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연산서씨시조(連山徐氏 始祖),서준영(徐俊英),연산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7 18:10 수정일 : 2018-03-05 11:1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연산서씨(連山徐氏)의 시조(始祖) 준영(俊英)은 서신일(徐神逸 : 이천 서씨의 시조)의 후손으로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해온 연산지방(連山地方)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고 하나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상고(詳考)하지 못한다.

연산(連山)은 충청남도(忠淸南道) 논산군(論山郡)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황산군(黃山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에 연산(連山)으로 고쳐 현(縣)이 되었으며 1018년(현종 9) 공주(公州)에 이속시켜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현감(縣監)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어 공주부(公州府)의 관할이 되었다가 1914년 논산군에 합해져 지금은 논산군에 속한 연산면(連山面)으로 남아있다.

그 후 연산 서씨는 준영(俊英)의 아들 보(寶)의 후대에서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조선조에서 참군(參軍)을 지낸 의민(義敏)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2세손 종수(宗秀)가 현감(縣監)을 지내고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대표적인 인물

연(憐)은 현감 종수(宗秀)의 아들로 19세 때 무과(武科)에 장원하여 제주 판관(濟州判官)로 나가 10대 명관(名官)으로 명성을 떨쳤다. 당시 제주도에는 한라산(漢拏山) 석굴에 큰 뱀이 있어 풍우조화(風雨造化)를 부린다고 하여 사신(蛇神)을 숭배하는 관습이 있었다. 심지어는 사신을 모시지 않으면 불행이 닥친다고 하여 시집까지 꼭 신주(神主)를 옮겨다가 모시곤 하여 폐해가 극심하였다.

그는 제주 판관으로 나가 이 사신당(蛇神堂)을 두들겨 부수고 민심(民心)을 안정(安定) 시켜 도민(島民)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고, 지금까지도 제주 남부(濟州南部)에 사는 사람들은 사신당을 숭배하고 있다고 한다.

그후 연(憐)의 아들 천령(千齡)과 증손 후적(後積 : 감찰 주의 아들)도 현감(縣監)을 역임하여 가통(家統)을 이었고, 부사(府使)로 나갔던 택선(宅善)․윤박(潤璞) 과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간세(幹世), 판관(判官) 병덕(秉德)이 유명했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는 독립운동가로 이름났던 승태(承台)가 철종(哲宗) 때 의병(義兵)들의 군량(軍糧)을 조달했고, 광천(廣川)에 덕명학교(德明學校)를 설립하여 육영사업(育英事業)에 헌신했으며, 기환(基煥)은 의병(義兵)을 일으켜 민종식(閔宗植)과 함께 홍주성(洪州城) 전투에 참가했다가 접전중 순절하여 연산 서씨를 대표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산서씨(連山徐氏)는 남한(南韓)에 총 7,5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연산서씨조상인물

서의민(徐義敏) 조선조에 참군(參軍)을 역임하였다.

서종수(徐宗秀)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서연(徐 憐) 1511년(중종 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제주 판관(濟州判官)에 부임했다. 당시 한라산(漢拏山) 석굴에 큰 뱀이 풍우조화(風雨造化)를 부리며 요사(妖邪)를 부리므로 관민(官民)이 두려워하여 춘추(春秋)로 15세(歲) 동녀(童女)를 바쳐왔는데, 그 뱀을 죽여 없애어 민심(民心)을 안정(安定)시켰다. 도민(島民)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서천령(徐千齡)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서주(徐 澍) 조선조(朝鮮朝)에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서후적(徐後積)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서택선(徐宅善) 조선 때 부사(府使)을 역임하였다.

서명세(徐名世) 조선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서윤박(徐潤璞)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府使)을 지냈다.

서간세(徐幹世) 조선 때 수군 절도사(水軍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서해조(徐海朝) 자(字)는 종지(宗之). 조선 때 사간(司諫)을 지냈다.

서병덕(徐秉德) 조선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서승태(徐承台) 1854년(철종 5) 항일투쟁에 참가, 의병(義兵)들의 군량(軍糧)을 조달(調達)하였고, 한편으로는 광천(廣川)에 덕명학교(德明學校)를 설립(設立)하여 육영사업(育英事業)에 헌신했다.

서기환(徐基煥) 1850 (철종 1) ~ 1906 (광무 10)

호(號)는 우정(愚亭). 충남 홍성(洪城) 출신. 1905년(광무 9) 의병을 일으켜 이듬해 민종식(閔宗植)과 같이 홍주성(洪州城) 함락전에 참가, 동문 영관(東門領官)의 직책으로 동문(東門)을 부수고 돌입하여 접전 중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