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황주변씨시조(黃州邊氏),변려(邊呂),황주변씨조상인물,변이중(邊以中)

작성일 : 2017-04-17 10:41 수정일 : 2018-03-04 15:19

황주변씨의 연원

황주변씨(黃州邊氏)는 중국(中國) 농서(隴西) 사람인 변려(邊呂)가 북송(北宋)이 망하자 바다를 건너 동래(東來)하여 황주(黃州)에 세거(世居) 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황주로 하게 되었다.

황주(黃州)는 황해도(黃海道) 중앙 북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동홀(東忽) 또는 동어홀(東於忽) 이었으며 신라(新羅) 헌덕왕(憲德王)때 취성군(取城郡)으로 개칭되었고, 고려(高麗) 초에 황주(黃州)라 하였다.

983년(성종 2) 목(牧)을 두었고 그후 절도사(節度使)를 두었으며 천덕군(天德軍)이라하여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다.

1012년(현종 3) 안무사(安撫使)를 두었다가 또 목으로 고쳐 서해도(西海道)에 속하였으며 고종(高宗)때 지고령군(知高寧郡)으로 강등, 후에 다시 황주목(黃州牧)으로 환원되었다.

1269년(원종 10) 원(元)나라의 동녕부(東寧府)에 속하고 1290년 서북면에 이관되었으며 공민왕(恭愍王)때 다시 서해도에 이관, 조선(朝鮮) 세조(世祖)때에 진(鎭)을 두어 2 도호부, 6군, 5현 등을 관할하여 오다가 1895년에 황주군이 되었다.

「황주변씨시조(黃州邊氏始祖」

변려(邊呂)는 1232년(고려고종 19) 몽고병(蒙古兵)이 송경(宋京)을 침입하자 강화(江華)로 피난간 고종(高宗)을 시종(侍從)하는데 공(功)을 세워 상장군(上將軍)으로 태천백(泰天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을 하사(下賜) 받았다.


대표적인 인물

가통(家統)을 지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려(呂)의 아들 윤(允)이 고려 원종(元宗)때 서해도 안찰사(西海道安察使)로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과 제주도(濟州道)에서 삼별초(三別抄)를 평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우고 판추밀원사(板樞密院事)에 올랐으며, 9세손 정(靜)은 중군 사정(中軍 司正)을 지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참봉(參奉) 택(澤)의 둘째 아들 변이중(邊以中)이 임진왜란때 소모사(召募使)로 병마(兵馬)와 군기(軍器)를 수습했으며, 뒤에 조도사(調度使)가 되어 화차(火車) 300량(輛)을 제조하여 순찰사(巡察使) 권율(權 慄)을 도와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이루게 하였고, 함안군수(咸安郡守)로 나갔다가 사임하고 장성(長城)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중(以中)의 맏아들 경윤(慶胤)은 광해군(光海君)때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지내고 학행(學行)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폐모론(廢母論)에 대의(大意)를 세워 반대하다가 삭직되자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그밖에 소문난 인물로는 숙종(肅宗) 때 학행(學行)으로 지평(持平)에 천거된 휴(烋)와 영조(英祖)때 이름난 학자(學者)였던 괄(佸)이 유명했으며, 치명(致明)은 한성우윤(漢城右尹)과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치명의 아들 득양(得讓)은 정조(正祖)때 예조(禮祖)․병조(兵祖)․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라 아버지에 이어 기로소에 들어가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황주변씨(黃州邊氏)는 남한(南韓)에 8,0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황주변씨조상인물

1. 신라시대인물(新羅時代人物)
변품(邊  品) : 진평왕대(眞平王代)를 효시(嚆矢)로 북한산주 군주(北漢山州 軍主)로서 삼국통일 전(三國統一 戰) 수행중(修行中)에 단금성 전투에서 장렬(壯烈)하게 순국(殉國) 하다.
변산(邊  山) : 삼국통일(三國統一) 후대당외교(對 唐外交)에 공헌함.
변멸성(邊蔑性) : 신라말(新羅末) 토호(土豪), 아들 균여대사[(均如大師) 불교 문학(佛敎文學)]의 선각자(先覺者)

2. 고려시대인물(高麗時代人物)
변려(邊  呂) : 몽고 항쟁의 공으로 상장군(上將軍) 및 태천백(泰川伯)에 봉해짐.
변윤(邊  允) : 안찰사(按察使)
변유(邊  宥) : 공부외랑(工部議郞)
변제(邊  制) : 참지정사(參知政事)
변눌(邊  訥) : 전객(典客)
변석(邊  碩) : 저후(祗候)
변천(邊  遷) : 중랑장
변승준(邊承俊) : 典客
변광수(邊光秀) : 典工判書
변정(邊  靜) : 중군사정(中軍司正)을 지내신 휘정(靜)에 이르러 왕실의 외척으로 신돈의 미움을 받아 남으로 낙향하시어 장성에서 사시게 되었다.

3. 조선시대인물(朝鮮時代人物)
변효우(邊孝友) : 통훈대부 행유학교수
변  택(邊  澤) :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
변영남(邊永男) : 武司勇
변기남(邊起男) : 절충장군(折衝장군)
변이중(邊以中) : 1546(명종1) ~ 1611(광해군 3) 자(字)는 언시(彦時), 호(號)는 망암(望菴), 택(澤)의 아들이며 장성 (長城)출신이다. 이이(李 珥)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 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7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였으며 저서 심득(心得)에 심성이기본원론(心性理氣本源論)은 성리학의 정수가 담겨있다. 

1592년 임진왜란때 전라도소모사(全羅道召募使)가 되어 병마(兵馬) 군기(軍器)를 수습한 뒤 수원(水源)에 주둔하여 기호(畿湖) 지방의 적에 대비했다.
  조도사(調度使)가 되어 양천(陽川)에    주둔, 누차 전공을 세우는 한편 화차(火車) 3백량을 제조, 순찰사(巡察使) 권율(權 慄)에게 40량을 주어서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이룩케 하고 조도사 (調度使)를 세 번, 독운사(督運使)를 두 번 지내면서 군량 수십만석을 거두어 조달하는 등 공이 많아 호성 원종공신 1등, 선무원종 공신2등의 공신록에 올랐다.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선생과 예학(禮學)을 논하였으며 가례고증(家禮考證) 4권을 저술하였고 해원 부원군 윤두수 선생 초상때 사계(沙溪) 선생과 더불어 집례 책임을 맡았다.
  선생은 6조의 좌랑 몇 번이 행정 내부 고위직이었고 외직으로 이천(利川), 상주(尙州), 성주(星州) 풍기(豊基)고을 수령과 황해, 평안도의 도사(都事)등에 임명되었으나 극히  단기간이었고 함안군수를 끝으로 관직을 마쳤으며 고향 장성에 돌아와 향풍순화를 위하여 향헌20조를 만들어 공헌하였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 장성(長城)의 봉암서원(鳳巖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

 

변윤중(邊允中) 공의 휘는 윤중(允中)이고  자는 공신(公信)이고 휴암은 그 호 이다. 중군사정 휘 정(靜)의 5대손으로 고조의 휘는 호우 (孝友)이신데 교수(敎授)를 하셨으며, 증조의 휘는 호(浩)인데 생원(生員)이며, 할아버지의 휘는 처정(處楨)인데 참봉(參奉)을 하셨고, 아버지의 휘는 홍(洪)인데 참봉(參奉)을 하셨다.
어머니 진원최씨(珍原崔氏)는 현감 윤(崙)의 따님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바탕이 달라, 내실(內實)에 힘쓰고 독학(篤學)하여 종족들은 그 효도를 칭찬하고 향당에서는 그 학문을 스승으로 하였다. 거듭 천섬(薦剡)에 올랐으나 벼슬은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에 그쳤다.
임진년, 섬 오랑캐가 변란을 일으켜, 대가(大駕)가 파월(播越)하실 때 호종(扈從)하였고 정유년에 벼슬을 그만두시고 귀향하였는데 왜적의 무리 수천명이 갑자기 닥치니 드디어 스스로 맹세하시기를 『힘이 없고 형세(形勢  고단(孤單)하여 집 뒤 암혈(巖穴)에 숨으면 충분히 몸은 가릴수 있을것이나 만약 왜적을 한 명이라도 죽이지 못한다면 어찌 나라를 구할 수 있겠느냐!』하고는 집의 젊은이들 200여명을 거느리고 출전한지 수일에 결국에는 대강(大江) 가운데 휴암(?巖) 아래서 죽었으니, 바로 9월 18일 이었다.
이 때에 운홍(雲虹)의 기적(奇蹟)이 있었다. 공의 부인 함풍성씨(咸豊成氏)는 감찰 기인(起仁)의 따님인데 공을 뒤따라 물속으로 몸을 던지면서 말하기를, 『공이 나라를 위해 죽었는데,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하겠느냐?』라고 하였다.
공의 아들 선무랑(宣務郞) 형윤(亨胤)이 또 이어서 순사(殉死)하려고 하자, 며느님인 서씨(徐氏)가 자신이 대신하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부자가 모두 죽으면, 조상 제사는 누가 받들며, 후사(後嗣)는 누구에게 맡기란 말입니까?』하고는 드디어 제기(祭器)를 안고 강에 투신(投信)하여 죽었다.
난리뒤에 시신(屍身)을 건져올렸는데, 서씨(徐氏)가 떨어진 곳은 하류(下流)였는데, 거슬러 올라가서 시부모님 곁에 있었으니 그 또한 기적(奇蹟)이었다. 고종황제 임진년에 이르러 태상(太常= 諡號를 관장하는 官廳)에게 명하여 임진왜란 때에 충신 효자 열녀[忠孝烈]로서 행실이 남달리 뚜렷하였는데도 아직 포상(褒賞)을 받지 못한 사람을 널리 찾아서 보고하라고 하였었다. 그것을 담당하였던 신하가 공(公)과 성씨(成氏), 서씨(徐氏)에 대한 일을 들어가 보고하니, 공에게는 이조참의(吏曹參議), 성시(成氏)에게는 숙부인(淑夫人)이 증직되고 아울러 삼강정려(三綱旌閭)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공(公)은 망암선생(望菴先生)의 종제(從弟=사촌동생)이니 망암(望菴)이 화차(火車) 삼백량(三百輛)을 만들때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자의 조달을, 공(公)이 가산(家産)을 기울여 도았으니, 바로 행주대첩(幸州大捷)은 공의 공(功)이 또한 적지 않다.
판서 조종필(趙鍾弼) 참판 박봉빈(參判 朴鳳彬),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등의 정려기가 있다.

 

변경윤(邊慶胤) 공(公)의 휘는 경윤(慶胤) 자(字)는 자여(子餘) 호(號)는 치재(恥齋) 또는 서악 세상(西岳世上)이 자하선생(紫霞先生)이라 칭한다. 선조갑술(宣祖甲戌) 二월三일생 계묘년에 문과급제하시고 통훈대부 행예조좌랑(通訓大夫 行禮曹佐郞)에 이르시다.
일찍 우계 성선생(牛溪 成先生)과 사계  김선생(沙溪 金先生)에 배우매 양선생(兩先生)은 公의 자질(資質)과 度量을  크게 칭찬하여 우리나라 안자(顔子)가  됨이라 하였다. 우계선생(牛溪先生)이 피무(披誣)함에 항소(抗疏)하시고 광해혼조(光海昏朝)에 대하여 여러말로 이이첨도당(李爾瞻徒黨)의 죄악(罪惡)을 열거 3회나 상소(上疏)하였으나 관철되지 못함을 한탄하시고 장성입암산성(長城笠岩山城) 자하동(紫霞洞)에 은퇴(隱退)하시어 정하곡선생(鄭霞谷先生)과 지기지우(知其之友)로 여생(餘生)을 화답하시였다. 광해폭정(光海暴政)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묵재 이귀(?齋李貴)가 시도할 때 사위 자하공(紫霞公)께 물은즉 자하공(紫霞公)께서 위이윤직가(爲伊尹則可) 연이와 불위이윤직불가(不爲伊尹則不可)합니다.
이 말은 중국황제(中國皇帝)가 광해(光海)같은 폭정을 할때 이윤(伊尹)이 그황제(皇帝)를 폐위(廢位)시키고 새 황제(皇帝)를 맞이하여 별 정치보복(別 政治報復) 없이 선정(善政)을 베풀었기로 당신(當身)도 이와 같이 잘해보란 뜻이다.
도학(道學)과 절의(節義)가 세상(世上)에 숭앙(崇仰)되고 지리(地理)에도 통달(通達)하였고 조유인(曺孺人)을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하다가 모친이 별세하심에 애통(哀痛)하여 三년간 시묘(侍墓)하시고 인조계해(仁祖癸亥) 三월 十八일에 졸(卒)하니 나라에서 특히 정사원종훈으로 통정대부?예조참의(靖社原通政大夫禮曹參議)에 증직하다. 봉암서원(鳳岩書院)에 배항되고 문집(文集) 五권과 연보(年譜) 一권 그 외 많은 문헌이 보존(保存)되고 있다. 송곡 문간공 조복양(松谷文簡公趙復陽)이 묘갈명(墓碣銘)을 짓다.

변덕윤(邊德胤) 공(公)의 휘는 덕윤(德胤)이고 자(字)는 명보(明甫)이다. 高祖인 浩께서는 생원(生員)이시고 증조(曾祖) 차정(次楨)께서는 효렴(孝廉)으로 천거(薦擧)되어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셨고 할아버지의 휘는 우(宇)이신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셨고, 아버지의 휘는 復中이시다.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응신(應信)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계사년 8월에 공(公)을 장내(墻內) 본가(本家)에서 낳으셨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품성(稟性)이 영매(英邁)하시고 효성(孝誠)과 공경(恭敬)함이 단정하고 곧았으며 명리(名利)를 대단치 않게 생각하셨다. 자라서는 이웃마을에 분가(分家)하여 살았으나, 정성(定省)(아침저녁으로 부모에게 문안드리는 것)을 폐하지 않으셨고, 상을 당해서는 시묘살이를 하면서 3년을 피눈물로 울었다. 일찍이 사계 김선생(沙溪 金先生)에게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을 배우고 당세(當世)에 추중(推重)을 받으셨다.
인조(仁祖) 병자년(丙子年)에 군정(軍丁)을 모집하고 군량(軍糧)을 모아서 근왕(勤王)하려고 서울로 달려갔으나, 중도(中途)에서 남한산성(南漢山城)의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미칠 듯이 통분해 하였다. 드디어 상소를 올리고 백암 명정산중으로 발자취를 감추어 호를 명산(明山)이라고 하고 문설주에 독명헌(獨明軒)이라고 현판(懸板)을 걸었으며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이 여러번 천용(薦用)하려고하였으나 응(應)하지 않았다. 만년(晩年)에 부모님 묘소(墓所)에 다니기 가깝다 하여 고택(古宅)으로 돌아오셨으며 세상(世上)에서 려남처사(廬南處士)라고 불렀다.

 

변명익(邊命益) 공(公)의 휘는 명익(命益)
자(字)는 춘장(春長) 호(號)는 창암(滄岩) 광해경술(光海庚戌) 7월26일생 일찍 권석주 김청음 양선생(權石洲 金淸陰 兩先生)에 배워 문예(文藝)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많은 시(詩)와 문(文)이 문헌록(文獻錄)에 기록되었다.
병자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사옹원참봉(司饔院參奉)으로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피란하실 때 중신(重臣)들과 같이 호가(扈駕)하시다 기묘에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함창현감(咸昌縣監)을 제수받아 평창 가흥 은산현감(平昌嘉興恩山縣監)을 역임(歷任)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러 금산군수겸 전주진관병마 동첨절제사(錦山郡守兼 全州鎭管兵馬 同僉節制使)를 지내니 백성들이 송덕(頌德)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우다. 은산에서 성(城)을 쌓고 병사(兵使)를 길러 여러번 외적(外賊)을 쳐 많은 전적(戰績)을 세워 상전(賞典)이 내리매 부하(部下)들에 돌려주시고 공(公)은 받지 않으시니 신독재 김선생(愼獨齋金先生)이 부하에 인자하고 본인의 청렴함을 극히 찬양(讚揚)하였다. 현종경자(顯宗庚子) 十二월 二十일 졸(卒)하시니 증손 판서치명(曾孫判書致明)의 귀(貴)로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 경연 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 經筵 參贊官)에 증직되었다.

 

변광보(邊光輔) 공(公)의 휘(諱)는 광보(光補)
자(字) 여필(汝弼) 인조갑신(仁祖甲申) 八월 二十八일생 상소현세자 三녀(尙昭顯世子三女)와 결혼(結婚)하여 황창부위(黃昌副尉)에 봉(封)하다. 나이 七세에 문장(文章)에 능(能)하고 거동(去動)과 도량(度量)이 성숙(成熟)하여 효종 칠년(孝宗七年) 병신에 나이 十三세 상(上)이 친선(親善)하여 소현세자삼녀(昭顯世子三女)와 짝을 지으시고 다음해에 예부시(禮夫試)를 맞으시니 상(上)이 심히 기뻐하시다.
다음해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금산(錦山)에 분상하시고 근심과 애통(哀痛)이 심하시어 집자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상례를 맞으시며 현종경자(顯宗庚子) 겨울에 또 부친 창암공(父親 滄岩公)이 졸(卒)하니 애처럽고 통탄(痛嘆)이 심(甚)하여 병이 짙어짐에 현종(顯宗)이 어찬(御饌)과 의약(醫藥)을 하사(下賜)하였으나 효험이 없고 마침내 신축 十二월 十八일 나이 겨우 十八세로 졸(卒)하니 상(上)이 차탁불의하여 삼전종사(三殿從使)를 보내어 국례(國禮)로 치상하며 또 여주 장흥동(驪州長興洞)에 산지(山地)와 전토(田土)를 하사(下賜)하시고 장열왕후 수경(莊烈王后壽慶)때 순의대부 오위도총부부총관(順義大夫五衛都摠付副摠管)을 제수하시고 노복과 토지를 같이 하사(下賜)하시다.
서계문정공 박세당(西溪文貞公 朴世堂)이 묘갈명(墓碣銘)을 짓고 대사헌 박필명(大司憲 朴弼明)이 글을 쓰다. 배(配) 경순군주(慶順君主)는 계미 四월 二十六일생 정축 十二월 十八일 졸(卒)하시니 묘합폄 상의특명(上特命)으로 종손 치은(宗孫致殷)으로 사손(祀孫)을 삼다.

 

변건(邊  健) 조선조(朝鮮朝) 학자(學者)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변광식(邊光軾) 공(公)의 휘(諱)는 광식(光軾) 자(字) 여첨(汝瞻) 호(號)는 범호정(泛湖亭)

인조무자(仁祖戊子) 十二월十七일생 을묘에 진사(進士) 음계통선랑(陰階通善郞)에 오르다. 천자(天資)가 고명(高明)하시고 꽃다운 명예(名譽)가 일찍 창달(暢達)하여 이수곡 최명곡 임창계 김농암 오서파 임수촌 홍호은(李睡谷? 崔明谷錦鼎 林昌溪泳 金農岩昌? 吳西坡道一 任水村? 洪壺隱受疇)등과 장안 팔재자(長安八才子)로 온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시(詩)와 서(書)와 화(畵)로 동유들의 허연한바 되어 삼절사(三節士)로 명성(名聲)이 높다.
 

변휴(邊  烋) 조선 숙종(肅宗)때 학행(學行)으로 천거 되어 지평(持平)을 지냈다. 일사청류당(逸士聽流堂)
휘(諱) 휴(烋)의 자는 미경(美卿)이시다. 행의와 학문(行誼와 學問)으로 천(薦)에 오르고 숭명제(崇明際)에 뽑혀 지헌(持憲)에 제수되기에 이르렀으나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공은 출생후 1년도 못되어 부모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구씨(具氏)에게서 자랐다. 10세에 문리(文理)를 깨우치고 엄연하기가 어른 같았다. 20세에 과거를 보려고 원재(院齋)에 머무실 때 「이 모임은 매우 성대하니 마땅히 경의(經義)를 강명(講明)해야지 자질구레하게 문장과 문구의 뜻을 캐는 짓을 하겠는가」하시니 여러사람이 이 말을 따랐다고 한다.
월여(月餘)만에 학문을 논하고 귀가하였다. 현석 박공(玄石 朴公)과 구천 이공(龜川 李公)등 제현과 왕복토론에 힘썻고 마음은 경(敬)으로 지니고 몸은 공(恭)으로 조심스럽게 하여 학문을 실천하는데 돈독하고 견해가 민첩한 것은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공(公)은 대소 향시에 수십번 합격하였으나 결국 크게 드러나지를 못하였다.

변유(邊  攸) 조선 때 좌랑(左郞)을 역임하였다.
 

변괄(邊  佸) 공(公)의 휘(諱)는 괄(佸)이요, 자(字)는 회지(會之)요, 호(號)는 돈암(遯菴)이니 명산덕윤(明山德胤)의 증손(曾孫)이다. 경종계묘(景宗癸卯)에 장성읍(長城邑 長安里)에서 출생(出生)하였는데 2세에 이미 통어(通語)를 하고 입학(入學)하여서는 천지인(天地人) 3세의 뜻을 묻고 성동전후(成童前後)에 경전자사(經傳子史)를 모두 통달(通達)하였으며 향시(鄕試)에 합격(合格)하였으나 회시(會試)에 낙방(落榜)하고는 공령(功令)에 단념(斷念)하여 심성이기지학(心性理氣之學)을 전공(專攻)하였다. 궁경독행지사(窮經篤行之士)로 향천도천예천수천(鄕薦道薦禮薦繡薦)에 들었고 남당한원진문인(南塘韓元震門人)으로 문제자중(門弟子中) 명망가(名望家)가 많았다.
유고(遺稿) 2권(二券)과 소저3세실기(所著三歲實記)가 세상에 유명하다. 증직(贈職)은 사복시정(司僕寺正)이다.

 

변치명(邊致明) 공(公)의 휘(諱)는 치명(致明) 자(字) 성보(誠甫) 호는 묵포옹(墨逋翁) 숙종계유(肅宗癸酉) 六월 二十六일 장성군 장안리에서 출생하여 영조을미(英祖乙未)년에 향년(享年) 八十三세로 서울 적선동(積善洞)에서 졸(卒)하였다. 기틀과 국양이 넓어 문장(文章)을 일찍 깨우쳐 二十九세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나 여러차례 문과(文科)에 실패(失敗)하였다가 五十九세에 비로소 문과(文科)에 합격(合格)하여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예조(禮曹). 병조(兵曹).의조(吏曹).좌랑(佐郞).정랑(正郞).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평택현감(平澤縣監).개성경력(開城經歷).사복시정(司僕寺正).사헌부장영(司憲府掌令).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한성우윤(漢城右尹).동의금부총관(同義禁府摠管).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지중추(知中樞).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歷任)하고 정헌숭정(正憲崇政)을 거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이르렀다. 회혼례(回婚禮)를 지내고 기로사(耆老社)에 드니 영조(英祖)의 예우(禮愚)가 다른 기신(耆臣)보다 특히 우대하였으며 효헌공(孝憲公)의 시호(諡號)를 내리시니 자혜애친(慈惠愛親)을 입증(立證)함이다. 어려서부터 가정지학(家庭之學)을 이어받아 학문(學文)이 대성(大成) 하였고 과거에 올라 창방(唱榜)하는 날 영조(英祖)가 불러 묻기를 경(卿)은 무엇으로써 나를 섬기겠느냐 물은즉 대답하기를 충성(忠誠)과 바른 정치(政治)를 할 뿐이라고 답(答)하니 영조(英祖)께서는 더욱 기뻐하시고 기로사(耆老社) 생시장(生侍狀)을 짓게 하였다. 지평사직소(持平辭職疏)를 올리면서 날로 강연(講筵)을 열어 흥학근정(興學勤政)의 방(方)을 힘써야 할 것과 무신역옥(戊申逆獄)의 처리방안(處理方案)을 논(論)하였고 개성(開城)에 재직시(在職時) 치적(治蹟)이 높았으므로 유수남태제(留守南泰齊)가 상소(上疏)하여 유임(留任)이 되고 백성들이 비(碑)를 세워 송덕(頌德)하였다. 장영(掌令)때에 언론개척(言論開拓)과 인재등용(人才登用)에 관(關)한 소문(疏文)을 올렸고 경연강의(經筵講義)에 임금을 깨우친바 적지 않았다.영조을미(英祖乙未) 十월 十四일 졸(卒) 하니 이조판서 관암홍 문정공경모(吏曹判書冠岩洪文貞公敬謨)가 시장(諡狀)을 짓다.
 

변치도(邊致道) 공(公)의 휘(諱)는 치도(致道) 자(字) 성유(聖由) 호는 죽천재(竹泉齋) 숙종병자(肅宗丙子) 十二월 九일생 문학(文學)과 덕망(德望)이 一세에 중앙(衆仰)되었다. 녹천 이영상유허(鹿川李領相濡許)가 크게 쓰일 재목이라 칭(稱)하였고 참판 이우(參判李?)가 우리고을 안자(顔子)라 칭(稱)하였다. 경오에 생진양시(生進兩試)를 맞으시고 태학관장의(太學管掌議)로 많은 활약(活躍)하시면서 강경한 상소(上疏)로 윤명재(尹明齋)를 구(求)하려다가 당인(黨人)들의 화를 입어 관직(官職)을 버리시고 죽남산중(竹南山中)에 은거(隱居)하시여 교수불권(敎授不倦)하고 훌륭한 문인(門人)을 많이 양성(養成)하였고 명철한 학행(學行)으로 자주 도신수이계(道臣繡衣啓)에 들었다.
우리 가문은 죽천재공활동(竹泉齋公活動)으로부터 소론(少論)의 명문(名門)이 되었다. 죽천재는 성격(性格)이 강직(剛直)하고 논리(論理)가 투철하여 세인(世人)들이 경탄하였고 한때 송우암(宋尤岩)을 十八현정에서 제명(除名)할 때 선구자역할(先驅者役割)을 하면서 조출일귀하니 쾌재쾌재(快哉快哉)라
지은 시(詩)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영조계사(英祖癸巳) 七월 二十七일 졸(卒)하니 문집(文集) 三권이 있고 태학관장의(太學館掌議)로 재직(在職)시 수집한 귀중(貴重)한 필첩 七권이 있다.
아들 득좌(得佐)의 귀(貴)로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호조참판겸(戶曹參判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官)을 하였다. 호암안정택(湖岩安政宅)이 죽천재기(竹泉齋記)를 짓고 노하 임정헌 용성 양주익(魯下林廷憲 龍城梁周翊)이 행장(行狀)을 짓고 명현서첩서(明賢書帖序)를 손상희(孫相禧)가 짓고 중재김황(重齋金榥)이 묘갈명(墓碣銘)을 짓다.

 

변득양(邊得讓) 공(公)의 휘(諱)는 득양(得讓) 자(字)는 사겸(士謙) 호(號)는 단옹(檀 翁) 경종계묘(景宗癸卯) 三월 二十六일 장성군 장안리(長城郡長安里)에서 출생(出生)하여 영조을미(英祖乙未) 十월 十四일 서울 적선동(積善洞)에서 졸(卒)하니 향년(享年) 七十九세였다.
계유에 三十一세로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고 그 이듬해에 제술(製述)로 장원(壯元)이 되어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명(特命)을 받아 三十四세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장영집의(掌令執義) 사간원정언헌납사간(司諫院正言獻納司諫) 좌우승지(左右承旨)를 거쳐 공조판서 지돈령 판의금 판돈령 보국숭록대부(工曹判書知敦寧輔國崇祿大夫)에 이르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었으며 회혼례(回婚禮)를 지냈다. 임오년에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를 구(救)하기 위하여 극간(極諫) 하다가 삭탈관직(削奪官職)되고 계미년에 복직(復職)되어 정묘조(正廟朝)에는 흉당(凶黨)을 토벌(討罰)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올렸는데 그 전문(全文)이왕조실록(王朝實錄)과 대란록(待?錄)에 등재(登載) 되었다.
고종기묘(高宗己卯)에 영상김병학(領相金炳學)의 시호(諡號)를 받기 위하여 관계제신(關係諸臣)을 모아 시호에 해당(該當)되는 인물(人物)을 제외(除外)할 수 없으므로 공(公)과 이의생 이수준 김선 임영수 김응균 윤치용 김병운 이용희 이주철 서상정(李義生 李壽璿 金銑 林永洙 金應均 尹致容 金炳雲 李容熙 李周喆 徐相鼎)을 아울러 증시(贈諡)하였으니 공(公)의 시호(諡號)는 효정(孝靖)이요 태상시장록(太常諡狀錄)에 판서 윤정현(判書尹定鉉)이 시장(諡狀)을 짓다. 많은 유고(遺稿)는 전부 유실되고 연안지(延安誌)에 평원당시 一수(平遠唐詩一首)와 규장각(奎章閣)에서 기로사 제축인서록 헌어일관운축(耆老社 題軸人瑞錄 獻御日關韻축) 또는 변씨 족보에서 가보요람서(家譜要覽書) 해동명가필보(海東名家筆譜)에 서찰 등을 상소문(上疏文)과 합하여 관암외사(冠岩外史)에서 인서록 문자(人瑞錄 文字)등을 합집(合集)하여 일고(逸稿)를 만들었을 뿐 많은 시문(詩文)이 명문대가(名門大家)의 문헌(文獻)에 기재(記載)되었으나 자손들이 수집 못한 것을 천만유감(千萬遺憾)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