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영해박씨(寧海朴氏)는 신라 제5대 파사왕의 5세손인 파진찬 물품의 아들 박제상(堤上)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작성일 : 2017-04-11 15:37 수정일 : 2018-02-08 16:48

영해박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

영해(寧海)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동북부(東北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우시군(于尸郡)을 통일신라(統一新羅) 때 유린군(有隣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에 예주(禮州)로 하였다가 1259년(고종 46) 덕원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로 승격하였다.

그후 예주로 다시 고치고 1310년에 영해부(寧海府)로 개칭하였으며 1895년에 군(郡)이 되었으나 1913년 영덕군에 통합되어 일부지역은 영해면으로 남아 있다.

영해박씨(寧海朴氏)는 신라 제5대 파사왕(婆娑王:재위기간 80~112)의 5세손인 파진찬(坡珍湌) 물품(勿品)의 아들 박제상(堤上)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신라 제17대 왕인 실성왕(實聖王:재위기간 402~417) 때 이웃 일본(日本)이 화친(和親)의 동맹(同盟)을 맺자는 간계(奸計)를 꾸며 신라의 왕에게 왕자(王子)를 맹약의 보증으로 일본에 보내 줄 것을 청하자 실성왕은 내물왕(奈勿王)의 아들인 미사흔(未斯欣)을 인질로 일본에 보냈다.

그후 미사흔의 형인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하여 일본에 억류된 아우를 그리워하며 신하를 보내어 귀환을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때 삽량주 태수로 있던 제상(堤上)이 율포(栗浦:지금의 경주군 남양면 하서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을 구하여 신라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왜왕(倭王)에게 모진 고초를 당한 후 목도(木島)로 귀양보내져서 소살(燒殺) 당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눌지왕은 크게 슬퍼하며 제상에게 대아찬(大阿湌)의 벼슬을 내리고 그의 충절을 높이 치하했으며, 제상의 부인은 원한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거느리고 동해(東海)가 바라다 보이는 치술령(致述嶺)에 올라가 날마다 통곡하다가 지쳐 죽으니 나라에서는 치술령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제사지내게 하였으며, 제상의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맞게하여 은혜를 갚도록 하였다.

그후 사람들은 제상이 떠난 울포 앞바다에서 부인이 엎드려 울었던 하서리(下西里) 갯가를 장사(長沙)라 불렀다 하며,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그 지명을 벌지지(伐知旨)라 했고 부인은 치술령에서 울다 지쳐 망부석(望夫石)으로 굳어 버렸다고 전한다.

그후 제상의 26세손 명천(命天)이 고려(高麗) 때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내고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으로 예원군(禮原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영해(寧海)를 본관(本貫)으로하여 제상(堤上)을 시조로 하고 명천(命天)을 중시조(中始祖)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신라 자비왕(慈悲王) 때 명신(名臣)인 문량(文良)은 제상의 아들로 천성(天性)이 청렴결백하여 항상 가난 속에서 청빈(淸貧)하게 살았으며, 거문고(彈琴)를 즐겼고, 의복(衣服)이 남루하여 백군데나 기운 누더기 옷을 입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478년(자비왕 21) 그가 65세 때 이벌찬(伊伐湌)의 벼슬에 올라 아첨하는 무리들이 많음을 개탄하여 천재(天災)·치폐(治弊)·처경(處境)·흥인(興人)·지인(知人)·화인(化人) 등 여섯 장(章)의 상소문(上疎文)을 올리니 이 상소문은 너무도 유명했다.

어느해 섣달 그믐날 사방에서 떡방아 소리가 요란하자 그의 부인이 “남들은 곡식이 풍부하여 떡방아를 찧는데 우리는 당장 먹을 양식조차 없으니 어찌할꼬”하며 탄식하자 그는 태연하게 “사람에게는 수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매인 것이니 오게 되면 받는 것이요 가게 되면 막을 수 없는 것인데, 부인은 왜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오”하며 거문고를 당겨 방아소리를 구성지게 내어 부인을 위로하였다.

이 방아타령은 우식곡(憂息曲)을 대신하여 서라벌에 온통 퍼져 즐겨 불렀다고 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거문고로 회포를 푸니 이것을 〈낙천낙(樂天樂)〉이라하였다.

영해 박씨는 특히 신라와 고려조에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名門)의 기초를 다졌다. 고려 때 인물로는 중시조 명천(命天:예원군)의 아들 윤(論)이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상주국(上柱國)에 올라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판병부사(判兵部事)에 이르렀으며, 그의 손자 선(宣)이 문종(文宗) 때 진국공신(鎭國功臣)으로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내고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그후 경창공주(慶昌公主)와 혼인하여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진 태고(太古:선의 아들)의 아들 용재(用才)와 용량(用良)의 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하여 가문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는데, 맏아들 용재는 예빈경(禮賓卿)에 증직(贈職)되고 차남 용량은 은청광록대부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다.

한편 관(琯)의 아들 원계(元桂)는 19세로 과거에 급제하여 충숙왕(忠肅王) 때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와 전법 판서(典法判書)를 지냈으며, 경(經)은 우왕(禑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조선이 개국(開國)된 후 대사헌(大司憲)과 완산부윤(完山府尹)을 역임하여 평양 서윤(平壤庶尹) 창령(昌齡)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 밖의 인물로는 세조(世祖)의 왕위찬탈을 개탄하여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정재 조상치(曺尙治) 등과 함께 김화(金化) 초막동(草幕洞)은 은거(隱居)하여 단종복위를 도모했던 도(渡)·제(濟)의 형제와 규손(奎孫)·효손(孝孫)·천손(千孫) 3형제가 유명했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진(璡)의 아들 치안(致安)은 당대에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쳐, 순조(純祖) 때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와 감찰(監察)을 지낸 명벽(命壁)과 함께 충절(忠節)의 전통가문(傳統家門)인 영해 박씨를 대표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해박씨(寧海朴氏)는 남한(南韓)에 31,5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영해박씨조상인물

박문량(朴文良) 414 (보성왕 13) ~ 478 (자비왕 21)

초명(初名)은 효원(孝元), 호(號)는 백결(百結), 혁거세(赫居世)의 10세손(世孫), 충렬공(忠烈公) 제상(堤上)의 아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둘째 누이 아영(阿榮:미사흔의 아내) 밑에서 자라나 각간(角干) 이수현(李壽玄)의 딸과 혼인하였다.

벼슬에 나가서도 항상 청렴 결백하여 집안이 몹시 가난했고 거문고를 즐겨 탔으며, 언제나 백군데 정도의 기운 옷을 입으니 사람들은 그를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 불렀다.

박등흔(朴登欣) 자(字)는 내계(乃繼). 신라(新羅) 자비왕(慈悲王) 때 대장군(大將軍)·이찬(伊湌)을 역임하였다.

박의각(朴義珏) 자(字)는 사성(士成), 호(號)는 마서우(麻西于), 등흔(登欣)의 아들. 신라(新羅) 자비왕(慈悲王) 때 계림대도독(鷄林大都督)·참지정사(參知政事)·상주국(上柱國) 등을 역임하였다.

박담(朴 曇) 자(字)는 여랑(汝良), 호(號)는 마영간(麻靈干), 의각(義 珏)의 아들. 신라(新羅) 소지왕 때 출생하여 급벌찬(級伐湌)·대아찬(大阿湌) 등을 역임하였다.

박유(朴 紐) 554 (진흥왕 15) ~ ?

자(字)는 공중(公仲),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신라 때 이찬(伊湌)· 상주국(上柱國)·태자시서(太子侍書) 등을 지냈다.

박용문(朴龍文) 584 (진평왕 6) ~ ?

자(字)는 순경(舜景), 시호(諡號)는 무열(武烈). 626년(진평왕 48) 예부령(禮部令)으로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고, 김유신(金庾信) 과 함께 침략한 고구려군(高句麗軍)을 격퇴하였으며, 654년(무열왕 1)에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말갈(靺鞨)의 연합군을 당나라 구원 병과 김유신(金庾信)·유백영(劉伯英)과 더불어 격파하는데 공을 세워 대총관요동도안무사(大摠管遼東道按撫使)·파진찬(波珍湌) 등을 역임하였다.

박경한(朴京漢) 자(字)는 선행(善行), 시호(諡號)는 충경(忠敬), 용문(龍文)의 아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 삼한통합(三韓統合)에 공을 세워 일길찬(一吉湌) 등에 이르렀다.

박인범(朴仁範) 자(字)는 군여(君汝),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경한(京漢)의 아들. 당나라 신무왕(神武王) 때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대총관(大摠管)·대아찬(大阿湌) 등을 역임하였다.

박유(朴 裕) 자(字)는 태형(泰亨), 시호(諡號)는 문순(文純). 신라(新羅) 성덕여왕(聖德女王) 때 통문학 박사(通文學博士)·상대등(上大等) 등을 역임하였다.

박수봉(朴秀奉) 702 (성덕왕 1) ~ ?

자(字)는 보경(輔卿), 유(裕)의 아들., 신라에서 일길찬(一吉湌)을 역임하였다.

박계업(朴季業) 756 (경덕왕 15) ~ ?

자(字)는 치장(稚章),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수봉(秀奉)의 아들. 시중(侍中)·상대등(上大等)·일길찬(一吉湌) 등을 지냈고, 신라 헌덕왕 (憲德王 2)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당 덕종(德宗)으로부터 태복 소경(太僕少卿)에 제수되었으며, 귀국 후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박술홍(朴術洪) 883 (헌강왕 9) ~ ?

자(字)는 가숙(可叔), 시호(諡號)는 공효(恭孝). 신라(新羅) 때 아찬 검교사성(阿湌檢校尙書)·좌복야(左僕射) 등을 지냈으나 견훤(甄萱)의 난을 비롯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박광렴(朴光廉) 951 (광종 2) ~ ?

자(字)는 지수(志守), 호(號)는 청허당(淸虛堂), 시호(諡號)는 문충 (文忠). 효성이 지극하여 정충효각(旌忠孝閣)이 세워졌고 한림학사(翰 林學士)를 거쳐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되었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삼한벽상공신대광(三韓壁上功臣大匡)에 봉해졌다.

박도덕(朴度德) 1008 (목종 11) ~ ?

자(字)는 수겸(搜謙), 호(號)는 순취(順翠), 시호(諡號)는 문효(文孝). 고려(高麗) 목종(穆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문하시중(門下侍中) 을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다.

박황(朴 璜) 1102 (숙종 7) ~ ?

자(字)는 한경(漢卿).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금(金) 나라에 갔다가 순절(殉節)하였다.

박명천(朴命天) 고려(高麗) 때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에 추증되었고, 예원군(禮原君)에 봉해졌으며 양동(楊東) 숭례사(崇禮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박윤(朴 論) 예원군(禮原君) 명천(命天)의 아들. 고려 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상주국 평장사(上柱國平章事)를 역임하였다.

박달유(朴達儒) 윤(論)의 아들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판병부사(判兵部事) 등을 역임하였다.

박선(朴 宣) 시호(諡號)는 문양(文襄), 달유(達儒)의 아들.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진국공신(鎭國功臣)으로 태자태사(太子太師) 등을 지냈으며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박태고(朴太古) 시호(諡號)는 충의(忠毅),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 선(宣)의 아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밀직제학(密直提學) 등을 역임하였으며, 경창공주(慶昌公主)와 결혼하였고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다.

박용량(朴用良) 시호(諡號)는 충민(忠敏), 영성군(寧城君) 태고(太古)의 아들.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였다.

박송비(朴松庇) 1258 (고종 45) ~ ?

김인준(金仁俊)과 같이 최 의(崔誼)를 죽이고 정권(正權)을 왕실에 반환시키는데 공을 세워 위사공신(衛社功臣)·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태자태사(太子太師) 등을 역임하였다.

박인근(朴仁謹) 시호(諡號)는 충정(忠靖). 고려 때 신호위 대장(神虎衛大將)을 역임하였다.

박세통(朴世通) 인근(仁謹)의 아들. 고려 고종(高宗) 때 출생하여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통해군(通海君)에 봉해졌고 중영공신당(重營功臣堂)에 배향(配享)되었다.

박원계(朴元桂) 1282 (충렬왕 8) ~ 1348 (충숙왕 4)

자(字)는 순규(舜圭), 관(琯)의 아들. 권 부(權溥)의 문인. 19세에 문과(文科)에 급제, 전주목(全州牧)의 사록(司錄) 겸 장서기(掌書記)가 되고, 뒤에 권지전교교감(權知典校校勘)을 거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충선왕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충실히 모셔 사랑을 받았다.

1335년(충숙왕 복위 4) 감찰 장령(監察掌令)이 되어 기강(紀綱)을 바로잡고 집의(執義)에 승진, 뒤에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가 되었다가 전법 판서(典法判書)를 지냈다.

박홍무(朴洪茂) 통해군(通海君) 세통(世通)의 아들. 고려(高麗)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등을 역임 하였고 영해(寧海)의 운계서원(雲溪書院)과 양동(楊東)의 숭례사(崇禮 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박감(朴 憾) 호(號)는 역옹(轢翁), 밀직사(密直使) 홍무(洪茂)의 아들.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좌복야(左僕射) 등을 역임하였고 강양백(江陽伯)에 봉해졌다.

박구(朴 球) 자(字)는 경옥(景玉), 호(號)는 돈옹(豚翁), 백감(伯減)의 증손. 고려 때 권농병마단련판관(權農兵馬團鍊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박경(朴 經) 1350 (충정왕 2) ~ 1414 (태종 14)

시호(諡號)는 양정(良靖), 시중(侍中) 감(減)의 증손.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1379년(우왕 5)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했다. 조선 건국 후 1395년(태조 4) 대사헌에 오르고, 1402년(태종 2) 총제(摠制)로 재직중 사신을 영접하지 않은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1405년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에 등용되고 1411년 대 사헌에 재임. 1412년 완산부윤(完山府尹)이 되었다.

박자청(朴子靑) 1357 (공민왕 6) ~ 1423 (세종 5)

시호(諡號)는 익위(翼魏), 도총관 장검(張儉)의 아들. 내시(內侍)에서 낭장(郎將)이 되었고,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중랑장(中郞將)으로 승진, 이듬해 입직당번(入直當番)으로서 궁문(宮門)을 지킬 때 왕제 의안대군(義安大君)이 부름받은 일도 없이 입궁하려는 것을 구타 당하면서까지 제지하여 태조의 신임을 받아 특히 호군(護軍)으로 승진, 내상직(內上直)이 되어 유악(惟幄)의 숙위(宿衛)를 담당했다.

선공소감(繕工少監)을 지낸 후 1396년 호익사 대장군(虎翼司大將軍)으로 동북면 선위사(東北面宣慰使)가 되어 동맹가티무르(童猛哥帖木 兒)를 초유(招諭)했다.

1402년(태종 2) 공조·예조의 전서(典書), 1406년 중군 총제(中軍摠 制) 겸 선공감사(繕工監事)가 되는 등 주로 영선(營繕)을 맡았다. 1408년 공조 판서로서 제릉(齊陵)·건원릉(健元陵)의 공사를 감독하는 등 토목공사를 관장한 공으로 1418년 참찬(參贊)을 거쳐 판우군도총 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이르렀다.

박창령(朴昌齡) 1377 (우왕 3) ~ ?

자(字)는 원길(元吉). 조선(朝鮮) 때 평양 서윤(平壤庶尹)을 역임하였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박우(朴 愚) 자(字)는 경로(敬魯), 호(號)는 추암(秋庵), 대사헌(大司憲) 양(揚)의 아들. 조선 성종(成宗)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태화현감(泰化縣監)을 역임하고, 양동(楊東)의 숭례사(崇禮祠)에 배향되었다.

박낭(朴 浪) 1394 (태조 3) ~ ?

평양 서윤(平壤庶尹) 창령(昌齡)의 아들. 조선 때 병조 정랑(兵曹正郞)·이조 참의(吏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박도(朴 渡) 1396 (태조 5) ~?

평양 서윤(平壤庶尹) 창령(昌齡)의 둘째 아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에 재임중 단종(端宗)이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양도할 때 김시습(金時習:매월당)·조상치(曺尙治:정재) 등 9현(賢)과 함께 김화 초막동(金化草幕洞)에 은둔하여 단종 복위를 모의한 7의사(義士)의 한 사람으로 구은사(九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박제(朴 濟) 1399 (정종 1) ~ ?

호(號)는 경은(坰隱), 창령(昌齡)의 셋째 아들.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재직중 단종 복위(端宗復位)를 모의하였던 7의사(義士)의 한 사람으로 구은사(九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박치안(朴致安) 1380 (우왕 6) ~ ?

자(字)는 공기(公器), 호(號)는 송촌(松村),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진(璡)의 아들. 숭정대부(崇政大夫)·펀즁츄뷰서(判中樞府事)에 봉해졌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힘써 문장(文章)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박규손(朴奎孫) 1426 (세종 8) ~ ?

호(號)는 탁영재(濯纓齋), 병조 정랑(兵曹正郞) 낭(浪)의 아들. 예빈 향(禮賓鄕)에 재직중 단종 복위(端宗復位)를 도모하다가 실패하였던 7의사(義士)의 한 사람으로 구은사(九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박효손(朴孝孫) 1428 (세종 10) ~ ?

자(字)는 자경(子慶), 호(號)는 운와(雲窩), 병조 정랑(兵曹正郞) 낭(浪)의 둘째 아들. 형조 참판(형조참판(刑曹參判)에 있을 때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하다 실패하였던 7의사(義士)의 한 사람으로 구은사(九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박천손(朴千孫) 1431 (세종 13) ~ ?

호(號)는 규은(葵隱), 낭(浪)의 셋째 아들. 사직(司直)에 재임되었을 때 단종 복위(端宗復位)를 꾀하려다 실패하였던 7의사(義士)의 한 사람으로 구은사(九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박계손(朴季孫) 1419 (세종 1) ~ ?

자(字)는 자현(子賢), 호(號)는 포신(逋臣), 시호(諡號)는 정절(貞節), 사복시정(司僕寺正) 도(渡)의 아들.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면서 단종(端宗)이 왕위를 양도할 때 부친(父親)·숙부(叔父)·형제(兄第)·종형제(從兄第) 7현(七賢)과 김시습(金時習:매월당)·조상치(曺尙治:정재) 등 9현(九賢)이 김화 초막동(金化草幕洞)에 은둔하여 단종 복 위(端宗復位)를 모의하다 실패하였던 7의사(義士)의 한 사람으로 구은사(九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박인손(朴璘孫) 1417 (태종 17) ~ ?

호(號)는 성로(醒老), 사복시정(司僕寺正) 도(渡)의 아들. 병조 정랑 (兵曹正郞)으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정재(靜齊) 조상치(曺尙治)를 비롯하여 중숙부(仲叔父)와 종형제(從兄第) 등 7현(賢)과 함께 단종 복위(端宗復位)를 도모한 7의사(七義士)의 한 사람으로 구은 사(九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박명벽(朴命壁) 1773년 (영조 49) ~ 1827 (순조 27)

자는 희립(希立), 호는 금호(錦湖)·습재(習齋),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사섭(師燮)의 아들. 오희상(吳熙常)의 문인. 1813년(순조 1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816년 의릉 참봉(義陵參奉)이 되고,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에 이어 감찰(監察)에 전임했다가 어머니의 상(喪)으로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 전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