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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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17 17:34 수정일 : 2018-01-02 11:21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달성서씨(達城徐氏)는 시조(始祖) 서진(徐 晋)이 고려조(高麗朝)에서 봉익대부(奉翊大夫)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기준(奇俊)과 손자 영()에 이르기까지 3()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달성(達城)에 세거(世居)하며 관향(貫鄕)을 달성하게 되었으며, 후대로 내려와 현감공파(縣監公派 : ), 학유공파(學諭公派 : ), 판서 공파(判書公派 : ), 감찰공파(監察公派 : 近中), 진사공파(進士公派 : 錫蓮), 생원공파(生員公派 : 錫蓂), 진사공파(進士公派 : 錫笭), 참판공파(參判公派 : 宗一),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 ) 9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달성(達城)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최남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 불렀고, 757(신라 경덕왕 16)에 대구현(大丘縣)으로 개칭하여 수창군(壽昌郡)에 속하였다.

조선(朝鮮) 영조조(英祖朝)에 구()를 구()로 고쳐 대구(大邱)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 가지를 이룬 전역이 대구부(大邱府)로 독립되고,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폐합하여 달성군(達城郡)으로 개칭하였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시조의 증손(曾孫) 균형(鈞衡)1360(공민왕 9)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신 돈(莘 旽)의 방탕한 횡포를 탄핵하는 직언(直言)을 서슴치 않았고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군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며, 그의 아들 침()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후 조봉대부(朝奉大夫)로 전의소감(典醫少監)을 지냈다.

()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문한(文翰)은 승사랑(承仕郞)으로 광흥창 부승 (廣興倉副丞)을 거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차남 문간(文幹)은 중시(重詩)에 올라 역시 현감을 역임했고, 막내 문덕(文德)은 숙부(叔父)인 송화 부사(松禾府使) ()에게 출계(出系)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 과 만경 현감(萬頃縣監)을 지냈다. 대사간 충()의 증손 한정(翰廷 : 진사 균의 아들)은 세종(世宗) 때 진사(進士)로 태학(太學)에서 학문(學問)을 연구하였고, 1455(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가족을 데리고 영주 이산면 한성동(榮州伊山面漢城洞)으로 내려가 은거(隱居)하다가 소백산(小白山) 밑 순흥(順興)으로 옮겨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학문연구에 진력하며 스스로 호()을 돈암(遯庵)이라 불렀다.

한편 임진왜란 때 중봉(重峯) 조 헌(趙 憲)의 휘하로 들어가 금산(錦山)의 전투에서 칠백 의사(義士)와 함께 순절한 응시(應時)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에 추증되었으며, 선조(宣祖) 때 학행(學行)으로 명성을 떨쳤던 사원(思遠)은 청안 혐감(淸安縣監)에 부임하여 학문의 진흥과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그외 선조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아 주사장(舟師將)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었던 인충(仁忠)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화의(和義)를 반대했던 변()이 유명했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막하(幕下)에서 선봉수문장(先峰守門將)으로 임명되었던 후손 수천(壽千)은 대나무로 뗏목(筏舟)을 만들어 노량 해전(露粱海戰)에서 무공을 떨쳤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서화(書畵)에 탁월하여 <팔능(八能)>으로 일컬어졌던 병오(丙五)와 독립운동가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상일(相日), 영친왕(英親王) 결혼식전에 참석했던 총독부 요인과 이완용(李完用) 등의 살해를 기도하다 피체되었던 상한(相漢 : 상일의 아우)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목렬(穆烈)의 아들 재승(在承 : 종사랑 진의 12세손) 은 일찌기 유학(儒學)에 전념하여 시()와 예학(禮學)에 정통했으며 효성(孝誠) 이 뛰어나 세인(世人)들의 칭찬을 받았다.

1905(광무 9) 통사랑(通仕郞)으로 탁지부 주사(度支部州事)이 되었으나 일본(日本)의 침략흉계에 의한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해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에 앞장섰으며, 군자금(軍資金) 조달을 위하여 고향인 영주(榮州)로 내려가 활약하다가 밀고자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도중 영풍군 풍기읍(榮豊郡豊基邑) 창락동에서 일본 헌병과 격투하다가 40세로 순절하였다.

그 후 그의 충절(忠節)을 기려 사림(士林)에서 충의(忠義)라 사시(私諡)하였고, 1980814일 대한민국건국포장(大韓民國建國褒章)이 수여되었다. 근대에 와서는 죽림(竹林) 재승(在承)의 장손(長孫) 병극(丙極)이 전국 사림의 공의(公議)에 의하여 사업비(事業費) 일체를 전담하여 경북 영풍군 단산면 사천리(慶北榮豊郡丹山面沙川里)에 백산서원(白山書院)을 건립하여 전사청(典祀廳)을 비롯한 부속건물을 세우고 경내(境內)의 조경(造景)과 진입로 공사를 완료하여 선조(先祖)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407,4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歷代人物)

서기준(徐奇俊) 고려 때 승봉랑(承奉郞), 도관 좌랑(都官左郞) 등을 지내고 문하시중찬성사(門下侍中贊成事)에 추증(追贈)되고 달천군(達川君)에 봉해졌다.

서유(徐 宥) 고려조(高麗朝)에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사(密直使) 겸 판전농시사(判典農),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서영(徐 潁) ()는 노남(櫓南), 시호(諡號)는 충정(忠靖). 고려 때 문하하시중찬성사(門下侍中贊成事)를 역임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문장훈업(文章勳業)으로서 세상에 명망(名望)이 높았다.

서충(徐 衷) 고려(高麗) 때 문과(文科)에 급제,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서균형(徐鈞衡) ? 1391 (공양왕 3)

()는 학암(鶴巖), 시호(諡號)는 정평(貞平). 136(공민왕 15) 우정언(右正言)이 되고 1388(우왕 14) 문하평리(門下評理)로 호인(胡人)의 평정을 축하하는 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9(공양왕 1)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재직시 왕명을 받아 폐왕(廢王) ()를 살해했고, 이듬해 상의문하(商義門下)로서 세자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1390(공양왕 2) 양광도 도감찰사(陽廣道都監察使)가 되었다.

서침(徐 沉) ()는 성묵(聖黙), ()는 귀계(龜溪). 조선 때 조봉대부(朝奉大夫), 전의소감(典醫少監)을 지냈다. 세종조(世宗朝)에 그의 거주지인 달성(達城 : 현달성 공원)을 나라에 바침으로 해서 본읍 백성(本邑百姓)들에게 조세를 삭감(削減)해 줄 것을 주달(奏達)하여 큰 혜택(惠澤)을 주었다.

서습() 조선 때 부사(府使)을 지냈다.

서문한(徐文翰) ()는 쌍죽당(雙竹堂). 조선조에 승사랑(承仕郞)으로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을 지내고 문과(文科)에 급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현감을 지냈다.

서문간(徐文幹)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 통정대부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서문덕(徐文德) ()는 여일(予一), ()는 무우당(無憂堂).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만경 현감(萬頃縣監)을 지냈다.

서한정(徐翰廷) 1407 (태종 7) 1490 (성종 21)

()는 돈암(), 진사(進士) ()의 아들. 세종(世宗) 때 진사가 되어 태학(太學)에서 공부하던 중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비분강개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대구(大邱) 화원현(花園縣)으로 돌아가 가족을 데리고 소백산(小白山) 아래 순흥부 (順興府)에 은거(隱居)하며 회봉(檜峯) 권득평(權得平)과 시()로써 여생을 보냈다. 조봉대부(朝奉大夫)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영풍(榮豊)의 상절사(節祠), 세덕사(世德祠)와 공주(公州)와 계룡산(鷄龍山)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되었다.

서제(徐 濟) 조선조(朝鮮朝)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서도(徐 渡) ()는 군즙(君楫), ()는 호민재(好敏齋). 조선 때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지냈다.

서섭(徐 涉) 조선조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서근중(徐近中) 조선(朝鮮)에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서석련(徐錫蓮) ()는 후백(后伯), ()는 돈재(). 조선(朝鮮)때 태학생(太學生)이었다.

서석명(徐錫蓂) ()는 형백(馨伯), ()는 남조(南潮). 조선 때 생원(生員)이었다.

서석령(徐錫苓) ()는 계백(桂伯), ()는 검계(儉溪). 조선에서 진사(進士)였다.

서종일(徐宗一) 조선조(朝鮮朝)에 참판(參判)을 지냈다.

서진(徐 震) 조선 때 종사랑(從仕郞)에 올랐다.

서인원(徐仁元) ()는 가성(可成), ()는 박약재(博約齋),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조선(朝鮮)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서시중(徐時重) ()는 중지(重之).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서응시(徐應時) ()는 군망(君望), ()는 창계(昌溪),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조 헌(趙 憲)의 제자(弟子). 조선(朝鮮)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헌(趙 憲)을 따라 분전(奮戰), 7백 의사(義士)와 함께 금산(錦山) 싸움에서 순절(殉節)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 贈)되었으며, 금산(錦山)의 종용사(從容祠), 창원(昌原)의 숭절사(崇節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서방경(徐方慶) ()는 군길(君吉), ()는 직재(直齋). 조선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서사원(徐思遠) 1550 (명종 5) 1615 (광해군 7)

()는 행보(行甫), ()는 미락재(彌樂齋), 낙재(樂齋). 전교(典校) ()의 아들, 백부 형()에게 입양(入養). 이천(利川) 출신. 정구(鄭 逑)의 문인. 주자학(朱子學) 및 이 황(李 滉)의 문집(文集)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 이후에는 후진을 가르쳤다.

선조(宣祖) 때 학행(學行)으로 감역(監役), 찰방(察訪)을 지내고, 1595(선조 28) 청안 현감(淸安縣監)에 부임하여 학문의 진흥과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598년에 사임했다.

후에 개령(開寧)옥과(玉果)연기(燕岐)의 현감, 형조 정랑(刑曹正郞)호조 정랑(戶曹正郞)역학 교정(易學校正) 등에 임명 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 청안(淸安)의 귀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서인충(徐仁忠) ()는 방보(邦輔), ()는 망조당(望潮堂), 달성군(達城君) 영구(潁九)9대손. 1591(선조 24) 무과(武科)에 급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주사장(舟師將)이 되어 연전연승(連戰連勝)으로 수전, 육전에서 많은 적을 살해했다.

어사(御史)원수(元帥) 등이 조정에 보고하여 그 공이 표창되고 부산진 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에 이르렀다. 1784(정조 8)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서몽호(徐夢虎) ()는 병보(炳甫). 조선 때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역임하였다.

서시립(徐時立) ()는 입지(立之), ()는 전귀당(全歸堂). 조선(朝鮮)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서사선(徐思選) ()는 정보(精甫), ()는 동고(東皐).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서승희(徐承禧) ()는 수지(綏之), ()는 소암(嘯巖). 조선의 학자(學者)이다.

서변(徐 忭) 1605 (선조 38) 1656 (효종 7)

()는 자경(子慶), ()는 용계(龍溪), 사건(思建)의 아들. 손처눌(孫處訥)의 문인. 1620(광해군 1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33(인조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서학 교수(西學敎授)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주전파(主戰派)로서 청나라와의 화의를 강력히 반대했으며, 뒤에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거쳐 여러 지방관을 지내고 1656(효종 7) 천안 군수(天安郡守)이 되었다.

당시 인평대군(麟坪大君)이 베푼 연석회(宴席會)에서 승지(承旨) 류도삼(柳道三)이 취중에 대군에게 신()이라 칭한 것을 듣고 왕실에 모반하려는 기미가 보인다고 과장하여 고변(告變)했다가 효종(孝 宗)의 진노를 사서 장살(杖殺)되었다.

1680(숙종 6) 신원(伸寃)되고,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추증(追贈) 되었으며, 대구의 옥계서원(玉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서병오(徐丙五) 1862 (철종 13) 1935

()는 석재(石齋). 대구(大邱) 출신. 벼슬은 군수(郡守)을 지냈고, 글씨는 행서(行書)를 잘 썼으며, 그림은 매화(梅花)()국화(菊花)() 4군자(四君子)에 탁월하였다.

()글씨그림가야금장기바둑의약(醫藥)에도 능통해서 팔능(八能)이라 불리었으며 일찍이 중국과 일본에 갔을 때 그 곳의 명사들과 문묵(文墨)의 교유가 있었다.

대구에서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를 창설하여 후진(後進) 지도에 공이 컸고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서도부(書道部)의 심사위원을 지냈다.

서재승(徐在承) 1876 (고종 13) 1915

()는 성서(聖瑞), ()는 죽림(竹林), 시호(諡號)는 충의(忠義),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목렬(穆烈)의 아들. 일찍이 유학(儒學)에 전념하여 시()와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였다. 1907(광무 5) 통사랑(通仕郞)으로 탁지부 주사(度支部主事)이 되었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우리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망국의 의분을 참을 수 없어 고향인 영주(榮州)로 내려가 의병활동(義兵活動)에 나섰다.

이어 동지들을 규합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일본군(日本軍)과 맞서 싸우며 항일투쟁에 앞장섰고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더욱 분발하여 영주(榮州) 순흥(順興)의 왜병 헌병대를 습격, 수명의 사상자와 많은 피해를 입혔다.19156월 동지 김동진과 뜻을 같이 한 여러 선비들을 규합하여 영남 북부 지방을 무대로 다시 의병활동을 계속했고, 군자금을 마련키 위하여 향리에 오다가 밀고자에 의하여 잠복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도중 풍기(豊基)를 지나 창락역에서 압송하던 헌병과 격투를 벌이다가 왜병의 흉탄에 맞아 순절(殉節)하였다.

서상일(徐相日) 1887 (고종 24) 1962

()는 동암(東菴). 대구(大邱) 출신.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졸업하고 1909(융희 3) 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윤병호(尹炳浩) 등과 항일 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후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해방 후에는 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설, 총무에 선임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 헌법 기초위원으로 활약했으며 제헌국회 말기에는 내각 책임제(內閣責任制) 개헌안을 발기, 최초의 개헌안을 제기했다. 1960년 제5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신병으로 활동을 못하다가 서울에서 병사했다.

그 동안 한때 사회민주주의 정당 활동을 벌여 진보당(進步黨),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 등에 관계했다.

서상한(徐相漢) 1901 (광무 5) ?

상일(相日)의 동생. 대구(大邱) 출신. 대구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경제과에 입학, 학비 관계로 세이소꾸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로 전학하여 재학중 1920년 영친왕(英親王)이 은(李 垠)과 일본 나시모또노미야(梨大宮)의 마사꼬(方子)와의 결혼식전에 참석하는 총독부 요인과 이완용(李完用) 등의 살해 및 정책 결혼을 방해하고자 비밀히 폭탄을 제조, 배달부로 가장하고 식전에 잠입했으나 피체, 6년간 복역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