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운봉박씨시조(雲峰朴氏),박중화(朴仲華),운봉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1 15:43 수정일 : 2018-04-11 12:53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운봉박씨(雲峰朴氏)의 시조(始祖) 박중화(朴仲華)는 신라 경명왕(景明王)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彦沈)의 11세손으로 고려 말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냈으며, 그의 현손(玄孫) 종우(從愚)가 조선 태종(太宗)의 장녀 정혜옹주(貞惠翁主)와 혼인하여 운성군(雲城君)에 봉해지고 세종(世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세조(世祖)를 도와 정난 1등공신으로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밀양 박씨(密陽朴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중화(仲華)를 시조로 받들고 운봉(雲峰)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운봉(雲峰)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원구(南原郡)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무산현(毋山縣) 혹은 아영성(阿英城)· 아막성(阿莫城)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 때 운봉현(雲峰縣)으로 고쳐 천령군(天嶺郡)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高麗) 때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운봉군이 되었으나 1914년 남원군에 합해져 지금은 남원군 운봉면에 이르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태조(太祖) 때부터 세종조(世宗朝)에까지 4대에 걸쳐 명신(名臣)으로 이름났던 신(信:중화의 증손)이 태종(太宗) 때 대사헌(大司憲)에 올라 직간(直諫)을 하다가 아주현(牙州縣)으로 귀양 갔다가 풀려나와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세종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으나 앞서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로 있을 때 부하 관리의 부정사건에 인책되어 13년 동안이나 유배지에서 생활했으며, 그의 아들 종지(從智)·종우(從愚)종귀(從貴) 3형제가 뛰어났다.

그외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간 윤형(允瀅)의 아들 익래(翼來)가 효행(孝行)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 흥래(興來)는 강릉 참봉(康陵參奉) 서래(瑞來), 명릉 참봉(明陵參奉) 태륜(泰崙) 등과 함께 가문의 전통을 이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운봉박씨(雲峰朴氏)는 전국에 1,4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운봉박씨조상인물

박신(朴 信) 1362 (공민왕 11) ~ 1444 (세종 26)

자(字)는 경부(敬夫), 호(號)는 설봉(雪峰), 시호(諡號)는 혜숙(惠肅).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1385년(우왕 11) 문과(文科)에 급제,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을 거쳐 예조·형조의 정랑(正郞)을 역임. 조선초 봉상시 소경(少卿), 감문위 대장군(監門衛大將軍) 겸 사헌중승(司憲中丞), 좌산 기상시(左散騎常侍)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399년(정종 1) 형조 전서(刑曹典書)가 되고, 1400년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승추부 좌부승지(承樞府左副承旨)로 발탁, 우대언(右代言)·대사헌(大司憲)·판광주목사(判廣州牧使), 1404년 개성 유후(開城留後), 한성 부윤(漢城府尹)·승녕부윤(承寧府尹)을 역임하였다.

1405년(태종 5)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거쳐 다시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언사(言事)로써 왕의 비위를 거슬려 아주현(牙州縣)에 귀양 갔다가 동북면 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에 가용되었다.

1407년 다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공조 판서(工曹判書), 이듬해 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를 지냈고, 1409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가 되었다.

뒤에 호조 판서(戶曹判書)·병조 판서(兵曹判書)·찬성사(贊成事)·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1418년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다시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나,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로 있을 때 선공감 관리가 저지른 부정(不正) 사건에 관 련되어 13년 동안이나 통진현(通進縣)에 유배(流配), 1432년(세종 14) 풀려 나왔다.

박종우(朴從愚) ? ~ 1464 (세조 10)

시호(諡號)는 성렬(成烈), 찬성(贊成) 신(信)의 아들, 태종의 사위. 1418년(태종 18)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 운성군(雲城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하였다. 1423년(세종 5)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고 3년 후 황주선위사(黃州宣慰使)로 나갔다.

1427년 사은(謝恩) 겸 진하사(進賀使)로 다시 명나라에 갔다. 이듬해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품하여 평양(平壤)과 개성(開城)에 선위사(宣慰使)로 나갔고, 1442년 경상좌도 도병마절제사(慶尙左道都兵馬節制使), 다음해 삼군 장수(三軍將帥) 등을 역임하고 이어 호조 판서 (戶曹判書)로서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를 겸직, 1443년(세종 25)에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등을 지냈다.

이듬해 부친상으로 사직했으나 1445년 왕명으로 기복(起復), 판호조사(判戶曹事)·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1447년(세종 29) 이조 판서(吏曹判書)·좌찬성(左贊成), 1449년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지내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을 제거하는데 참여, 정난공신(睛難功臣) 1등이 되고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박윤형(朴允瀅) 1902(광무 6년)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묘소는 충북(忠北) 중원군(中原郡) 신니면(薪尼面) 마수리(馬水里)에 있다.

박익래(朴翼來) 박윤형(朴允瀅)의 차남으로 소문난 효자였다. 1972년 성균관(成均館) 발행의 한국효열록(韓國孝烈錄)에 기재되었다.

박흥래(朴興來) 조선(朝鮮) 때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지냈다.

박태륜(朴泰崙) 조선조에 명릉 참봉(明陵參奉)을 역임하였다.

박성래(朴省來) 조선에서 주사(主事)를 지냈다.

박태호(朴泰浩) 조선조(朝鮮朝)에 주사(主事)를 지냈다.

박태준(朴泰峻) 조선(朝鮮)에서 주사(主事)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