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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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17 17:58 수정일 : 2018-01-08 16:26

대구서씨시조 및 대구서씨유래

대구서씨(大丘徐氏)의 시조(始祖) 서한(徐 閈)은 누대(累代)에 걸쳐 대구(大丘)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해온 사족(士族)의 후예(後裔)로 고려조에서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역임하여 후손들이 대구(大丘)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1702(숙종 28)에 간행된 「대구서씨세보(大丘徐氏世譜)」에 의하면 서씨(徐氏)의 선조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다고 하나 세대가 멀고, 문헌도 없어 계대(系代)를 고증(考證)할 수 없다고 하였다.


대구(大邱)는 영남지방(嶺南地方)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경상도(慶尙道)의 행정중심지이다. 본래 신라(新羅) 때 달구화현(達句火縣 : 달불성)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대구(大丘)로 고쳐서 수창군(壽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조(高麗朝) 에 들어와 경산부(京山府)에 이속되었으며 1143(인종 21) 현령(縣令)을 두었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대구현(大丘懸)에서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되면서 수성(壽城)을 속현으로 두었고, 1466(세조 12) ()을 설치하여 도호부(都護府)가 되었다. 1750(영조 26) 대구의 유생 이양채(李亮采)가 구()자는 대성 공자(大聖孔子)의 휘()자이므로 이를 개칭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했다가 1801년부터 점차 대구(大邱)로 쓰이기 시작했다. 1895(고종 32) 대구군으로 칭하여 대구부에 속하였고 그후 대구부를 대구시로 개칭, 198171일을 기해 대구직할시(大邱直轄市)로 승격하였다.


대구서씨는 시조 소윤공(少尹公) ()의 다음 대()부터 5대가 실전되었고, 고려 말엽에 이르러 7세 익진(益進)이 판전객시사(判典客시事)를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의()가 호조 전서(戶曹典書)를 지냈으나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자 기관낙향(棄官落鄕)하였다.

일찍이 영남내륙(嶺南內陸)에 깊숙히 뿌리를 내리고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을 겸비한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 기틀을 다져온 대구서씨는 조선 개국(開國)과 함께 훌륭한 인재(人財)가 많이 배출되어 명문(名門)의 반열(班列)에 올랐다.

대구 서씨의 인맥(人脈)으로는 뛰어난 학덕문장(學德文章)과 예지(叡智)로 조선 초기의 법치덕화(法治德化)에 기여한 사가정(四佳亭) 거정(居正)과 약봉(藥峯) ()을 들 수 있다.

1420(세종 2) 안주 목사(安州牧使)을 지내고 달천부원군(達川府院君)에 추봉된 미성(彌性)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거정은 세종(世宗)과 성종대(成宗代)에 걸쳐 전후 45년간 벼슬길에 있으면서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거쳐 두번이나 대사간(大司諫)에 올랐으며, 문형(文衡)26년간이나 맡아 선비를 23()이나 뽑아 훌륭한 인재를 많이 등용시켰다.

세조(世祖)가 즉위 전 사신(使臣)으로 연경(燕京)에 갈 때 그는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수행하였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파사보(婆沙堡)에서 자고 있는데 그의 어머니 권부인(權夫人 : 권 근의 딸)의 부고가 이르렀다. 세조는 사신길에 상심을 덜기 위해 그 부고를 숨기려고 했는데, 그가 밤에 잠을 자다가 달이 떨어지는 꿈에 놀라 일어나 눈물을 흘리므로 같이 자던 이가 연유 를 물으니 거정은 꿈에 달에 변괴가 생겼으니, 달은 어머니의 상징(象徵) 인지라 집에 노모가 계시는데 꿈자리가 좋지 못해 울고 있다하였다. 세조는 탄식하기를 그대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켰구나하며 부고가 온 것을 알렸다. 후에 세조가 왕 위에 오르고 난 후에도 압록강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자네를 들어 쓴 것은 유독 자네의 재주뿐만이 아니다하고 극진히 우대했다.

특히 그는 문장(文章)과 글씨를 비롯하여 성리학(性理學)은 물론 한문학(漢文學)과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약(醫藥)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여 신라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시문(詩文)의 정수(精髓)만을 골라 실은 「동문선(東文選)」과 「동인시화(東人詩話)」를 비롯하여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국통감(東國痛鑑),필원잡기(筆苑雜記), 태평한화(太平閑話),사가집(四佳集), 오행총괄(五行摠括)」 등 수많은 편저서(編著書)를 남겨 오늘날 귀중한 역사자료가 되고 있다.

선조(宣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했던 약봉(藥峯) ()5도의 관찰사(觀察使)3(三曹)의 판서(判書)를 거쳐 인조(人祖)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랐으며, 그의 후손에서 3대 상신(相臣 : 宗泰․ 命均․ 志修), 3대 대제학(大提學 : 有臣․ 榮輔․ 箕淳), 3대 문장(文章 : 命膺․ 浩修․ 有榘)이 배출 되어 대구서씨의 가장 거대한 인맥을 이루었다.


조선 3대 현모(賢母)로 손꼽히는 약봉(藥峯)의 어머니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어린 시절에 안맹(眼盲)하고, 안동에 살다가 일찍 남편을 사별하고, 아들의 교육을 위해 한양(漢陽)에 올라와 지금의 만리동(萬里洞) 약현(藥峴)에 살면서 자식을 훌륭하게 성장시켰다. 일찍이 율곡 이 이(李 珥)와 귀봉 송익필(宋翼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약봉은 선조조의 <고명칠신(顧命七臣)>으로 광해군(光海君) 때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11년간 유배생활을 했으나 이항복(李恒福)이 당대 인재의 제일인자로 손꼽았던 명신(名臣)이었다.

()의 다섯 아들 중 장남 경우(景雨)는 인조조(仁祖朝)에 우의정(右議政)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그의 아들 원리(元履)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과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를 역임했고, 손자 문중(文重)은 숙종(肅宗) 때 좌의정(左義政)을 거쳐 영의정(領義政)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이 되었으며 평생 독서에 힘써서 역대의 사적(事蹟)에 정통했고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성의 둘째 아들 경수(景需)의 인맥(人脈)으로는 그의 아들 상리(祥履)가 볼모로 심양(瀋陽)에 가는 세자(世子 : 봉림대군, 효종)를 호종(扈從)하고 돌아와 광주 목사(廣州牧使)과 병조 참의(兵曹參議)을 거쳐 승지(承旨)에 올랐으며, 현손 종제(宗悌 : 사평 문도의 아들)는 딸이 영조(英祖)의 비(: 貞聖王后)가 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종제의 현손 용보(龍輔)는 순조(純祖) 때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1805(순조 5)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를 다녀와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후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러 가세(家勢)를 더욱 일으켰다.


성의 네째 아들 경주(景周)의 집안에서는 경주의 증손 종태(宗泰 : 병조 참의 문상의 아들)가 숙종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좌․우의정(左․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명균(命均)1710(숙종 36)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부제학(副提學)으로 실록청 도청당상(實錄廳都廳堂上)을 겸하여「경종실록(景宗實錄)」편찬에 참여하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으며, 아들 지수(志修)가 영의정에 올라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혔다.

1722(영조 4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급제한 유신(有臣)은 영의정(領議政) 지수(志修)의 아들로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광주 부윤(廣州府尹)과 형․호․예조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한성부 좌우윤(漢城府左右尹)을 거쳐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올랐다.

그의 아들이 순조조(純祖朝)에 「죽석문집(竹石文集)」을 남긴 대제학 영보(榮 輔)이며 손자는 헌종(憲宗)과 철종대(哲宗代)에 걸쳐 대제학(大提學)을 지내며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했던 기순(箕淳)으로 한 집안에서 6()에 걸쳐 3대 정승3대 대제학을 배출하여 대구 서씨의 골격을 이루었다. 한편 대사간 문유(文裕 : 경수의 손자)의 손자 명응(命膺), 증손 호수(浩修), 현손 유구(有榘) 3대가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쳐 학문(學問)의 전통을 세웠다.


영조와 정조대에 걸쳐 북학파(北學波)의 비조로 일컬어진 명응(命膺)은 역학(易學), 실학(實學)을 깊이 연구하여 명망이 높았고 역대 국악의 악보(樂譜)를 집대성한「대악전․후보(大樂前․後譜)」를 간행하였으며, 그의 아들 호수(浩修)는 정조(正祖) 때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80세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러 다녀오면서 지은 기행문집인「연행기(燕行記)」로 유명하다.

우리 나라 최초의 농업백과 전서인 「임원경제십육지(林園經濟十六志)」를 저술한 유구(有榘)는 농정에 관한 경론 및 상소문을 써서 영농법 개혁을 누차 역설했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유예지(遊藝志)」를 저술하여 오늘날 국악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종옥(宗玉 : 경주의 증손, 대사간 문유의 아들)의 세째 아들 명선(命善)은 영조 말에 임금의 병이 심해지자 세손(世孫 : 정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반대해 오던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을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정조 초에 영의정에 올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외 숙종 때 「현종실록(顯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했던 종헌(宗憲)과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었던 종급(宗級)이 유명했으며, 영의정 종태(宗泰)의 세째 아들 명빈(命彬)은 여러 조()의 판서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감역(監役) 종신(宗愼)의 아들 명구(命九)는 영조 때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 과중한 조세 부담을 삭감케 하고 지방관리들의 부정을 엄단하는 등 많은 치적(治績)을 올린 후 벼슬은 사직(司直)에 이르렀고 문장(文章)과 청렴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명원(命元)의 아들 매수(邁修)1804(순조 4)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으로 치사(致仕)하고 향리로 돌아갔다가 뒤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러 판의금부사 정수(鼎修)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1757(영조 23) 음보(蔭補)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던 유대(有大 : 일수의 아들)는 사복시 내승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訓鍊院正)으로 통신사를 따라 일본(日本)에 다녀왔으며 금위대장(禁衛大將)과 훈련대장을 거쳐 한성판윤을 지내고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다. 특히 무신(武臣)으로서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통제사(統制使)에 재임시 세병관(洗兵舘)의 웅장한 관액(舘額)을 썼다.

영상(領相)의 벼슬에서부터 외직(外職)인 방백수령(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6백 여 명의 명신현관(名臣賢官)을 배출해낸 대구 서씨는 그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초야(草野)에 묻혀 학덕(學德)과 문행(文行)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도 개화부국강병(開化富國强兵)을 위하여 헌신한 인사(人士)와 구국운동(救國運動)의 대열에 앞장서서 의병장(義兵將)으로 신명(身命)을 바친 훌륭한 인재(人才)가 대거 배출되어 명문 대구 서씨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대구서씨는 남한에 97,86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대구서씨조상인물

서익진(徐益進): 군기소윤(軍器少尹) ()6세손. 고려 말엽에 판전객시사(判典客시事)를 지냈으며, 경상도(慶尙道) 자인현(慈仁縣)에 은거(隱居)하였고, 후에 가정대부(嘉靖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서의(徐 義): 판전객(判典客) 익진(益進)의 아들. 고려 말엽에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냈으며, 관직을 버리고 부모와 처자를 데리고 경상도 자인현(慈仁縣)에 은거하여 여생을 마쳤다. 정헌대부(正憲大夫)․병조 판서(兵曹判書)가 증직(贈職)되었다.

서미성(徐彌性): 1383(고려 우왕 9) 1429(세종 11). ()는 자상(子常), 호조 전서(戶曹典書) ()의 아들. 1399(정종 1)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고, 경기경력(京畿經歷)․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달천부원군(達川府院君)로 추증(追贈) 및 추봉(追封)되었다.

서거광(徐居廣): 달천부원군(達川府院君) 미성(彌性)의 아들로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서거정(徐居正) 1420(세종 2) 1488(성종 19). ()는 강중(剛中), 초자(初字)는 자원(子元), ()는 사가정(四佳亭), 정정정(亭亭亭),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목사(牧使) 미성(彌性)의 아들, 권 근(權 近)의 외손(外孫). 1438(세종20) 생원(生員), 진사(進士)에 합격, 1444(세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을 지내고 1451(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452(문종 2)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이 명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갈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여 압록강을 건너 파사보(婆娑堡)에서 달이 떨어지는 꿈에 놀라 일어나 눈물을 지으니 동숙자(同宿者)의 물음에 달은 모상(母像)이라 노모(老母)가 재가(在家)하니 꿈이 불길하여 슬퍼한다고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수양대군은 그의 지극한 효성(孝誠)이 하늘을 감동시켰다고 귀국시키니 돌아와 모친의 삼년상(三年喪)을 마치고, 1455(세조 1)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부수찬(副修撰)․응교(應校) 등을 역임하고, 1457(세조 3) 문신중시(文臣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였다.

후에 공조 참의(工曹參議)․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내고 이조 의(吏曹參議)이 되어 1460(세조 6)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문장과 시()를 논하고 해동(海東)의 기재(奇才)라는 찬탄을 받았다.

귀국 후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이어 형조 판서(刑曹判書)․성균관지사(成均館知事)․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었다.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장원 후 6()의 판서(判書)를 두루 지내고, 1470(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올라 이듬해 좌리공신(左理功臣) 3등으로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8(성종 9)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겸하니 조선시대 최초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으며,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 수차 전형(銓衡)을 담당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고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여 세조(世조) 때 「경국대전(經國大典)」「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또한 왕명으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했고,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지리․의약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다. 한편 시화(詩話)의 백미인「동인시화(東人詩話)」와「동문선(東文選)」등을 남겨 신라 이래 조선 초기에 이르는 시문을 선집, 한문학을 대성했다. 대구의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서팽소(徐彭召): ()는 맹당(孟棠), 현감(縣監) 거광(居廣)의 아들. 1476(성종 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 경연청 전경(經筵廳典經),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 장령(掌令)과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 등을 역임했다.

서팽려(徐彭呂): ()는 지암(止庵), 현감 거광(居廣)의 아들. 숙부인사가정(四佳亭)에게 수학하여 학행(學行)으로 성종(成宗) 때 풍저창봉사(豊儲倉奉事)가 되었다.

서후(徐 厚): ()는 덕재(德載), 팽소(彭召)의 아들. 1498(연산군 4)에 진사(進士)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지내고, 1521(중종 16) 직제학(直提學)으로 있을 때 편조전(鞭條箭)을 창제했다.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대사간(大司諫), 부승지(副承旨)을 역임, 1525년 아들 증()이 역모혐의로 체포되자 이로 인해 한때 투옥, 뒤에 영흥 부사(永興府使)이 되었다. 1528년 예조 참의(禮曹參議), 1531년 충주 목사(忠州牧使)을 지냈다.

서고(徐 固): ()는 백공(伯鞏), 장령(掌令) 팽소(彭召)의 아들. 1522(중종 17) 생원(生員)이 되고 1526(중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548(명종 3) 충주 목사(忠州牧使), 예조 참의(禮曹參議) 등을 역임했고,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증직되었다.

서해(徐 嶰): 1537(중종 32) 1559(명종 14). ()는 정지(挺之), ()는 함재(涵齋), 예조 참의(禮曹參議) ()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인. 일찍부터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 20세에 이미 문장,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으나 요절했다. 대구의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서성(徐 渻) 1558(명종 13) 1631(인조 9). ()는 현기(玄紀), ()는 약봉(藥峯),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의 아들. 이 이(李 珥), 송익필(宋翼弼)의 문인. 1586(선조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함북에 이르러 황정욱 등이 두 왕자와 함께 적의 포로가 될 때 홀로 탈출했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병조 정랑(丙曹正郞), 직강(直講)이 되고, 명장(明將) 유 정(劉 綎)을 접대했다.

그후 암행어사(暗行御史)로서 삼남(三南)을 순찰, 돌아와 제용감정(濟用監正)에 특진되고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 후에 호조, 형조, 공조의 판서(判書)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을 지냈다.

1613(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11년간 유배(流配)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조反正)으로 형조와 병조의 판서가 되었고, 1624년의 이 괄(李 适)의 난과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 각각 인조(仁조)를 호종(扈從)했다.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 이호민(李好閔), 이 귀(李 貴) 등과 남지 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 역학(易學)을 토론했으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대구의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祭享),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서경우(徐景雨) 1573(선조 6) 1645(인조 23). ()는 시백(施伯), ()는 만사(晩沙), 약봉(藥峯) ()의 아들. 1601(선조 34) 진사(進士)가 되고, 1603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정주 목사(定州牧使)가 되었으나 1613(광해군 5)에 아버지가 유배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퇴, 1623년 인조반정(仁조反正)으로 다시 등용되어 1625년 예조 참의(禮曹參議), 승지(承旨) 등을 지냈다.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강화도(江華島)로 왕을 호종(扈從), 1630년 좌승지(左承旨), 1637년 대사헌(大司憲), 형조, 이조의 참판을 지내고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로서 1643(인조21) 성절 겸 진하사(聖節兼進賀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우의정(右義政)에 승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45년 병으로 은퇴를 청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의 한직(閑職)을 맡았다.

서경수(徐景需): 1575(선조 8) 1646(인조 24). ()는 시중(施中), 약봉(藥峯) ()의 아들. 1605(선조38) 진사에 합격, 음사(蔭仕)로 양천 현령(陽川縣令), 호조 좌랑(戶曹佐郞), 형조 정랑(刑曹正郞) 등을 역임하고, 1633(인조11)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1635(인조13)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관직을 끝마쳤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서경빈(徐景霦): 1576(선조 9) 1664(현종 5). ()는 자온(子溫), 약봉(藥峯) ()의 아들. 1627(인조5) 생원에 합격, 음사(蔭仕)로 내시교관(內侍敎官),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 과천 현감(果川縣監) 등을 역임했다. 그후 여러 차례 제수(除授)에도 나가지 아니하였으며, 1645(인조23)에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 되었다.

서경주(徐景周): 1579(선조 12) 1643(인조 21). ()는 자순(子順), ()는 송강(松岡),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의 아들. 선조의 사위. 1592(선조25) 정신옹주(貞愼翁主 : 선조의 딸)와 결혼, 달성위(達城尉)에 봉해졌다.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환도할 때까지 왕을 호종(扈從), 그 후에도 항상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총관(摠管)과 상의원 제조(尙衣院提調)를 겸했고, 인조(仁祖) 때 상의원(尙衣院) 및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와 총관(摠管)을 겸했다.

서원리(徐元履): 1596(선조 29) 1663(현종 4). ()는 덕기(德基), ()는 화곡(華谷), 우의정(右義政) 경우(景雨)의 아들. 1627(인조5) 생원(生員)이 되고, 세마(洗馬)를 거쳐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 : 孝宗)이 볼모로 심양(瀋陽)에 있을 때 시종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뒤에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거쳐 호조, 공조의 정랑(正郞)을 역임, 청도 군수(淸道郡守)로 선정을 베풀었고, 1651(효종2) 천안 군수(天安郡守)로 나가 새로 제정된 대동법(大同法)을 잘 시행하여 치적을 올렸다. 현종(顯宗이 세자로 있을 때 강관(講官)으로 뽑혀 강의를 잘했으므로 진선(進善)에 특진, 이후 장령(掌令), 집의(執義), 호조 참의(戶曹參義), 승지(承旨) 등을 역임, 1656(효종7)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내고, 이듬해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가 되어 왕의 북벌 계획(北伐計劃)을 도와 군비의 충실을 도모했다. 1659년에 현종이 즉위하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총관(摠管)이 되고, 이어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어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을 겸했다. 1662(현종 3)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나가 이듬해 임지에서 사망했다.

서상리(徐祥履): 1602(선조 35) 1659(효종 10). ()는 여길(汝吉),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경수(景需)의 아들. 인조(仁祖) 때 전강(殿講)에 있어서는 유생(儒生)의 으뜸이었다. 1630(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 벼슬에 기용, 여러 조()의 낭관(郎官)을 거쳐 시강원(侍講院)에 보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봉림대군(鳳林大君 : 孝宗)을 따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고, 이듬해 화의의 성립으로 볼모가 된 봉림대군을 따라 심양(瀋陽)에 갔으며, 뒤에 경성 판관(鏡城判官), 수찬(修撰), 교리(校理), 장령(掌令), 사간(司諫), 필선(弼善), 보덕(輔德) 등을 지냈다. 효종(孝宗) 초 광주 목사(廣州牧使)을 거쳐 1654(효종5) 예조 참의(禮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 참의(兵曹參議)을 역임, 1655년 종성 부사(鍾城府使), 다시 병조 참의(兵曹參義)를 거쳐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서도립(徐道立): 1580(선조 13) 1623(인조 1). ()는 중수(仲修), ()는 동천(東泉), 봉사(奉事) 경치(景穉)의 아들.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13세에 노복 십여 명을 거느리고 의병진(義兵陣)에 가담하여 종사하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홍의장군(紅衣將軍 : 곽재우)의 화왕 산성(火旺山城)에 종군하여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가 되고 여러 차례 승직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서문상(徐文尙): 1630(인조 8) 1677(숙종 3). ()는 국익(國益), ()는 송파(松坡)․나산(羅山), 부사(府使) 정리(貞履)의 아들. 1655(효종 6)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세마(洗馬)가 되었다. 1688(현종 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672년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된 후 정언(正言)․문학(文學)을 지냈다. 이듬해 부수찬(副修撰), 1674년 장령(掌令)․헌납(獻納)․집의(執義)를 거쳐 1677(숙종 3)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올랐다. 시문(詩文)에 능했다.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서문중(徐文重): 1634(인조 12) 1709(숙종 35). ()는 도윤(道潤), ()는 몽어정(夢漁亭), 시호(諡號)는 공숙(恭肅), 부사(府使) 정리(貞履)의 아들. 원리(元履)에게 입양(入養). 1657(효종 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673(현종 14) 학행(學行)으로 추천을 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다. 1680(숙종 6)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이르러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이듬해에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발탁되었다. 이어 승지(承旨),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어영 대장(御營大將)․예조 참판(禮曹參判) 겸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공조 참판(工曹參判) 등을 거쳐 1687년 형조판서(刑曹判書) 겸 종묘(宗廟)․빙고(氷庫)의 제조(提調)를 지내고, 이듬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1689(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노론(老論)의 중신(重臣)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한 뒤 금천(衿川)에 퇴거했다. 이듬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경주 부윤(慶州府尹)․안변 부사(安邊府使) 등을 역임했다. 1694(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병조 판서(兵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등용,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에 올랐으나 이때 장희빈(張禧嬪) 및 기사환국의 주동자들을 징계함에 있어 온건론을 주장하다가 탄핵을 받고 다시 금천에 은퇴, 후에 좌의정(左義政) 박세채(朴世采)의 노력으로 기용되어 1696년 훈련원 대장(訓鍊院大將)․형조 판서(刑曹判書)․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했다. 1698년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갔으며, 1699년 좌의정, 이듬해 영의정(領義政)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죽었다. 평생 독서에 힘써서 역대의 사적(事蹟)에 정통했으며, 저서도 많이 남겼다.

서문유(徐文裕): 1651(효종 2) 1707(숙종 33). ()는 계용(季容), ()는 만산(晩山),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부사(府使) 정리(貞履)의 아들. 1673(현종 1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84(숙종 10)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이 되고 정언(正言)․수찬(修撰)․교리(校理)를 역임, 1687년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그후 헌납(獻納)으로써 강원도 암행어사(江原道暗行御史)가 되고, 다음해 사간(司諫)․승지(承旨)를 지낸 뒤, 1689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재직중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죽산 부사(竹山府使)로 좌천되었다가 1694(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대사간(大司諫)에 발탁되었다. 1699년에 대사성(大司成), 이듬해 이조 참의(吏曹參議), 1701년 형조 참판(刑曹參判),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그후 대사헌(大司憲), 도승지(都承旨)을 지내고, 1704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1706년 형조, 예조의 판서, 우참찬(右參贊)을 역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 되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서종태(徐宗泰): 1652(효종 3) 1719(숙종 45). ()는 군망(君望), ()는 만정(晩靜), 서곡(瑞谷), 송애(松厓), 시호(諡號)는 문효(文孝), 참의(參議) 문상(文尙)의 아들. 1675(숙종 1) 생원(生員)이 되고, 168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검열(檢閱)이 되었다. 1682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뒤에 헌납(獻納), 집의(執義),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 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했다. 1701년 공조 판서(工曹判書),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1703년 정조사 (正朝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1707년 우의정, 뒤에 좌의정을 지내고 1711년 영의정(領議政)에 승진, 1716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가 되었다.

서종헌(徐宗憲): 1654(효종 5) 1712(숙종 38). ()는 치도(致度), 문하(文夏)의 아들. 1678(숙종 4) 진사(進士)가 되고, 1680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실록청 노청낭청(實錄廳都廳郎廳)이 되어「현종실록(顯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88년 예조, 병조의 낭관(郎官)을 지내고,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항소(抗疏)하고 은퇴했다.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수년간 대간(臺諫)을 지낸 뒤 승지(承旨)․사성(司成)․종부시정(宗簿寺正)․홍주 현감(洪州縣監)․임천 군수(林川郡守)에 이어 인천 부사(仁川府使)․경주 부윤(慶州府尹)․호조․예조의 참의(參議)을 역임, 1709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임기를 끝내고 돌아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다.

서종제(徐宗悌): 1656(효종 7) 1719(숙종 45). ()는 효숙(孝叔), 시호(諡號)는 효희(孝僖), 사평(司評) 문도(文道)의 아들, 영조의 장인. 1687(숙종 1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사릉 참봉(思陵參奉), 신천 군수(信川郡守)을 지내고 1704년 딸이 연잉군(延礽君 : 英祖)과 결혼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여 딸이 정성왕후(貞聖王后)가 되자 영의정에 추증(追贈),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서종급(徐宗伋): 1688(숙종 14) 1762(영조 38). ()는 여사(汝思), ()는 퇴헌(退軒), 달성위(達城尉) 경주(慶州)의 증손, 문택(文澤)의 아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1711(숙종 37) 진사(進士)가 되고 171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경종(景宗) 때 지평(持平)으로서 왕세제(王世弟 : 영조)의 대리청정(代理廳政)을 건의한 대신(臺臣)을 두둔했다가 정언(正言) 이명의(李明誼)의 탄핵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 : 1721 1722) 때 고금도(古今島)에 유배, 1725(영조 1) 풀려 나왔다.

그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이조 판서(吏曹判書)․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741(영조 17)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라 이광좌(李光佐)의 노덕원(老德院)에의 제향(祭享)을 반대하다가 영조(英祖)의 노여움을 사고 사직했다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으며, 후에 봉조하(奉朝賀)가 되어 1757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서종옥(徐宗玉): 1688(숙종 14) 1745(영조 21). ()는 온숙(溫叔), ()는 학서(鶴西), 시호(諡號)는 문민(), 정간(貞簡) 문유(文裕)의 아들. 1719(숙종 45) 생원(生員)․진사(進士) 양과(兩科)에 합격, 1725(영조 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예조 좌랑(禮曹佐郞), 1728(영조 4)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사간(司諫)․동부승지(同副承旨)․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호․이․형조 참의(戶․吏․刑曹參議)과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등을 역임했다.

1738(영조 14) 병조 참판(兵曹參判)․대사헌(大司憲)․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를 지내고, 1740(영조 16) 한성 판윤(漢城判尹)․형․예․공․병조 판서(刑․禮․工․兵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영의정(領議政)이 증직되었다.

서종만(徐宗萬):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을 지냈다.

서종창(徐宗昌): 조선(朝鮮)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을 지냈다.

서명균(徐命均): 1680(숙종 6) 1745(영조 21). ()는 평보(平甫), ()는 소고(嘯皐)․재간(在澗)․보졸재(保拙齋),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영의정 종태(宗泰)의 아들. 1705(숙종 31) 진사(進士)에 합격, 171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에 뽑혔다.

1721(경종 1) 헌납(獻納)․부수찬(副修撰)․이조 참의(吏曹參議)을 역임하고, 이듬해 김일경(金一鏡)의 상소로 안악 군수(安岳郡守)에 좌천, 1723년 진하 부사(進賀副使)로 발탁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후 다음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보직, 1725(영조 1)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 되었다.

1727년 호조 참판(戶曹參判)․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 다음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되었다.

1730년 부제학(副提學)에 재임, 실록청 도청당상(實錄廳都廳堂上)을 겸직하여 「경종실록(景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우참찬(右參贊)에 승진, 이듬해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1732년 우의정(右議政)을 지내고 같은 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1734년 진주사(陳奏使), 1736년 세자책봉 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을 지냈다. 아들 지수(志修)도 여의정에 오름으로서 3()에 걸쳐 모두 대신을 지낸 명문이다. 글씨를 잘 썼다.

서명빈(徐命彬): 1692(숙종 18) 1763(영조 39). ()는 질보(質甫), 시호(諡號)는 정간(靖簡), 영의정(領議政) 종태(宗泰)의 세째 아들. 1715(숙종 41) 진사(進士)에 합격, 1723(경종 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교리(校理)․필선(弼善)․지평(持平)․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부제학(副提學)․대사간(大司諫) 등을 거쳐 1737(영조 13)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대사헌(大司憲)과 여러 조()의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1756(영조 32)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어 여러 조()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1761(영조 37)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63(영조 39) 숭록(崇祿)이 가자(加資)되었다.

서명구(徐命九): 1692(숙종 18) 1754(영조 30). ()는 우경(虞卿), ()는 약허(若虛), 감역(監役) 종신(宗愼)의 아들. 1717(숙종 4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722(경종 2) 소론(少論)의 과격적인 김일경(金一鏡) 등이 환관(宦官)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 등을 시켜 세제(世弟 : 영조)를 죽이려 하자 이를 탄핵, 음모를 막고 영조(英祖)가 즉위한 후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갔다.

그후 사서(司書)․필선(弼善)․보덕(輔德)․헌납(獻納)․집의(執義)를 역임, 1731(영조 7) 사간(司諫)․부응교(副應敎)․승지(承旨)을 거쳐 1741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

이듬해 사은부사(謝恩副使)로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 후 한성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내고, 대사헌(大司憲)․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공조 참판(工曹參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을 역임, 1752(영조 28)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 과중한 조세 부담을 삭감케 하고, 관하 지방관들의 부정을 엄단하는 등 치적을 올렸다. 사직(司直)에 이르렀으며, 문장에 능했고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서명형(徐命珩): 1687(숙종 13) 1750(영조 26). ()는 행옥(行玉),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 종적(宗積)의 아들. 1723(경종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고, 1730(영조 6) 정언(正言)에 재직중 과격한 소를 올렸다가 파직, 1734년 헌납(獻納)에 재등용되어 1736년 사간(司諫)을 거쳐 1739년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되었다. 그후 승지(承旨), 직제학(直提學), 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1749년 도승지(都承旨)이 되었다.

서명서(徐命瑞): 1711(숙종 37) 1785(정조 9). ()는 백오(伯五), ()는 만옹(晩翁),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종준(宗峻)의 아들. 1747(영조 23)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1763(영조 39) 의령 현감(宜寧縣監), 1784(정조 8)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서명응(徐命膺) 1716(숙종 42) 1787(정조 11). ()는 군수(君受), ()는 보만재(保晩齋)․담옹(澹翁),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이조 판서 종옥(宗玉)의 아들. 1754(영조 3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헌납(獻納)․부응교(副應敎)을 지내고,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1759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이듬해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761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전직되었다가 이듬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

1763(영조 39) 우승지(右承旨)을 거쳐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어 대사헌(大司憲)․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역임, 1769년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나갔다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다음해 형조 판서(刑曹判書)․지경연사(知經筵事)․이조․호조․병조의 판서(判書)를 역임, 1777(정조 1)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역임했다. 다음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을 거쳐 1779(정조 3) 수어사(守禦使)가 되고, 이듬해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역학(易學)을 두루 섭렵하고 실학(實學) 연구에 전심한 북학파(北學派)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며 학자(學者)로서 명망이 높았고, 영조(英祖) 때 왕명으로 악보를 수집, 집대성하여 간행했으며 그의 유고집은 왕이 특히 내탕금(內帑金)을 하사하여 발간케 했다. 글씨에도 능했다.

서명신(徐命臣): 1701(숙종 27) 1771(영조 47). ()는 원직(元直), ()는 원와(袁窩),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종수(宗秀)의 아들. 1726(영조 2) 진사(進士)에 합격, 1733(영조 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예문관(藝文館)의 대교․봉교(待敎․奉敎)․지평(持平)․정언(正言)․수찬(修撰)․교리(校理)․사간(司諫)․승지(承旨)․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1752(영조 28)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대사성(大司成)․공․이조 참의(工․吏曹參議)․대사헌(大司憲)․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등을 거쳐 홍문관․예문관의 제학(提學)을 지내고, 1769(영조 45) 한성 판윤(漢城判尹), 그 이듬해 형조 판서(刑曹判書)․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중임하였다.

서명선(徐命善): 1728(영조 4) 1791(정조 15). ()는 계중(繼中), ()는 귀천(歸泉), 동원(桐源), 시호(諡號)는 충문(忠文), 이조 판서(吏曹判書) 종옥(宗玉)의 아들. 1753(영조 29) 생원(生員)이 되고, 176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지평(持平)․헌납(獻納)․풍산만호(豊山萬戶)․응교(應敎) 등을 역임하고, 176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1769년 승지(承旨)․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고, 1771년 이조 참의(吏曹參議)을 지냈다.

이해 9월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잠시 승지(承旨)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고, 1774년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올라 세손(世孫 : 正祖)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반대해 오던 재상 홍인한(洪麟漢)을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세손의 대리청정을 시행하게 했다.

1776(영조 52)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고, 영조가 죽자 빈전도감(殯殿都監)․상시봉원도감(上諡封園都監) 등의 제조(提調)를 지냈으며,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1777(정조 1) 우의정(右議政), 이듬해 좌의정(左議政)을 역임, 1780(정조 4)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서명위(徐命緯): 조선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을 지냈다.

서혁수(徐赫修): 1712(숙종 38) 1794(정조 18). ()는 미경(美卿), 풍덕 부사(豊德府使) 명무(命茂)의 아들. 1744(영조 20)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1761(영조 37) 정평 부사(定平府使)이 되고, 여러 차례 승진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을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었다.

서회수(徐晦修): 1713(숙종 39) 1792(정조 16). ()는 근지(根之),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명순(命純)의아들. 음사(蔭仕)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신령 현감(新寧縣監)․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대흥 군수(大興郡守) 등을 지내고, 1772(영조 4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병․형조 참의(兵․刑曹參議)․대사간(大司諫)․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774(영조 50) 형조 참판(刑曹參判)․대사헌(大司憲)․청송 부사(靑松府使)을 지냈으며, 1790(정조 14)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고 2년 뒤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이 되었다.

서지수(徐志修): 1714(숙종 40) 1768(영조 44). ()는 일지(一之), ()는 송옹(松翁), 시호(諡號)는 문청(文淸), 좌의정 명균(命均)의 아들. 1740(영조 16)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서(司書)․대사간(大司諫)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비행을 조작하여 영조(英조)에게 그 처벌을 강요하는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일당을 탄핵했으며, 시강원 빈객(賓客)으로서 장헌 세자의 면학(勉學)을 도와 크게 존경을 받았다.

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예조판서․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등을 거쳐 1766(영조 42)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서효수(徐孝修): 1716(숙종 42) 1753(영조 29). ()는 여원(汝源), 승지(承旨) 명형(命珩)의 아들. 대사헌 명구(命九)에게 입양(入養). 1738(영조 14) 진사(進士)가 되고, 1744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었다.

1746(영조 22) 설서(說書)를 거쳐, 이어 사서(司書)․지평(持平)․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지제교(知製敎)․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지내고,1753(영조 29) 수찬(修撰)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했고, 특히 주자학(朱子學)에 해박했다.

서형수(徐逈修): 1725(영조 1) 1779(정조 3). ()는 사의(士毅), ()는 직재(直齋), 현령(縣令) 명훈(命勳)의 아들. 김원행(金元行), 이 재(李 縡)의 문인. 1751(영조 2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중망(重望)이 있어 신 만(申 晩)․홍계희(洪啓禧) 등 요인(要人)들로부터 교유를 원해 온 것을 거절, 이 때문에 오랫동안 벼슬길이 침체했으며 1757(영조 33) 정언(正言)으로서 윤시동(尹蓍東)을 신구(伸救)했다가 당쟁(黨爭)을 일삼는다하여 흑산도(黑山島)에 유배, 1763년 풀려 나왔다.

1767년 교리(校理)가 되어 척신(戚臣)의 자제가 너무 많이 대과(大科)에 급제되는 폐단을 직언(直言)하고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특진되었다. 1772년 벽파(僻派)를 탄핵했다가 서인(庶人)이 되어 회양부(淮陽府)에 쫓겨났다.

뒤에 등용되어 1776년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공조 참의(工曹參議)을 거쳐 이듬해 승지(承旨)․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했다.

서매수(徐邁修): 1731(영조 7) 1818(순조 18). ()는 덕이(德而), ()는 당헌(戇軒), 시호(諡號)는 익헌(翼獻), 영의정에 추증된 명원(命元)의 아들.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1779(정조 3) 신령 현감(新寧縣監)을 지냈다.

1787(정조 1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내고, 1789년 홍문관(弘文館)에 발탁되었다가 1791년 승지(承旨)이 되고, 이듬해 이조 참의(吏曹參議)․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1794년 대사간(大司諫), 그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이조참판(吏曹參判)․대사헌(大司憲)․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1799년 형조․예조의 판서(判書)에 이어 우참찬(右參贊)으로 있을 때 동지사(冬至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좌참찬(左參贊)에 보직,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에 재임되었다.

1801(순조 1) 다시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이조 판서(吏曹判書), 1803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듬해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승진, 1805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대사헌(大司憲)으로 재직중 비행이 많았다는 3()의 탄핵을 받고 1806년 사직, 향리에 돌아갔다가 1813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서호수(徐浩修): 1736(영조 12) 1799(정조 23). ()는 양직(養直), ()는 학산(鶴山), 시호(諡號)는 문민(文敏), 정헌(靖憲)으로 개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명응(命膺)의 아들. 명익(命翼)에게 입후(入後). 1765(영조 4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지평(持平)이 되었으나 언사(言事)로 왕의 비위에 거슬려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1767년에 부교리(副校理)로 발탁되었으며 이어서 교리(校理)에 오르고, 1770년 영의정(領議政) 홍봉한(洪鳳漢) 등과 함께「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했다.

1776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이 되었으며, 1791년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가 되었고, 1799년 「홍재전서(弘齋全書)」 속편을 편집하였다.

서형수(徐瀅修): 1749(영조 25) 1824(순조 24). ()는 여림(汝琳), ()는 명고(明皐), 문정(文靖) 명응(命膺)의 아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명성(命誠)에게 입후(入後). 1773(영조 49) 생원(生員)에 합격, 1783(정조 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승지(承旨)․광주 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내고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있다가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다녀왔다. 1804(순조 4)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고 그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 되었다. 저서로 「명고집(明皐集)」이 있다.

서정수(徐鼎修): 1749(영조 25) 1804(순조 4). ()는 여성(汝盛), ()는 이헌(彛軒), 지돈령(知敦寧) 명전(命全)의 아들. 1774(영조 50) 진사(進士)에 합격, 1775(영조 5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김천 찰방(金泉察訪)․좌랑(佐郞)․교리(校理) 등을 거쳐 1783(정조 7) 강원 관찰사(江原觀察使)가 되고 이어 참의(參議)․대사간(大司諫)․가선대부(嘉善大副)․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부총관(副摠管)․예․호조참판(禮․戶曹參判)․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등을 역임했다.

1793(정조 17) 형․예․공․이조(刑․禮․工․吏曹) 등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1801(순조 1)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서덕수(徐德修): ()는 사민(士敏). 조선 때 학자(學者)이다.

서유대(徐有大): 1732(영조 8) 1802(순조 2). ()는 자겸(子謙), ()는 만포(晩圃), 시호(諡號)는 무익(武翼), 일수(逸修)의 아들. 1757(영조 33) 음보(蔭補)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759년 사복시 내승(司僕시內乘)으로 무과(武科)에 급제, 1763년 훈련원정(訓鍊院正)으로 재직중 통신사(通信使)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귀국 후 방어사(防禦使)로서 겸사복장(兼司僕將)이 되고, 1768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과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를 겸했다.

그후 금위대장(禁衛大將)․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훈련대장(訓鍊大將) 등을 역임, 1799(정조 23)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1801(순조 1) 다시 금위 대장․훈련대장을 역임,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다.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고, 옛사람들의 글씨를 즐겨 수집했다. 통제사(統制使)에 재임시 세병관(洗兵舘)을 중수(重修)하고 관액(舘額)를 썼다.

서유령(徐有寧): 1733(영조 9) 1789(정조 13). ()는 치오(致五), 부사(府使) 인수(仁修)의 아들. 찬성사(贊成事)에 추증된 신수(信修)에게 입후(入後). 1766(영조 4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서(司書)․수찬(修撰)․교리(校理)․장령(掌令)․승지(承旨)․도승지(都承旨)․대사간(大司諫)등을거쳐 1775(영조 51) 곡산 부사(谷山府使), 이듬해 경주 부윤(慶州府尹), 1777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등을 역임했다.

1779(정조 3) 대사헌(大司憲), 이듬해 총융사(摠戎使)가 되었으며, 1782(정조 6)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1784(정조 8) 지돈령부사(知敦寧府使)과 공․형․예조 판서(工․刑․禮曹判書)를 역임하고 1786(정조 10) 한성 판윤(漢城判尹)․우참찬(右參贊)을 지냈으며, 총융사(摠戎使)를 여러 차례 중임했다.

서유린(徐有隣): 1738(영조 14) 1802(순조 2). ()는 원덕(元德), ()는 영호(潁湖),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교리(校理) 효수(孝修)의 아들. 1766(영조 42) 생원(生員)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1768년 부교리(副校理)가 되고, 도승지(都承旨)․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이어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1781년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올랐다.

1788(정조 12) 공시 당상(貢市堂上)으로 국경무역을 관장했고, 1790년 왕명으로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을 국역(國譯)했다.

1792년에는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이 되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을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를 지냈다. 1801(순조 1) 집권한 벽파(僻派)에 의해 경흥(慶興)에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글씨를 잘 썼다.

서유경(徐有慶): 1727(영조 3) 1788(정조 12). ()는 군선(君善), 부사(府使) 인수(仁修)의 아들. 1750(영조 26) 진사(進士)에 합격, 음사(蔭仕)로 경산․금산 현감(慶山․錦山縣監)을 거쳐 1773(영조 4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예조 좌랑(禮曹佐郞)․교리(校理)․승지(承旨)․병조 참의(兵曹參議) 등을 역임한 후 1776(영조 52)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냈다.

그 다음해 형․예조 참판(形․禮曹參判)․대사헌(大司憲)․한성 좌윤(漢城左尹) 등을 거쳐 1780(정조 4) 공․예조 판서(工․禮曹判書)와 도총관(都摠管)을 지내고 청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왔다.

1787(정조 11)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이 되고, 이듬해 숭정대부(崇政大夫)․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이 되었다.

서유신(徐有臣): 1735(영조 11) 1800(정조 24). ()는 순오(舜五), ()는 야헌(野軒),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영의정(領義政) 지수(志修)의 아들. 음사(蔭仕)로 능참봉(陵參奉)․익위사 부수(翊衛司副수)를 지내고 1772(영조 4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壯元)하였다. 영조(英祖)가 불러서「사세용방 억석흥회(四世龍榜憶昔興懷)」라는 친필 휘호(親筆揮毫)를 내리고 장원급제를 치하했다고 한다.

전적(典籍)․병조 좌랑(兵曹佐郞)․교리(校理)․영평 현감(永平縣監)․영남 감시관(嶺南監試官) 등을 역임하고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남양 부사(南陽府使),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다.

1793(정조 17)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광주 부윤(廣州府尹)․형․호․예조참판(刑․戶․禮曹參判)과 한성부 좌우윤(漢城府左右尹)을 역임하고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좌찬성(左贊成)이 증직되었다.

서유방(徐有防): 1741(영조 17) 1798(정조 22). ()는 원례(元禮), 사호(賜號)는 봉헌(奉軒), 시호(諡號)는 효간(孝簡), 수찬(修撰) 효수(孝修)의 둘째 아들. 1768(영조 44) 진사가 되고, 음보(蔭補)로 교관(敎官)을 지냈다. 1772(영조 4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조 초에 대사간(大司諫)․승지(承旨)․대사성(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대사헌(大司憲) 등 요직을 역임했다. 1783(정조 7)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이어서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1792(정조 16)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어 이조․병조 판서(吏曹․兵曹判書) 등을 역임했다. 좌찬성(左贊成)이 증직되었다.

서유구(徐有榘): 1764(영조 40) 1845(헌종 11). ()는 준평(準平), ()는 풍석(楓石),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대제학 명응(命膺)의 손자, 정헌(靖憲) 호수(浩修)의 아들. 철수(澈修)에게 입후, 1790(정조 1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92년 대교(待敎), 검열(檢閱)을 역임, 1797년 「향례합편(鄕禮合編)」을 편집했다.

순조(純祖) 때 의주 부윤(義州府尹)․대사성(大司成)․부제학(副提學)․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형조 판서(刑曹判書)․예조판서(禮曹判書)․대사헌(大司憲)을거쳐 1838(헌종 4) 다시 대사헌(大司憲), 이어 상호군(上護軍)․이조․형조의 판서(判書)․우참찬(右參贊)․좌참찬(左參贊)을 역임했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實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백가서(百家書)에 통달하여 문명이 높았다. 1834년 호남 순찰사(湖南巡察使)로 노령(蘆嶺) 남북을 돌아보던 중 기근(飢饉)을 겪고 있는 백성들의 궁핍을 목격하고 나서, 일본에 가는 통신사(通信使) 편에 부탁하여 고구마 종자를 구입, 각 고을에 나눠 주어 재배를 장려하고, 「종저보(種藷譜)」를 저술하여 그 재배법을 널리 알렸다.

「농대(農對)」 혹은 「경계책(經界策)」 등 농정에 대한 경론 및 상소문을 써서 영농법(營農法)의 개혁을 누차 역설했고, 만년에는 전원(田園)에 묻혀 몸소 농사를 지으며 박세당(朴世堂)의「산림경제(山林經濟)」를 토대로 「임원경제십육지(林園經濟十六志)」라는 저술을 남겼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또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라고도 하는 이 책은 농업을 주로 한 방대한 백과사서(百科事書), 본리지(本利志)를 비롯하여 팔역 이정표(八域里程表)에 이르기까지 16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가운데는 농기(農器)의 도보(圖譜), 심지어는 전국의 시장 날짜까지 들어 있다.

서유여(徐有畬): 1792(정조 16) 1879(고종 16). ()는 낙삼(樂三), 시호(諡號)는 문경(文景), 도승지(都承旨) 미수(美修)의 아들. 1813(순조 13) 진사(進士)에 합격, 1831(순조 31) 안의 현감(安義縣監), 1846(헌종 12) 영양 현감(英陽縣監), 1854(철종 5) 밀양 부사(密陽府使) 등을 역임하고 오위부(五衛府)의 호군(護軍)을 지냈다.

1873(고종 10) 소과회방(小科回榜)에 가자되어 참판(參判)이 되었으며, 1876(고종 13) 특명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서유훈(徐有薰): 1795(정조 19) 1862(철종 13). ()는 계남(啓南), ()는 석종(石淙), 참판(參判) 기수(淇修)의 아들. 1828(순조 28) 생원(生員)에 합격, 1837(헌종 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하고, 전적(典籍)․병조 좌랑(兵曹佐郞)․직각(直閣)․부교리(副校理)․수찬(修撰)․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평안도 암행어사(平安道暗行御史)를 거쳐 병조 참의(兵曹參議)․승지(承旨)․영흥 부사(永興府使)․대사성(大司成)․예조 참판(禮曹參判)․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등을 마치고, 도총관(都摠管)․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공․형․예조판서(工․刑․禮曹判書)와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으며, 1858(철종 9) 숭정대부(崇政大夫)․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이 되었다.

서유원(徐有元): 1735(영조 11) 1786(정조 10). ()는 춘보(春甫), 목사(牧使) 각수(覺修)의 아들. 1756(영조 32)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 등의 여러 관직을 거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에 이르렀다.

서용보(徐龍輔): 1757(영조 33) 1824(순조 24). ()는 여중(汝中), ()는 심재(心齋), 시호(諡號)는 익헌(翼獻), 판서 유령(有寧)의 아들. 1774(영조 50)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이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783(정조 7)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등용되고, 1792년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에 승진했다.

1803(순조 3)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1805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이 되었다가 1819년 영의정(領議政)에 승진, 뒤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서영보(徐英輔): 1757(영조 33) 1821(순조 21). ()는 여방(汝芳), 판윤(判尹) 유대(有大)의 아들. 1782(정조 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도총부(都摠府)․훈련원(訓鍊院)의 여러 관직을 거쳐 황해 수사(黃海水使)․전라병사(全羅兵使)․좌승지(左承旨)․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를 역임했으며, 1815(순조 15) 포도대장(捕盜大將)․훈련대장(訓鍊大將)․어영대장(御營大將) 등을 지내고 형조 참판(刑曹參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에 이르렀다. 통제사(統制使) 재임시는 세병관(洗兵館)을 중수(重修)하고 벽화를 개수(改修)하였다.

서영보(徐榮輔): 1759(영조 35) 1816(순조 16). ()는 경재(景在), ()는 죽석(竹石),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문민(文敏) 호수(浩修)의 아들. 1789(정조 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1790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함경도 암행어사(咸鏡道暗行御史)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고, 1794년 호남위유사(胡南慰諭使)를 지낸 후 1798(정조 22)에 호군(護軍)이 되었다. 순조(純조) 초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내고 대제학(大提學)․호조 판서(戶曹判書) 등을 거쳐 1816(순조 16) 수원 유수(水原留守)를 지내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이 되었다. 저서(著書)에 「죽석문집(竹石文集)」이 있다.

서능보(徐能輔): 1769(영조 45) 1835(헌종 1). ()는 치량(稚良), 유경(有慶)의 아들. 1802(순조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1808년에 평안도 암행어사(平安道暗行御史)로 다녀와서 수찬(修撰)․교리(校理)를 역임.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양서 순무사(兩西巡撫使) 이요헌(李堯憲)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1913년 승지(承旨), 그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이조 참판(吏曹參判)․대사간(大司諫)․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를 역임, 1828년 이조판서(吏曹判書), 이듬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1830년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어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했다.

서준보(徐俊輔): 1770(영조 46) 1856(철종 7). ()는 치수(穉秀), 사호()는 죽파(竹坡),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판서 유방(有防)의 아들. 유린(有隣)에게 입양(入養). 1790(정조 14)에 진사(進士)가 되고, 179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병조 좌랑(兵曹佐郞)을 비롯하여 내외직을 역임, 이조 참판(吏曹參判)․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거쳐, 이조․공조․형조의 판서(判書)를 역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글씨를 잘 썼다.

서경보(徐畊輔): 1771(영조 47) 1839(헌종 5). ()는 임세(任世), ()는 묘옹(卯翁),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유신(有臣)의 아들. 증찬성(贈贊成) 유로(有老)에게 입후(入後). 음보(蔭補)로 순창(淳昌)․예천(禮泉)의 군수(郡守)을 거쳐 1825(순조 25)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1827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어 예․공조 참판(禮․工曹參判)․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냈다.

1833(순조 33)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으며, 헌종(憲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함경 관찰사(咸鏡觀察使)․공조 판서(工曹判書)․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서춘보(徐春輔): 1776(영조 52) 1825(순조 25). ()는 화세(和世), 시호(諡號)는 숙렬(肅烈), 영상(領相) 지수(志修)의 손자. 1800(정조 24) 무과(武科)에 급제, 1811(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정주 목사(定州牧使)로서 반란평정에 공()이 많았다. 영변부사(寧邊府使)․총융사(摠戎使)․좌포도대장(左捕盜大將) 등을 거쳐 병조 참판(兵曹參判)이 되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서좌보(徐左輔): 1786(정조 10) 1855(철종 6). ()는 공필(公弼), 시호(諡號)는 효정(孝靖), 참판(參判) 유문(有聞)의 아들. 1810(순조 10) 진사(進士)에 합격, 1819(순조 1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835(헌종 1)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이어 대사성(大司成)․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병조 판서(兵曹判書) 등을 역임하고, 1851(철종 2) 숭록대부(崇祿大夫)․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서당보(徐堂輔): 1806(순조 6) 1883(고종 20). ()는 계긍(季肯), ()는 다사(茶史),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유돈(有敦)의 아들. 1826(순조 26) 생원(生員)이 되고, 1844(헌종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856(철종 7) 동래 부사(東來府使)가 되었다.

1866(고종 3) 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오고, 1873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나갔다. 1880년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듬해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1882년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후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이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서승보(徐承輔): 1814(순조 14) 1877(고종 14). ()는 원예(元藝), ()는 규정(圭庭),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공조 판서(工曹判書) 유여(有畬)의 아들. 1856(철종 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57(철종 8) 충청도 암행어사(忠淸道暗行御史)를 다녀왔고, 1862(철종 13) 성천 부사(成川府使)․좌우승지(左右承旨)․대사성(大司成)․이조․예조 참판(吏曹․禮曹參判)을 지냈다.

1872(고종 9)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거쳐 1876(고종 13) 한성 판윤(漢城判尹)․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했다.

서신보(徐臣輔): 1831(순조 31) 1908(융희 2). ()는 대린(大鄰), 공조 참판(工曹參判) 유상(有象)의 아들. 1848(헌종 14) 생원(生員)에 합격. 1855(철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조()의 낭관(郎官)을 거쳐 1861(철종 12) 대사성(大司成)․이조 참의(吏曹參議)․승지(承旨) 등을 역임했다. 1874(고종 11) 감시관(監試官)․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1890(고종 27)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1898(광무 2) 충추원 의곤(中樞院議官)에 이어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다.

서봉순(徐鳳淳): 1775(영조 51) 1832(순조 32). ()는 경승(敬承), 훈련대장(訓鍊大將) 영보(英輔)의 아들. 1796(정조 20)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도총부(都摠府)의 여러 관직을 거쳐 경흥 부사(慶興府使)․회령 부사(會寧府使)․전라 수사(全羅水使)․병사(兵使)를 역임했으며, 포도대장(捕盜大將)․좌승지(左承旨)․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에 이르렀다.

서학순(徐翯淳): 1785(정조 9) 1834(순조 34). ()는 우고(羽高), 의보(宜輔)의 아들. 1811(순조 1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도총부(都摠府)․승정원(承政院)의 여러 관직을 거쳐 백령진 수군첨절제사(白翎鎭水軍僉節制使)를 지냈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서우순(徐羽淳): 1788(정조 12) 1826(순조 26). ()는 운로(雲路), 훈련대장(訓鍊大將) 영보(英輔)의 아들. 1814(순조 14)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도총부(都摠府)의 여러 관직을 거쳐 순천 군수(順天郡守)․상주 영장(尙州營將)을 지냈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서기순(徐箕淳): 1791(정조 15) 1854(철종 5). ()는 중구(仲裘), ()는 매원(梅園), 시호(諡號)는 청문(淸文), 문헌(文憲) 영보(榮輔)의 아들. 1827(순조 27) 증광문과(增廣文科) 갑과(甲科)에 급제, 1837(헌종 3)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1839(헌종 5)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승진했고, 1824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냈다.

1845(헌종 11)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이어 형․예조 판서(刑․禮曹判書)․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 1850(철종 1)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어 치적을 올렸고, 숭록대부(崇祿大夫)․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대제학(大提學)을 수차 역임했다.

서명순(徐明淳):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서희순(徐憙淳): 1793(정조 17) 1857(철종 8). ()는 치회(穉晦), 사호(賜號)는 우란(友蘭), 시호(諡號)는 숙헌(肅獻), 찬성사(贊成事)에 추증된 응보(應輔)의 아들. 1809(순조 9) 진사(進士)에 합격, 1816(순조 1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24(순조 24) 대사성(大司成)에 이어 이조 참의(曹參議)․대사간(大司諫)․경상도 관찰사(慶尙道관察使) 등을 역임했다.

헌종(憲宗) 때 대사헌(大司憲)․직제학(直提學)을 지내고 정경(正卿)이 되어 한성 판윤(漢城判尹)․형․예․병조 판서(刑․禮․兵曹判書)와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했으며,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다.

서만순(徐萬淳): 조선 때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을 지냈다.

서영순(徐英淳): 1793(정조 17) 1854(철종 5). ()는 기백(耆伯), ()는 석우(石友), 시호(諡號)는 효정(孝靖),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종제(宗悌)5세손, 첨추(僉樞) 경보(京輔)의 아들. 1813(순조 13) 진사(進士)에 합격, 1815(순조 1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22(순조 22)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고 1828년에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838(헌종 4) 승지(承旨)에 이어 예․호․이․공조 참판(禮․戶․吏․工曹參判)․경기․강원 감사(京畿․ 江原監司) 등을 역임하고, 1848년 정경(正卿)으로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1850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거쳐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수원 유수(水原留守), 1854(철종 5) 다시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서염순(徐念淳): 1800(정조 24) 1859(철종 10). ()는 경조(敬조), ()는 석범(石帆),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숙렬(肅烈) 춘보(春輔)의 아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공보(恭輔)에게 입후(入後). 1819(순조 19)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1827(순조 2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設書)․검열(檢閱)․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거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예조 참의(禮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1837(헌종 3) 영흥 부사(永興府使)․승지(承旨), 1839(헌종 5) 양주 목사(楊州牧使)을 지냈으며 호조 참판(戶曹參判)․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마치고, 1850(철종 1) 자헌대부(資憲大夫)․한성 판윤(漢城判尹)에서 사은정사(謝恩正使)로 북경에 다녀와서 형․병․공조 판서(刑․兵․工曹判書)에 예문․홍문관 제학(藝文․弘文館提學)을 겸하였다. 후에 숭정대부(崇政大夫)․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이 되었다.

서헌순(徐憲淳): 1801(순조 1) 1868(고종 5). ()는 치장(穉章), ()는 석운(石耘), 시호(諡號)는 효문(孝文), 진사(進士) 기보(基輔)의 아들. 1822(순조 22) 진사(進士)에 합격, 1829(순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850(철종 1)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갔다왔다.

전라․경상 관찰사(全羅․慶尙觀察使)를 거쳐 형․공조 판서(刑․工曹判書)를 역임하고, 1862(철종 13)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갔다왔으며 1868(고종 5) 숭정대부(崇政大夫)․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서대순(徐戴淳): 1805(순조 5) 1871(고종 8). ()는 원후(元厚), ()는 향파(鄕坡), 시호(諡號)는 효헌(孝憲), 찬성사(贊成事)에 추증된 응보(應輔)의 아들. 영상(領相) 용보(龍輔)에게 입후(入後). 1827(순조 2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서 1841(헌종 7) 대사성(大司成)․이조 참의(吏曹參議), 1849(헌종 15)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어 과만(瓜滿 : 벼슬의 임기가 다됨) 후에 제학(提學)과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1854(철종 5) 한성 판윤(漢城判尹)이 되고 다음해에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좌참찬(左參贊)․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고 1859(철종 10) 평안 관찰사(平安觀察使)를 지내고 숭록대부(崇祿大夫)․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서원순(徐元淳): 1805(순조 5) 1873(고종 10). ()는 태시(太始), 효정(孝靖) 좌보(左輔)의 아들. 1825(순조 25) 진사(進士)에 합격, 1829(순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좌랑(左郞)․정랑(正郞)을 거쳐 1851(철종 2) 이조참의(吏曹參議)․공조․예조 참의(工曹․禮曹參議)․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했다.

1860(철종 11) 이조 참판(吏曹參判), 1865(고종 2) 공조 판서(工曹判書) 다음해에 예조 판서(禮曹判書)․형조 판서(刑曹判書)에 도총관(都摠管)을 겸하고 예․형조판서(禮․刑曹判書)를 중임하였다. 1870(고종 7) 한성 판윤(漢城判尹)이 되었다.

서형순(徐衡淳): 1813(순조 13) 1893(고종 30). ()는 치평(穉平), ()는 한산(漢山), 참판(參判) 홍보(鴻輔)의 아들. 예조 참판(禮曹參判) 장보(長輔)에게 입후(入後). 1843(헌종 9) 진사에 합격, 음사(蔭仕)로 여러 관직을 거쳐 6품에 이르렀다.

1854(철종 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동부승지(同副承旨)․공조 참의(工曹參議)․대사성(大司成)․도승지(都承旨)을 역임하고 1860(철종 11) 호․병조참판(戶․兵曹參判)과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낸 후 1863(철종 14) 공조 판서(工曹判書)․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다음해에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갔다 와서 예조․형조 판서(禮曹․刑曹判書)와 지의금부사(知義禁府使) 등을 역임하고, 1869(고종 6)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어 빈민들의 누적(累積)된 환상곡(還上穀)을 탕감(湯減)하고 많은 선정을 하였다. 1892(고종 29) 숭록대부(崇祿大夫)․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판돈령 부사(判敦寧府事)이 되었다.

서형순(徐珩淳): 1829(순조 29) 1908(융희 2). 부사(府使) 희보(羲輔)의 아들. 1852(철종 3) 무과(武科)에 급제, 1867(고종 4) 대구 영장(大丘營將), 1871(고종 8)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회령 부사(會寧府使)․통진 부사(通津府使)․무산 부사(茂山府使) 등을 역임하고, 1901(광무 5)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고 다시 승자(陞資)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특진관(特進官)이 되었다.

서정순(徐正淳): 1835(헌종 1) 1908(융희 2). ()는 원중(元仲), 시호(諡號)는 효문(孝文), 생원(生員) 긍보(兢輔)의 아들. 1871(고종 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892(고종 29)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를 지내고, 1894년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의 공부대신(工部大臣), 이어 박정양(朴正陽) 내각(內閣)의 법무대신(法務大臣)을 역임했다.

그후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참정대신(參政大臣)을 거쳐 독립협회를 지지하였으며, 후에 황국협회의 모략으로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사건화 되자 파면되었다.

서상규(徐相奎): 1796(정조 20) 1832(순조 32). ()는 성오(聖五), 승지(承旨) 봉순(鳳淳)의 아들. 1825(순조 25)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도총부(都摠府)․훈련원(訓鍊院)의 여러 관직을 거쳐 훈계진 첨사(訓戒鎭僉使)를 지냈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서상오(徐相五): 1801(순조 1) 1857(철종 8). ()는 성서(聖瑞), 승지(承旨) 봉순(鳳淳)의 아들. 1825(순조 25)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도총부(都摠府)․승정원(承政院)의 여러 관직을 거쳐 경기 수사(京畿水使)․평안 병사(平安兵使)․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를 역임했다. 1848(헌종 14) 총계사(摠戒使)․총위대장(總衛大將)․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내고 병조 참판(兵曹參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훈련원사(訓鍊院事)․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에 이르렀다.

서상익(徐相益): 1808(순조 8) 1868(고종 5). ()는 우경(虞卿), 첨사(僉使) 학순(翯淳)의 아들. 1834(순조 34)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도총부(都摠府)․사복시(司僕寺)의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 수사(忠淸水使)․경상 병사(慶尙兵使)를 역임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에 이르렀다.

서상직(徐相稷): 1810(순조 10) 1875(고종 12). ()는 하경(夏卿), 영장(榮將) 우순(羽淳)의 아들. 1839(헌종 5)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도총부(都摠府)․승정원(承政院)의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 수사(忠淸水使)․경기 수사(京畿水使)를 역임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에 이르렀다.

서상조(徐相祖): 1830(순조 30) 1905(광무 9). ()는 경념(敬念), 시호(諡號)는 효헌(孝憲), 복순(復淳)의 아들. 참의(參議) 기순(耆淳)에게 입후(入後). 1852(철종 3) 진사(進士)에 합격, 1882(고종 1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이조 참의(吏曹參議)․동지 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다.

1886(고종 23)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대사헌(大司憲)․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비서원경(秘書院卿)․궁내부특진관(宮內部特進官)․장례원경(掌禮院卿) 등을 역임하고, 1903(광무 7) 숭록대부(崇祿大夫)․판돈령 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서상조(徐相祚): 조선 때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을 지냈다.

서상정(徐相鼎): 1813(순조 13) 1876(고종 13). ()는 이응(而凝), 시호(諡號)는 효정(孝靖), 목사(牧使) 호순(灝淳)의 아들. 1834(순조 34) 진사(進士)에 합격, 1848(헌종 1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와서 형․병조 판서(刑․兵曹判書)를 역임하고 1874(고종 11) 한성 판윤(漢城判尹)이 되었다. 형조 판서(刑曹判書)와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중임하고 다시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서상악(徐相岳): 1821(순조 21) 1883(고종 20). ()는 보경(甫卿), 첨사(僉使) 학순(翯淳)의 아들. 1845(헌종 1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1847년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흥양 현감(興陽縣監), 1849년 훈련원정(訓鍊院正)․상주 영장(尙州營將)․동지중추 부사(同知中樞府事)등을 지내고 1852년 금산 첨사(金山僉使)․동부승지(同副承旨)․창원 부사(昌原府使), 1865년 충청 수사(忠淸水使)․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좌부승지(左副承旨)을 거쳐 1873년 경상병사(慶尙兵士)․함경병사(咸鏡兵使)․우승지(右承旨)․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에 이르렀다.

서상우(徐相雨): 1831(순조 31) 1903(광무 7). ()는 은경(殷卿), ()는 추당(秋堂),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경순(慶淳)의 아들. 1882(고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통리기무아문 부주사(統理機務衙門副主事)가 되어 미국․영국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에 접견대관(接見大官) 신 헌(申 櫶)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1884년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오르고,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로서 특파전권대신(特派全權大臣)이 되어 도일(渡日),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일본이 입은 피해에 대한 협상을 했다.

1886년 서리독판교섭통상사무로서 한로밀약설(韓露密約說)에 대한진상 해명차 천진(天津)에 다녀왔으며, 영국에 거문도(巨文島) 점령에 대해 항의하는 한편 그 철수를 요구했다. 1888년에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다시 형조․공조의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서상렬(徐相烈): 1854(철종 5) 1896(건양 1). ()는 경은(敬殷), ()는 경암(敬菴),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벼슬은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외국인 묄렌도르프(穆麟德)를 조정에서 기용하자 이를 개탄하고 향리에 돌아가 한말의 거유(巨儒) 류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895(고종 32) 민비(閔妃)가 시해(弑害)되자 제천(堤川)에서 의병장 이춘영(李春永)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어 단양(丹陽)․상주(尙州) 등지에서 활약, 이듬해 예천(醴泉)에서 회맹소(會盟所)를 조직하고 대장이 되어 류인석(柳麟錫) 부대가 서진(西進) 할 때 선봉으로 낭천(狼川)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서상훈(徐相勛): 1858(철종 9) 1943. ()는 군필(君弼), 정순(正淳)의 아들. 1889(고종 26) 진사(進士)에 합격, 동년(同年) 전시문과(殿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등을 거쳐 1905(광무9)성균관장(成均館長)․비서감승(秘書監丞)․장례원 비서승(掌禮院秘書丞) 등을 역임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이 되었다.

서광승(徐光承): 1846(헌종 12) 1881(고종 18). ()는 경조(景조), 승지(承旨) 상악(相岳)의 아들. 1869(고종 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현감(縣監)을 거쳐 후창 군수(厚昌郡守)을 지냈다.

서광범(徐光範): 1859(철종 10) 1897(광무 1). ()는 서구(叙九), ()는 위산(緯山), 사시(私諡)는 익헌(翼獻), 참판 상익(相翊)의 아들. 1880(고종 1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된 뒤 대교(待敎)․승지(承旨)․참판(參判)을 역임, 1882년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의 수행원으로 도일(渡日), 문물제도를 살피고 정치개혁을 계획했다.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을 중심한 개화독립당(開化獨立黨)의 소장 정치인들과 함께 집권층인 사대당(事大黨)의 제거를 획책하고, 1884년 우정국 사건(郵政局事件)의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가담, 개화당 내각이 수립되자 좌우영사(左右營使) 겸 대리 외무독판(代理外務督辦)․우포장(右捕將)이 되었으나 내각이 사흘 만에 와해되자 일본에 망명했다.

1894년의 갑오경장(甲午更張) 후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법부 대신(法部大臣)이 됐으나 진로파 및 사대수구파(事大守舊派)와 대립했다. 그들의 압력으로 주미공사로 부임,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서병정(徐丙鼎): 1834(순조 34) 1901(광무 5). ()는 치구(致九), 중추부사(中樞府事) 상익(相익)의 아들. 1862(철종 13)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도총부(都摠府)․의금부(議禁府)의 여러 관직을 거쳐 첨사(僉使)․수사(水使)․병사(兵使)를 역임했으며, 병조참판(兵曹參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훈련원사(訓鍊院事)에 이르렀다.

서병무(徐丙懋): 1836(헌종 2) 1901(광무 5). ()는 치삼(致三), 첨사(僉使) 상규(相奎)의 아들. 1857(철종 8)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도총부(都摠府)의 여러 관직을 거쳐 부사(府使)․수사(水使)․대구 병사(大邱兵使)를 역임했으며,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훈련원사(訓鍊院事)에 이르렀다.

서병훈(徐丙勳): 1841(헌종 7) 1916. ()는 원필(元弼). 병조 참판(兵曹參判) 상오(相五)의 아들. 1859(철종 10)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도총부(都摠府)․승정원(承政院)의 여러 관직을 거쳐 수사(水使)․병사(兵使)를 역임했으며, 병조 참판(兵曹參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에 이르렀다.

서병태(徐丙泰): 1852(철종 3) 1920. ()는 경교(景交), 선전관(宣傳官) 상석(相奭)의 아들. 1872(고종 9)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도총부(都摠府)의 여러 관직을 거쳐 귀성 도호부사(龜城都護府使)을 지냈다.

서정규(徐廷圭): 1853(철종 4) 1916.()는 세유(歲有), 병조 참판(兵曹參判) 병정(丙鼎)의 아들. 1876(고종 13)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훈련원(訓鍊院)․도총부(都摠府)의 여러 관직을 거쳐 강계 부사(江界府使)․진주 병사(晋州兵使)․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를 역임했으며,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훈련원사(訓鍊院事)에 이르렀다.

서광철(徐光徹): 한말(韓末)에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을 지냈다.

서병익(徐丙益): 한말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

서병창(徐丙昌): 한말에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을 역임.

서병희(徐丙熙): 1867(고종 4) ?. 경상도 양산(梁山) 출신. 1907(융희 1)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의 체결과 고종 황제의 양위에 분격, 허 위(許 蔿)의 휘하에서 경상도 창의장(倡義將)이 되어 울산(蔚山)․경주(慶州)․함안(咸安)․합천(陜川)․창원(昌原)․진주(晋州)․고성(固城) 등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활약하다가 1909(융희 3) 김해(金海)에서 체포되었다.

서재창(徐載昌): 한말에 규장각 부제학(奎章閣副堤學)을 역임하였다.

서재필(徐載弼): 1866(고종 3) 1951. 군수(郡守) 광효(光孝)의 아들. 전남 보성(寶城) 출생. 7세에 상경하여 외숙(外叔)인 판서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수학, 1879(고종 16) 13세에 전강(殿講)에 장원했다. 이때부터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의 선진적 개화 인사들과 교유, 1883(고종 20) 일본 도오꾜오 육군유년학교(東京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 귀국 후 왕에게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 조련국(調鍊局) 사관장이 되었다.

이해 김옥균․홍영식(洪英植)․서광범 등과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병조 참판(兵曹參判)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가족은 역적이라 하여 체포령이 내리자 부모․형․처는 음독자살, 동생 재창(載昌)은 참형, 2살된 아들은 아사(餓死)하였다.

미국 유학 중 미국에 귀화, 펜실베니아주의 웩스바레 중학교를 다니고, 1888년 라파예트 대학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워싱턴 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졸업 후 가아필드 병원에서 세균학을 연구, 미국인 암스트롱과 재혼하고 본국의 민씨 일파가 몰락하자 1896년 귀국했다.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고 내무대신 유길준(兪吉濬)에게 교섭, 정부 예산 5천원으로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 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또한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守舊派)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출국이 강요되어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3.1운동 때까지 펜실베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독립만세 운동을 전해 듣고 잡지 「이브닝 레저」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 친구회를 조직, 재미교포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 후원회를 만들었다.

1919년 겨울부터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와도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외교 위원장의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사무실을 두고 활약, 1922년 워싱턴의 군축 회의(軍縮會議)에 독립을 청원하는 한국의 370여 단체가 서명한 연판장을 돌렸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 규탄했다.

독립운동으로 가재(家財)가 파산에 이르자 다시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강의하고 여러 병원의 의사로 있었다. 1947년 미 군정장관하지 중장의 초청을 받고 귀국, 과도 정부 최고 정무관(政務官)이 되었다가 1948년 미국에 가서 여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