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장연변씨시조(長淵邊氏),변유영(邊有寧),장연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7 12:19 수정일 : 2018-04-05 20:3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장연변씨(長淵邊氏)는 주(朱)나라 문하습비후(門下習秘候)) 대아찬(大阿湌) 변경(邊 鏡)의 증손(曾孫)인 변유영(邊有寧)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장연변씨갑오보(長淵邊氏甲午譜)」에 의하면 그는 1138년(고려 인종 16) 중문지후(中門祗候)로 연성 부원군(淵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장연(長淵)에 정착 세거(政着 世居)하면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을 장연(長淵)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다.

장연(長淵)은 황해도(黃海道) 서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부터 장연으로 불리워 오다가 1018년(고려 현종 9)에 옹진(裵津)에 속하였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여러 변천을 거친 후 태종(太宗)때 영강현(永康縣)과 합하여 연강(淵康)으로 개칭 하였다.

1416년에는 전에 왜구(倭寇)로 인하여 청송현(靑松縣 : 지금의 신천군 용문면)으로 편입시켰던 해안현(海安縣)을 다시 합치고 이름도 장연으로 환원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군(郡)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

유영의 7세손 영인(永仁 : 사온동정 용지의 아들)이 고려조에서 판전의사(判興l醫事)를 지냈고. 그의 손자 처후(處厚)는 조선개국(朝鮮開國) 초에 춘장문과(春場文科)에 급제하여 태종(太宗) 때 소윤(少尹)을 지내고 세종조(世宗朝)에 중추원부사(中樞i院副使)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처후의 아들 대해(大海)는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고 슬하에 곤(鹿)과 윤(裔)의 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교하 현감(交河縣監)과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각각 지내면서 명성을 떨쳤으며. 곤의 증손 사정(士貞) 은 임진왜란 때 무공(武功)을 세워 변응정(邊應井 : 원주변씨) · 변이중(邊以中 : 황주변씨)과 더불어 임란의 삼변총장(三邊忠壯)으로 일컬어졌다.

당대에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인 일재(一齋) 이 항(李 恒)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사정(士貞)은 1592년(선 조 25) 임란이 일어나자(順天)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晉州)싸움에 파병하고 전라도(全羅道) 산간 지방에서 20일 동안에 왜병 2천명을 사살하는 등 빛나는 전공을 올려 적개 의병장(敵愼義兵將)으로 불리웠다.

그 외 사헌부감찰(司窓府監察)을 지낸 사형(士亨 : 사정의 형)과 거제 부사(巨濟府使)로 치적을 쌓았던 윤조(潤 祖 . 통제 사흡의 아들).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건중(建中 : 신천 군수 징의 맏아들) 등이 뛰어났으며. 호군 (護軍)을 지낸 광후(光厚 : 처후의 아우)의 6세손 발(潑)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 의(詞), 거제 부사(巨濟府使) 진영(震英), 의금부사(義禁府使) 덕용(德龍) 등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연변씨(長淵邊氏)는 남한(南韓)에 총 2,4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장연변씨조상인물

변유영(邊有寧): 호(號)는 석천(石)II). 고려(高麗) 때 중 문지후(中門祗候)을 지냈고 연성 부원군(淵城府院君) 에 봉해졌다

변인경(遊彦卿): 고려(高麗)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변충효(邊沖孝): 고려 때 시랑(侍郞)을 지냈다.

변회(邊 懷): 호(號)는 안곡(巖谷) · 초수. 고려조(高麗朝)에 시중(侍中)을 거쳐 중현대부(中顯[大 夫)로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을 지냈다.

변용치(邊用至): 고려(高麗) 때 위위승(衛慰丞) · 사온동정(司酷同正) 등을 지냈다.

변귀수(邊龜壽): 호(號)는 죽강(竹岡). 고려때 교수(敎 授)를 역임하였다.

변치후(邊處厚) : 1373년(공민왕 22) - 1437년(세종 19) 호(號)는 수정(水亭). 귀수(龜壽)의 아들. 1393년(태 조 2) 춘장 문과(春場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에 올랐다가 1404년(태종 4) 노비오결(奴牌誤決)의 죄로 파직, 이듬해 상서사소윤(尙瑞司少尹)에 기용되었다. 1421년 (세종 3) 판정주 목사(判定州牧事)로 재임 중 뇌물을 받은 혐의로 1432년 배천(白川)에 유배, 이듬해 풀려 나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1436년(세종 18) 중추원부사(中樞院 副使)가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여 당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하였다.

변대해(邊大海):조선 때 관찰사(觀察使)를지냈다.

변곤(邊 鹿) : 자(字)는 앙지(仰止). 조선(朝鮮) 때 교하 현감(交河縣監)을 역임했다.

변윤(邊 裔):자(字)는 경지(景止). 조선에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다.

변희철(邊希哲):조선 때 장사랑(將仕郞)에 이르렀다.

변희준(邊希俊):조선(朝鮮)에서 성균관 진사(成均館 進士)를 지냈다.

변희필(遊希禪):조선조에 사포서별제(司團暑別提)를 역임했다.

변희웅(邊希雄):조선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변이안(邊以安) : 자(字)는 후경(厚卿), 호(號)는 송와(松窩). 조선에서 성균관진사(成均館 進士)를 지냈다.

변호(邊 灝) : 조선에서 사포서 별제 (司團暑別提)를 지냈다.

변흡(邊 治):조선 때 통제사를 역임했다.

변징(邊 澄) : 지·(字)는 자청(子淸). 조선(朝鮮)에서 신천군수(信川郡守)를 지냈다.

변사형(邊士亨) : 자(字)는 중가(仲嘉). 조선에서 사헌부 감찰(司慮府監察)을 역임했다.

변사정(邊士貞) : 1529년(중종 24) - 1596년(선조 29) 자는 중간(仲幹), 호는 도탄(桃灘). 이 항(李 恒)의 문인. 음보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이 되고, 15 92년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천(順天)에서 의병(義兵)을 모집, 의병장으로 왜병 2천명을 사살 했다. 장령(掌令)에 추증(追贈), 운봉(雲峰)의 용암서 원(龍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변사원(邊士元):자(字)는 중인(仲仁). 조선 때 주부(主 薄)를 지냈다.

변윤조(邊潤祖) : 조선(朝鮮)때 거제부사(巨濟府使)를 역임했다.

변건중(邊建中):자(字)는 여정(汝精). 조선 때 승정원도 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되었다.

변국중(邊克中):자(字)는 응시(應時). 조선에서 통덕랑 (通德郞)에 이르렀다.

변취중(邊就中) : 자(字)는 군예(君話). 조선 때 선무랑(宣 務郞)에 올랐다.

변발(邊 潮):조선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변의(邊 誼) : 자(字)는 의숙(宜淑). 조선 때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을 지냈다.

변적(邊 迪):조선 대 현감(縣監)을 지냈다.

변식(邊 湜) : 조선 때 정주 목사(定J州 牧使)를 역임하 였다.

변계량(邊維良):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변계수(邊維秀):조선(朝鮮)때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변진영(邊康英):조선때 거제 부사(巨濟府使)를 역임 하였다.

변덕룡(邊德龍) : 자(字)는 운서(雲瑞). 조선조(朝鮮朝)에 의금부사(義禁府使)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