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진원박씨(珍原朴氏)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대장군의 벼슬에 이른 박진문(진원박씨시조)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작성일 : 2017-04-11 21:52 수정일 : 2018-02-07 14:03

진원박씨시조와 본관

진원박씨(珍原 朴氏)는 신라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대장군(大將軍)의 벼슬에 이른 박진문(朴進文)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보첩인 정유보(丁酉譜; 효종8년; 1657년 進士公 東溪; 春長 編纂)에 따르면 “그 이상은 문적이 없어 더 이상 고찰(考察)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新羅宗姓 仕 高麗 位至 大將軍 己上文籍 不存 不可攷).

또한 그 譜序에 의하면 “珍原에서 原譜를 가져다가 자손의 支派를 찾고 조사하여 이렇게 刊行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미 그 훨씬 전에 족보(族譜)가 있었으며 동시에 시조 진문공(始祖 進文公)에 관한 것도 오랜 문적(文籍)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진원 박씨의 상계 선조들은 거의가 장성(長城)주변의 명족(名族)들과 혼인(婚姻) 관계를 이루고 살았으며. 세종때의 ‘신찬 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誌)’의 기록에 따르면 “그 때 장성군(長城郡)에 많은 씨족(氏族)이 세거(世居)하고 있었지만 진원 박씨(珍原 朴氏)와 영광 오씨(靈光 吳氏)가 주성(主姓)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타 씨족(氏族)보다 이른 시기에 장성에 정착(定着)하였기에 진원(珍原) 고현(古縣)을 중심으로 구진(丘珍) 또는 진원(珍原)으로서 관향(貫鄕)을 정하였다고 여겨지며. 그 시기는 대략 고려(高麗) 중기 명종(明宗) 무렵 이후로 추정된다.

進文公의 현손 첨(瞻)은 고려조에 순충론도 동덕 좌명공신(純忠論道 同德 佐命功臣) 벽상 삼한 삼중대광(壁上 三韓 三重大匡)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우문관 대제학(右文館 大提學), 예문춘추관사 영경연사(藝文春秋館事 領經筵事)등을 역임한 후, 익양군백(益陽郡伯; 今 永川)에 봉해졌고, 충의(忠義)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또한 구례(求禮) 감무(監務)를 지내신 7세 온(溫)은 용원재(龍原齋)에 봉향(奉享)하고 있다.

진원 박씨 중흥(中興)을 일으킨 8세 희중(熙中)은 조선 태종(太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동궁(東宮; 世宗) 서연관(書筵官)을 거쳐 예문관(藝文館) 지제교(知製敎) 겸(兼)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註官)을 역임하고 일본국(日本國) 회례사(回禮使)와 명(明)나라에 조선(朝鮮) 건국의 승인(承認)을 받으려고 사신(使臣)으로 다녀왔으며, 1423년에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제수되었고, 김제 벽골제(碧骨提)를 수축(修築)한 공으로 백성들이 비(碑)를 세워 은혜(恩惠)의 뜻을 표시하였다.

또한 公은 글씨에 能하여 海東筆苑에 登載되었으며 남원 부사를 끝으로 진원 땅에 귀향(歸鄕)하여 후진(後進) 양성에 전념하고, 청백전가(淸白傳家)의 가훈(家訓)을 남겨 지금까지 종훈(宗訓)으로 이어오고 있다. 공은 사후에 학림사(鶴林祠)에 배향(配享)되었다.

13세 우(祐)는 선공감판 겸 첨정(繕工監判 兼 僉正)으로.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捕虜)가 되어서도 충절(忠節)을 굽히지 않았으며 조총(鳥銃)의 정교한 기술을 배워 새로운 무기를 개발한 공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충열공(忠烈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14세 광전(光前)은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함열(咸悅)과 회덕(懷德)의 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임정(壬丁)양란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훈을 세우고 돌아가신 후 이조 판서(吏曹 判書)에 추증(追贈)되고 문강(文康)의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용산서원에 배향되었다.

또한 아들 근효(根孝), 근제(根悌)와 함께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워 일문삼충(一門 三忠)으로 가문(家門)을 빛냈다.

14세 승종(承宗)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지금의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일등 공신(一等 功臣)에 책록(冊錄)되고, 철권단서(鐵券丹書)를 하사(下賜)받으셨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양소(良昭)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이렇듯 국가(國家)가 난국(難局)에 처했을 때마다 珍原 朴氏는 구국(救國)의 길에 앞장서 혁혁(赫赫)한 공훈(功勳)을 세워 충의(忠義)의 전통(傳統)을 이어오고 있다.

파별 분포 및 세거지

☉ 5개파의 세거지(世居地)를 살펴보면 휘(諱) 박희중(朴熙中)의 세 아들이 9세손으로서 휘생(暉生), 곤생(坤生), 진생(進生)이다.

장자 휘생(暉生)은 성균(成均) 생원으로 시거(始居) 보성(寶城)하여 종파(宗派)의 파조가 되었다.

차자(次子)인 곤생(坤生)은 성균 진사(成均 進士)로 장성(長城)의 중파(中派) 파조가 되었다.

삼자(三子)인 진생(進生)은 생원으로 승의랑(承議郞)을 지냈으며 장성(長城)의 계파(季派) 파조가 되었다.

보성(寶城)종파에서는 휘생(暉生)의 아들인 10세손 휘(諱) 문기(朴文基 ; 進士, 司醞署 直長)의 세 아들이 11세손으로 흥원(興原) 계원(繼原) 윤원(胤原)인데, 장자(長子) 흥원(興原 ; 進士)은 장종파(長宗派), 차자(次子) 계원(繼原 ; 生員 昭格署 參奉)은 장중파(長中派), 삼자(三子) 윤원(胤原 ; 生員)이 장계파(長季派)의 파조가 되어 오늘날 5개 파로 모든 종문사(宗門事)가 이루어지고 있다.

☉ 파별(派別) 거주 분포(分布) 상황(狀況)을 살펴보면,

장종파(長宗派)는 보성(寶城)과 장흥(長興) 지방에,

장중파(長中派)는 보성(寶城)과 고흥(高興) 지방에,

장계파(長季派)는 보성(寶城), 고흥(高興), 여수(麗水), 화순(和順), 광양(光陽), 장성(長城), 전북(全北) 임 실(任實), 경남(慶南) 사천(泗川) 지방에,

중파(中派)는 장성(長城), 담양(潭陽), 나주(羅州), 신안 (新安)과 전북(全北)의 임실(任實), 충남(忠南)의 연 기(燕岐), 보은(報恩) 등지에,

계파(季派)는 장성(長城), 담양(潭陽), 나주(羅州)와 전북 (全北)의 임실(任實)지방에 각각 세거(世居)하면서 집성촌(集成村)을 이루고 있었으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면서 도시집중화 현상으로 정든 고향 을 떠나 현재는 광주, 서울 또는 지방도시로 점차 거주를 달리하고 있다.

2015년 통계청의 인구조사 통계 자료에 의하면 진원박씨는 전국에  33,630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 진원박씨조상인물

고려시대

박진문(朴進文); 진원 박씨의 시조, 신라 시조왕 박혁 거세의 후손으로 명종조에 대장군(大將軍).

박효대(朴孝大); 대상(大相).

박빈(朴 贇); 검교장군(檢校將軍).

박성량(朴成亮); 판군기감(判軍器監).

박첨(朴 瞻); 시호(諡號)는 충의(忠義).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으면서 공을 세워, 순충론도 동덕 좌명공신(純忠論道 同德 佐命功臣) 벽상 삼한 삼중대 광(壁上 三韓 三重大匡)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 르고 판도평의사사(判都評議司事)에 병부상서(兵部尙 書) 겸 우문관 대제학(右文館 大提學), 예문관(禮文 館), 춘추관사(春秋館事), 영경연사(領經筵事) 등을 역 임하고 익양군백(益陽郡伯; 今 永川)에 봉해졌다.

박홍서(朴洪瑞); 가선대부(嘉善大夫), 전라도 병마 수 군 절도사(全羅道 兵馬水軍節度使).

박흥(朴 興); 중랑장(中朗將).

조선시대

박온(朴 溫); 구례(求禮) 감무(監務).

박희중(朴熙中); (1368~1446) 초명. 희종(熙宗), 자. 자인(子仁), 호. 위남(葦南), 감무 온(溫)의 아들, 1393년(太祖 2)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401년(太宗 1) 문과(文科)에 급제, 환로(宦路)에 오른 이후, 이조병조 정랑(吏曹 兵曹 正郞), 1416년(太宗 16)에 동궁(東宮; 世宗) 서연관(書筵官)을 지냈고 예문관(藝文館) 지제교(知製敎) 겸(兼)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註官)을 역임하였으며 해동필원(海東筆苑)에 올라 명필(名筆)로 칭송(稱頌)을 받았고, 하윤린(河允潾; 河崙 先親)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쓰기도 하였다.

전농시윤(典農寺尹)으로 있을 때 일본국(日本國) 회례사(回禮使)로 국위(國威)를 선양(宣揚)하고, 명(明)나라에 조선(朝鮮)건국의 승인(承認)을 받으려고 사신(使臣)으로 다녀왔으며 1423년에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제수(除授)되었고, 특히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 修築때 경차관(敬差官)으로서 공사를 완성, 그 업적(業績)에 감탄(感歎)하여 백성들이 그 공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는데 지금도 남아있다. 1426년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임명되고 1429년 결연(決然)히 진원(珍原) 땅에 귀향하여 위남어수(葦南漁叟)라 자호(自號)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했으며 청백전가(淸白傳家)의 가훈(家訓)을 남겨 지금까지 종훈(宗訓)으로 이어오고 있으며 공(公)은 사후(死後)에 학림사(鶴林祠; 장성군 진원면)에 배향(配享)되었다.

박휘생(朴暉生); 성균(成均) 생원(生員)으로 시거(始居) 보성(寶城)하여 종파(宗派) 파조.

박곤생(朴坤生); 성균(成均) 진사(進士)로 장성(長城)에 살면서 중파(中派) 파조.

박진생(朴進生); 성균(成均) 생원(生員). 승의랑(承議郞), 장성(長城)에 살면서 계파(季派) 파조.

박문기(朴文基); 世宗때 진사(進士), 효행(孝行)이 지극 하였으며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

박숭기(朴崇基); 世祖때 성균 진사(成均 進士).

박흥원(朴興原); (1452~ ?) 世祖때 성균진사(成均進士).

박계원(朴繼原); (1455~ ?) 1492년(成宗 23)에 생원, 진사에 합격, 음보(蔭補)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

박윤원(朴胤原); (1458~ ?) 1496년(燕山君 2)에 생원.  박근지(朴謹之); (1475~ ?) 자. 덕중(德重), 호. 둔재(遯齋), 사마(司馬) 충순위 대호군(忠順衛 大護軍).
박지(朴  摯); 자. 성여(誠汝), 成宗때 진사(進士).
박창주(朴昌柱); 자. 국간(國幹), 1516년에 무과합격, 진해(鎭海) 현감(縣監).
박익견(朴益堅); (1484~ ?) 자. 사위(士韋), 호. 회헌(晦軒), 成宗때 진사(進士).
박형주(朴亨柱); (1489~1553) 자. 통경(通卿), 진사시에 합격하고 선교랑(宣敎郞).
박균(朴 囷); (1490~ ?) 자. 덕취(德聚), 성균 진사(成均 進士).
박위(朴  徫); 燕山君때 진사(進士).
박영주(朴榮柱); (1496~ ?) 청백을 이어 받아 행실(行實)이 독실(篤實)하고 성리학에 능통하여 사림의 추앙(推仰)을 받음.
박서(朴 恕); (1501~ ?) 자. 서지(恕之),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여 통례원 인의(通禮院 引義).
박간(朴 衎); (? ~1548) 燕山君때 진사(進士)로 선교랑(宣敎郞).
박익강(朴益强); 자. 자위(子韋), 호. 송계당(松溪堂), 中宗(1519년)때 진사(進士)로 사마양시(司馬兩試)합격. 

박현(朴  絢); 中宗때 진사(進士).
박이성(朴而誠); (? ~1579) 덕산(德山) 군수.
박천민(朴天民); (1503~1597) 통정대부, 임란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활약.
박이건(朴而健); 자. 건지(健之), 中宗때 생원(生員).
박세린(朴世麟); 자. 군서(君瑞), 明宗때 생원(生員).
박이경(朴而儆); 자. 경지(敬之), 호는 오헌(梧軒), 성균진사(成均 進士). 문강공 안방준(文康公 安邦俊)의 외조(外祖).
박이준(朴而俊); (1507~ ?)자. 준지(俊之), 호. 오은(梧隱), 성균 진사(成均 進士),
박지추(朴之樞); (1510~1579) 자. 윤극(允極), 절제사(節制使).
박이의(朴而誼); 문강공(文康公) 박광전(朴光前)의 아버지로 1534年 (中宗 29)에 성균 진사.
박우(朴 祐); 호. 추재(秋齋), 宣祖때 무과에 합격하여 선공감판 겸 첨정(繕工監判 兼 僉正)을 역임.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捕虜)가 되어서도 충절을 굽히지 않았으며 조총의 정교한 기술을 배워 21년만인 1617년(光海 10)에 送還된 후, 이를 후세(後世)의 환란(患亂)을 막는 이기(利器)로 삼고 새로운 무기 개발과 제작에 공을 세워 禮曹諭文이 내려졌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충열공(忠烈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秋齋 朴祐 禮曹諭文 :  宗孫所藏 
박원효(朴元孝); 자. 윤극(允極), 무과에 합격한 후 훈련첨정(訓練 僉正)을 역임하였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용감히 싸우다 전사.
박응두(朴應斗); 자. 천장(天章), 경상좌도(慶尙左道) 우후(虞侯).

박광전(朴光前); (1526~1597) 보성군 조성면 용전리 태생, 자. 현재(顯哉), 호. 죽천(竹川), 성균관 진사 이의(而誼)의 아들로 이황(李滉 ;退溪)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구했으며 죽천집등 4권이 전해지고 있다. 1568년(宣祖 1) 진사가 되었으며, 경기전 참봉(慶基殿 參奉)에 이어 빙고 별좌(氷庫 別坐),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함열과 회덕(懷德)의 현감을 역임했다.

1592년(宣祖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켰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동복적벽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우고, 72세에 돌아가신 후에 이조 판서(吏曹 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문강(文康)의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보성(寶城)의 용산 서원(龍山 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김인후 (河西 金麟厚), 기대승(高峯 奇大升), 이항(一齊 李恒), 유희춘(眉岩 柳希春)과 함께 호남 5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박천서(朴天叙); (1526~ ?) 통덕랑(通德郞), 孝行으로 鄕道에 薦하다.

박문(朴 紋); 통례원 인의(通禮院 引儀).

박광선(朴光先); (1535~ ?) 자. 연재(連哉), 호. 오곡(悟 谷), 박광전(朴光前: 竹川)의 문인으로서, 관찰사(觀察 使)의 천거로 제용감(濟用監) 참봉

박한충(朴漢忠); 자. 자량(子良), 무과에 급제, 현감.

박한무(朴漢懋); 宣祖때 무과에 급제, 주부(主簿)와 형조좌랑(刑曹佐郞).

박응삼(朴應參); (1540~1604) 자. 한장(漢章), 호. 석정 (石亭), 宣祖때 무과에 급제한 후 주부(主簿). 임진 왜란(壬辰倭亂)때 義兵 및 군량(軍糧)을 모으는데 공을 세워 대호군(大護軍), 부사직(副司直)에 추증.

박원순(朴元恂); (1546~ ?) 자. 신이(信而), 호. 청계 (淸溪), 宣祖 때 생원에 합격, 김인후(金麟厚)의 문인으로 후진 양성에 힘써 변이중(邊以中), 이문룡(李文龍) 등 문인(門人)을 양성.

박응호(朴應虎); 자. 문숙(文叔), 임진왜란 때에 의병 활동을 하여 공을 세우고 淸州 牧使에 제수.

박광현(朴光玄); 자. 계현(季顯), 宣祖때 성균관 진사에 합격, 선교랑(宣敎郞)을 거쳐 사옹원 주부(司甕院 主 簿)가 되었는데, 1597년(宣祖 30) 정유재란을 당하여 박광전(朴光前)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왜적과 싸우다 가 진중(陣中)에서 전사(戰死)함.

박광운(朴光雲); 호. 정와(靜窩), 생원.

박승종(朴承宗); 자. 백술(伯述)로, 宣祖때 무과에 급제 한 후 상의원(尙衣院) 첨정(僉正)과 영암(靈岩), 서산 (瑞山)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병마절도사(兵馬節度 使)를 역임.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께서 피난(避難) 하게 된 사실(事實)을 듣고 공(公)이 달려가서 선조 (宣祖)를 지금의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일등 공신(一等 功臣)에 책록(冊錄)되고, 1613년(光海 6)에 철권단서(鐵券丹書)를 하사(下賜)받았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양소(良昭)의 시 호(諡號)가 내려졌다.

박 진(朴 瑨); 호. 쌍괴당(雙槐堂), 통덕랑(通德郞).

박예복(朴禮福); 초명. 정남(挺南), 1636年(仁祖 14) 丙子胡亂이 일어나자 義兵을 모아 大將이 되어 역전끝 에 白馬山城을 固守. 掌樂院判事에 追贈.

박진복(朴振福); 자. 진남(振南), 선전관(宣傳官).

박몽진(朴夢辰); 宣祖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찰방(察訪)을 역임하고, 통훈대부,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증직.

박광소(朴光昭); 자. 백순(伯順), 宣祖때 생원(生員).

박영전(朴榮前); 宣祖 때 진사(進士).

박문수(朴文粹); 호. 관수재(觀氺齋), 仁祖때 통정대부 (通政大夫).

박대붕(朴大鵬); 宣祖 때 무과에 급제,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

박공정(朴公楨); 자. 영보(寧甫), 宣祖때 무과급제, 통훈대부(通訓大夫), 현감(縣監).

박공한(朴公翰); 어회장군(籞侮將軍), 훈련원 주부(訓練院 主簿).

박공익(朴公翼); 宣祖 때 군자감 첨정(軍資監 僉正).

박공임(朴公任); 자. 이중(而重), 宣祖때 副護軍.

박원길(朴元吉); 자. 대수(大綬), 선교랑(宣敎郞), 사옹원 주부(司甕院 主簿).

박희망(朴喜望); 호. 오은(梧隱), 仁祖때 통덕랑(通德郞).

박양우(朴樑宇);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제용감 판사(濟用監 判事), 단성 부사(丹城 府使).

박양주(朴樑宙); 자. 자격(子擊), 仁祖때 선무랑(宣務郞) 봉정대부(奉正大夫).

박유제(朴惟悌); (1546~ ?) 자. 공언(恭彦), 호. 우옹(愚翁), 金壽恒의 문인, 병자호란 때 안우산(安牛山) 과 倡義.

박동식(朴東植); (1550~1629) 자. 식지(植之), 중추부사(中樞府事).
박근제(朴根悌); (1560~1629) 자. 입보(立甫), 호. 옥현(玉峴), 1592년(宣祖 25) 임진왜란 때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으며, 1597년(宣祖 30)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의병장(義兵將)인 아버지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
박유충(朴惟忠); 자. 효원(孝元), 호. 송은(松隱),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병자호란 때 창의하다.
박유효(朴惟孝); 자. 효언(孝彦), 호. 죽와(竹窩), 선교랑(宣敎郞)으로 丙子胡亂때 倡義하다.
박잠(朴  岑); 宣祖때 통정대부(通政大夫).
박응장(朴應張); (1566~ ?) 자. 운장(雲章), 明宗때 무과에 합격, 감포(監浦), 강진(康津) 현감(縣監)을 歷任했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추증(追贈).
박준철(朴濬哲); (1568~ ?) 호. 기양(岐陽),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아버지 원순(元恂)과 함께 장성(長城) 학림사(鶴林祠)에 配享되다.
박경인(朴敬仁); (? ~1640) 자. 공숙(恭淑), 호. 송은   (松隱), 文學夙就하고 後學을 敎導하여 士林이 松隱先生이라 敬仰.
박공건(朴公健); (1577~ ?) 자. 이순(而順), 수직통정대부(壽職通政大夫).
박경무(朴慶茂); (1581~ ?) 자. 수숙(綬叔), 무과에 합격하고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 영해 도호부사(寧海 都護府使).
박유양(朴有揚); 자. 명숙(明淑), 光海君때 통정대부(通政大夫).
박춘수(朴春秀); (1590~1641) 자. 언종(彦宗), 호. 아수재(我誰齋), 근효(根孝; 晩圃)의 아들, 김수항(金壽恒)의 문인, 仁祖때 진사과에 합격한 후 종묘서 직장(宗廟署 直長), 남원(南原) 찰방(察訪). 병자호란 때 의병 활동을 하였으나 후금(後金)과 화의(和議)된 이후 고향에 돌아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
박진철(朴震哲); (1594~ ?) 武科에 합격.
박선철(朴宣哲); 성균 생원(成均 生員).
박응철(朴應哲); 호. 풍호(楓湖), 죽천선생(竹川先生)의 門人, 光海君때 통덕랑(通德郞) 역임.
박형길(朴亨吉); 仁祖때 중추부사(中樞府事).
박춘장(朴春長); (1595~1664) 자. 언승(彦承), 호. 동계(東溪), 근효의 아들, 仁祖때 進士에 합격하고 1636년(仁祖 14)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후금에 대항하였으나,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함락된 소식을 듣고 통곡(痛哭)하며 낙향(落鄕)하여, 후학의 양성(養成)과 저술(著述)에 힘써 산양지(山陽誌)등을 남기고 진원박씨 최초의 족보인 정유보(丁酉譜)를 만들었으며, 寶城 육현사(六賢祠)에 配享.
박춘호(朴春豪); 자. 위원(偉元), 호. 해월당(海月堂), 근제(根悌)의 아들, 진사시에 합격한 후 병자호란에 종형(從兄) 춘수(春秀), 춘장(春長)과 함께 의병을 거느리고 여산(礪山)에 이르렀으나 조정(朝廷)에서 항복(降服)했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정심하여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고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찰방(察訪).
박찬경(朴纘慶); (1598~ ?) 자. 형보(亨甫), 승종(承宗)의 아들로 武科에 合格, 주부(主簿).
박시형(朴時炯); 자. 군도(君都), 군자감 첨정(僉正), 병자호란때 창의.
박시엽(朴時燁); 선교랑(宣敎郞), 제용감 주부(濟用監 主簿), 통정대부(通政大夫).
박용휘(朴用輝); (1604~1715) 자. 이빈(而彬), 증 호조참의(贈 戶曹參議).
박  전(朴 荃); (1610~1671) 자. 춘우(春佑), 가선대부 (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
박승근(朴承根); 자. 영보(永甫), 통덕랑(通德郞).
박계근(朴繼根); 仁祖때 선무랑(宣務郞), 금천찰방(金泉察訪).
박이일(朴以一); 자. 원보(元甫), 仁祖때 무과(武科)에 합격, 공조참의(工曹參議), 충렬공(忠烈公)의 孫.
박영립(朴英立); 仁祖때 무과(武科)에 합격, 전력부위 (展力副尉) 훈련원 봉사(訓練院 奉事).
박이문(朴以文); 자. 실이(實而), 통덕랑(通德郞).
박진형(朴震亨); (1611~1672) 자. 진숙(進叔), 호. 요천(蓼川), 父親 춘수(春秀), 숙부 춘장(春長), 당숙 춘호(春豪)와 함께 병자호란 때 창의, 호남의록사(湖南義錄事)에 登載.
박시환(朴時煥); (1613~1690) 자. 용회(用晦), 통덕랑(通德郞).
박비형(朴賁亨); (1615~1671) 자. 문숙(文叔), 통덕랑(通德郞).
박몽일(朴夢日); (1616~1680) 자. 경명(景明), 통덕랑(通德郞).
박동형(朴同亨); (1617~1665), 자. 인숙(仁叔), 통덕랑(通德郞).
박인강(朴仁綱); (1624~1664) 자. 사현(士顯), 성균진사(成均進士)로 丙子亂에 倡義.
박제형(朴濟亨); (1624~1682) 자. 정숙(定叔), 통덕랑(通德郞).
박사헌(朴士憲); (1629~1669) 자. 숙도(叔度), 仁祖때  생원(生員).
박유형(朴有亨); (1631~1683) 자. 재숙(載叔), 통덕랑(通德郞).
박몽형(朴蒙亨); (1631~1683) 자. 양숙(養叔), 호. 농은(農隱) ,통덕랑(通德郞).
박사도(朴師道); (1632~ ?) 통정대부(通政大夫), 증(贈) 공조참의(工曹參議).
박민희(朴敏熙); (1634~1664) 자. 여호(汝皥),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박인호(朴仁昈); (1634~1714) 자. 비현(丕顯), 성균 진사(成均 進士).
박세형(朴世亨); (1634~1675) 자. 영숙(永叔), 통덕랑(通德郞).
박겸형(朴謙亨);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總府 副摠管).
박익형(朴益亨); 자. 겸숙(謙叔), 통덕랑(通德郞). 
박사형(朴士亨); (1635~1706) 자. 서옹(瑞翁), 호. 청광자(淸狂子), 박춘장(朴春長)과 안방준(安邦俊)의 문인으로 도학자(道學者)이며, 가사문학(歌辭文學) 한글로 남초가(南草歌)를 지음.
박경방(朴敬芳); 仁祖때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
박정최(朴挺最); (1646~1722) 호. 금호(琴湖), 권상하(權尙夏; 수암)의 문하생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능통하였으며 금호집(琴湖集)이 전해지다.
박승남(朴昇南); 자. 명서(明瑞), 가선대부(嘉善大夫), 증(贈) 공조참판(工曹參判) 兼 동지의금부춘추관사(同知義禁府春秋館事).
박귀서(朴龜瑞); 肅宗때 무과(武科)에 합격.
박정영(朴挺榮); 자. 원직(元直), 조선 인조(仁祖)때 직언(直言)을 하다가 북청(北靑)에 유배되었으나 돌아온 후 송우암(宋尤庵)의 천거(薦擧)로 사천 현감(泗川 縣監).
박만영(朴曼榮); 자. 숙현(叔顯), 절충장군 겸 오위도총부총관(折衝將軍 兼 五衛都摠府 摠管).
박지영(朴之榮); (? ~1741) 자. 백현(伯顯), 통정대부(通政大夫) 검지중추부사(檢知中樞府事).
박태진(朴泰珍); 자. 대옥(大玉), 肅宗때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
박언걸(朴彦傑); 자. 찬보(讚保), 무과에 합격, 현감.
박동우(朴東雨); 자. 중문(仲文), 호. 경재(敬齋), 용양위부호군(龍驤衛 副護軍).
박만당(朴萬當); 자. 태승(太勝), 肅宗때 생원(生員). 
박만주(朴萬冑); 자. 운백(雲伯), 호. 수양정(壽養亭), 부호군(副護軍), 통정대부(通政大夫).
박정주(朴挺宙); (1651~1693) 자. 태초(太初), 통덕랑(通德郞).
박뢰(朴  蕾); (1653~ ?) 자. 춘재(春才), 통덕랑(通 德郞).
박래장(朴來章); (1655~ ?) 자. 명징(明徵), 통정대부(通政大夫).
박수석(朴壽錫); (1667~1754) 자. 원빈(元賓), 호. 귀휴정(歸休亭), 삼로재(三魯齋)와 청광자(淸狂子)의 문인(門人),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중수(重修)에  공헌(貢獻), 유(有) 귀휴집(歸休集). 崇祖會館 : 장흥군 장평면 두봉리 15세 公楨公 이하 27세 炯虎公까지 奉享 2003년 28세 聖基 創建
박응춘(朴應春); 자. 이현(以賢),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
박홍익(朴弘翊); (1681~ ?) 자. 자익(子益), 가선대부(嘉善大夫) 증(贈) 漢城府左尹 兼 五衛都摠府總管.
박동노(朴東老); (1682~1724) 호. 호산(壺山), 통덕랑(通德郞).
박동익(朴東翊); (1688~1724) 자. 여망(汝望), 통덕랑(通德郞).
박종일(朴宗一); (1689~1768) 자. 인수(仁叟), 호. 송계(松溪), 詩格에 능하고 孝行이 지극하며 맑고 깨끗하여  氷玉先生이라 稱함. 有 善歌集.
박형(朴 蘅); (1691~ ?) 자. 국형(國馨), 통덕랑 (通德郞), 진사(進士).
박동주(朴東周); (1692~ ?) 자. 숙경(叔敬), 가선대부 (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박홍(朴  泓); (1692~1751) 호. 선제(先齌), 자. 심보(深甫), 학림사(鶴林祠) 창건(創建) 有功.
박내석(朴乃錫); (1697~1755) 學行이 卓越, 1737년 정사(丁巳) 구보(舊譜) 중수(重修) 서문(序文) 작성.
박취현(朴就玄); (1716~ ?) 자. 성중(成中), 통정대부 (通政大夫).
박만성(朴萬成); (1721~1750) 자. 덕중(德仲),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박여해(朴汝海); (1724~ ?) 호. 창계조수(滄溪釣叟),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박만배(朴萬培); (1725~1754) 자. 무중(茂仲), 가선대부(嘉善大夫) 증(贈) 공조참의(工曹參議) 兼 오위도 총부별총관(五衛都摠府別摠管).
박린석(朴麟錫); (1729~1784) 자. 성서(聖瑞), 英祖때 통덕랑(通德郞).
박세주(朴世柱); 자. 경숙(擎叔), 통정대부(通政大夫).
박형덕(朴馨德); (1731~1815) 자. 대립(大立), 호. 완역당(玩易堂), 정조(正祖)의 유음으로 호남을 대표한 농소를 올렸으며 童蒙敎官 朝奉大夫를 증직.
박만준(朴萬遵); (1733~1788) 자. 성원(聲遠),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박승형(朴升亨); (1734~ ?) 승훈랑(承訓郞)으로 사헌부 감찰 (司憲府 監察).
박세문(朴世雯); (1736~ ?) 자. 덕중(德仲), 통덕랑(通德郞).
박홍뢰(朴弘磊); 英祖때 통덕랑(通德郞).
박영서(朴英瑞); 자. 선경(選卿), 英祖때 부호군(副護軍).
박찬민(朴燦玟); (1742~1814) 자. 화옥(華玉), 호. 간와(艮窩), 김이안의 문인으로 正祖때 成均 生員.
박승석(朴承錫); 자. 수승(遂承), 英祖때 무과(武科), 선전관(宣傳官).
박취석(朴聚錫); (1746~ ?) 자. 경집(景集),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박무석(朴武錫); (1747~1816) 자. 의연(毅然), 통훈대부(通訓大夫), 贈 司僕寺正.
박명근(朴命根); (1751~1802) 호. 운헌(雲軒), 통덕랑(通德郞), 玩易堂門人.
박성석(朴聖錫); (1752~ ?) 자. 승원(承元), 가선대부(嘉善大夫).
박봉석(朴鳳錫); 자. 명서(眀瑞), 英祖때 진사(進士).
박명근(朴命根); (1754~1816) 자. 인택(仁澤), 통정대부(通政大夫), 증(贈) 호조참의(戶曹參議).
박기환(朴基煥); (1758~ ?) 자. 입지(立之), 正祖王의 孝行御筆과 三日賜宴을 받음.
박수찬(朴守讚); 통정대부(通政大夫), 英祖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박수의(朴守儀); 자. 백우(伯羽), 英祖때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 중추부사(僉知 中樞府事).
박채후(朴采垕); 호. 우금당(友琴堂), 英祖때 통정대부(通政大夫).
박찬선(朴燦璿); 자. 순옥(舜玉), 호. 운영정(運影亭), 英祖때 사마 양시(司馬 兩試)에 합격, 김원행(金元行 ; 미호)의 문하생.
박순상(朴舜相); 호. 잠와(潛窩), 英祖때 통정대부(通政大夫).
박태훈(朴台熏); 자. 성중(誠中), 英祖때 통정대부(通政大夫).
박찬영(朴燦瑛); (1774~ ?) 英祖때 성균 생원, 증 司憲府 持平.
박치한(朴致漢); (1777~ ?) 자. 화경(華敬), 호. 농야(農野),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오위도총부 총관(五衛都摠府 總管).
박태환(朴台煥); (1777~1842) 자. 대언(大彦), 가선대부(嘉善大夫) 증(贈) 공조참판(工曹參判).
박수원(朴守遠); 자. 덕빈(德彬), 正祖때 통정대부(通政大夫) 증(贈)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박도영(朴道英); 자. 사행(士行), 正祖때 진사(進士).
박일화(朴一華); (1784~1861) 초휘. 중화(中華), 자. 여성(璵誠), 형덕(馨德)의 아들, 純祖때 무과에 합격,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 中樞 府事), 대구 중군(大邱中軍).
박중홍(朴重洪); (1802~1870) 매산 홍직필(梅山 洪直弼) 문인, 임정(壬丁) 양란의 칠현 거의록(七賢 擧義錄)을 蒐錄.
박성환(朴星煥); (1803~1839) 호. 애죽헌(愛竹軒), 조봉대부(朝奉大夫) 증(贈) 동몽교관(童蒙敎官).
박중원(朴重源); (1804~1875) 자. 원여(元汝), 가선대부(嘉善大夫), 敦寧府同敦寧, 오위장(五衛將).
박홍순(朴弘舜); (1809~1883)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
박태성(朴泰成); (1814~ ?) 자. 성백(成伯), 武科에 급제, 선략장군(宣略將軍).
박창섭(朴昌燮); (1813~1861) 호. 전은(田隱), 성균 진사(成均 進士)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박태준(朴泰俊); (1824~ ?) 武科에 급제, 선략장군(宣略將軍).
박신영(朴新英); (1825~1854) 호. 백헌(栢軒), 가선대부(嘉善大夫).
박중영(朴重英); (1837~1885) 자. 원숙(元淑),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박중룡(朴重龍); (1838~1875) 호. 송제(松齌), 통덕랑(通德郞), 繕工監假監役 贈 從二品奎章閣提學.
박홍재(朴弘載); (1841~1900) 호. 용동(龍洞), 학림재(鶴林齋) 창건 유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