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비안박씨시조(比安朴氏),박우(朴瑀),비안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0 11:47 수정일 : 2018-03-26 15:25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비안박씨(比安朴氏)는 신라 제5대 파사왕(破娑王)의 후손에서 갈려진 계통(系統)으로, 시조(始祖) 우(瑀)가 고려조(高麗朝)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병산군(屛山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월성 박씨(月城朴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관향(貫鄕)을 비안(比安)으로 삼게 되었다.

비안(比安)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군(義城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비옥(比屋)과 안정(安貞) 두 현(縣)의 합명(合名)인데, 비옥현(比屋縣)은 본래 신라(新羅)의 아화옥현(阿火屋縣)을 경덕왕(景德王) 때 비옥현으로 개명하였다.

한편 안정현(安貞縣)은 본래 신라의 아시혜현(阿尸兮縣)을 경덕왕이 안현현(安賢縣)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기에 안정현으로 개칭한 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두 현을 합해서 비안현(比安縣)이라 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그후 현서면(縣西面)은 예천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의성군에 병합되어 지금은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시조 우의 아들 일(逸)이 고려조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며, 증손(曾孫) 징(徵)은 공부 전서(工部典書)를 역임하고 슬하에 아들 형제를 두어 그중 맏아들 원(遠)이 대제학(大提學)을, 둘째 규(逵)는 현감(縣監)을 지냈다.

고려 말에 보승중랑장(保勝中郞將)에 올랐던 점(漸)은 대제학 원의 현손(玄孫)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그의 아들 서생(瑞生)이 태종(太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와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고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세종조(世宗朝)에 이조 참판(吏曹參判)과 대사헌(大司憲)에 올랐으며 청덕(淸德)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그는 실학정치(實學政治)에 밝아 통신사(通信使)로 일본(日本)에 갔을 때 민생(民生)을 위한 제도개선에 역점을 두고 세밀하게 조사해 와서 물레방아를 제작하여 농사(農事)의 관개(灌漑)에 혁신을 기했다.

서생(瑞生)의 손자 효원(孝元:북부 녹사 전의 아들)은 세조 때 등과(登科)하여 예종이 즉위하자 수찬(修撰)으로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성종(成宗) 때는 사간(司諫)으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선조(宣祖) 때 효행(孝行)으로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천거되었던 준(峻:풍기 군수 신원의 현손)은 광해군(光海君) 때 신녕(新寧)과 비안의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고향에 효자정려(孝子旌閭)가 세워졌다.

그밖의 인물로는 부사맹(副司猛) 혼(琿)의 맏아들 형종(亨宗)이 개천 군수(价川郡守)를 지냈으며, 준(峻)의 아들 종악(宗岳)은 이천 찰방(利川察訪)을 거쳐 숙종(肅宗)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여, 선교랑(宣敎郞)에 오른 계인(繼仁:병절교위 형성의 손자)과 함께 충효(忠孝)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비안박씨(比安朴氏)는 남한에 3,3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비안박씨조상인물

박일(朴 逸)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박징(朴 徵) 고려에서 공부 전서(工部典書)를 역임하였다.

박원(朴 遠) 고려(高麗)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박규(朴 逵) 고려조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계오(朴繼五) 고려(高麗)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박종주(朴宗柱) 고려(高麗) 때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지냈다.

박윤보(朴允甫) 고려조에 예부 낭중(禮部郎中)을 역임하였다.

박점(朴 漸) 고려 때 흥위위 보승중랑장(興威衛保勝中郞將)을 지냈다.

박서생(朴瑞生) 자는 영가(寧可), 호는 율정(栗亭), 중랑장(中郞將) 점(漸)의 아들. 길재(吉再)의 문인. 1401년(태종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14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고, 정언(正言)을 거쳐 이듬해 병조 좌랑(兵 曹佐郞)이 되었다.

1419년(세종 1) 집의(執義)를 거쳐 그후 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1428년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다녀온 뒤 우군 첨총제(右軍僉摠制)․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공조․병조의 참의(參議)를 지내고 1432년 판안동부사(判安東府事)로 나갔다. 이듬해 앞서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올 당시 배워온 수차(水車)의 사용을 건의하여 농사의 관개(灌漑)에 혁신을 기했다. 비안의 구천서원(龜川書院)에 제향되었다.

박전(朴 瑔) 조선조(朝鮮朝)에 북부 녹사(北部綠事)를 지냈다.

박혼(朴 琿) 조선에서 부사맹(副司猛)을 지냈다.

박신원(朴信元)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이하였다.

박효원(朴孝元) 자는 백인(伯仁), 전(瑔)의 아들. 1465년(세조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1469년(예종 1) 수찬(修撰)으로 검토관(檢討官)․교검(校檢) 등을 겸직했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세조실록(世祖實錄)」의 편찬에 참여, 뒤에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천문학관(天文學官)이 되었다.

1471년(성종 2) 병조 좌랑(兵曹佐郞), 1476년 장령(掌令), 이듬해 사간(司諫)으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평안도 순찰사(平安道巡察使) 허종(許琮)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했다.

박형종(朴亨宗) 조선(朝鮮) 때 개천 군수(价川郡守)를 지냈다.

박형도(朴亨道) 조선조(朝鮮朝)에 효력 부위(效力副尉)에 이르렀다.

박희성(朴希聖) 조선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박준(朴 峻) 1559 (명종 14) ~ 1625 (인조 3)

자는 자첨(子瞻), 부사(府使) 희성(希聖)의 아들. 1604(선조 37) 병중의 아버지를 지성으로 간호하여 낫게 한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헌릉 참봉(獻陵參奉)이 되고, 1611(광해군 3) 청백리(淸白吏)의 자손으로서 동부 주부(東部主簿)에 특진, 이어 감찰(監察), 신녕(新寧)․ 비안(比安) 등의 현감(縣監)을 지냈다. 한편 효행으로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