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달성배씨(達城裵氏),달성배씨시조,배운룡(裵雲龍),달성배씨유래,달성배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5 16:07 수정일 : 2018-02-04 11:28

달성배씨시조 및 달성배씨유래(본관)

달성(達城)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최남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 불렀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대구현(大丘縣)으로 개칭하여 수창군(壽昌郡)에 속하였다. 조선 영조조(英祖朝)에 구(丘)를 구(邱)로 고쳐 대구(大邱)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가지를 이룬 전역이 대구부(大邱府)로 독립되고,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폐합하여 달성군(達城郡)으로 개칭하였다.


달성 배씨(達城裵氏)는 고려 창업(高麗創業)의 주역(主役)으로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된 배현경(裵玄慶)의 6세손 배운룡(雲龍)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있다.

「배씨대동보(裵氏大同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조(高麗朝)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사혁(斯革)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고려 중엽에 벼슬을 지내고 공(功)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연유로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달성(達城)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한다.

그후 달성 배씨는 민부 전서(民部典書) 영(瑩 : 운룡의 7세손)의 아들 정지(廷芝)와 정란(廷蘭) 형제대에서 가세(家勢)가 크게 융성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10세의 어린 나이로 금위(禁衛)에 들어갔던 정지(廷芝)는 강화(江華)에 천도했던 원종(元宗)이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할 때 왕(王)을 호종(扈從)하여 대정(隊正)이 되었고, 충렬왕(忠烈王) 때 별장(別將)으로 만호(萬戶) 인 후(印 侯)와 함께 연기(燕岐)에 침입한 거란군을 격파하여 용맹을 떨쳤으며, 충청(忠淸)과 전라도 찰방(全羅道察訪)으로 나가서는 지방 관기(官氣)를 바로잡는 데 앞장섰고, 충숙왕(忠肅王) 때 일어난 제주도(濟州道) 반란사건을 존무사(存撫使)로서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도원수를 지낸 아우 정란(廷蘭)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공민왕(恭愍王) 때 과천(果川)에 침입한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다가 아들 광유(光裕)와 함께 순절한 성경(成慶)은 밀직부사 정지의 맏아들로, 그의 아우 천경(天慶)․함경(咸慶)과 더불어 가문의 중추적(中樞的)인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다.

신유당옥(辛酉黨獄)으로 아버지 정지가 무고를 받아 유배되자 대신하여 수형(受刑)할 것을 간청했던 천경(天慶 : 성경의 아우)은 공민왕을 호종하여 단성강절공신(端誠康節功臣)으로 금자숭록대부(金紫崇祿大夫)에 올라 달성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함경(咸慶)은 맏형인 성경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정충효절공신(貞忠效節功臣)으로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성경의 손자 균(均 : 광유의 아들)은 우왕(禑王) 때 함양(咸陽)의 사근역(沙斤驛)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을 이었고, 고려 말에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와 뜻을 같이 했던 을서(乙瑞 : 균의 아우)는 조선의 개국(開國)한 후 수차에 걸친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둔거하여 고려 말 절의충신(節義忠臣)으로 유명했으며, 야은(冶隱) 길재(吉再)에게 글을 배웠던 인경(仁敬 : 성경의 증손, 문우의 아들)은 태종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지내고 세종 때 고주 수령(固州守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뒤에 고부군(古阜君)에 봉해졌다.


그외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을 예견했던 두유(斗有)와 단종(端宗)이 손위하자 절의를 지켰던 효명(孝明)이 뛰어났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한 사원(師元)은 정언(正言)과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이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성종(成宗) 때 정주 목사(定洲牧使)를 지낸 상경(常絅)은 연산군(燕山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한편「여지승람(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했던 익신(益臣)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양산 군수(梁山郡守)를 지냈으며, 명종(明宗) 때 유일(遺逸)로 기자전 참종(箕子殿參奉)에 천거되었던 서(恕)는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귀양간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의 억울함을 상소(上疏)하다가 파직되자 향리로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승무(承武)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 김덕령(金德齡)․김천일(金千鎰)․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진주성(晋州城) 싸움에서 순절하여 승문원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성유(聖有)는 영조(英祖) 때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상규(祥奎), 고종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낸 은성(殷星), 좌승지(左承旨) 인기(仁基) 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달성배씨(達城裵氏)는 남한(南韓)에 39,3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달성배씨조상인물

배숙(裵 淑)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배구(裵 球) 고려 때 문하시승(門下侍丞)을 역임하였다.

배문진(裵問晋) 호(號)는 고헌(高軒).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배영(裵 瑩) 고려 때 민부 전서(民部典書)를 지냈다.

배정지(裵廷芝) 1259 (고종 46) ~ 1322 (충숙왕 9)

초명(初名)은 공윤(公允), 자(字)는 서한(瑞漢), 호는 금헌(琴軒). 10세에 금위(禁衛)에 들어가 도지(都知)가 되고, 1270년(원종 11) 강화(江華)에서 개경(開京)에 환도(還都)할 때 11세로서 왕을 호종, 대정(隊正)이 되었다.

1291년(충렬왕 17) 별장(別將)으로 만호(萬戶) 인 후(印 侯)를 따라 연기(燕岐)에서 합단(哈丹)을 격파, 용맹을 떨쳐 중랑장(中郞將)에 특진되었다. 후에 충청․전라 양도 찰방(忠淸全羅兩都察訪)으로서 지방의 관기를 바로잡고, 충선왕(忠宣王) 때 호군(護軍)이 되어 전농사(典農司) 비창(備倉)의 일을 관장했다.

1318년(충숙왕 5) 탐라(耽羅)에서 김성(金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존무사(存撫使)가 되어 이를 토벌, 돌아와 밀직무사(密直副使)가 되었다. 1321년(충숙왕 8) 에 옥사(獄事)가 일어나 죽림(竹林)의 방호(防護)에 유배되고, 후에 풀려나와 금기(琴碁)로 여생을 보냈다. 나주(羅州)의 초동사(草洞祠)에 제향되었다.

배성경(裵成慶) 1312년(충선왕 4) 문과(文科)에 급제, 판통례문하사(判通禮門下事)를 지내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자 과천(果川) 전투에 참전하여 아들 광우(光祐)와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배천경(裵天慶) 1321(충숙왕 8) 신유당옥(辛酉黨獄) 때 아버지 정지(廷芝)가 무고(誣告)로 유배(流配)되자 대신 수형(受刑)할 것을 간청(懇請)하는 등 효행(孝行)이 출중하였다. 1354년(공민왕 3) 왕을 호종(扈從)한 공(功)으로 단성강절공신(端誠康節功臣)이 되고 금자숭록대부(金紫崇祿大夫)에 올라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359년(공민왕 8) 경주 유수(慶州留守)가 되었다.

배함경(裵咸慶) 자(字)는 선지(善之).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할 때 형 성경(成慶)과 함께 참전, 많은 공(功)을 세워 정충효절공신(貞忠效節功臣)에 녹훈되고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올랐다.

배문우(裵文祐) 자(字)는 용도(龍覩), 호(號)는 회은(晦隱),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올랐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하자 이에 불복(不服)하고 아우 을서(乙瑞)와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개를 지켰다. 능주(綾州)의 대곡사(大谷祠), 장성(長城)의 경현사(景賢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균(裵 均) 자(字)는 호익(虎翼), 호(號)는 율헌(栗軒). 1380년(우왕 6) 원사(元師) 배극렴(裵克廉)과 정 지(鄭 地) 휘하에 있다가 함양 사근역 전장(咸陽沙斤驛戰場)에서 왜구를 맞아 많은 공(功)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을서(裵乙瑞) 자(字)는 봉소(鳳韶), 시호(諡號)는 청정(淸靖).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올랐다. 정몽주(鄭夢周)와 뜻을 같이한 여말(麗末)의 절의충신(節義忠臣)으로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하자 둔세(遯世), 태종(太宗)이 세자 사부(世子師傅), 도는 대광 태사(大匡太師)로 임명(任命)하였으나 불취(不就)하였다. 나주(羅州)의 초동원(草洞院), 장성(長城)의 경현사(景賢祠)에 제향되었다.

배경덕(裵敬德) 자(字)는 군범(君範), 호(號)는 극재(克齋), 야은(冶隱)길재(吉再)와 교유(交遊)한 학구지사(學究之士)로 누차 관직에 오를 것을 권유받았으나 불취(不就)하고 학구(學究)에만 전심(專心)하였다. 세종(世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배을보(裵乙甫) 자(字)는 봉의(鳳儀).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이르렀다. 문종(文宗)이 죽은 뒤 치사(致仕)하고 은진(恩津)에 은거(隱居)하여 금서(琴書)로 자오(自娛)하니, 세인(世人)이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嘆服)하였다. 나주(羅州)의 무열사(武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현우(裵玄祐) 자는 오겸(五兼). 효성(孝誠)과 선행(善行)으로 활인군자(活人君子)의 칭송을 받았다. 세조(世祖) 때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배인경(裵仁敬) 자(字)는 이직((而直), 호(號)는 만은(晩隱). 조선 때 길재(吉再)의 문하(門下)에서 수업하고, 태종(太宗)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오르고, 1420년(세종 2) 고주 수령(固州守令)으로 있으면서 선정(善政)으로 소임을 다하고 사퇴하여 금서(琴書)로 소일하였다.

이상원(李相原)의 천거(薦擧)로 사부(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1440년(세종 22) 왕(王)이 고적(古籍)을 취고(取考)할 때 선음(先陰)을 상기(想起)하여 고부군(古阜君)에 봉(封)해졌다. 1455년(세조 1) 단종 손위(端宗遜位)를 통탄(痛嘆)하고 스스로 호(號)를 만은(晩隱)이라 하였다. 고성(固城)의 수림서원(繡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배두유(裵斗有) 자(字)는 덕선(德善), 호(號)는 우재(寓齋). 조선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환 찰방(成歡察訪)을 지냈다. 단종 재위(端宗在位)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의 위세(威勢)가 날로 성(盛) 함을 보고 불원간(不遠間) 조정(朝廷)에 불안(不安)이 있을 것을 예지(豫知)하고 가족(家族)과 더불어 능주(陵州) 대곡(大谷)에 은거(隱居)하였다.

단종 손위(端宗遜位) 후 두문사객(杜門謝客)하고 정사(精舍)에 우재(寓齋)라는 편호(偏號)를 게시(揭示)하고 일생을 보냈다.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배효명(裵孝明) 자(字)는 경부(敬夫), 호(號)는 소요자(逍遙子). 1451년(문종 1) 수의부위(修義副尉)가 되었고, 1453년(단종 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역임하였다.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사퇴하고 은거(隱居)하였는데 세조(世祖) 때 누차(累次) 징명(徵命)이 있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사원(裵師原) 자(字)는 도심(道心), 호(號)는 희암(希菴). 1466년(세조 1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亂) 때 배맹달(裵孟達)과 함께 출전(出戰)하여 역도(逆徒) 토평(討平)에 큰 공(功)을 세웠다.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상경(裵尙絅) 자(字)는 회보(晦寶), 호(號)는 휴재(休齋). 1474년(성종 5)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정주 목사(定州牧使)에 이르렀는데, 연산군(燕山君) 때에 치사(致仕)하였다.

배익신(裵益臣) 자(字)는 사겸(士謙). 1492년(성종 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여지승람(輿地勝覽)」수찬(修撰)에 참여하고,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양산 군수(梁山郡守)를 지냈다.

배서(裵 恕) 자(字)는 인원(仁源), 호(號)는 안심당(安心堂). 조선 때 문장예학(文章禮學)이 숙성(夙成)하여 1546년(명종 1)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어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이 되었으나 송규암(宋圭庵)의 무죄(無罪)를 상소(上疏) 구신(救伸)하다가 파직(罷職)되었다. 귀향(歸鄕)하여 후진 양성(後進養成)에 힘썼다.

배경인(裵褧仁) 자(字)는 성보(聖甫), 호(號)는 만암(晩菴). 조선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이르렀는데 당쟁(黨爭)으로 국정(國政)이 혼란(混亂)해지므로 고향(故鄕)인 대구(大邱)로 돌아와서 칠곡(漆谷)으로 이거(移居)하여 일생을 마쳤다.

배승무(裵承武) 자(字)는 자환(子桓). 1579년(선조 1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86년(선조 19)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 김덕령(金德齡)․김천일(金千鎰)․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왜구(倭寇)를 맞아 싸우다가 진양(晋陽)에서 순절(殉節)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경연참찬(經筵參찬)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세강(裵世剛) 1700(숙종 2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통영중군(統營中軍)을 거쳐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지냈다.

배성유(裵聖有) 자(字)는 시중(時中). 1756년(영조 32) 식년친임전시(式年親臨殿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배상규(裵祥奎) 자(字)는 문오(文五). 1832년(순조 3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배병수(裵炳壽) 자(字)는 치회(致繪), 호(號)는 남재(南齋). 1884년(고종 21) 선공감역(繕工監役)을 거쳐 시종관(侍從官)을 지냈다. 효성(孝誠) 이 지극하였다.

배은성(裵殷星) 자(字)는 경열(景悅), 호(號)는 운포(雲圃). 1874년(고종 11) 경과정시전시(慶科庭試殿試)에 급제하고, 1876년(고종 13)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승정원정자(承政院正字)․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고,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이르렀다.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배철순(裵哲淳) 1894년(고종 31) 전시 을과(殿試乙科)로 급제하여 맹산군수(孟山郡守)를 지냈다.

배인기(裵仁基) 자(字)는 처인(處仁), 호(號)는 야은(野隱). 1890년(고종 27) 판서(判書) 송세헌(宋世憲)의 천거(薦擧)로 출사(出仕),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호조 정랑(戶曹正郞)을 거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분(憤)을 참지 못하고 복수토적(復讐討賊)할 것을 항소(抗疏)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