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순천박씨(順天朴氏),순천박씨시조,박영규(朴英規),순천박씨유래,순천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1 14:35 수정일 : 2018-01-08 14:27

순천박씨시조 및 순천박씨유래

순천박씨(順天朴氏)의 시조(始祖) 영규(英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일곱째 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언지(彦智)의 아들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의 사위로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창업(創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좌승(左丞)에 올라 승주군(昇州君)에 봉해졌으며, 후손 난봉(蘭鳳)은 평양(平陽:순천의 옛 지명)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영규(英規)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순천(順天)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으나, 그후의 계대(繼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충숙왕(忠肅王)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숙정(淑貞)을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순천(順天)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백제시대(百濟時代)에 함평군(欿平郡)이었으나 신라(新羅) 때 승평(昇平)으로 고쳤으며, 996(고려 성종 15)에 승주(昇州)로 하였다가 정종(靖宗) 때 승평군(昇平郡)이 되고, 1309(충선왕 1) 승주목(昇州牧)으로 승격하였다.

그후 순천부(順天府)로 강등되고 조산조(朝鮮朝)에 도호부(都護府)가 되었으며, 여러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순천군(順天郡)으로 개칭, 1949년 순천읍과 일부 면을 통합하여 순천시(順天市)가 되고 종래의 순천군은 승주군(昇州郡)으로 개칭되었다.


충절(忠節)의 가문(家門)으로 알려진 순천 박씨는 일세조 숙정이 슬하에 아들 5형제를 두어 가문이 크게 융성하기 시작했는데, 맏아들 원룡(元龍)은 시랑(侍郞)을 역임했고, 막내 원상(元象)은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으며,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른 천상(天祥:원료의 아들)의 아들 가흥(可興:좌정승)․가실(可實:판계림윤)․가권(可權:개성판윤) 3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조선조에 와서는 가흥의 아들 석명(錫命)이 태종(太宗) 때 명신(名臣)으로 유명했다. 그는 정종(定宗), 태종(太宗)과 더불어 이불을 같이 덮고 잤을 만큼 절친한 사이였으며, 고려 공양왕(恭讓王)의 아우인 왕우(王瑀)의 사위이기 때문에 조선이 개국되자 화()를 피하기 위하여 7년간이나 은거(隱居)하다가 태종 때 좌명삼등공신(佐命三等功臣)으로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다.

석명의 손자가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하던 중선(仲善)이며, 목사(牧使) 안생(安生:공조 전서 원상의 아들)의 아들 중림(仲林)1423(세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이어 중시(重試)에 급제하고 집현전 학자(集賢殿學者)로 선임되었으며 단종(端宗) 때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으나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아들 팽년(彭年)․인년(引年)․기년(耆年)․대년(大年)․영년(永年) 5형제와 손자 헌()․순() 등과 함께 참화를 당했다.

세조(世祖)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던 1456(세조 2) 아버지와 함께 사육신과 더불어 단종복위를 도모했던 팽년(彭年)의 형제들은 형()에 임하며 울며 고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려 하매 효에 어긋납니다 하니 중림은 임금을 섬기는데 충성하지 못한 것은 효가 아니다 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팽년은 성삼문(成三門)과 함께 세종(世宗)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으며, 경학(經學)․문장(文章)․필법(筆法) 등에 빼어난 석학(碩學)으로 세조 때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올라 사육신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거사(巨事) 직전에 탄로나 화(禍)를 입었다.

국문(鞠問)을 하던 세조는 팽년의 재주를 아껴 만일 네가 나를 섬기면 살려 주겠다 라고 회유했으나 그는 나는 상왕의 신하이지 당신의 신하는 아니오 라며 이를 거절하였다.

세조가 사육신들을 옥에 가두었을 때 김질(金礩)로 하여금 술을 가지고 가서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불렀던 하여가(何如歌)로 마음을 떠 보려 하니 성삼문은 정몽주의 노래로 대답하였고, 팽년은 아래와 같은 시(詩)로 답했다.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랴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마다 쫓을소냐.

팽년의 일가가 멸족될 때 둘째 아들 순(珣)의 아내 성주 이씨(星州李氏)가 임신중이었는데 나라에서는 이 뱃속에 든 아이까지도 아들일 경우에 죽이라는 선고를 내렸다. 교동현감(喬洞縣監) 이질근(李軼根)의 딸인 이(李)부인은 친정인 경북 달성군 하빈면 사동(慶北達成郡河濱面沙洞:일명 묫골)에 내려가 살다가 아이를 낳으니 아들이었다. 유일한 이 혈손을 보존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마침 충비(忠婢)가 딸을 낳자 서로 바꿔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자라났다.

이 아이가 장성한 후인 성종(成宗) 때 순(珣)과 동서지간이던 이극균(李克均)이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로 내려와 울면서 자수를 권고시키자 16세의 소년은 한양(漢陽)으로 달려가서 왕에게 팽년의 자손임을 고했다. 성종은 기뻐하면서 특사령을 내리고 이름도 일산(壹珊)으로 고쳐주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의 주역인 원종(元宗:중선의 아들)은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는데 무과(武科) 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르기는 신경진(申景禛:평산 신씨 신입 장군의 아들)과 함께 역사상 두 사람 뿐이다.

그는 신장이 9척이며 풍채가 의젓하였고,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윤여필(尹汝弼)의 처남으로 구속됨이 없었고 영웅 기질이 짙은 무인(武人)이었다고 한다. 그의 누이가 연산군(燕山君)에게 몸을 더럽혔을 때 원종을 불러 원수를 갚아 달라면서 이를 악물고 죽자 그는 이것이 항상 원한에 사무쳐 성희안(成希顔)․류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반정을 단행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의하면 그는 호방하였고 위선(僞善)을 하려고도 않았으며, 항상 공부하면서 겸손하였고, 중종은 대사(大事) 때마다 그의 의견을 꼭 물었다고 한다.

그밖의 인물로는 광해군(光海君) 때 대사성(大司成)과 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했다가 삭탈관직된 이장(而章)과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으로 숙종(肅宗) 때 왕장(王子)의 스승을 지내고 「손재집(遜齋集)」․「진호문답(晋湖問答)」․「나소판무(羅疏誣)」 등의 저서를 남긴 광일(光一:상현의 아들)이 유명했으며, 임진왜란 때 성주(星州)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용맹을 떨쳤던 이현(而絢)의 아들 영서(永緖)는 인조(仁祖) 때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平定)하다가 황주(黃州)의 신교(薪橋)에서 죽음을 당했다.

임진왜란 때 호서(湖西)에서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義兵)을 이르켰던 춘무(春武)의 아들 동명(東命)은 아버지와 더불어 선봉장으로 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왕(王)을 호종(扈從)하다가 무계(茂溪)에서 청(淸)나라 군사와 분전중 순절하였고, 선조의 특혜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에 등용된 계창(繼昌:일산의 후손)과 임란에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오른 충후(忠後)는 효종(孝宗)의 스승이었던 공구(羾衢)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정조(正租) 때 등과(登科)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내고 이의준(李義駿)․이서구(李書九)과 함께 「장릉사보(莊陵史補)」를 완정한 기정(基正)은 이인좌(李麟左)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功)을 세워 민웅(敏雄:부사 원직의 손자)과 함께 충절(忠節)의 가문(家門)인 순천 박씨(順天朴氏)를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천박씨(順天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105,2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순천박씨조상인물

박숙정(朴淑貞) 고려 때 정순대부(正順大夫)로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고, 관동 존무사(關東存撫使)에 있을 때 경포대(鏡浦臺)의 사선정(四仙亭) 및 선차정(仙槎亭)을 창건하였다.

박원룡(朴元龍) 고려조(高麗朝)에 시랑(侍郞)을 지냈다.

박원구(朴元龜) 고려에서 낭장(郎將)을 지냈다.

박원린(朴元麟)고려(高麗) 때 시랑(侍郞)을 지냈다.

박원상(朴元象) 고려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다.

박천상(朴天詳) 고러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박가흥(朴可興) 고려(高麗) 때 좌정승(左政丞)을 역임하였다.

박가실(朴可實) 고려에서 판계림윤(判鷄林尹)을 지냈다.

박가권(朴可權) 고려조(高麗朝)에 개성 판윤(開城判尹)을 지냈다.

박장생(朴長生) 조선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박안생(朴安生) 조선조(朝鮮朝)에 목사(牧使)를 지냈다.

박석명(朴錫命) 1370 (공만왕 19) ~ 1406(태종 6)

호(號)는 이헌(頤軒).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재상(宰相) 가흥(可興)의 아들.

1385년(우왕 11) 문과(文科)에 급제, 1390년(광양왕 2) 우부대언(右副代言)․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귀 의군(歸義君) 왕우(王瑀:공양왕의 아우)의 사위이기 때문에 화를 피 하기 위해 7년간 은거했다.

1399년(정종 1) 좌산기상시(左散騎常使)로 기용,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정정(定宗)이 태종(太宗)에게 선위(禪位)하자 그 교서(敎書)를 가져가서 태종(太宗)을 옹립했다.

1401년 좌명공신(左命功臣) 3등이 되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진 후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1405년(태종 5) 지의정 부사(知議政府事), 이듬해 함경도 선위사(咸鏡道宣慰使)․전라도 도체찰사(全羅道都體察使) 등을 역임, 다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대사헌(大司憲)을 겸 직했다.

박순명(朴順命)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안명(朴安命) 조선(朝鮮) 때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

박유성(朴柳星) 조선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박두성(朴斗星) 조선 때 참판(參判)을 지냈다.

박중림(朴仲林) ? ~ 1456 (세조 2)

호(號)는 한석당(閑碩堂), 시호(諡號)는 문민(文愍), 목사(牧使) 안생(安生)의 아들, 팽년(彭年)의 아버지. 14 23년(세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142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저명한 유학자(儒學者) 로서 세종(世宗) 때 집현전 학자로 선임되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성 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이 배출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455년 대사헌(大司憲)․이조 판서(吏曹判書) 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아들 팽년과 함께 단종(端宗)을 복위시키 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사형되었다. 뒤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박증원(朴增原)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박팽년(朴彭年) 1417 (태종 17) ~ 1456 (세조 2)

자(字)는 인수(仁叟), 호(號)는 취금헌(醉琴軒), 시호(諡號)는 충정 (忠正), 판서 중림(仲林)의 아들.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로서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았다. 143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1447년(세종 2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했다.

1455년(세조 1)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고, 이듬해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서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류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김질(金礩) 등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체 포된 후 그의 재능을 아낀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고 사형당했다.

뒤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과천(果川)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洪州)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 여러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인년(朴引年) 조선(朝鮮) 때 교리(校理)를 지냈다.

박기년(朴耆年) 조선 때 수찬(修撰)을 지냈다.

박대년(朴臺年) 조선조(朝鮮朝)에 박사(博士)를 역임하였다.

박영년(朴永年) 조선에서 예문관 검열(藝文官檢閱)을 지냈다.

박거완(朴去頑) 조선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거소(朴去踈) 조선(朝鮮) 때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하였다.

박호선(朴好善) 조선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중선(朴仲善) 1435(세종 17)~1481(성종12)

자(字)는 자숙(子淑), 시호(諡號)는 양소(襄昭),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거소(去踈)의 아들.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에 들어갔다가 부호군(副護軍)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겸임하고, 1460년(세조 6) 무과 (武科)에 장원, 훈련원 부사(訓練院副使)가 되었다.

이어 지훈련관사(知訓鍊觀使)에 승진, 예빈시 소윤(禮賓侍少尹)․부지통레문사(副知通禮門事)․판군기검사(判軍器監事)․지병조사(知兵曹事) 등을 역임하고 1463년(세조 9) 병조 참의(兵曹參議), 1466년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 나자 귀성군(歸城君) 준(浚)의 휘하에서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 황 해도 관군을 인솔하여 난을 진압한 후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진 후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승진했다.

이어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거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재임되고, 1468년(예종 즉의)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이 되고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진, 1471 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이 되었다. 1477년 경기도 관찰사 (京畿道觀察使), 다음해 이조 판서(吏曹判書), 1479년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박숙선(朴叔善) 조선 때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하였다.

박계선(朴季善) 조선조에 감찰(監察)을 지냈다.

박승선(朴承善) 조선(朝鮮) 때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박일산(朴壹珊) 충정공(忠正公) 팽년(彭年)의 아들. 조선(朝鮮)에서 시정(侍正)을 지냈다.

박원종(朴元宗) 1467 (세조 13) ~ 1510 (중종 5)

자(字)는 백윤(伯胤),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중선(仲善)의 아들. 무술에 뛰어나 음보(蔭補)로 무관직(武官職)에 기용되었고, 1486년(성종 17) 선전관(宣傳官)으로 있을 때 무과 (武科)에 급제, 선전 내승(宣傳內乘)으로 오랫동안 왕을 측근에서 모셨다. 1492년 성종(成宗)의 특지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된 후 공조․병조의 참의(參議)를 거쳐, 연산군(燕山君) 때 지중추부사 (知中樞府事) 겸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지내고,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이어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져도 총부 도총관(都摠部都摠管)을 겸했다.

1506년 성희안(成希顔)․류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이룩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하여 정국 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 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1507년 이과(李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이 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1509년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이듬해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중종(中宗)의 묘종(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박이온(朴而溫) 조선 때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박이장(朴而章) 자(字)는 숙빈(叔彬), 호(號)는 용담(龍潭). 노수신(盧守愼)의 문인. 1573년(선조 6) 생원(生員)이 되고, 성균관(成均館)의 추천으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1586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예문관(藝文館)에 보직됭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 의 계청으로 도사(都事)가 되어 활약, 이듬해 지평(持平)․지제교(知 製敎)를 역임, 뒤에 이조정랑(吏曹正郞), 대사헌․이조 참판(吏曹參判)․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 정인홍(鄭仁弘)의 배척으로 청송 부사(靑松府使)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고, 이어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다시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615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되어 성주(星州)에서 후진 양성으로 여생을 마쳤다. 문장에 능하고 특히 시(詩)에 뛰어났다.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이량(朴而良) 조선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박이양(朴而讓)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박이훈(朴而勳) 조선 때 순성군(順成君)에 봉해졌다.

박이현(朴而絢) 1544 (중종 39) ~ 1592 (선조25)

자(字)는 여수(汝粹), 시호(諡號)는 의민(毅愍), 참봉(參奉) 대영(大榮)의 아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고 경명(高敬命)과 합세, 성주(星州)의 가천(伽川)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전사했다. 판서(判書)에 추증(追贈), 성주(星州)의 덕봉사(德峰祠) 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윤종(朴胤宗)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박 운(朴 雲) 조선 때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박운옥(朴雲玉) 조선(朝鮮)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박문효(朴文孝)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박충후(朴忠後)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영서(朴永緖) 자(字)는 효원(孝源), 시호(詩號)는 충장(忠壯). 옥구현감(沃溝縣監)과 창성 부사(昌城府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던 중 황주(黃州) 신교(薪橋)에서 고전(苦戰)을 겪자 홀로 적진에 뛰어들었다 잡혀 끝내 죽음을 당하니, 인조(仁祖)는 그를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하였고 정려(旌閭)를 세워 주었다.

박공구(朴羾衢) 조선(朝鮮) 때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을 지냈다.

박종남(朴宗男)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박숭고(朴崇古) 조선 때 동궁익찬(東宮翊贊)을 지냈다.

박춘무(朴春武) 호(號)는 화천당(花遷堂), 시호(諡號)는 민양(愍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조헌(趙憲)과 함께 호서(湖西)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 후 인천 부사(仁川府使)를 거쳐 참찬(參贊)에 추증되었다.

박동명(朴東命) ? ~ 1636 (인조 14)

자(字)는 시응(時應), 호(號)는 매은당(梅隱堂), 시호(諡號)는 충경(忠景), 장령(掌令) 춘무(春武)의 아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참전, 항상 선봉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1607년(선조 40) 선전관(宣傳官)으로 재직중 패망(悖妄)하여 동료들을 욕되 게 했다는 탄핵으로 파직, 뒤에 태안 군수(泰安郡守)․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扈從)하던 중무계(茂溪)에서 청나라의 군사를 만나 분전하다가 죽었다. 고향에 충신(忠臣)의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 판서에 추증(追增)되었다.

박상현(朴尙玄) 1629 (인조 7) ~ 1693 (숙종 19)

자(字)는 경초(景初), 호(號)는 우헌(寓軒). 경전(經傳)에 밝고, 특히 「대학(大學)」에 정통했다. 죽은 뒤 장령(掌令)에 추증(追增)되었다.

박광일(朴光一) 자(字)는 사원(士元), 호(號)는 손재(遜齋), 시호(諡號) 는 문숙(文肅), 상현(尙玄)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숙종(肅宗) 때 천거로 익위(翊衛)․왕자사부(王子師傅)․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숙종(肅宗)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광주(光州)의 진천사(眞泉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성수(朴聖洙) 조선 때 학자(學者)였다.

박여량(朴汝梁) 조선에서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박의형(朴宜形)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박경여(朴慶餘)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치도(朴致道) 조선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박성협(朴聖浹)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박광진(朴光進)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박광우(朴光遇) 조선(朝鮮)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박광적(朴光迪)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박종현(朴宗鉉) 조선(朝鮮)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박정현(朴珽鉉) 조선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박문현(朴文鉉) 조선에서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박기굉(朴基宏) 조선(朝鮮)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박광석(朴光錫) 조선 때 한성 우윤(漢城右尹)을 역임하였다.

박광보(朴光輔) 조선(朝鮮) 때 학자였다.

박기정(朴基正) 1748 (영조 24) ~ ?

자(字)는 일여(一如), 팽년(彭年)의 후손, 광주(光冑)의 아들. 음보(蔭補)로 현감(縣監)을 지내고 1784년(정조 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교리(校理)․승지(承旨)를 거쳐 참판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앞서 1796년(정조 20) 왕명으로 이의준(李義駿)․ 이서구(李書九)와 함께 「장릉지(莊陵志)」를 교정(校正), 「장릉사보(莊 陵史補)」를 완성했다.

박민웅(朴敏雄) 1674 (현종 15) ~ 1732 (영조 8)

자(字)는 사호(士豪), 호(號)는 서호산인(西湖山人), 부사(府使) 원 진(元震)의 손자, 청주(淸州) 출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수백명을 거느리고 의거(義擧), 재상(宰相)들의 천거로 충청 도 병마우후(兵馬虞候) 겸 창의사(倡義使)로 특진되어 난의 평정에 공헌, 이어 영남(嶺南)의 요충(要衝)인 상주(尙州)를 지키기위해서 상주영장(尙州營將) 겸 영남 창의사(嶺南倡義使)에 발탁되어 잔적(殘賊)을 토평하고 바로 귀향(歸鄕)하여 무단 이탈죄로 잠시 유배(流配) 되었다가, 1729년 해미 현감(海美縣監)․창성 부사(昌城府使), 이어 1732년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역임했다.

박규상(朴奎祥) 조선조(朝鮮朝)에 학자(學者)였다.

박규현(朴奎鉉) 조선 때 감역(監役)을 지냈다.

박해령(朴海齡) 조선(朝鮮)에서 학자였다.

박해구(朴海龜)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박해철(朴海哲)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박양동(朴陽東) 호(號)는 관어헌(觀魚軒), 제방(齊邦)의 아들. 기정진(寄正鎭)의 문인. 일평생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