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하음봉씨시조(河陰奉氏),봉우(奉佑),하음봉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7 14:24 수정일 : 2018-03-04 19:51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하음봉씨시조(河陰奉氏 始祖) 봉우(奉佑)는 고려 인종(仁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지내고 좌복야(左僕射)에 올라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져서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았다.

「하음봉씨을축세보(河陰奉氏乙丑世譜)」에 그의 출생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기 1106년(고려 예종 1) 어느날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江華郡河岾面長井里) 하음산 기슭의 연못가에 눈부신 광채가 비치더니 이어 석함(石函)이 떠올랐다. 마침 물을 길러 왔던 한 노파가 이상히 여기며 살펴보니 그 속에 용모가 뛰어난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다. 노파가 이 아이를 왕(王)에게 바쳤더니 임금은 궁중(宮中)에서 양육하라는 명(命)을 내린 후 노파가 봉헌(奉獻)했다고하여 성(姓)을 봉(奉)이라 하고 이름을 우(佑)로 하사(下賜)했다.

그로 인하여 봉씨(奉氏)의 연원(淵源)을 이루게 되었으며, 후손들은 봉 우(奉 佑)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그가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하음(河陰) 땅의 지명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봉씨의 본관(本貫)은 하음 외에도 강화(江華)․경주(慶州)를 비롯하여 안산(安山)․안성(安城) 등 19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하나 모두가 하음 봉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하음을 제외한 본관(本貫)에 대해서는 상계(上系)가 미상하다.

하음(河陰)은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에 있었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동음내현(冬音奈縣) 또는 아음현(芽音縣)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시대에 호음현(冱音縣)으로 고쳐 해구군(海口郡)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조(高麗朝)에 하음현(河陰縣)으로 고쳐 개성(開城)에 속하였으나, 1413년(조선 태종 13) 강화군(江華郡)에 이속되어 현(縣)을 폐하고 강화군에 병합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세(家勢)를 일으킨 인물로는 우(佑)의 7세손 천우(天祐)가 고려 때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원(元)나라에 피난가는 충숙왕(忠肅王)을 호종(扈從)하는 데 공(功)을 세워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을 받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올라 하음부원군(河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맏아들 질(質)은 전객령(典客令)을 거쳐 합문지후(閤門祗侯)와 판도판서(版圖判書)을 역임하였다.

한편 천우의 손자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유례(由禮 : 판도판서 문의 아들)는 나라일로 상소(上疏)를 올려 극간(極諫)을 했으나 실행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學問)을 연구하며 후진양성에 진력했으며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정몽주(鄭夢周), 이 색(李 穡) 등과 교유하며 <도학(道學)의 지종(之宗)>으로 일컬어졌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세종(世宗) 때 종부시 소윤(宗簿寺少尹) 여(礪)의 딸이 왕세자비(王世子妃 : 문종의 비인 순빈)가 되었고 형조(刑曹)를 비롯한 4조(曹)의 참판(參判)을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우 즙(楫)은 세종조(世宗朝)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아들 여해(汝諧)와 함게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당대의 석학(碩學) 박중림(朴仲林 : 박팽년의 아버지)에게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동문수학(同門數學)한 여해는 학문이 뛰어나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처남매부간인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하다가 순절하여 공주의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그외 성종(成宗) 때 감찰(監察)을 거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을 역임한 원효(元孝 : 판도판서 문의 증손, 신의 아들)와 세조(世祖) 때 정난이등공신(靖亂二等功臣)로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던 석주(石柱)가 유명했고, 황간 현감(黃澗縣監) 삼산(三山 : 훈련원 도정을 지낸 장의 아들)의 둘째 아들 천상(天祥)은 1516년(중종 11) 생원(生員)로 <시정책십개조(施政策十個條)>를 상소하여 채택됨에 따라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천거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운 종한(宗翰)․진한(震翰)은 학명(學名)을 떨친 성민(聖民)․경륜(景綸)을 비롯한 효자(孝子) 한정(漢鼎)과 함께 하음 봉씨를 대표했다.


인 구

봉씨(奉氏)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5,911명, 1975년에는 1,700가구가 있었으며, 하음봉씨는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7,6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하음봉씨조상인물

봉시진(奉時進) 고려(高麗) 때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을 지냈다.

봉희렴(奉曦廉) 고려에서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역임하였다.

봉공윤(奉公胤) 고려 때 호부 원외랑(戶部員外郞)을 지냈다.

봉군필(奉君弼) 고려(高麗) 때 판도정랑(版圖正郞)을 지냈다.

봉천우(奉天祐) 시호(諡號)는 문겸(文謙).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이 원(元) 나라에 머무를 때 호종(扈從)한 공(功)이 있어 1327년(충숙왕 14)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었고,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1344년(충목왕 즉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을 역임하였다.

봉질(奉 質) 고려(高麗)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내외직(內外職)을 지내면서 공(功)을 세워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봉문(奉 文)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봉유검(奉由儉) 고려(高麗)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다.

봉유인(奉由仁) 고려 때 개성부윤(開城府尹)를 지내고, 조선(朝鮮) 태조(太祖)가 도읍(都邑)을 옮긴 후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였다.

봉유의(奉由義) 조선 때 지평(持平)을 지냈다.

봉유례(奉由禮) 자(字)는 입유(立攸), 호(號)는 송혜(松蹊), 판도판서(版圖判書) 문(文)의 아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과거에 급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전리 판서(典理判書)에 올라 극간(極諫)을 하다가 실행되지 않음을 개탄하여 향리(鄕里)로 돌아가 후진양성에 힘썼다. 조선이 개국되어 태종(太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봉원장(奉原長) 조선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봉원량(奉原良) 조선(朝鮮) 때 상당 도호부사(上堂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봉여(奉 礪) 1375 (우왕 1) ~ 1436 (세종 18)  시호는 공숙(恭肅).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감찰(監察)․창녕 현감(昌寧縣監)을 지냈다. 1429년(세종 11) 딸을 왕세자에게 출가(出嫁 : 순빈)시켜 종부시 소윤(宗簿寺少尹)으로 특진, 1431년 이조 참의(吏曹參議),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거쳐 이듬해 형조 참판(刑曹參判)․경창 부윤(慶昌府尹)․병조 참판(兵曹參判)․형조 참판(刑曹參判) 등을 역임, 1442년 정조사(正朝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3년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이듬해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경상도 도순검사(慶尙道都巡檢使)를 겸직하고 호조참판(戶曹參判), 공조․호조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1435년 진헌사(進獻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보직, 이듬해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봉즙(奉 楫) 자(字)는 이제(以濟), 호(號)는 풍애(楓崖), 이조 판서(吏曹判書) 유례(由禮)의 아들.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과거에 급제,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봉윤(奉 綸)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덕산 현감(德山縣監)을 지냈다.

봉안방(奉安邦)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봉안국(奉安國) 조선조(朝鮮朝)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하흥군(河興君)에 봉해졌다.

봉규(奉 奎) 조선 때 평창 군수(平昌郡守)을 지냈다.

봉여해(奉汝諧) 1419 (세종 1) ~ 1456 (세조 2)  초명(初名)은 극해(克諧), 자는 화보(和輔), 호는 묵헌(黙軒), 병조판서(兵曹判書) 즙(楫)의 아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박중림(朴仲林)의 문하에서 수학, 학문으로 명성을 떨쳐 학행(學行)으로 사옹원 별좌(司饔院別坐)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등 사육신(死六臣)의 단종(端宗) 복위사건(複位事件)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한 혐의로 사형당했다. 문장(文章)에 능하여 저술이 많았고「사경석의(四經釋義)」를 저술했으나 전하지 않는다.

봉극순(奉克諄) 자(字)는 대경(大卿), 병조 판서(兵曹判書) 즙(楫)의 아들. 조선(朝鮮) 때 상호군(上護軍)․태인 현감(泰仁縣監)을 지냈다.

봉장(奉 璋) 자(字)는 서규(瑞圭), 현감(縣監) 안방(安邦)의 아들. 성종(成宗) 때 춘천 부사(春川府使)를 거쳐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을 지냈다.

봉석주(奉石柱) ? ~ 1465 (세조 11)  자는 군보(君輔), 호는 서관(墅觀). 1453(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亂)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정난공신(靖亂功臣) 2등으로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으며, 전라도 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 병조 판서(兵曹判書) 등을 역임했다.그후 역모죄(逆謨罪)로 몰려 김처의(金處義)․최 윤(崔 潤)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었다. 연산군(燕山君) 때 자손들의 상소로 죄가 씻기고 관직이 회복되었다.

봉원효(奉元孝) 1426 (세종 8) ~ ?  자는 행가(行可), 신(伸)의 아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47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감찰(監察)을 거쳐 1483년(성종 14)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에 재직중 도내에 기근(饑饉)이 들고 전염병이 발생했는데, 이의 대책을 소홀히 하여 탄핵을 받고 삭직(削職) 당했다. 후에 다시 기용되어 1487년(성종 18) 장령(掌令)이 되고 이듬해 봉상시정(奉常시正)을 거쳐 사간(司諫)에 승진했다. 이해 임사홍(任士洪)의 죄를 논핵한 상소 사건을 둘러싸고 권경희(權景禧)와 논쟁을 벌이다 영의정(領議政) 윤필상(尹弼商)에 의해 모두 파직당했다.

봉인(奉 寅)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봉징(奉 澄) 조선조에 연기 현감(燕岐縣監)을 지냈다.

봉희(奉 禧)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봉천상(奉天祥) ? ~ 1521 (중종 16)  자는 상지(祥之).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연안(延安) 출신. 1516년(중종 11) 생원(生員)로서 상소한 시정책(施政策) 10개 조가 채택됨과 함게 희릉 참봉(禧陵參奉)이 되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직(削職) 당하고,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안처겸(安處謙)․안 당(安 瑭) 등과 함게 변란을 모의했다는 죄로 능지처참(陵遲處斬)되었다.

봉시중(奉時中) 호(號)는 죽계(竹溪).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봉한정(奉漢鼎) 조선에서 효자(孝子)로 향민(鄕民)의 칭송을 받았다.

봉성민(奉聖民) 조선조(朝鮮朝)에 학자(學者)로 유명(有名)하였다.

봉경륜(奉景綸) 조선(朝鮮) 때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