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흥해배씨(興海裵氏) 흥해배씨시조는 고려조에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오른 배경분(裵景分)을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며

작성일 : 2017-04-15 16:17 수정일 : 2018-02-06 16:25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흥해(興海)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일군(迎日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퇴화군(退火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의창군(義昌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초에 흥해(興海)로 고쳐 현종(顯宗) 때 경주(慶州)에 속하였다가 1172년(명종 2) 감무(監務)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지주사(知州事)로 승격하였으며 조선시대(朝鮮時代)에도 그대로 내려왔고, 1914년 영일군(迎日郡)에 병합되어 그 일부지방은 1973년 이후 의창읍으로 내려오다가 1983년 흥해읍으로 개칭되었다.

흥해배씨(興海裵氏)는 고려조에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오른 경분(景分)을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며, 그의 6세손 전(詮: 전리판서 영지의 아들)이 충혜왕(忠惠王) 때 호군(護軍)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조적(曺頔)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功)을 세워 일등좌명공신(一等佐命功臣)에 책록되고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졌으며 흥해를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1764년(영조 40)에 편찬된「갑신합보(甲申合譜)」에는 배씨의 중시조(中始祖)인 현경(玄慶 : 고려 개국공신)의 6세손 오룡(五龍 : 시중 사우의 아들)을 파조(派祖)로 기록하고 있는데 계대 소목(昭穆)이 미상(未詳)하고 각파의 이론(異論)이 있어「곡강세첩(曲江世牒)」에 밝혀진 바에 따라 경분(景分)을 파조로 상고(詳考)한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흥해군(興海君) 전(詮)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상도(尙度)와 세째 상지(尙志)의 후대에서 가문이 크게 융성하기 시작하였다.

일찌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한 상도(尙度)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둔(屯)이 조선 태조(太祖) 때 등과(登科)하여 형조 참의(刑曹參議)와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했고 슬하에 아들 처눌(處訥 : 맹산 현감을 역임)과 지눌(止訥)을 두어 대(代)를 이어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형 상도와 함께 목은(牧隱)에게서 글을 배웠던 상지(尙志)는 고려 말에 벼슬이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어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두문동(杜門洞) 두류산(頭流山)에 둔거하다가 안동 금계촌(安東金溪村)으로 내려가 은거하면서 잣나무(栢)와 대나무(竹)을 심고 호(號)를 백죽당(栢竹堂)이라 하였다. 그후 조선조에서 수차례에 걸쳐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으나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켰다.

그의 아들 권(權)은 사헌부(司憲府)의 감찰(監察)과 지평(持平)을 지내고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봉화(奉化)․횡성(橫城) 등지의 현감을 역임한 후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올라, 세종 때 진주 목사(晋州牧使)로 치사(致仕)한 아우 환(桓)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그외 여흥 부사(驪興府使)를 지내고 원종공신에 올랐던 효숭(孝崇: 관찰사 환의 아들)과 옥과 현감(玉果縣監)을 지낸 효건(孝騫), 세조 때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역임한 효사(孝思) 3형제가 뛰어났으며,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司果) 천석(天錫)의 맏아들 삼익(三益)은 선조(宣祖) 때 풍기 현감(豊基縣監)과 양양 부사(襄陽府使)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가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에 전력하여, 이퇴계(李退溪)의 고제(高弟)로 학문이 숙성했던 아우 삼근(三近)과 함께 대(代)를 이어 가문(家門)을 빛냈다.

관찰사 삼익의 아들로 임진왜란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용길(龍吉)은 김성일(金誠一)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여 천문(天文)․지리(地理)․율력(律曆)․병전(兵典)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역리(易理)에 밝았다.

효성(孝誠)으로 이름난 경(經)은 임진왜란 때 연로(年老)한 어머니를 업고 산중(山中)으로 피난가다가 돌연 적병을 만나자 어머니를 껴안고 구명(求命)을 애걸하니 그의 효성(孝誠)에 감동한 적의 무리가 안전(安全)한 길을 알려주어 모자(母子)가 생명을 보전하였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인길(寅吉)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용궁(龍宮)으로 가던 도중 적의 대 부대(部隊)를 맞아 격전 끝에 공수백인(空手白刃)으로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는데, 부인 월성 이씨(月城李氏)도 남편을 따라 자결하여 순조(純祖) 때 쌍절각(雙節閣)이 세워졌으며, 헌종(憲宗) 때 문과에 급제한 상현(象鉉)은 전적(典籍)과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여 가문(家門)의 전통을 지켰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흥해배씨(興海裵氏)는 남한(南韓)에 34,2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흥해배씨조상인물

배광우(裵光祐) 고려조(高麗朝)에 위위승 동정(衛尉丞同正)을 지냈다.

배약경(裵若卿) 고려 때 위위승 동정(衛尉丞同正)을 역임하였다.

배유손(裵裕孫) 고려(高麗) 때 보승 별장(保勝別將)을 지냈다.

배영지(裵榮至) 고려조(高麗朝)에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역임하였다.

배전(裵 詮) ? ~ 1361 (공민왕 10)

궁비(宮婢)의 소생. 충혜왕(忠惠王)의 총애로 호군(護軍)이 되어 기무(機務)를 장악했으며 뒤에 군부 판서(軍簿判書)에 올랐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적(曺 頔)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 그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졌다.

뒤에 원나라에 들어가 강윤충(康允忠)과 덕녕공주(德寧公主 : 충혜왕비)의 총애를 받았으며, 행성 이문(行省理問)이 되었다. 1351년(공민왕 즉위) 이제현(李齊賢)이 권성(權省)이 되자 행성옥(行省獄)에 갇혔으나 공민왕(恭愍王)이 그를 석방하였다.

배천희(裵千熙) 호(號)는 설산(雪山), 시호(諡號)는 진각국사(眞覺國師). 13세 때 화엄반룡사(華嚴盤龍寺)에 들어가 삭발하고 일비대사(一非大師) 밑에서 수도(修道), 19세 때 상품신(上品身)에 올라 여러 사찰(寺刹)을 역주(歷住)하였고, 1367년(공민왕 16) 국사(國師)로 대화엄종사(大華嚴宗師) 선교도총섭(宣敎都摠攝)에 봉(封)해졌으며, 1370년(공민왕 19) 인장(印章)과 법의(法衣)를 하사(下賜)받았고, 그의 출신지(出身地) 흥해현(興海縣)이 군(郡)으로 승격(昇格)되었다.

국사(國師)의 유덕(遺德)을 추모(追慕)하는 탑비(塔碑)를 수원 광교산(水原光敎山) 창성사(彰聖寺)에 세울 때 우왕(禑王)의 명(命)으로 이색(李穡)이 찬(撰)하고, 통조대사(通照大師) 충술(沖述)이 입석(立石)하고, 비구혜잠(比丘惠岑)이 각명(刻銘)하였다. 보물(寶物) 12호로 지정(指定)되었다.

배상도(裵尙度) 고려(高麗) 때 이색(李穡)의 문하(門下)에서 수업(修業)하였고, 벼슬이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다. 정국(政局)이 혼란(混亂)해지자 치사(致仕)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조선(朝鮮) 때 누차(累次) 징빙(徵聘)이 있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청백(淸白)하기로 유명(有名)하였다.

배상지(裵尙志) 호(號)는 백죽당(栢竹堂). 고려 말에 벼슬하여 관직(官職)이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이르렀는데 정국(政局)이 혼란(混亂)해지고 불원(不遠)에 변혁(變革)이 있을 것을 깨닫고 치사(致仕), 귀향(歸鄕)하여 영가군(永嘉郡) 금계촌(金溪村)에 은거(隱居)하면서 백 죽(栢竹)을 심으니 호(號)를 백죽당(栢竹堂)이라 하였다. 그후 조선(朝鮮)에서 누차(累次) 징명(徵命)이 있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숙종(肅宗) 때 사림(士林)의 소청(疏請)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안동(安東)의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상공(裵尙恭)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공조 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는데 이때 이성계(李成桂)가 공양왕(恭讓王)을 폐(廢)하고 왕위(王位)에 오르려 하므로 이를 개탄(慨嘆)하고 물러나 안동(安東)에 내려와서 전원생활을 하였다.

배둔(裵 屯) 1393년(태조 2)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내외직(內外職)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배권(裵 權) 1419년(세종 1) 음보(蔭補)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기용되어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냈으며, 1425년(세종 7) 전농판관(典農判官)을 역임하였고, 봉화(奉化)․횡성(橫城) 등지의 현감(縣監)을 거쳐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이르렀다.

배환(裵 桓) 1378 (우왕 4) ~ ?

판사(判事) 상지(尙志)의 아들. 조용(趙庸)의 문인. 1401년(태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호군(護軍) 벼슬을 거쳐 1423년(세종 5) 의주(義州)․삭주도 경차관(朔州道敬差官)으로 나갔다.

1432년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선위사(宣慰使)를 겸직, 광주(廣州)에서 일본 사신을 접견했고 2년 후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1435년 병조 참의(兵曹參議)로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이듬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1438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공조 참의(工曹參議), 1442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역임, 1448년(세종 30) 판진주목사(判晋州牧使)로 치사(致仕)했다.

배남(裵 楠) 1411년(태종 1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배강(裵 杠) 1426년(세종 8)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문장(文章)이 고상(高尙)했으며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났다.

배소(裵 素) 1408년(태종 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배효숭(裵孝崇) 호(號)는 조곡(조谷). 1438년(세종 20)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447년(세종 29)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좌․우사간(左右司諫)을 지내고, 부승지(副承旨)․여흥 부사(驪興府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서훈(叙勳)되었다.

배정(裵 禎) 자(字)는 원길(元吉). 어머니 밑에서 수학(修學)하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창원 교수(昌原敎授)가 되었다. 천성(天性)이 온아인후(溫雅仁厚)하고 사친(事親)에 효성을 다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배삼익(裵三益) 1534 (중종 29) ~ 1588 (선조 21)

자는 여우(汝友), 호는 임연재(臨淵齋), 천석(天錫)의 아들. 이황(李滉)의 문인. 1558년(명종 13) 생원(生員)이 되고, 156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학유(學諭)를 거쳐 1573년(선조 6)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다.

풍기 현감(風氣縣監)․양양 부사(羊羊府使) 등을 거쳐 1584년 교리(校理), 이듬해 사간(司諫)을 역임, 1587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8년(선조 21)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어 크게 흉년이 들자 구황(救荒)에 힘쓰다 병을 얻고도 관내 순시를 강행중에 객사했다. 광국1등훈(光國一等勳)에 서훈(叙勳)되고, 안동(安東)의 도생서원(道生書院)에 제향되었다.

배삼근(裵三近) 자(字)는 여용(汝勇), 호(號)는 유산(儒山). 조선 때 퇴계(退溪) 이황(이황) 문하(門下)에서 수업(修業)하여 학문(學問)이 숙성(夙成)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장자(長子)가 전사(戰死)하고 자부(子婦)가 순절(殉節)하니 임천(林泉)에 잠적(潛跡)하여 시서(詩書)로 자오(自娛)하였다. 만년(晩年)에 정릉 참봉(靖陵參奉)에 천거(薦擧)되었다.

배용길(裵用吉) 1556 (명종 11) ~ 1609 (광해군 1)

자는 명서(明瑞), 호는 금역당(琴易堂)․장륙당(藏六堂), 관찰사 삼익(三益)의 아들. 1585년(선조 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대장(大將) 김해(金垓)의 휘하에서 부장(副將)으로 활약했다.

1594년 세마(洗馬), 이어 시직(侍直)․부수(副率)를 지내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화의(和議)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으며, 160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에 이르렀다.

김성일(金誠一) 문하에서 수학(修學), 류성룡(柳成龍)․조목(趙穆)․남치리(南致利) 등에게도 사사(師事), 천문(天文)․지리(地理)․율력(律曆)․병전(兵典)․의약(醫藥)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역리(易理)에 밝았다.

배경(裵 經) 자(字)는 경상(景常), 호(號)는 효우당(孝友堂). 어려서부터 부모(父母)에게 효성(孝誠)이 지극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연로(年老)한 어머니를 업고 산중(山中)으로 피난(避亂)할 때 돌연(突然) 적병(賊兵)을 만나 동행자(同行者)가 거의 피살되었는데, 그는 어머니를 껴안고 구명(救命)을 애걸(哀乞)하니 적도(賊徒)가 효성(孝誠)에 감동(感動)되어 안전(安全)한 길을 알려주어 모자(母子)가다 생명(生命)을 보전(保全)하였다.

선조조(宣祖朝)에서 천문(薦聞)하고 정려(旌閭)를 명(命)하였으며, 영조(英祖) 때 박문수(朴文秀)의 상소(上疏)로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인길(裵寅吉) 자(字)는 경보(敬甫). 어려서부터 용력(勇力)이 과인(過人)하고 기사(騎射)에 능(能)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이끌고 신지제(申之俤)의 진(陳)에 이르러 용궁(龍宮)으로 가던 중 돌연(突然) 적(賊)의 대(大) 부대(部隊)를 맞아 격전(激戰) 끝에 화살이 떨어지자 공수백인(空手白刃)으로 분전(奮戰)하다가 순사(殉死)하였다.

부인(夫人) 월성 이씨(月城李氏)가 남편(男便)의 순절(殉節)을 듣고 손가락을 깨물어「군신(君臣)의 의(義)는 중차대(重且大)하고 부부(夫婦)의 은혜(恩惠)는 오히려 경미(輕微)하다」라고 혈서(血書)를 쓰고 자결(自決)하여 남편(男便)의 뒤를 따랐다. 1817년(순조 17) 사림(士林)의 소청(疏請)으로 정포(旌褒)의 은전(恩典)이 내리고 쌍절각(雙節閣)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