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음성박씨시조(陰城朴氏),박서(朴犀),음성박씨조상인물,박순(朴淳)

작성일 : 2017-04-11 20:13 수정일 : 2018-03-02 23:0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음성박씨(陰城朴氏)의 시조(始祖) 서(犀)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네째 아들인 죽성대군(竹城大君) 언립(彦立)의 11세손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고려 고종(高宗) 때 몽고(蒙古)의 장수(將帥) 살리타이(撤禮塔)가 쳐들어와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이어 귀주(龜州)를 공격하자 그는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이를 물리쳐서 몽고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며 후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음성백(陰城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죽성박씨(竹城朴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서(犀)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음성(陰城)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음성(陰城)은 충청북도(忠淸北道) 북서쪽 끝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진한(辰韓)의 영토였으나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 때 잉홀현(仍忽縣)이라 하였고, 553년(진흥왕 14)에 신라(新羅)의 영토가 되어 경덕왕(景德王)이 음성현(陰城縣)으로 고쳐서 흑양군(黑壤郡: 진천)에 속하게 하였다.

그후 고려(高麗) 성종(成宗)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충주부(忠州府)에 속하게 되었으나 1413년(태종 13)에 와서 현감(縣監)을 두었고, 선조(宣祖) 때 청안(淸安)에 속하였으며 1618년(광해군 10)에 다시 음성현이 되어 고종(高宗) 때 군(郡)으로 승격하고, 1956년 7월 8일에 음성읍(陰城邑)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서의 아들 재(梓)가 고려조에서 공부 상서(工部尙書)를 역임했고, 손자 현계(玄桂)는 충숙왕(忠肅王) 때 전리총랑(典理摠郞)과 평해부사(平海府使)를 거쳐 정승 윤 석(尹碩) 등과 함께 조 적(曹顯)의 난(亂)을 평정(平定)한 공으로 이등공신(二等功臣)에 책록되어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으며, 슬하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문서(文瑞)는 강화 부사(江華府使)를, 차남 문길(文吉)은 지군사(知郡事)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올랐다.

조선창업(朝鮮創業) 때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공신으로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던 순(淳)은 문길(文吉)의 아들이다. 왕위계승을 다투어 골육상쟁의 피바람을 일으켜 여러 왕자(王子)를 죽이고 등극한 태종(太宗)의 패륜을 개탄하여 태조가 고향인 함흥(咸興)으로 내려가자 태종은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고 여러번 사자(使者)를 보냈으나 그때마다 태조가 사자를 모조리 죽여버렸다. 이때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로 있던 순(淳)이 자청하여 하인도 딸리지 않고 평복으로 혼자서 새끼 딸린 어미말을 타고 함흥에 들어가서 행궁 앞 소나무에 새끼말을 매어 놓고 어미말을 타고 들어가니, 어미말과 새끼말이 서로 쳐다보며 울어댔다.

태조는 평복으로 찾아온 옛 친구를 맞이하여 시끄럽게 울어대는 말의 사연을 묻자 그가 말하기를 “새끼말이 길가는 데 방해가 되어 매어 놓았더니 어미말과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하며 “비록 미물이라도 지친(至親)의 정은 있는 모양입니다”하고 태조와 태종의 멀어진 사이를 풍자하여 비유하니 태조가 척연(戚然)히 슬퍼하고 잠저(潛邸)의 옛 친구인 순(淳)을 머물러 있게 하였다.

하루는 태조와 순이 장기를 두고 있을 때 마침 쥐가 그 새끼를 껴안고 지붕 모퉁이에서 떨어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도 서로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순이 장기판을 제쳐놓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한양(漢陽)으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였다. 순이 한양으로 돌아가겠다는 태조의 허락을 받고 행궁을 떠나올 때 태조를 모시고 있던 신하들이 이전처럼 이 차사도 죽일 차비를 하고 있었다.

태조는 옛 친구와의 우의를 생각하여 차마 죽일 수 없어 시간을 끌다가 순(淳)이 용흥강(龍興江)을 건너가 추격이 어려울 것을 짐작하여 칼을 주면서 이르기를 “만약 이미 강을 건넜거든 쫓지말라” 하였다. 그러나 순은 도중에 병이 나서 시간을 지체하다가 나루터에서 추격자들에게 붙잡혀 허리를 베이었다.

그 후 태종은 순에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리고, 또 화공에게 명하여 그 반신을 그려서 그의 공(功)을 치하했으며, 관직(官職)과 토지(土地)를 내리는 한편 자손을 벼슬에 등용하였고 부음을 듣고 자결한 부인 임씨(任氏: 대사헌 임 헌의 딸)에게 열녀(烈女)의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한편 순(淳)의 아우 정(淨)은 세종(世宗) 때 직제학(直提學)과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순의 아들 소(昭)는 좌승지(左承旨)로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했다가 형을 받았다.

순의 손자 숙진(叔秦:병조 참판 흔의 아들)은 대사헌(大司憲)을, 숙무(叔楙)는 세종 때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숙달(叔達)은 성종(成宗) 때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집의(執義)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을 도왔던 광옥(光玉)은 참봉(參奉) 자회(子回)의 손자(孫子)로서 퇴계(退溪)에게 글을 배워 학명(學名)이 높았으며, 세칭 삼옥(三玉: 얼굴·용모·이름)으로 일컬어져서 호남(湖南)의 선비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그밖의 인물로는 광해군(光海君) 때 이이첨 일당의 전횡을 탄핵했던 지성(至誠)과 영조(英祖) 때 효행(孝行)으로 이름난 호원(浩遠)이 뛰어났으며,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지낸 정규(廷珪)와 영조(英祖) 때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한 종언(宗彦)은 순조조(純祖朝)의 정언(正言) 내양(來陽)을 비롯한 「목도서설(木圖書說)」의 저자(著者) 준흠(俊欽)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음성박씨(陰城朴氏)는 남한(南韓)에 8,73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음성박씨조상인물

박재(朴 梓) 고려 때 공부 상서(工部尙書)를 지냈다.

박현계(朴玄桂)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전리 총랑(典理摠郞)·평해 부사(平海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1327년(충숙왕 14) 정승(政丞) 윤 석(尹碩)과 함께 조 적(曺顯)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등공신에 책록(冊錄)되었다.

박문서(朴文瑞)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강화 부사(江華府使)를 역임하였다.

박문길(朴文吉) 고려조(高麗朝)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였다.

박문환(朴文桓) 고려에서 전리 총랑(典理摠郞)을 지냈다.

박제(朴 濟) 1388년(우왕 14) 문관에 합격하고, 전의시 판사(典醫寺判事)가 되었으며, 1398년(태조 7)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예를 역임하였다.

박원(朴 洹) 조선(朝鮮) 때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역임하였고, 길재(吉再)·정몽주(鄭夢周)와 교유(交遊)하였으며,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와 노상시(路上詩)를 남겼다.

박순(朴 淳) ? ~ 1402년(태종 2). 시호는 충민(忠愍), 문길(文吉)의 아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종군,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에 앞서 이성계의 명으로 회군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우왕(禑王)에게 갔으며, 1392년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여러 왕자들을 죽이고 등극한 태종을 미워하여 함주(咸州:함흥)에 머물고 있자 사자(使者)를 파견, 귀환을 요청했으나 모조리 사자들을 죽이므로 태조와 친분이 두터운 그는 사신되기를 자원하여 1402년(태종 2) 함주에 내려가서, 돌아가겠다는 태조의 확약을 받고 나서 귀로(歸路)에 올랐다. 한편 그를 좇아가 죽이자는 측근자의 간청에 못 이긴 태조는 그가 용흥강(龍興江)을 건넜을 무렵을 어림하여 신하들의 청을 허락하면서 강을 건너갔으면 좇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도중에 급병으로 지체하다 간신히 배를 탔으나 결국 뒤좇아온 사람들에게 잡혀 살해되고 말았다. 태종은 그의 공(功)을 녹(錄)하고 관직(官職)과 토지(土地)를 내리는 한편 자손(子孫)을 등용(登用)할 것을 명했고, 부음을 듣고 자결한 부인 임씨(任氏)에게 묘지(墓地)를 내렸으며, 그의 고향에 충신(忠臣)·열녀(烈女)의 두 정문(旌門)을 세우게 했다. 용강서원(龍江書院)에 제향되었다.

박정(朴 淨)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조선 세종(世宗) 때 세자 빈객(世子賓客)·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예조 판서(禮曹判書) 등을 지냈으며, 1435년(세종 17)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박거(朴 渠) 조선(朝鮮) 때 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박소(朴 昭) 조선조(朝鮮朝)에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박흔(朴 昕) 조선 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박진(朴 瞋) 세조(世祖) 때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박계금(朴繼金) 1426년(세종 8) 문과에 급제한 후 강화 부사(江華府使)를 지냈다.

박숙진(朴叔秦) 자(字)는 정지(挺之). 1453년(단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용(司勇)·직강(直講)·우승지(右承旨)·병조 참의(兵曹參議) 등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박숙무(朴叔楙) 1426년(세종 8) 음보(蔭補)로 관직에 오른 후 고양(高陽) 등 4개 고을의 군수(郡守)를 역임하고, 1443년(세종 25)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박숙달(朴叔達) 1462년(세조 8) 문과에 급제하고, 1477년(성종 8) 지평(持平) 등을 거쳐 다음해 장령(掌令)이 되고, 이어 이조 정랑(吏曹正郞)·집의(執義) 등을 역임하였다.

박숙창(朴叔暢) 1465년(세조 11) 춘시문과(春試文科)에 급제한 후 경상우도 도사(慶尙右道都事)가 되었다.

박숙번(朴叔蕃) 거관(居官)에 정직(正直)하고 부모(父母)에 효성(孝誠)이 지극하였으며, 1456년(세조 2)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올랐다.

박조(朴 凋) 1528년(중종 23) 이천 부사(利川府使)가 되고, 1536년 (중종 31) 내자시정(內資寺正)에 이르렀다.

박윤진(朴胤陳) 세조(世祖) 때 음보(蔭補)로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가 되었으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강경서(姜景敍)와 함께 연좌(連坐) 되어 화를 당하였다.

박문형(朴門亨) 성종(成宗) 때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좌찬성(左贊成) 등을 역임하였다.

박붕(朴 鵬) 1504년(연산군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전주 판관(全州判官)을 역임했다.

박곤(朴 鯤) 자(字)는 변갑(變甲). 1501년(연산군 7) 문과에 급제한 후 사예(司藝)에 이르렀다.

박유경(朴惟敬) 자(字)는 경지(敬之). 조선(朝鮮) 때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박유겸(朴惟慊) 자(字)는 겸지(慊之). 조선 때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냈다.

박인원(朴仁元) 1491년(성종 22)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고, 곡산 부사(谷山府使)를 지냈다.

박수원(朴秀元) 1501년(연산군 7)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감역(監役)이 되었다.

박비(朴 丕) 1513년(중종 8)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가 되고, 감조군기시 판관(監造軍器寺判官)·문천 군수(文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박광옥(朴光玉) 1526년(중종 21) ~ 1593년(선조 26)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 곤(鯤)의 아들. 이 이(李珥)의 문인. 1568년(선조 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를 지냈다. 1574년(선조 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고, 전라도·충청도의 도사(都事)를 거쳐 1579년 지평(持平)·예조 정랑(禮曹正郞) 등을 역임한 후 봉상시정(奉常寺正) 때 신병으로 사직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고향에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키는 한편, 군량을 수집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도원수(都元帥) 권 율(權慄)을 도왔다. 이듬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임명받아 병을 무릅쓰고 민심을 수습하고 흩어진 병사를 규합하던 중 죽었다.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 운봉(雲峰)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지성(朴至誠) 자(字)는 몽여(夢與), 호(號)는 일소옹(一笑翁). 광해군(光海君) 때 천거되어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으나,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횡포를 반대,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면서 유고(遺稿)를 남기고 일생을 마쳤다.

박응양(朴應樑) 조선(朝鮮) 때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지냈다.

박응항(朴應恒) 조선 때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박연(朴 淵) 자(字)는 정원(淨源), 호(號)는 청계거사(淸溪居士).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호원(朴浩遠) 자(字)는 천경(天卿), 호(號)는 면헌(勉軒). 1725년(영조 1) 효행으로 포상을 받았으며, 벼슬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고 서예에 능하였다.

박진귀(朴震龜) 1643년(인조 21) ~ 1730년(영조 6)

자(字)는 성보(聖寶), 호(號)는 문당(文堂). 어릴 때부터 송우암(宋尤庵)·송동춘(宋同春)의 제자로 학문에 전념하다가 늦게 음보(蔭補)로 숙종(肅宗) 때 감역(監役)에 천거되었다. 70세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그 후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 府事)에 제수되었다.

박징원(朴徵遠) 조선(朝鮮) 때 광해군(光海君)의 부마(駙馬)였다.

박지준(朴之俊) 조선조에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정규(朴廷珪) 자(字)는 헌지(獻之), 호(號)는 이락(二樂). 1721년(경종 1)에 진사(進士)가 되고,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지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박상빈(朴尙彬) 자(字)는 자장(子章).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박언(朴 堰) 자(字)는 찬옥(贊玉). 조선에서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하였다.

박종언(朴宗彦) 자(字)는 중연(仲淵), 호(號)는 신재(新齋). 1754년(영조 30)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이르렀다.

박성한(朴聲漢) 자(字)는 사장(士章), 호(號)는 자각(紫閣). 1802년(순조 2)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역임하였다.

박내양(朴來陽) 자(字)는 자복(子復). 1823년(순조 23) 문과에 급제한 후 정자(正字)·전적(典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박준흠(朴俊欽) 자(字)는 덕여(德汝), 호(號)는 입암(立菴).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특히 그가 남긴 「목도서설(木圖書說)」은 세상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고, 만년에는 안성(安城)의 덕곡산(德谷山)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후 지평(持平)에 추중되었으며, 합천(陜川)의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