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면천박씨시조(沔川朴氏),박득의(朴得宜),박술희(朴述熙),면천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09 17:52 수정일 : 2018-03-04 20:32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면천박씨(沔川朴氏)는 신라 제5대 파사왕(婆娑王 : 제위기간 80~112)의 원손(遠孫)인 박득의(朴得宜)가 고려조(高麗朝)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대승(大丞)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술희(述熙)는 조선 초에 태사 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으로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득의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면천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면천(沔川)은 충청남도(忠淸南道) 당진군(唐津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 때에는 혜군(槥郡) 또는 지비(智非)라 부르던 것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혜성군(槥城郡)으로 개칭하였고,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운주(運州 : 홍주의 옛 지명)에 속하였다.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와서 면천군(沔川郡)으로 고쳤으나 1913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진군(唐津郡)에 속한 면천면(沔川面)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인물

「박씨원류사보(朴氏原流史譜)」에 의하면 술희는 어려서부터 호협하고 용맹스러워 18세에 궁예(弓裔)의 호위병으로 있다가 태조(太祖)를 도와 고려 창업(創業)에 공(功)을 세웠으며 936년(태조 19) 후백제 정벌(征伐) 때는 보기(步騎 :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진격하여 대첩을 거두었다. 태조는 승하할 때 그를 내전(內殿)으로 불러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친히 주며 태자(太字 : 혜종)를 잘 보필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그후 면천 박씨는 신기도령(神騎都令) 주(柱 : 술회의 손자)를 중조(中祖)로 받들고 기일세(起一世)하여 왔으며, 주의 9세손 심(諶)이 고려 말에 전서(典書)를 지내고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 땅에 은거하며 절의(節義)를 지켰다.

조선조에 와서는 심(諶)의 맏아들 수생(秀生)이 승의교위(丞義校尉)로 부사정(副司正)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거신(居信)은 벽동 군수(碧潼郡守)를 거쳐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로 무명(武名)을 떨쳤으며,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상의원 판사(尙衣院判事)를 역임한 유(攸)의 아들 효순(孝順)은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거쳐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올라 명성을 떨쳐다.

한편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삼길(三吉)이 이조 참판(吏曹參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했으며, 거신의 증손 여룡(汝龍)은 이율곡(李栗谷)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배우고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거쳐 공조 정랑에 이르러 스승의 유집(遺集)을 간행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義兵)을 일으

켜 전공을 세웠으므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해주(海州)의 방현서원(傍賢書院)에 제향 되었다.

그 외 인물로는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웠던 성렬(成烈)과 참찬관(參贊官) 치기(致岐)가 유명했고, 좌승지(左承旨) 처용(處庸)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한 태제(泰齊), 소위장군(昭威將軍) 의용(義容)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면천박씨(沔川朴氏)는 남한(南韓)에 4,3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면천박씨조상인물

박술희(朴述熙) ? ~ 945 (정종 즉위)

시호(諡號)는 엄의(嚴毅), 대승(大丞) 득의(得宜)의 아들. 18세 때 궁예(弓裔)의 호위병이 되고 후에 고려 태조(太祖)를 섬겨 전공을 세워 대광(大匡)이 되고, 936년(태조 19) 후백제(後百濟)를 칠 때 보기(步騎) 1만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다. 943년(태조 26) 왕이 죽을 때 내전(內殿)에서 군국 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다. 태사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에 추증(追贈), 혜종(惠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박인정(朴仁証) 고려(高麗) 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박계(朴 桂) 고려(高麗) 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박안(朴 安) 고려조(高麗朝)에 동정(同正)을 지냈다.

박대부(朴大富) 고려 때 상서(尙書)를 지냈다.

박금강(朴金剛) 고려조(高麗朝)에 동정(同正)을 역임하였다.

박여(朴 侶) 고려(高麗)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박심 (朴 諶) 자는 용길(用吉), 호는 해은(海隱). 조선때 전서(典書)를 역임하였다.

박승검 (朴承儉) 조선(朝鮮)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박수민(朴秀敏) 조선조에 사직(司直)을 역임하였다.

박유(朴 攸) 조선(朝鮮)때 상의원 판사(尙衣院判事)를 지냈다.

박거신(朴居信) 조선 때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하였다.

박효순(朴孝順) 조선조(朝鮮朝)에 훈련원정(訓練院正)을 지냈다.

박겸(朴 謙) 조선에서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박삼길(朴三吉) 1442 (세종 24) ~ 1509 (중종 4)

자는 동리(東利), 호는 백비(白扉), 효순(孝順)의 아들, 학문에 열중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했고, 1474년

(성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1485년(성종 16) 예조 좌랑(禮曹佐郞)․정언(正言)을 거쳐 헌납(獻納)․지평(持平)․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연산군(燕山君)초 지회양부사(知淮陽府事)를 지내고, 150 4년(연산군 10)대사간(大司諫)․병조 참의(兵曹參議)를 거쳐 이듬해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으나 연산군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후진양성에 힘썼으므로 사람들이 기로개(耆老皆) 선생이라 일컬었다.

박삼익(朴三益)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수의(朴守義)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박수지(朴守智) 조선(朝鮮)때 부위(副尉)를 역임하였다.

박장수(朴長壽) 조선조에 훈도(訓導)를 지냈다.

박여룡(朴汝龍) 1541 (중종 36) ~ 1611 (광해군 3)

자는 순경(舜卿), 호는 송애(松崖), 시호는 문온(文溫), 부호군(副濩軍) 수의(守義)의 아들. 이 이(李 珥)의 문인.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에서 평양 현감(平陽縣監)․호조 좌랑(戶曹佐郞)․평시 서령(平市暑令)을 거쳐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이르렀다. 이 이의 유집(遺集)을 간행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 해주(海州)의 방현서원(傍賢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성렬(朴成烈) 자(字)는 공보(功甫), 호(號)는 구일(九一). 조선조에 생원(生員)으로서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창의(倡義)하여 큰 공(功)을 세웠다.

박치기(朴致岐) 자(字)는 봉우(鳳宇). 조선 때 참찬관(參贊官)을 역임하였다.

박처용(朴處庸) 자(字)는 도경(道卿). 조선조(朝鮮朝)에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박민흡(朴敏潝) 자(字)는 성일(聖溢). 조선에서 참찬관(參贊官)을 지냈다.

박태제(朴泰齊) 자(字)는 중석(仲錫). 조선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한종(朴漢宗) 조선(朝鮮) 때 소위장군(昭威將軍)에 이르렀다.

박의용(朴義容)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박사의(朴思義) 자(字)는 중유(重有). 조선 때 위장(衛將)을 지냈다.

박수근(朴守根) 조선(朝鮮)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