직제학(密直提學)

석흥국(石興國):문하사중(門下侍中)

석양선(石良善):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이니 시조 석인의 6세손이다. 배는 영흥최씨(永興崔氏)며 의혜왕후의 妹弟이시고 이태조(李太祖)가 탄생한지 다섯달만에 의혜왕후가 돌아가시고 이모 崔氏에 의하여 유양(乳養)하였으며, 그 은혜로 최씨를 경창옹주(慶昌翁主)로 봉하고 석양선을 홍양부원군으로 추봉하였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인물(人物)

석천을(石天乙):자는 성백(星伯), 호는 향산(香山)이며 관()이 중랑장(中郞將)인데 홍성군(洪城君)에 추봉되었다.

석수명(石壽明):한성판윤(漢城判尹)

석여명(石汝明):자는 윤립(胤立), 호는 화원(花園)이며 1374년 공민왕(恭愍王) 갑인(甲寅)에 성균관생원(生員)으로서 을과(乙科)에 급제(及第)하고 관()이 주서(注書)였다.

고려가 망하고 두문불출로 자정하였는데 조선왕실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141662일에 태종(太宗)이 왕지(王旨)를 내려 가선대부 검교 한성윤집현전제학(嘉善大夫檢校漢城尹集賢殿提學)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불취(不就)하니 왕이 진노하고 충주시 차의산(車依山) 회문동(回文洞)으로 안치(安置)되고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이소식을 들은 태종은 불괴포목(不愧圃牧)이라하면서 그 충성심에 감복하고 포양(褒揚)하니 숭록대부좌찬성(崇祿大夫左贊成)을 추증(追贈)하였다. 묘는 실전하고 설단(設壇)배향하며 하록(下麓)에 신도비(神道碑)花園齊가 있다.

석문수(石文守):자헌대부행예조참판(資憲大夫行禮曹參判)

석문현(石文賢):이천현감(利川縣監)

석문성(石文成):직제학(直提學)

석인정(石仁正):() 모정, () 판서(判書)

석의정(石義正):예조참의(禮曹參議)

석예정(石禮正):정산현감(定山縣監)

석지정(石智正):정원승지(政院承旨)

석신정(石信正):한림학사(翰林學士)

석감(石鑑):통훈대부정주목사(通訓大夫定州牧使)

석구수(石龜壽):현령(縣令)

석정신(石貞信):정량(正郞)

석사진(石斯珍):석여명의 증손이다. 서기 1407년 태종 정해(丁亥)에 출생하여 세종조에 등과하고, 1445년 단종 갑술(甲戌)에 가선대부(嘉善大夫)행 경상우병마절도사(慶尙右兵馬節度使)겸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역임하였다. 단종이 쫓겨나고 세조가 임금이 됨으로서 사직하고 은거하기를 경남 의령군 화정면 덕교리였는데 그곳에서 졸하였다. 배는 정부인 完山李氏며 묘하에 석천재(石川齋)가 있다.

석성옥(石成玉):()이 이조참의(吏曹參議)니 좌찬성 석여명의 증손이다. 1506년 연산군의 가혹한 정치를 차마 볼 수 없어 과감하게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곳이 경남 밀양군 무안면 중산리이며 은거지였다. 당시 영백(嶺伯)인 이호지(李好之)는 이종지의로 전토(田土)와 노비를 주어서 은거하는 생활을 도왔다. 배는 숙부인 順興安氏는 영의정수산(壽山)이다. 묘하에 청덕재(淸德齋)가 있다.

석사성(石斯珹):통덕랑(通德郞)

석사화(石斯華):방어사(防禦使)

석옥점(石玉玷):병조좌랑훈련원선전관

석옥진(石玉瑧):사도사첨정(司導寺僉正)

석감(石鑑):() 명서(明序). 임진왜란때 충주향교가 왜병에 의하여 불타고 있을 때 재종손(再從孫) 천수(天壽)와 오성(五聖)의 위패(位牌)를 안고 산속으로 들어가 피난시킨 호성공(護聖功)이 인정되어 정조때 증일품가선대부병조참판에 추봉되었고 매년 충주유림에서 춘추로 향사하고 있다.

석천수(石天壽):재종조(再從祖) 석감과 함께 충주향교 오성의 위패를 피난시킨 호성공으로 증통정대부장예원판결사이며 매년 충주유림에서 춘추로 향사하고 있다.

석백(石柏):() 수연(壽年), () 의암(義庵). 선조 25년 임진왜란시 강개유기절(慷慨有氣節)하여 겸구여력하고 불승울분하여 곽재우장군이 영남일대에 의병을 일으킬때 정유재란과 화왕산성전투에 참여 왜군과 격전분투하였다. 다시 복수군에 편입, 진양성을 수호하다 고전구일에 큰비에 성이 무너짐에 여동제의사투강이사(與同諸義士投江而死)하니 계사 6월이라 창녕군지와 임란공신유사지에 기록되어 있으며, 창녕상의사에서 유림이 향사한다. 또한 충남 보령 호국사에도 위패가 봉안되어 춘향대제를 행하고 있다.

석종(石琮):는 성좌(聖佐), () 三山堂이며, 선조(宣祖)때 병조좌랑이었으나 광해군의 폭정으로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석지형(石之珩):는 숙진(淑珍), 壽峴이며 인조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강화 개성교수를 거쳐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지냈다.

석여신(石汝信):호는 운포(雲圃)이고 관()이 승사랑(承仕郞)으로 문장과 덕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한강 정선생의 옥사에 소를 지은 사람이 석여신이다.

근대 인물

석대성(石大誠):() 도중(道中), () 성당(性堂)이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후학을 양성하여 석씨문중을 빛낸분이며 또한 낙원정사를 건립하여 향토유림이 향사하니 정일이 3월상 갑()일이다.

석재준(石載俊):() 경수(慶秀), () 소계(小溪)니 도와 예를 겸비한 경학원강장(經學院講長)으로 1908년 장능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1910년 경술 국치(國恥)에 북향통곡하고 두문불출하며 우국충정으로 나날을 보내며 오직 사학을 진작시켜 민족도의를 일깨우는 은사(隱士)로서 혼신의 정열을 불태웠다. 1921년 문하제생들이 함영수계(含英修契)하고 달도산하에 소계정을 영축하여 강학소로 활용하였다.

석호문(石鎬文): 1943년 철기 이범석(李範錫)장군휘하에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을 전수하였다.

석성기(石盛基):191931일 독립운동때 경성의학전문학생으로 탑골공원 독립선언식에 참가하고 고향인 상주에 내려와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후 일본경찰에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당하여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출감후에 고향에서 병원을 개업하지 못하고 강원도등지를 돌며 업을 경영하다 작고하였다.(건국훈장추서)

석성국(石成國):1895년 을미사변때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참모장으로 활동하다 왜병에 체포되자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