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죽산박씨(竹山朴氏),죽산박시시조,박언립(彦立),죽산박씨시조,죽산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1 21:27 수정일 : 2018-01-29 09:13

죽산박씨시조 및 죽산박씨유래(본관)

죽산(竹山)은 경기도(京畿道) 용인군(龍仁郡)과 안성군(安成郡) 일부에 속해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이었는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쳤다가 고려(高麗) 초에 죽주(竹州)로 고치고, 995(성종 1)에 단련사(團鍊使)를 두어 음평(陰平) 또는 연창(延昌)이라 하였으며 현종(顯宗) 때 광주(廣州)로 속하였다.

1413(조선 태종 13)에 죽산(竹山)으로 개칭하여 감무(監務)를 두었고, 1895(고종 32) ()이 되었다가 1913년 원일면(遠一面)과 근삼면(近三面) 일부는 용인군(龍仁郡)에 합해지고 나머지 지역은 안성군(安城郡)에 합해졌다.


죽산박씨(竹山朴氏)는 신라왕족(新羅王族)의 후예(後裔)로 경명왕(景明王)의 넷째 왕자(王子)인 죽성대군(竹城大君) 언립(彦立)으로부터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다.죽산박씨족보(竹山朴氏族譜)」에 의하면 죽성대군 언립(彦立)의 아들 기오(奇悟)가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창업(高麗創業)에 공()을 세우고 태조(太祖)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보(三重大匡太保)에 올라 죽주백(竹州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죽산(竹山을 하사(下賜) 받아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죽주백(竹州伯) 기오(奇悟)의 손자 충숙(忠淑)이고려 현종(顯宗) 때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거란(契丹)의 침입을 물리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恃郞平章事)를 지냈으며, 7세손 정유(挺蕤)느 고려 예종과 인종대에 걸쳐 20여 년간 대간(臺諫)으로 있으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추밀원 부사(樞密院 副使) 겸 태자 좌빈객(太子左賓客)에 이르렀다.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 육화(育和 : 정유의 아들)의 아들로(騎士) 기사(騎射)에 능했던 인석(仁碩)은 명종(明宗) 초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북원(北原)에 은거(隱居)했다가 선종(宣宗)이 즉위 하자 감찰어사(監察御史)와 형부 원외랑을 지내고 ,초토 판관(招討判官)으로경주(慶州)의 초적(草賊)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전법 판서(典法判書) ()의 아들 전지(全之)는 외교(外交)와 정치이론에 밝아 원() 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치고 충선왕(忠宣王)이 복위(復位)하자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진 후 1321년충숙왕(충숙왕 8)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치사(致仕)했으며, 그의 아들, ()은 충선왕(忠宣王) 때 공신(功臣)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한편 정당문학으로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진 문보(文珤)의 증손(曾孫) 원형(元亨)은 세종(世宗)과 세조(世祖) 때의 명신(名臣)으로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사체(事體)에 명달하고 전고(典故)에 밝아 외교(外交)의 일인자로 손꼽혔다.

일찍이 중국(中國) 사신(使臣) 장 영(張 寧)이 그의 인품을 평하기를 그대와 같은 재주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났더라도 숙향(叔向)과 자언(子彦)의 밑에는 있지 않은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특히 그는 영상(領相)에까지 올랐으면서도 일평생을 청렴하고 검소하게 생활함으로써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임금에게 바른말을 잘해 세종은 그를 가리켜 급암(汲黯 : 직언을 잘한 한나라의 충신)이라 불렀다.

그의 아들 안성(安性)이 벼슬이 높아지기도전에 그의 생일에 술상을 차려 올리니 그는 받아 마시며 아들을 앞에 앉혀놓고 아래와 같은 계명시(戒命時)를 내렸다.

오늘밤 등불 앞에 두어 순배 술을 드니(今夜燈前酒數巡)

너의 나이 헤어보매 서른 둘 청춘이라(汝年三十二靑春)

우리집 가보로는 청백 그뿐이니(吾家舊物慛淸白)

이걸 잘 지녀서 무한히 전해내려라(好把相傳無限人)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안성(安性)의 후대에서는 광해군(光海君) 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홍구(弘耈)가 유명했다. 그는 도정(都正)을 지낸 난영(蘭榮)의 아들로 선조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관(史官)과 정언(正言)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의는 전라도 어사(全羅道御史)가 되어 군량미 조달에 수완을 보였으며, 1601(선조 34)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진하부사(進賀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의 혼탁한 정국에서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나 인조반공(仁祖反正)으로 삭직되었으며, 이 팔(李 活)의 난 때 광해군의 복위를 도모했다는 조카 윤장(允章)의 사건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던 중 자결했으나 숙종(肅宗) 때 신원(伸冤)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인조(仁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권지중군(權知中軍)으로 용만(龍灣) 전투에서 순절한 신룡(信龍)과 정유재란(丁酉再亂)에 공을 세워 정난이등공신(靖難二等功臣)에 책록되고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진 명현(名賢 : 원형의 후손)이 유명했으며,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한 명룡(命龍)의 형인 성룡(成龍)이 용만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는 정묘호란 때 안주(安州) 방어전에서 단신으로 화살을 쌓아놓고 적 수백명을 섬멸했으며 손가락을 다쳐 활을 쏘지 못하게 되자 혼자 칼을들고 적진에 뛰어들어 용전하다가 전사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안주 충민사(忠愍祠)에 제향 되었다.

일문(一門)에서 충()․효()․열()을 배출한 계성(繼成)은 임진왜란 때 권 율(權慄)의 막하에서 행주대첩(幸州大捷)에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에는 구례(求례) 전투에서 순절하자 그의 부인도 뒤를 따라 자결했으며, 아우 승성(承成)과 사촌 동생 언정(諺貞)도 싸움터에서 순절하여 이름을 떨쳤다.

재흥(載興)의 아들 종유(宗儒)는 영조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경전(經傳)」과 백가(百家)에 통달했고, ()․서()․화()에 모두 능했으며, 고종(高宗) 때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주도했던 주현(周鉉)은 가산(家産)에을 풀어 군자금을 제공했다가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어 심한 고문 끝에 순절하여, 평북(平北) 선천(宣川)에서 항일운동에 공헌했던 치조(治祚)․치의(治義)․건채(健采)등과 함께 의절(義節)의 가통(家統)을 이어온 죽산 박씨를 더욱 빛낸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죽산박씨(竹山朴氏)는 남한(南韓)63,17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죽산박씨조상인물

박술(朴 述) 시호는 엄의(嚴毅), 고려조(高麗朝)에 추밀원사(樞密院使)를 지냈다.

박충숙(朴忠叔) 시호(諡號)는 정신(貞愼). 1010(현종1) 거란(거丹)이 침입하자 예빈경(禮賓卿)으로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가 되어 강 조(康 兆)․안소광(安紹光)․최현민(崔賢敏)등과 함께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거란군을 방어했다. 뒤에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박온유(朴溫裕) 고려조(高麗朝)에 군기감(軍器監)을 역임하였다.

박형(朴 衡) 고려(高麗) 대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올랐다.

박영후(朴永侯) 고려조에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다.

박정유(朴挺蕤) 1089 (선종 6) 1145 (인종 23)

시호는 충질(忠質), 영후(永侯)의 아들. 예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경원 판관(慶源判官)을 거쳐, 인종 때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가 지인주사(知仁州事) 좌천, 후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오르고, 20여년간 대간(臺諫)으로 있으면서 조리있는 논의로 조정을 견제했다. 왕의 신임을 받아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겸 태자 좌빈객(太子左賓客)에 이르렀다.

박육화(朴育和) 고려(高麗)때 좌복야(左僕射)를 지냈으며 1157(의종 11)에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낼 때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박인석(朴仁碩) 1143 (인종 21) 1213 (강종 2)

자는 수산(壽山), 호는 회곡(檜谷), 좌복야(左僕射) 육화(育和)의 아들, 기사(騎射)에 능하고 글 읽기를 즐겨 8세에 세자의 학우(學友)가 되었다. 뒤에 음보(蔭輔)로 팔관보 판관(八關寶判官)에 이르러 우군녹사(右軍錄事)를 겸했고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를 지냈다.

명종(明宗) 초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북원(北原)에 은거했을 때 여러번 모함을 받아 생명이 위험했으나, 구해 주는 자가 있어 죽주(竹州)에 귀양가는 것으로 그쳤다. 24년간 시골에 묻혀있다가 1197(명종 27) 동래 현령(東萊懸令)으로 등용되고, 신종이 즉위한 뒤 통사사인(通事舍人)․감찰어사(監察御史)․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을 역임, 경주(慶州)에서 초적(草賊)의 반란이 있자 초토 판관(招討判官)으로 대장군 김척후(金陟侯)를 따라 전공을 세웠다.

이어 어사잡단(御使雜端)이 되어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대부소경(大府少卿)에 삼사 부사(三司副使)를 겸했고, 호부 상서(戶部尙 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박훤(朴 暄) 고려(高麗) 때 찬성(贊成)을 지냈다.

박전지(朴全之) 1250 (고종 37) 1325 (충숙왕 12)

호는 행산(杏山), 시호는 문광(文匡), 전법 판서(典法判書) ()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 사국(史局)한림원(翰林院) 벼슬을 역임, 1297(총령왕 56) 원나라의 세조(世祖)가 고려 양반들의 자제를 뽑아입시(入侍)시킬 때 선방되어 원나라의 명사들과 사귀어 명성을 떨치고 정동성 도사(征東省都事)가 되었다.

귀국 후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의 시랑(侍郞)에 임명되었으나 어린 나이에 비하여 높은 벼슬이라하여 사양하고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 왕에게 재주가 인정되어 전중윤(殿中尹)․지제교(知製敎)에 발탁, 세자(世子 : 충선왕)의 시강(侍講)을 맡았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삼사 좌사(三司左使)․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중경 유수(中京留守 : 개성부윤)가 되고 이해 충렬왕(忠烈王)이 복위하자 무고로 파직, 1308년 충선왕 복위 후 복직되어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졌으며, 1321(충숙왕 8)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서 치사(致仕)했다.

박원(朴 遠) ? 1341 (충혜왕 복위 2)

초명은 원(), 시호(諡號)는 문강(文康), 찬성사(贊成事) 전지(全之)의 아들, 일찍이 문과(文科)에 급제, 1324(충숙왕 11)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2년 뒤 전선(銓選)을 담당, 앞서 충숙왕(忠肅王)을 원나라에서 시종한 공으로 13272등 공신이 되었다. 뒤에 정당문학(正當文學)에 승진, 충숙왕의 총애를 받아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했다.

박문수(朴門壽) ()는 송암(松菴), 시호(諡號)는 충현(忠顯). 고려 말에 우정승(右政丞)을 지냈으나 조선개국(朝鮮開國) 후 두문동(杜門 洞)에 들어가 고려 왕조의 신하로서 절개를 지켰다.

박영충(朴永忠) ()는 국재(菊齋), 죽산군(竹山君) 문보(文珤)의 아들. 1388(우왕14) 요동 정벌(遼東征伐) 때 원수로서 이성계(李成桂)의 우군(右軍)이 되어 출전했다가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였다. 1390(공양왕 2) 회군(回軍)의 공으로 공신(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조선 개국(朝鮮開國) 후 강화 절제사(江華節制使)․좌찬성(左贊成)을역임하였고, 죽성부원군(竹成府院君)에 봉해졌다.

박효수(朴孝修) ? 1337 (충숙왕 복위 6)

호는 석재(石齋). 1317(충숙왕 4) 구재삭시(九齋朔試)를 관장, 1320년 대언(代言)으로 시관(試官)을 겸했다. 이듬해 밀직 부사(密直副使)가 되었으며 청절(淸節)로 이름을 떨쳐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다.

박현계(朴玄桂)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전리 총랑(典理摠郞)․평해 부사(平海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1327(충숙왕 14) 정승(政丞) 윤 석(尹 碩)과 함께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등 공신(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박형(朴 形) ? 1398 (태조 7)

시호는 정강(靖康), 전리 판서(典理判書) 덕룡(德龍)의 아들. 일찍이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문과(文科)에 급제, 대간(臺諫)․대언(代 言)을 역임하고, 1380(우왕 6) 밀직사(密直使)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조선 초에 예문춘추관 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仕)가 되고 이어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했다.

박익(朴 翊) 고려(高麗) 떄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박고(朴 翶) ()는 회헌(晦軒). 조선(朝鮮) 때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졌다.

박총(朴 叢) 이성계(李成桂)에게 위화도(威化島) 회군을 요청하였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으며, 글씨도 능하여 그가 쓴 백운선사(白雲禪師)의 구록(口錄)을 나무에 천녕(川寧)의 취암사(鷲巖寺)에 보관하고 있다.

박포(朴 苞) ()는 호곡(壺谷).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대장군 (大將君)이 되었으며 1398(태조 7) 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정사 1등공신(定社一等功臣)에 책록(冊錄)되었으며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나, 1400(정종 2) 방간(芳幹)과 함께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이산(尼山)에 유배되었다.

박덕공(朴德公) 고려(高麗) 때 도총제(都摠制)를 지냈으나 고려 멸망을예측하여 벼슬을 버리고 광릉산(光陵山)에 들어가 절개를 지켰다. 두문동(杜門洞)의 표절사(表節祠)에 배향(配享) 되었다.

박중의(朴仲宜) 조선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박자량(朴子良) ()는 행촌(杏村). 조선개국(朝鮮開國) 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낼 때 숙부(叔父)인 박 포(朴 苞)가 제2차 왕자의 난을 주도하였다 실패하여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남원군(南原郡) 수지면(水旨面) 초리(草里)에 서당(書堂)을 세우고 후배 양성에 힘을 다했다.

박원형(朴元亨) 1411 (태종 11) 1469 (예종 1)

자는 지구(之衢), 호는 만절당(晩節堂), 시호는 문헌(文憲), 병조 참의(兵曹參議) ()의 아들. 1432(세종 14) 사마시(司馬詩)에 합격하고 1434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예빈시직장(禮賓侍直長)․도임서령(都染署令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사복시 소윤(司僕侍少尹) 겸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엿다.

1450년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판사복지사(判司僕侍事)․좌승지(左承旨) 겸 지형조사(知刑曹事)를 지내고 1451(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좌이공신(左翼功臣) 3등이 되고 1459(세조 5)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어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지고, 호조․형조․이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을 지내고, 1466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으로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예종의 묘정(廟亭)에 배향(配享)되었다.

박원정(朴元貞) ()는 지성(之成), ()는 만은(晩隱),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144(세종 26) 문과(文科)에 급제, 공조좌랑(工曹佐 郞)을 거쳐 판서(判書)를 지냈다.

박안성(朴安性) ()는 성지(性之), 시호(諡號)는 정안(靖安). 조선조(朝鮮朝)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충지(朴忠至) 조선 떄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홍문(朴弘文) 무예(武藝)에 능통하였고 군민선치(軍民善治)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1420(세종 2) 태안 지군사(泰安知郡事)․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를 지냈다.

박적선(朴積善) ()는 경옹(慶翁). 조선 때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했다.

박증(朴 增) 조선 때 직강(直講)을 지냈다.

박숭조(朴崇祖) ()는 삼졸(三拙). 조선조(朝鮮朝)에서 호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박수문(朴守紋) 자는 원장(元章). 조선 때 호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박겸무(朴兼武) ()는 조부(趒夫).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박겸인(朴兼仁) ()는 원지(元之). 조선(朝鮮) 때 부사를 지냈다.

박팽손(朴彭孫) 조선 떄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박난영(朴蘭英) ? 1636 (인조 14)

중형(仲馨), 시호는 충숙(忠肅). 선조(宣祖) 떄 면천 군수(沔川郡守)․중군(中軍) 등을 거쳐 1619(광해군 11)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금나라 정벌에 출전, 포로가 되었다. 1627(인조 5) 석방되어 귀국, 조선을 괴롭히는 후금(後金)에 회답관(回答官)․선위사(宣慰使)․선유사(宣諭使) 등으로 여러번 왕래하며 회유에 힘썼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청나라와 휴전교섭에 나서 청장(淸將) 용골대(龍骨大) 등과 청영(淸營)에서 회담했다. 그러나 이떄 왕자를 볼모로 보내라는 청나라 요구에 왕자대신 능봉군(綾峰君)과 심 집(沈 諿)을 가장시켜 청진에 보냈던 일이 탄로되어 청장(淸將)에 의해 살해되었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박난영(朴蘭榮) ()는 중욱(仲郁). 조선 때 도정을 역임하였다.

박문영(朴文榮) ()는 사욱(士郁). 조선 조에 호조 판서를 역임.

박웅즙(朴雄楫) ()는 중제(仲齊). 조선 때 군수를 지냈다.

박담년(朴聃年) ()는 기옹(耆翁). 조선 때 서령을 지냈다.

박해(朴 楷) ()는 자무(子武). 조선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박홍구(朴弘耈) 1552 (명종 7) 1624 (인조 2)

초명은 홍로(弘老), 자는 응소(應邵). 1582(선조 1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정언(正言)을 거쳐 1593년 교리(校理)로 전라도 어사(全羅道御使)가 되어 임진왜란 중의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1595년 응교(應敎)로서 시독관(侍讀觀)을 겸직했고,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했다. 1597년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史)․대사성․도승지(都承旨)․병조 참판(兵曹參判), 다음해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601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진하부사(進賀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대사간․부제학․대사헌․첨지충추부사 등을 거쳐, 1607(선조 40)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 1608년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를 지낸 후 1618(광해군 10) 우의정(右議政), 이듬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삭직(削職), 이듬해 이 괄(李适)의 난 때 광해군 복위를 음모했다는 조카 윤장(允章)의 사건에 연좌, 심문을 받던 중 자살했다. 1691(숙종 17) 신원(伸寃)되었다.

박경선(朴慶先) ()는 백길(白吉), 장령(掌令) 사공(思恭)의 아들. 1582(선조 15) 진사(進士)를 거쳐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박경신(朴慶新) 1560 (명종 15) ?

자는 중길(仲吉), 호는 한천(寒泉), 장령(掌令) 사공(思恭)의 아들. 1582(선조 1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1592년 임진왜란 때 청도 조전장(淸道助戰將)으로 참전, 그 후 밀양 부사(密陽府使)를 거쳐 1595년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어 1597년 정유재란 (丁酉再亂) 때 싸우지 않고 도주한 죄로 파직당했다.

뒤에 서흥 부사(瑞興府使)로 기용되고 동래 부사(東來府使)․삼척부사(三陟府使)․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역임, 광해군(光海君) 때 광주 목사(光州牧師)․판결사(判決事), 경상도와 공홍도(公洪道)의 관찰사를 지내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탐학(貪虐)했다는 서인(西人)들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문명(文名)이 높았다.

박경심(朴慶深) 자는 계길(季吉). 조선(朝鮮) 떄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철정(朴鐵貞) 조선(朝鮮) 때 승의랑(承義郞)에 이르렀다.

박명현(朴名賢)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원형(元亨)의 후손. 1596(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이 난을 일으켜 홍주(洪州)를 위협할 때 목사(牧師) 홍가신(洪可臣)의 휘하에서 무장(武將) 임득의(林得義)와 함께 홍주성을 지켰으며, 군사를 이끌고 적을 청양(淸陽)까지 추격하여 섬멸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떄는 토포사(討捕使)에 이어 충청도 방어사(忠淸道防禦使)․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의 요직을 지내면서 분전했다. 1604(선조 37) 청난공신(淸難功臣) 2등이 되고 연창군(延昌 君)에 봉해졌으며 위계(位階)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박사공(朴思恭) 자는 경부(敬夫).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사제(朴思濟) ()는 경현(景賢). 조선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박진(朴 震) 조선조(朝鮮朝)에 승훈랑(承訓郞)에 올랐다.

박홍도(朴弘道) ()는 자수(子修). 조선(朝鮮) 때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박진장(朴晋章) ()는 이성(而盛). 조선 떄 부사(府使)를 지냈다.

박내장(朴來章) ()는 이경(而慶). 조선조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

박취장(朴就章) 자는 이현(而顯).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유장(朴有章) ()는 이회(而晦). 조선 떄 응교(應敎)를 지냈다.

박홍호(朴弘頀) ()는 자성(子成).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박현공(朴玄公)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박충검(朴忠儉) ()는 노곡(老谷). 조중봉(趙重峰)의 문하생으로 통덕랑(通德郞)에 올랐으며,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였다.

박천추(朴天樞) ()는 군행(君行), ()는 인묵재(忍黙齋).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우다 순국(殉國)하였다.

박배(朴 培) 조선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박세형(朴世炯) 조선(朝鮮) 떄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냈다.

박 곤(朴 坤) 조선 때 한성 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

박숙인(朴璹寅) ()는 수백(壽伯). 조선(朝鮮) 떄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박치항(朴致恒)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해금(海琴). 조선 때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박규수(朴奎壽) ()는 서일(瑞一), ()는 관호(觀湖). 조선조(朝鮮朝)에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박성태(朴聖泰) 자는 성앙(聖仰), 호는 장파(長坡). 조선 때 참판(參判)을 지냈다.

박기수(朴耆壽) ()는 정로(廷老), ()는 낙수당(樂水堂).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을 개탄하여 과거(科擧)도 포기한채 은거생활을 하던 중, 1618(광해군 10)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되자 음식을 폐하며 통곡하였던 우국지사(憂國之士)이다.

박천거(朴天擧) ()는 경천(景薦). 조선 떄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시좌(朴時佐) ()는 형중(衡仲). 조선 때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역임했다.

박유붕(朴有鵬) ()는 남거(南擧), ()는 만각(晩覺). 조선조(朝鮮朝)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역임하였다.

박진호(朴震祜) ()는 욱재(郁哉).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희인(朴羲寅) ()는 성당(惺堂). 조선 때 교리(校理)를 지냈다.

박명룡(朴命龍) 1588 (선조 21) 1627 (인조 5)

자는 견숙(見叔), 시호는 충민(忠愍). 1616(광해군 8)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조산 만호(造山萬戶)를 거쳐 소근진 수군첨절제사(所斤鎭水軍僉節制事) 등을 지냈다.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에 형 성룡(成龍)과 함께 부원수(副元帥) 이수일(李守一)에 휘하에 있었으며 난이 평정된 뒤 고천군수(古泉郡守), 이어 평안도 병마우후(兵馬虞候)를 지냈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안주(安州) 방어전에서 전사했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1681(숙종 7)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박계성(朴繼成) ()는 이술(而述), ()는 초곡(草谷). 1592(선조25)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행주대첩(幸州大捷)에 훈공을 세웠으며, 1597(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구례(求禮)에서 전사하자 그의 부인도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또한 아우 승성(承成), 사촌 동생인 언정(彦貞)도 순국(殉國)하니 최익현(崔益鉉)이 쓴 그의 비문(碑文)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