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7-04-16 13:06 수정일 : 2018-01-30 16:46
초계변씨 득성의 유래
한국인의 성이 투화성(외국에서 귀화한 자)이 많은데 우리 변씨성도 그 근원을 찾아보면 고대중국의 주나라에서 비롯된다. 문왕(성덕)의 십사자중 제육자 진탁이 조나라에 봉후되고, 진탁의 제이자 제양이 별도로 호남성의 노나라 변읍에 봉군되고서 그 지명을 따서 변성의 시초가 되었다.
우리나라 변씨는 당나라 천보년간(서기742-755)에 예부상서를 지낸 변원이 서기743년(신라경덕왕 2년)에 팔학사의 일인으로 효경 일질을 가지고 도래하여 가르치고 시례를 숭상케 하라는 명에 따라 신라에 정착하며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상계를 고증할 문헌이 없어 고려 성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후에 관이 문하시중에 오르고 팔계군에 봉해진 문열공 휘 정실(변정실)을 시조(초계변씨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초계(옛 팔계)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면서 시조 정실의 아들 광(광 : 장파)·요(요 : 중파)·휘(휘 : 계파) 삼형제를 기점으로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 후 둘째 아들인 요의 손자 고적이 밀양에 시거함으로서 밀양변씨로 분관되면서 초계와 밀양으로 나누어졌으나 시조를 같이하는 후손들이 종의를 모아 대동보를 발간하게 되었다.
일찍이 영남내륙과 기호지방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도덕과 학문을 숭상하는 명문의 후예로서 빛이 바라지 않는 변문은 장파 광의 후손들이 변씨일문의 6할을 점하며 영남과 기호지방에 주로 많이 살고, 둘째 요(중파)의 손은 경남지방에 삼남 휘(계파)는 합천군을 중심으로 집중세거하여 천수백년 동안 명문의 기틀을 다져왔다.
※ 초계읍지에 의하면 문열공 휘정실은 중화예부상서 휘원의 후예라고 하였고 또 밀양박씨종신위양보를 고증하면 상서공 이하 10세까지는 휘함 관작이 소상하게 현록되었으나 구보에 일찍이 재록되지 않아 막중한 선계를 경솔하게 다를 수 없음으로 이에 보수에 저록하고 일후문헌의 경징을 기다린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초계변씨는 전국에 53,86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 - 초계변씨조상인물
신라시대 인물
변원(卞 源): 唐나라 天寶年間(서기742-755)에 禮部
尙書를 지낸 卞源이 서기743년(新羅 景德王 2년)에 八學士의 一人으로 孝敬을 가지고 渡來하여 新羅에 定着함과 동시 詩禮를 가르쳐 알게 하였다.
장자(長子) 변반(卞潘): 당나라에서 벼슬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변시(卞 蓍): 여진기도독(女眞騎都督)을 역임(歷任)
변계조(卞繼祖): 선덕왕(宣德王)때 대사도(大司都)를 역임(歷任)하고 동왕(同王)4년 계해(癸亥)단기3116년(서기783년)에 사직단 (社稷壇)과 양현각(養賢閣)의 건립(建立)을 주청(奏請)하니 윤허(允許)하여 양현각(養賢閣)에서 많은 인재(人才)를 양성(養成)하니 왕(王)께서 조부의 훈업(訓業)을 계승(繼承)하라는 뜻에서 계조(繼祖)라고 사명(賜名)하였다
변철(卞 喆): 헌덕왕(憲德王)때 시중랑(侍中朗)에 오르고 덕흥왕(德興王)때 간의대승(干儀大承)을 역임(歷任)
변용(卞 鏞): 문성왕(文聖王)때 대사도정(大司都正)에 오르고 헌안왕(憲安王)때 대부평천우두대각간(大府令千尤頭大角干)을 역임(歷任)
변이(卞 怡): 경문왕(景文王)때 숙평중랑대아찬(倏平中郞大阿湌)에 오르다.
변후(卞 垕): 진성왕(眞聖王)때 대통사(大痛仕)를 역임(歷任)
변 관(卞 觀): 효공왕(孝恭王)때 상감아찬(相監阿湌)을 역임(歷任)
고려시대 인물
변구연(卞龜年): 고려왕건태조(高麗王建太祖)를 도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와 설능이주부원군(雪陵二州府院君)을 역임(歷任)
변 섭(卞 攝): 정종(定宗)과 광종(光宗)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歷任)
始祖 변정실(卞庭實): 高麗朝 諡號 文烈公, 官職 門下侍中
高麗 成宗(乙酉985年) 登第하여 門下侍中을 歷任. 國家에 貢獻한 勳功으로 八溪君에 封侯되시고 文烈公의 諡號를 받았다. 墓所는 慶南 陜川郡 栗谷面 甲山里 山29番地 壬坐이다.
1985年 墓所 아래쪽 山下에 永慕齋와 神道碑 그리고 龍德齋를 重建하고 2001年에 永慕齋 뒤편에 崇禮祠를 建立하였다. (歲一祭는 陰曆 10月 1日)
변광(卞 光): 高麗朝 官 門下侍中)
변위보(卞爲寶): 高麗朝 官 左右衛保勝大護軍
변돈미(卞敦美): 高麗朝 左右衛保勝郞將
변득형(卞得荊): 高麗 睿宗때 司藝를 거쳐 仁宗때 判事僕侍事를 역임(歷任).
변용(卞 勇): 高麗朝 官: 檢校監門衛大護軍
변치(卞 緻): 高麗朝 推融府錄事
변화형(卞和瑩): 高麗 明宗朝에 樞密院事를 역임(歷任)
변경(卞 卿): 高麗朝 官 左右衛保勝大護軍 階 奉常大夫
변계손(卞季孫): 朝鮮 官訓 大司諫 輝의 6世 位階는 通訓
大夫(正三品) 官은 太宗朝에 正言과 禮賓小尹 世宗朝에는 司諫院司諫 및 安東府使를 역임하셨다. 公은 通訓大夫로 永樂2年 甲申年(1404年) 때 전임, 宣德 6年(1431年)에 安東府使로 재임.
변빈(卞 贇): 高麗朝 官 門下評理 正二品 高麗末 國運
이 기울음에 처해 判書 成萬庸, 博士 鄭夢周, 提學 洪載, 大司成 李穡, 全書 金成牧, 全書 趙悅, 進士 李午, 丹邱 金厚 等과 함께 世上을 恨歎하며 殷나라가 亡할 때 三賢의 去就를 想起하고 우리도 各自의 意志에 따라 處身하자 하여 이 때 公은 杜門洞으로 들어가 麗朝의 忠節을 지켰다. 開城 杜門洞書院 表節室 靖節班 第二位로 奉享, 慶南 馬山市 鎭田面 日岩里 誠久祠에 配享되었다. 杜門洞書院誌: 國立圖書館所藏(索引番號 古 2107-80)
변원(卞 原): 高麗 공양왕(恭讓王) 3年 제위(帝位)
원자(元字)를 避하여 원자(原字)로 改諱 추성익위공신중대광(推誠翊衛功臣重大匡)이며 官은 門下贊成事上護軍을 역임(歷任).(正三品)
변남용(卞南龍): 號 靜菴 字 雲卿 麗朝에 登第 官은 門下侍郞(正四品) 開城尹을 歷任하고, 朝鮮太宗朝 漢城判尹(正二品) 歷任
변옥란(卞玉蘭): 朝鮮 官訓 判中樞院事 1346년(忠穆王 20年)에 文科에 及第한 후 禮貧侍丞에 보직되고, 1360年 (恭愍王9年) 晋州判官을 지낸 뒤 典法正郞을 거쳐 1372年 水原府使가 되었다. 1375年(禑王1年) 判繕工寺事 忠州, 淸州의 牧使를 거쳐 1390年(恭愍王2年)에 이어 判內府寺事, 戶曹判書를 역임하였다. 1392年 李成桂를 추대하여 開國原從功臣이 되고 이듬해 檢校判中樞院事에서 左贊成에 이르렀다.
변흔(卞 渾): 文科 司僕寺主簿 金書法華經을 善書함 太宗元年 二月 九日卒
조선시대 인물
변순(卞 純): 公은 14歲 文科에 及第 1415年 工曹正郞
과 察訪을 거쳐 弘文館校理, 延安府使 역임 후에 兵曹參判 追贈.
변타: 文科에 及第 長興府使 從三品
변굉(卞 紘): 文科에 及第 官 吏曹參判 엮임, 從二品.
변효문(卞孝文): 9세 諱南龍의 5男으로 太宗14年에 謁聖
文科에 及第 世宗2年에 注書로서 明나라 使臣을 迎接는 職務를 맡으시고 同年10月에 五部學堂을 造成하였고 世宗15年에 集賢殿校理로서 上疏, 日本殿에 32人이 無冗之幣라 하여 12名을 減員하고 그후 또 上疏하시기를 天災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수 없으나 百姓을 救恤하는 政務를 늦출수 없다하시었고 成均館大司成으로서 上疏하시기를 堯舜의 道를 行하시면 無不治하고 老佛의 道가 興하면 無不亂이 오니 帝王은 龜鑑이 되어야 한다하시고 조선조에서 최초로 일본통신사로 임무를 훌융하게 완수하고 귀국하시니 세종대왕게서 기뻐하시어 큰잔치를 베풀고 제학으로 隆進하시고 이듬해에 五禮儀注를 詳定하여 西紀1474年에 公布되어 施行되였고 《新註無寃綠》을 編纂하고 世宗28年 訓鍊提調를 歷任하시고 端宗二年에 陰陽提調가 되엇으나 端宗廢位后 全州府尹 忠州判牧使로 官職을 마침.
변효경(卞孝敬): 世宗(乙亥에 1419年) 增廣文科에 及第知承文院事에 司諫院司諫을 거쳐 1451年(文宗元年) 吏曹參判에 端宗三年에 1455년 永興大都護府使 (從二品)
변효량(卞孝良): 文科 官은 우윤(右尹) 從二品
변옹(卞 雍): 官은 1396年 禮安監務 赴任 癸酉 6월에 遞職(체직)
변맹량(卞孟良): 號는 春軒 文科에 오르시고 朝鮮朝에 吏曹判書에 追贈.
변중량(卞仲良): 號 春堂 李元桂(李成桂의 兄)의 사위,
麗末 1365年(恭愍王 14年)에 文科에 及第, 密直司左承旨 歷任 정도전 사건에 연루돼 慘殺되다. 居昌의 屛巖書院에 享配 淸道 鳳陽書院에 享配 階 資憲大夫 吏曹判書, 知經筵義禁府使,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知春秋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에 追贈
변계량(卞季良): 朝鮮 字 巨卿, 號 春亭, 諡號 文蕭, 官 大提學 1382年(禑王 8年) 14歲때 進士가 되고, 1385年에 文科에 及第 典校의 主簿 進德博士등을 역임했다. 朝鮮建國初 千牛右領中郞將 兼 醫務監丞, 醫學敎授官이 되고 司憲府侍史, 成均館學正, 直藝文官, 司帝少監등을 거쳐 藝文館直提學등을 지냈다. 1407年(太宗7年) 文科重試에 及第하고, 그 후 禮文館大提學, 禮曹判書, 參贊등을 거쳐 1426年(世宗8年) 判右軍都摠制府使가 되었다. 大提學을 20年間 지내는 동안 대부분의 外交文書를 도맡아 지어 名文章家로 유명했으며 〈太祖實錄>의 편찬과〈高麗史>의 改修에 참여했고, 詩에도 뛰어나 靑丘永言에 時調 2首가 전하며 文廟, 箕子墓의 碑文과 〈樂天亭記〉등을 撰했다. 居昌의 屛巖書院 靑道鳳陽書院에 配享. 成均館 校庭碑文을 撰.
변효량(卞孝良): 號 景泰 1445年 文科 及第, 階는 中直大夫(從三品) 官 松羅察訪을 역임
변효검(卞孝儉): 관(官)은 장사랑참봉(將仕郞參奉)
변숙빈(卞淑濱): 號 仲隱
변옥성(卞玉成): 號 靑蓑
변몽량(卞夢良): 字 殷老, 官 司馬를 역임, 癸巳年 安蔭
府使에 除授되었는데, 이곳 百姓들이 세운 頌德碑의 一節에 公을 百姓들이 父母같이 여기고 吏屬들은 神 같이 모시고 承服하니 特히 濟州判官에 除授도었다 하였으니 公의 善政을 알 수 있다,
변질(卞 質): 武科에 及第 官은 兵馬節度使(從二品)
贈嘉善大夫 中樞府使
변강(卞 鋼): 文科에 及第 官 安岳郡守(從四品)
변포(卞 袍): 11歲에 父喪을 입고 侍墓3年 후 世宗에 알려져 孝子賞을 받음. 武科에 及第하시고 1447년 訓練參軍, 慶尙左道兵馬節制使, 戊子1468년 上護軍으로 明나라 자혜황태후 조문사절로 피명, 金海, 長興府使 및 定州, 淸州牧使를 歷任
변심(卞 鐔): 世祖時 개령현감(開寧縣監) 역임(歷任).
변이흠(卞李欽): 號 至樂 成宗朝 忠南 진잠현감(鎭岺縣監)
역임(歷任) 聞慶入鄕祖이며 至樂軒燈波樓廣遠臺를 創建하시어 賢人達士와 交流 後孫들이 思孝齋 創建重修 記念碑와 遺墟碑를 建立하였다.
변구상(卞九祥): 朝鮮 官 司藝 1419年(世宗1年) 增廣文科
에 及第하시고 여러 벼슬을 거쳐 成均館 司藝에 이르렀다. 詩에 뛰어나 國朝文科 榜目卷之二에 能詩 詩人 謂之 詩魔라 記錄되어 있다.
변림(卞 琳): 號 守默 관(官) (1451년) 연안부사(延安
府使) 역임(歷任)
변벽(卞 璧): 字 仲玉 文衡으로 官은 司憲府 執義 역임
(歷任).
변옥(卞 玉): 문과(文科), 우윤(右尹), 충순위(忠順衛)
변옥곤(卞玉崑): 1470年 德川郡守를 지내시고 어모장군
(퀷侮將軍)을 지냄.
변진(卞 珍): 朝鮮 中宗朝 監察 有碑石 , 의령
변찬(卞 瓚): 中宗朝 司諫 全北 高敞
변서(卞 瑞): 朝鮮朝 中宗朝 進士 司諫
변정(卞 玎): 中宗朝 注簿 慶南 巨濟
변준(卞 儁): 朝鮮 草溪君 諡號 忠敬 官 兵曹判書
1506年(中宗 1年) 柳詢등 9人과 함께 燕山君을 폐하고, 晋城大君(中宗)을 迎入하는 世稱 中宗反正에 功을 세워 秉忠舊議決翊運靖國功臣 4等에 錄勳되고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兼 五衛將,資憲大夫兼知義禁府事,兵曹判書등을 역임하고 草溪君에 封해졌다.
변형량(卞亨良): 朝鮮 字 亨之 官 正字 1495年(燕山君 1年)
進士가 되고, 1501年 式年 文科에 內科로 及第하여 正字로 있다가 1504年의 甲子士禍에 연루되어 茂長에 유배되었다가 臭首당함.
변훈남(卞勳男): 朝鮮 官 縣令 文科에 及第, 여러 官職을 거쳐 安樂郡守를 역임. 明宗때 淸白吏에 錄選.
변용(卞 勇): 號 華巖 孝誠이 至極하여 昭聞이 널리
전파되어 明나라 皇帝가 듣고 中郞將의 벼슬을 내리시고 比安懸 龜川 渭城里 白川書院에 配享게 하였다. 只今도 安溪面 國道邊에 旌閭가 있다.
변온(卞 溫): 號 淸軒 1515년 進士 同福縣監과 長興
府使 1522年 文科에 及第 弘文館校理(正五品) 贈 兵曹參判(從二品) 趙靜菴先生에 師事
변안인(卞安仁): 宣宗朝 部將 慶北 聞慶
변우인(卞友仁): 中司馬 成均館生員 慶北 金泉, 永同
변효충(卞孝忠): 官 僉使(從三品) 贈 兵曹參議
변경복(卞景福): 朝鮮 字 仲申, 號 栢陰 孝子 孝誠이 至極
한 孝子로서 항상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공양하였으며 1592年 壬辰倭亂때는 55歲의 노령으로 어머니를 업고 피난하여 편안하게 모셨다. 1602年(宣祖35年)에 旌閭가 命해졌다. 菊溪書院에 祭享.
변길상(卞吉祥):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
변관(卞 覲): 宣務郞 서울 慶北 聞慶
변관(卞 觀): 尙衣院 直長(從七品)
변종인(卞宗仁): 朝鮮 字 子元, 諡號 恭莊, 官 工曹判書
1460年 (世祖 6년) 武科에 及第하고, 1467年 李施愛의 亂이 일어나자 이를 평정하는데 功을 세워 당상관이 되었다. 1473年 (成宗 4년) 오랑개가 北邊을 침범하자 助戰將으로 功을 세워 嘉善大夫에 오르고, 그후 行隱城郡護府使, 工曹判書, 全羅道와 永安北道의 兵馬節度使를 거쳐 1487年 同知中樞府事로 進香使되어 明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水軍節度使를 거쳐 兵馬節度使를 역임하면서 국방을 튼튼히 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1498年(燕山君 4年) 工曹判書를 거쳐 知中樞府事를 역임. 공장공신도비명 부천시 향토유적 1호지정.
변옥희(卞玉希): 朝鮮 字 得楚, 號 坪川 學者 曺 植의 門下에서 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學者로서 이름이 높았다. 1592年(宣祖25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義兵을 모집, 陜川 南城防禦將이 되어 많은 적을 무찌르고,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어 표창을 받았으며 뒤에 전사했다. 고향에 旌門이 세워지고 戶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五衛都摠管에 追贈.
변회보(卞懷寶): 宣祖甲午, 文科에 及第 階 朝散大夫(從4品), 官 三嘉縣監 壬辰倭亂때 진주성전투 참가 진주진영 兵馬節制使都尉(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 기록됨)
변희황(卞希璜): 임진왜란을 당하여 창의하기 위해 송암김면 막료로 군량유사를 맡았으나 공훈을 세운 것이 용사일기에 실려 있음.
변벽(卞 壁): 朝鮮 字 憲之, 號 龜山, 官職 司憲府執義
1507(中宗 丁卯) 司馬에 오르고 己卯에 조정에서 공은 효편의 천으로 현량과를 설하였는데 標題는 學問 器識事親無違 운운이라 했으나 응대하지 않아 士禍를 면하였다. 龜山下에 隱居하고 歌字賦를 지어 소요 자적하였다. 관은 사헌부지평 追贈 병암서원에 享祀
변강지(卞綱之): 朝鮮 자. 국영 1480년(성종11년) 경자
사마문시(사마문시)에 오르고 1492년 문과에 급제 官職: 正言(正六品)
변희손(卞喜孫): 官 義禁府都事, 增兵曹參議
변상동(卞尙東): 朝鮮 字 君振 孝子 1592年(宣祖25)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16세로 아버지를 따라 南城을 수비하다가 아버지가 전사하자 아버지의 屍身을 부둥켜안고 자기도 함께 죽기를 원했다. 이때 적병이 그를 보고 忠臣孝子라 칭찬하며 이어 바위에다 「孝子岩」이라 쓰고 그를 풀어 주었다. 1609年(光海 1年) 童蒙敎官에 임명되었고 死後에 旌閭이 세워짐.
변회(卞 懷): 兼節 校尉 문경
변국형(卞國衡): 武科에 及第 官 水軍節度使(正三品)
변국간(卞國幹): 武科 官 七道兵馬節度使(從二品)엮임 하
시고 全羅右水使 在任時 營內에서 卒, 公은 在任中 善政으로 곳곳에 善政碑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咸鏡道 鍾城과 麗水鎭南館에 碑가 남아 있다. 公이 卒함에 上께서 全南 長興郡 安養面 梨山一麓을 許興한 敎旨를 禮官을 派遣하여 禮葬케 함.
변국경(卞國經): 武科 及第 官 釜山 僉節制使 엮임(從三品)
변소(卞 紹): 護軍 奉正大夫(正四品)
변시익(卞時益): 朝鮮 字 虛卿, 號 三知堂, 官職 承旨
1628年(仁祖6年) 文科에 급제하여 承旨로역임
변시환(卞時煥): 朝鮮 字 輝卿, 號 一측, 官職 縣監
1635年(仁祖13年) 謁聖文科에 內科로 及第하고, 벼슬은 縣監에 그쳤다. 文章에 뛰어났고 數學에도 정통했다. 淸州의 松溪書院에 祭
변헌(卞 獻): 朝鮮 字 時哉, 號 三一山人, 文人 일찍이
중이 되여 休靜, 惟政 등에게 師事했으며,1592年(宣祖25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僧軍에 속하여 功을 세우고, 다음해 還俗하여 司果에 임명되었다. 1609年(光海君 1年) 진사가 되고 이듬해 別試文科에 내과로 급제하였으나 諫官의 탄핵을 받아 科榜이 삭제되었다. 詩書에 뛰어나 布衣로서 使臣을 따라 明나라에 들어가 글씨로서 극찬을 받았다.
변시민(卞時敏): 朝鮮 字 士納, 官職 府使 1603年(宣祖 36年) 武科에 급제하고, 1616年 唐浦萬戶를 거쳐 慶興府使, 安樂郡守, 南原營將 등을 역임.
변성온(卞成溫): 朝鮮 字 汝潤, 號 壺嚴 學者 河西 金麟厚 先生에게 師事하고, 退溪 李滉 先生과 往來交遊하였으며 河西 門下에서 性理學과 易學 및 禮經을 篤究하여 日月의 晦朔을 터득하였으며,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겨 여막에서 3年 居喪하였다. 高敞의 月溪書院에 祭享.
변성진(卞成振): 朝鮮 字 汝玉, 號 仁川 學者 兄 卞成溫과
함께 金河西 門下에서 修業하였고 李退溪와 交遊하였으며 文章과 學行 이 뛰어나 同門弟子 가운데서 推重하였다. 宣祖때 어진 선비를 등용하고 간사한 臣下를 물리치도록 2千餘言의 上疏文을 올렸으나 奸臣들의 농락으로 받아들어지지 못했다. 中府參奉에 起用되었으나 어버이의 命으로 잠시 나갔다가 사직하고 돌아와서 맏형과 함께 學究에 傳念하였다. 高敞의 月溪書院에 祭享.
변승정(卞承貞): 階 正憲大夫 (正二品) 參判公派 蔚山 入鄕祖
변응몽(卞應夢): (1519~ ) 字 瑞翁 進士에 及第 官은 陜川郡守(從四品)를 지내고 正三品 贈左通禮
변문주(卞文周): 仁祖 五衛護軍 奉正大夫(正四品)
변이주(卞以周): 通德郞(正五品)
변인형(卞仁馨): 字 道寬, 官 通訓大夫 軍資監正(正三品)
변유벽(卞有壁): 1638年生 중추부관(中樞府官)
변존서(卞存緖): 壬辰倭亂時 訓練僉正으로 宣武一等原從
功臣(李舜臣將軍과 內外從間)
변포(卞 抱): 號 睡翁 1643年生 訓練判官
변황(卞 幌): 朝鮮 字 文學, 官職 刑曹參議 1654年
(孝宗 5年)에 式年文科에 丙科로 及第, 兩司를 거쳐 刑曹參議에 이르렀음.
변홍원(卞弘源): 字 景源 丁酉再亂때 丁鳴設, 白南振, 馬河秀와 함께 倡義하여 戰場으로 달려가 李忠武公을 後援하여 많은 功을 세운일이 忠武全書 및 湖南節義錄에 登栽 戰功으로 階 通政大夫
변홍제(卞弘濟): 武科 及第 官 訓練院 判事 丁酉亂때 從弟弘建, 弘迪, 弘選과 奮義討倭하여 倭奴를 크게 놀라게 하였고 奮戰中 諸從兄弟와 同殉하였다. 이 事實은 長興輿地勝覽友愛篇 및 湖南節義錄에 실려 있음.
변홍주(卞弘洲): 號 松川 丁酉亂時에 諸兄과 같이 倡義하
여 鳴梁의 戰에 參加하여 戰士함에 招魂葬으로 모심. 贈 兵曹參議
변홍건(卞弘建): 字 景立 僉使 公은 기力이 絶倫하여 丁酉
亂에 二弟와 같이 倡義하여 討倭賊하다가 包圍되어 同日殉節함.
변홍달(卞弘達): 字 景敏 천고가 英豪하고 勇略이 絶倫하
였음. 年十七에 兵使公을 陪行하여 平安兵營任所에 이르자 北노에 포위되었는데 萬刃中에 요입하여 血戰大捷 하였으므로 特科로 褒賞되었으며 壬辰亂때는 八力士에 拔擢되어 都元帥 權慄將軍 麾下의 前鋒으로서 轉戰無敵하였으므로 倭寇가 담畏하여서
경계하여 이르기를 가다가 黑面將軍을 만나면 피하라고 하였으니 公의 안색이 검었기 때문이며 倭賊을 斬殺한 數가 前後萬餘級에 達하였다함. 宣武原從勳二等으로 頒賜銖券되고 臨終時에 北兵使의 諭旨를 받은 사실이 湖南節義錄에 揭載되었으며 吳駿善行狀에 의하여 金谷壯忠祠에 配享되었음.
변홍적(卞弘迪): 字 景明, 官 奉事 公은 勇力과 氣義가 世人이 服從할만큼 壯大하였음. 정유재난에 백형 홍건이 왜적에 포위되었는데 제 홍선에게 이르데 형은 이미 사경에 빠졌는데 아우들만 살았구나 하고 창봉을 밀고 적진에 돌입하여 형을 껴안고 서로서로 앞을 다투며 죽으니 적이 경탄하여 석방하려했으나 일왜가 이르기를 이는 비록 가애하나 용력이 과인하니 어찌 흑면장군의 형제가 아니겠는가 석방하면 후환이 두렵다고 하여 함께 살해하니 형제삼인이 서로 껴안고 죽었다는 사실이 여지승람과 우애편에 상견됨.
변홍선(卞弘選): 자 경설 정유난에 형과 같이 토적하였음. 동일순절하다. 司僕寺正 正三品
변홍양(卞弘亮): 主簿 嘉善大夫 공은 성품영호매인하고
용약이 절윤하여 정유난에 종형 홍원 홍적 과 같이 동일순절 하였음. 장흥읍지에 등재되었으며 충무공전서에도 수록되어 있음.
변현동(卞玄東): 字 乃顯 軍功으로 階 贈 嘉善大夫(從二品) 官은 兵曹參議 (正三品)
변희석(卞希錫): 홍천군수(洪川郡守)
변희주(卞希株): 홍천현감(洪川縣監)
변종노(卞宗魯): 同知中樞院事
변응노(卞應魯): 嘉善大夫 문경 거주
변희늘(卞希訥): 字는 이민(而敏) 生員에 及第 안락찰방(從六品)
변희전(卞希詮): 字는 공택(公擇) 武科及第 인조(仁祖) 3년(1625) 관은 주부 역임. 追贈 左承旨
변시정(卞時禎): 護軍 문경 서울 거주18世 변동규(卞東規) 朝鮮 字 世則 學者
변동상(卞東尙): 朝鮮 字 大老 學者
변덕황(卞德璜): 公은 丁酉亂(1597년1월17일)을 當하여 父親을 따라 倡義討賊하여 郭山戰에서 戰歿하였슴.
변덕장(卞德章): 字 汝文 登科하여 壬亂時에 는 仲父黑面
將軍과 함께 轉戰하여 武勳을 세웠으며 甲子适變에서도 功勳을 세워 各宣武勳錄과 原從勳錄에 載錄되었슴.
변덕일(卞德馹): 자 이원 무과 선조 무오1618년에 음모하
여 요동으로 건너가 요동백 김응하 막하로반하지난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김장군과 같이 력전하다가 전사하였슴. 북간지에 등재
변연수(卞延壽): 朝鮮 字 五元 杜門洞 72賢의 高麗忠臣
門下評理 正二品 卞 贇(빈)의 10代孫으로서 일찍이 卞勳男에게 修學하여 學文뿐만아니라 騎射에 能해 武科에 及第하여 訓練主簿가 되었다. 1592年(宣祖 25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義兵을 일으켜 아들 ?(입)과 함께 倡義하여 倭敵과 싸웠으며 玉浦海戰에서 忠武公 李舜臣의 麾下에 金孝誠과 함께 倭船을 擊破하고 數 많은 倭敵을 참획하여 戰功을 세웠다. 1597年(宣祖 30年)에 唐浦海戰에서 父子가 함께 殉節하였다. 宣武原從功臣二等으로 록권되고 鐵券이 下賜되었으며 旌閭가 命해져 표창되고 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에 追贈되었다. 慶南 馬山市 鎭田面 日岩里의 誠久祠에 祭享됐고 良村에 旌閭인 三綱閭가 세워졌다.(參考文獻: 宣武原從功臣錄 및 諡狀)
변공의(卞公毅): 武科에 訓練院判官 壬辰亂에 倡義從軍
忠武公 麾下에 勇戰奇功 錄勳一等으로 頒賜鐵券한 事蹟이 宣武原從功臣錄과 湖南節義錄에 官 五衛將 宣祖 丁酉 殉死
변혼(卞 渾): 朝鮮 字 明叔, 號 縣令 일찍이 武科에 及第하고, 1592年(宣祖 25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義兵將 金汚의 幕下에 들어가 戰功을 세운 뒤 部將에 임명되고, 그 후 여러 고을을 다스렸다.
변 청(卞 淸): 字는 정숙(淨叔)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 (從四品) 임진왜란때 중씨 渾과 함께 창의(倡義) 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변충원(卞忠元): (1572~1627) 字는 익초(益初) 사마시(司馬試)에 及第(1583)의금부도사 사제감지강 종부시주부 강음현감 김포현감 역임
변제원(卞悌元): 字는 순초(順初) 癸卯 생원(生員) 연벽관은 종친부 전첨
변건원(卞乾元): 字는 대재(大哉)선무당 종육품(從六品)
변세린(卞世麟): 字 祥甫, 號 勳齊, 官 義禁府都事 比安邑志에 云 母 病在床十有一年에 상약상분(嘗藥嘗糞)하는데 始終如一 하시니 先朝의 효성을 계승.
변세림(卞世琳): 字 琢汝, 號 白隱 1590年 宣祖23年 壬辰倭亂時 義兵을 募集 出征하여 倭軍을 大破하니(鳥嶺戰鬪에서) 道臣의 報告를 듣고 上이 曰 爾子爾孫은 宣亨萬世 安樂하리라 하시고 僉正 벼슬을 내리셨다. 事載勳錄達南門上에 文蹟이 있음. 昭載比安邑誌.
변득팔(卞得八): 官 通政大夫(正三品) 判決事, 字 敬祖
변수복(卞福壽):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변두남(卞斗南): 保功將軍, 訓正(從三品) 贈通政大夫
변관하(卞觀夏): 朝鮮 字 禮甫 學者
변경화(卞擎華): 肅宗 癸酉 通政大夫(正三品) 堂上官 折衝將軍
변창후(卞昌後): 朝鮮 字 慶餘 號: 月潭 孝子
변입: 朝鮮 字 正蕭 1592年(宣祖 25年) 壬辰倭亂때 아버지(延壽)를 따라 義兵으로 參戰하여 唐浦海戰에서 父子가 함께 殉節. 旌閭가 命해지고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에 追贈되었다.慶南 馬山市 鎭田面 日岩里의 誠久祠에 配享되었고 良村里에 旌閭인 三綱閭가 세워졌다.
변득인(卞得仁): 字 士安, 號 嘉靖 官 訓司帝僉正 壬亂이 일어나자 叔父(白隱) 世琳과 함께 義兵을 일으켜 싸워 功을 세우니 上이 前記 벼슬을 除授하다.
변삼근(卞三近): 朝鮮 字 誠之 號 梧亭 1611年(光海君3年) 文科에 及第하고 벼슬이 刑曹參判에 이르렀음.
변삼중(卞三重): 朝鮮 字 伯鄕 號 沿湖 官 童蒙敎官 朝奉大夫 (從四品)
변삼신(卞三信): 朝鮮 字 仲鄕, 號 沿潭, 官職 漢城左尹 兼五衛都摠 贈 嘉善大夫(從二品)
변삼근(卞三謹): 朝鮮 字 秀鄕, 號 沿浦 官 司憲府 持平 贈通訓大夫 正三品)
변성화(卞聖華): 肅宗 中樞府 同知事(從二品)
변수일(卞壽一): 通政大夫(正三品), 堂上官
변승업(卞承業): 字 善行 1613年生, 官 譯科 嘉儀 마포부자
변지정(卞至鼎): 朝鮮 號: 梅軒 學者
변삼근(卞三近): 字 用徵, 號 龜卷, 官 通政大夫 文學을
宏崇하여 經義를 講論, 孝悌의 道理를 明辯 하고 士林에서 葬事.
변기욱(卞基郁): 字:和汝 1818年生 純祖 嘉善大夫 龍襄衛護君
변경유(卞景裕): 朝鮮 字 子俊, 號 洛村 孝子
변영대(卞榮大): (1866~1902) 문관. 통사랑 역임
변혁조(卞赫祚): 字 명숙(明叔) 英祖 39年(1763) 소과(小科)에 正祖2年(1777) 文科에 壯元及第 上께서 문장을 아끼시어 입시케 하니 時議가 公을 시기하여 실격(失格)으로 몰아 及第를 삭하니 귀향하여 여러 문사와 산수지간(山水之間)을 주유하다 수차 부름에 공은 자기의 지조를 지켜 응하지 않았다. 당시 8문장가로 그 중 으뜸.
변영식(卞永植): 朝鮮 純祖時 임오(壬午)22년 운봉현감(雲峰縣監)
변세언(卞世彦): 字는 군방(君邦) 號 위리(魏里) 癸卯進士
변상벽(卞相壁): 朝鮮 字 完甫, 號 和肅 화가(畵家) 肅宗때 畵員을 거쳐 縣監에 이르렀다. 닭, 고양이를 잘 그려 변고양이라는 別名이 붙었으며 초상(肖像)을 잘 그려 國手라는 칭호를 받았다.
변직현(卞稷賢): 밀양 인으로 죽산 전씨(竹山全氏)와 같이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자 단지(斷指) 주혈(注血)하고 허벅지 살을 베어 구완하였다. 효자 증 동몽교관(童蒙敎官) 밀양 변직현 효부(密陽卞稷賢孝婦) 증영인(贈令人) 죽산전씨(竹山全氏) 문려(門閭)를 세움.
변진규(卞珍圭): 號 芳菴 性理學에 밝은 學者, 吏曹參議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변치용(卞致勇): 字 사응(士應), 號 효산(曉山) 학행 고종
40년 癸卯에 學行으로 피천 표제목(標題目) 순독조행문학(純篤燥行文學)으로 상주하여 특제(特除)를 얻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제수(除授)
변연호(卞璉瑚): 1646~1724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변성준(卞成俊): 절충장군(折衝將軍) 부호군(副護軍) (1683~1763)
변상원(卞尙瑗): 1766~1847 통정대부(통정대부) 이조참의(이조참의)
변령(卞 ?): 字 원구(源具) 훈련봉사(訓練奉事)
변시하(卞時夏): 字 우범(禹範) 號 청용(靑龍) 행절충장군(行折衝將軍) 용마위부호군(龍馬衛副護軍)겸 오위장(五衛將)
변원규(卞元圭): 朝鮮 字 大始, 號 吉雲, 官 判尹
1881年(高宗 18年) 漢譯官으로 領選使 金允植의 別遺堂上이 되어 淸나라로 건너가 金允植과 李鴻章의 會談에 通譯을 맡아 보았다. 귀국 후 參議交涉通商事務를 거쳐 1884年 器械局봉辯 이 되고 이어 知敦寧府事, 漢城判尹을 지냈다. 詩와 글씨에 능함.
변종천(卞鍾千): 임진등과(壬辰登科) 사마공(司馬公)
용양위부호군(龍陽衛副護軍) 흥선서원봉향(興善書院奉享)
변용규(卞龍圭): 有詩集 遺稿 서울, 문경 거주
변인규(卞仁圭): 著書로 愚溪文3卷, 愚溪詩集見聞錄5卷,
愚溪理解錄2卷, 金剛山遊覽紀行文1卷,聖言散賢錄, 萬物錄, 草溪卞氏文獻錄等
변유도(변유도): 자 유경 기상이 영민하고 자질이 비범하
여 학문을 일찍 성취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였다. 만학정을 지어 은거하면서 많은 선비들과 예범을 익히고 도를 강론하여 후진을 교육함.
변종운(卞鍾運): 朝鮮 字 朋山, 號 蕭欠齋 學者 純祖때
譯科에 及第했고, 詩文에 능했으며 특히 唐, 宋의 詩에 능하고 七言絶句로 된〈揚子津〉은 널리 애송됨.
변종헌(卞鍾憲): 有遺稿 서울 미국 거주
변종호(卞鍾號): 朝鮮 學者
변구연(卞龜淵): 朝鮮. 字 文瑞 官 武科司果 誠久祠에 配享
되어 있는 壬亂功臣 贈 兵曹判書 卞延壽의 9代孫으로서 純祖 癸巳年(1833년 3월 17일)慶南 馬山市 鎭田面 日岩里(良田)에서 出生하여 騎士에 能해 高宗10年(1873年)에 武科丙科에 及第하고 武科司果에 이르렸다. 高宗14年(1877年 6月 19日 享年44歲로 別世하였다). 持平을 지낸 應洙의 從兄이다.
변응수(卞應洙): 朝鮮 字 汝溪, 號 志齋, 官 司憲府持平 誠
久祠에 配享되어 있는 壬亂功臣 贈 兵曹判書 卞延壽의 9代孫이다. 1846年(憲宗 丙午) 지금의 慶南 馬山市 鎭田面 日岩里(良田)에서 出生하여 1880年(高宗 庚辰)增廣 文科 乙科(33人中 7位)로 及第하고 1894年까지 東班內職中에서도 顯職을 두루 거친 高尙한 志와 淸廉한 선비였으므로 領議政 沈舜澤이 號를 志齋로 지었다. 司諫院 正言, 兵曹佐郞, 吏曹正郞, 司憲府持平등을 지냈고. 良田의 三綱閭 表旌과 誠久祠의 創建등 先代의 偉績宣揚과 後學指導에 힘썼다. 1921年 享年 76歲로 別世하였다. 志齋集 5卷 3冊은 國立中央圖書館에 所藏(색인번호: 古3648, 文30.6.c-2)
변세장(卞世葬): 검교문대호군(檢校門大護軍)
변 준(卞 逡): 효자(孝子) 字 明彦 증 가선대부(嘉善
大夫) 天性이 孝心의 化身으로 병약(病弱)한 어버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정성껏 구해 드렸으나 기절하자 단지삼혈(斷指三血)로 주혈(注血)하여 19년을 연명하였으며 운명후 3年 시묘(侍墓)에 맹호도 감명 每夜 護衛하였으니 하늘이 내린 孝子라 칭찬이 지대하니 旌閭가 내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