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목천상씨시조(木川尙氏),상국진(尙國珍),목천상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7 16:40 수정일 : 2018-04-06 15:06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상씨(尙氏)는 본래 중국(中國) 상당(上黨 : 산서성 기령도 노성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병마사(兵馬使)를 지낸 상가고(尙可孤)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상씨(尙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초에 목천 호장(木川戶長)을 지낸 상국진(尙國珍)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목천상씨 갑자대동보(木川尙氏甲子大同譜)」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후 고려를 개국(開國)하자 백제(百濟)의 유민(遺民)들이 목천 상왕산(尙王山)에 웅거(雄據)하여 백제 재건을 위해 수차에 걸쳐 반기를 들자 화가 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가축(家畜)의 이름인 우(牛)․마(馬)․상(象)․돈(豚)․장(장)으로 사성(賜姓)하였다.

축성(畜姓)으로 사성(賜姓)된 상씨(尙氏)는 국진의 아들 득유(得儒)가 고려 문종(文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최 충(崔 冲)이 설치한 구재(九齋)의 하나인 대빙재(待聘齋)에서 수학(修學)하면서 향역(鄕役)을 면하게 되었고, 본래 의 성(姓)인 상씨(尙氏)로 회복(回復)하였다고 한다.

목천(木川)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천원군(天原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때는 목주(木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목천(木川)으로 고쳐 1913년에 천원군에 속한 면(面)이 되었다.

그후 3세손 원(愿)이 급사(給事)를 지내며 임지(任地)를 따라 주거(住居)를 임천(林川)으로 옮겨 10대를 세거하면서 조상(祖上)의 원향지(原鄕地)인 목천(木 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후대로 내려와 후손들이 풍덕(豊德) 원주(原州)․부여(扶餘) 등지에 산거(散居)하면서 파(派)를 이루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8세손 천석(天錫)이 고려 말에 감문위 대호군(監 門衛大護軍)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효충(孝忠)은 조선 초에 충청도 수군우후(忠淸道水軍虞侯)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 (判義禁府使)에 추증되어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 중기에 명상(明相)으로 이름난 범허재(泛虛齋) 진(震)은 목천 상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의 증조부 영부(英孚)가 임천(林川) 합하동(閤下洞)에서 부자(富者)로 살았는데, 재물을 사람들에게 꾸어주고 이자를 붙여 받아들이다가 만년에 그 문서를 모두 불살라 버리며, “내가 후손이 있을 것이다”하였다. 아버지 보(甫 : 안기도찰방을 지냄)가 늙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친히 성주산(聖住山)에서 기도를 드렸더니, 이듬해 그를 낳았다.

그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여덟 살에 아버지마저 잃어서 매부인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의 집에서 자랐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관찰사(觀察使), 4조(四曹)의 판서(判書)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우․좌의정(右․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특히 그는 관후한 인품으로 16년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야의 신망이 두터웠고, 명상(名相)으로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청렴과 구휼(救恤)로 일생을 살았던 그는 창고가 무너져서 노비가 수리할 것을 말하면 웃으면서 “네가 비록 고쳐서 완전하게 만들어 놓아도 무엇으로 채우겠느냐”하였고, 집에 도둑이 들었다가 잡히면 도리어 불쌍히 여겨 “주리고 떨면서 쪼들리다가 부득이 하였구나”하며 훔친 물건을 도로 내어 주면서 “만약 배고프고 추위에 떨거든 반드시 나에게 와서 고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하였으며, 벌레나 짐승에 이르기까지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 인품이었다.

진의 아들 붕남(鵬南)은 학문(學問)에 깊이가 있어 경사(經史)에 능통했으며 아버지의 음덕(蔭德)으로 높은 벼슬에 오를 수도 있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서(詩書)로 일생을 살았다.

그외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낸 시손(蓍孫 : 붕남의 아들)과 공조 참판 (工曹參判)을 역임한 자산(子産)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진의 9세손 동기(東耆 : 통덕랑)의 둘째 아들 득용(得容)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거쳐 화량진 첨절제사(花梁津僉節制使)에 이르렀으며 경사(經史)를 비롯한 병서(兵書)․천문(天文)․주수(籌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의 전통 가문인 목천 상씨(木川尙氏)를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목천상씨는 남한에 2,2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歷代人物)-목천상씨조상인물

상원(尙 愿) 고려조(高麗朝)에 급사(給事)를 지냈다.

상원서(尙元諝) 고려 때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을 지냈다.

상진(尙 進) 고려(高麗) 때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하였다.

상용(尙 龍) 고려에서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하였다.

상을생(尙乙生) 자(字)는 덕립(德立). 고려 때 검교 낭장(檢校郎將)을 지냈다.

상천석(尙天錫) 고려조에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을 지냈다.

상영부(尙英孚) 조선(朝鮮)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상효충(尙孝忠) 조선 때 충청도 수군우후(忠淸道水軍虞侯)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상보(尙 甫) 자(字)는 자미(子美). 조선에서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상진(尙 震) 1493 (성종 24) ~ 1564 (명종 19)

자(字)는 기부(起夫), 호(號)는 송현(松峴)․ 범허재(泛虛齋)․향일당(響日堂), 시호(諡號)는 성안(成安), 찰방(察訪) 보(甫)의 아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으로 뽑히고, 1526년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28년 필선(弼善)이 된 뒤에 장령(掌令)․문학(文學)․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거쳐 집의(執義)․응교(應敎)을 지내고, 1533년 사간(司諫)․부제학(副提學)․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1535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1537년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호조와 병조의 판서(判書), 1543년 공조 판서(工曹判書) 우찬성(右찬成)․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 이듬해 중종(中宗)이 죽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중종실록(中宗實錄) 」의 편찬에 참여했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했고, 1545년(인종 1)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을 지냈다.

이듬해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다시 우찬성(右찬成)에 보직,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1551년(명종 6)에 좌의정(左議政), 1558년 영의정(領義政)이 되었다가 1563년(명종 18)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전임된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인품이 관후 인자하여 15년 동안 대신(大臣)으로 왕을 보좌하는 동안 조야(朝野)의 신망이 두터웠고 명상(名相)으로서의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상붕남(尙鵬南) 1511 (중종 6) ~ 1542 (중종 37)

자(字)는 대익(大翼), 호(號)는 득월자(得月子). 조선 때 음보(蔭補)로 장사랑(將仕郞)에 올랐고 판결사(判決事)에 추증되었다. 경사(經史)에 밝고 시(詩)에도 능했다.

상시손(尙蓍孫) 1537 (중종 32) ~ 1599 (선조 32)

조선 때 풍기 현감(豐基縣監)․교하 군수(交河郡守) 등 여러 벼슬을 거쳐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追贈)되었다.

상자산(尙子産) 초명(初名)은 감(瑊). 조선(朝鮮)에서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상자화(尙子華) 자(字)는 하숙(遐叔). 조선조(朝鮮朝)에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를 지냈으며, 학행(學行)으로 유명하였다.

상태첨(尙泰詹) 조선조(朝鮮朝)에 영릉 참봉(英陵參奉)을 지냈다.

상필주(尙弼周) 조선(朝鮮)에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상익주(尙翊周) 조선 때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상득용(尙得容) 자(字)는 약능(若能), 호(號)는 덕옹(德翁), 영의정(領議政) 진(震)의 후손, 동기(東耆)의 아들. 경기도 장단(長湍) 출신.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수문장(守門將)에 보직, 이어 선전관(宣傳官)․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등을 지내고 화량진 첨절제사(化梁津僉節制使)에 이르렀다.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육도(六韜)」「손자(孫子) 」「무자(武子)」 등 병서(兵書)에도 해박하고 천문(天文)․주수(籌數)에 이르기까지 통달했으며 79세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