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고령박씨(高靈朴氏) 신라 시조왕이신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의 제2자 고양대군 휘 언성(諱 彦成)을 시조로 뫼시고 있다.

작성일 : 2017-04-09 13:19 수정일 : 2019-12-27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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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박씨의 연원

고령박씨는 신라 시조왕(始祖王)이신 박혁거세(朴赫居世)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의 제2자 고양대군(高陽大君) 휘 언성(諱 彦成)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본관(本貫)의 유래는 고양대군의 봉토(封土)가 지금의 고령(高靈)인데 연유한 것으로 전해지며 그 밖에는 전기(傳記)가 없어 언급을 할 수는 없다.


고령박씨의 약사

우리 고령박씨는 시조(始祖)에 이어지는 계대(系代)와 소목(昭穆)이 분명하지 못하여 상계(上系)에서 호장공 파(戶長公派)와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그리고 주부공파(主薄公派) 3파로 나뉘어 각기 고려에서 명문거족으로 면목을 세웠다. 특히 홍위위대장군(興威衛大將軍) 휘 지순(諱 之順)을 위시하여 고양부원군에 봉군(封君) 되신 휘() 광순, 광우, 우생(光純, 光佑, 雨生)과 명장(名將)이신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 임종(林宗) 그리고 찬성사 휘 이(贊成事 諱 理)가 대표적 인물 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도 고령박씨는 타 박씨에 비해 그 손세가 현저히 적은 문중임에도 5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고 1명의 상신(相臣)과 많은 총재, 경재(家宰, 卿宰) 그리고 공신들을 배출하였는데 읍취헌 휘, (挹琴軒 諱, )이조판서 문효공 휘 장원(吏曹判書 文孝公 諱長遠) 영성군 충헌공 휘 문수(盡城君 忠憲公 諱 文秀) 좌의정 문익공 휘 영원(左議政 文翼公 諱 永元) 영선군 문정공 휘 영보(靈善君 文靖公 諱 永輔) 등과 제3공화국 대통령 (大統領)으로서 민족중흥과 조국 근대화를 이룩한 휘정희(諱正熙)는 호장공파에서 대표적으로 문중을 빛내신 분이라 할 것이다.

또한 부창정공파에서도 조선조 개국 초에 무숙공 휘 만(武肅公 諱 菱)을 위시하여 청백리(淸白吏)인 감사 휘 처륜(監司 諱 處輪)과 좌찬성 휘 영준(左贊成 諱永俊) 그리고 참의 휘 제순(參議 諱協順) 이조판서 휘 건(吏曹判書 諱 樓)과 병자호란 때의 충신 충숙공 휘 난영(忠肅公 諱 蘭英), 석학(碩學)으로 학암(鶴巖) 휘정번(諱廷璠)과 무민당 휘인(無問堂 諱細)등이 대표적으로 문중을 빛내신 분들이다.

그리고 끝으로 주부공파(主簿公派)에서는 태종조 때 공신 고창부원군 휘시()와 임진란 때 공신인 의병장(義兵將) 휘진남(震男) 등이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령박씨(高靈朴氏)는 남한(南韓)43,7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고령박씨조상인물

박인황(朴仁滉)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냈다.

박지순(朴之順) 고려(高麗) 때 강서인(江西人)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검교흥위대장군(檢校興威大將軍)이 되었다.

박길소(朴吉邵) 고려 때 감사(監司)를 역임하였다.

박섬(朴 暹) 고려조(高麗朝)에 어사(御使)를 지냈다.

박환(朴 還) 고려에서 부창정(副倉正)을 지냈다.

박연(朴 連) 고려 때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박윤정(朴允晶) 고려(高麗) 때 통례문 사인(通禮門舍人)을 역임했다.

박동신(朴東臣) 고려조에 동북면 찰리사(東北面察里使)를 지냈다.

박세영(朴世英) 고려(高麗) 때 동정(同正)을 지냈다.

박이(朴 理) 1283(충렬왕 9) 과거에 급제한 후 대광보국찬성사(大匡輔國贊成事)가 되었다.

박인걸(朴仁傑) 고려(高麗) 때 감문위 상장군(監門衛上將軍)을 지냈다.

박인비(朴仁庇) 고려 때 감문위 상장군(監門衛上將軍)을 지냈다.

박수견(朴守堅) 고려조(高麗朝)에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박지(朴 持) 고려에서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박광순(朴光純) 인걸(仁傑)의 손자, 찬성사(贊成事) 수견(守堅)의 아들. 고려 때 삼중대광 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를 역임하였고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하여졌다.

박광우(朴光佑)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순충양절국덕찬화공신(純忠亮節國德贊化功臣)으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박덕생(朴德生) 고려 때 상서(尙書)를 지냈다.

박임귀(朴林貴) 고려조(高麗朝)에 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박임종(朴林宗)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장군으로 기도(技都)를 토벌할 때 함께 큰 공()을 세웠으며, 1381(우왕 7) 서경 도순문사(西京都巡問使)가 되었고 이어 상호군(上護軍)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으며 수성익대보조공신(輸誠翊戴輔祚功臣)에 봉해졌다.

박만(朴 蔓) 시호(諡號)는 무숙(武肅). 태조조(太祖朝)에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박시(朴 是) 조선 태조(太祖) 때 고창부원군(高昌府院君)에 이르렀다.

박흥양(朴興陽) 문하시중(門下侍中) 광우(光佑)의 아들. 1386(우왕 12)에 감찰 지평(監察持平)을 거쳐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문하부사(門下府使)에 이르렀다.

박경(朴 景) 조선 세종(世宗) 때 사재감 소윤(司宰監少尹)을 지냈다.

박진언(朴眞言) 조선 세종 때 종묘 서승(宗廟署丞)을 지냈다.

박계손(朴季孫) 조선 세종 때 창신교위(彰信校尉)로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하였다.

박공순(朴恭順) 조선 세종(世宗)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박건순(朴建順) 조선 세종(世宗)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박지(朴 持)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사란(朴思爛) 1438(세종 20) 문과에 급제한 후 감찰(監察)을 지냈다.

박임익(朴林益) 조선 세종(世宗) 때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박석생(朴碩生)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박수산(朴壽山)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어모장군(御侮將軍)에 이르렀다.

박윤빈(朴允斌) 조선 세종(世宗)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제순(朴悌順) 1468(세조 14)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했다.

박진(朴 稹)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문형(朴文亨) 조선 세종(世宗) 때 사정(司正)을 역임하였다.

박익엄(朴益儼) 조선 세종(世宗)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박익의(朴益儀) 조선 세종조(世宗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용화(朴用和) 조선 세종(世宗)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박계분(朴季芬) 조선 세종(世宗) 때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했다.

박숙동(朴叔童) 조선 세종(世宗) 때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다.

박담손(朴聃孫) 조선 세조(世祖)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박망달(朴望達) 조선 세조(世祖)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박세광(朴世光) 조선 세조(世祖) 때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박승로(朴承老)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형(朴 炯) 조선 세조(世祖)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박춘산(朴春山) 조선 세조(世祖) 때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하였으며 정난공신(靖亂功臣)에 봉해졌다.

박종무(朴宗武) 조선 성종(成宗) 때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冊錄)되었다.

박아생(朴峨生) 조선 성종(成宗)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선(朴 璿) 조선 성종(成宗) 때 만호(萬戶)를 지내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박처륜(朴處綸) ()는 거경(巨卿). 1470(성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 세조실록(世祖實錄)」․「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1495(성종 28)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러 관압사(官押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어 청렴결백한 관리로 명성을 떨쳤다.

박계간(朴季幹) 1475(성종 6) 문과에 급제한 후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박계조(朴繼祖) 조선 성종(成宗)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처강(朴處康) 조선 성종(成宗) 때 의영고정(義盈庫正)을 지냈다.

박이순(朴耳順) 조선 성종(成宗) 때 교수(敎授)를 지냈다.

박안인(朴安仁) 조선 성종(成宗)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문간(朴文幹) 1480(성종 11) 문과에 급제한 후 교리(校理)를 지냈다.

박중간(朴仲幹) 1480(성종 11) 문과에 급제한 후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였다.

박조(朴 稠) 조선 성종(成宗)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박은(朴 誾) 1479 (성종 10) 1504 (연산군 10)

()는 중설(仲說), 호는 읍취헌(揖翠軒),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담손(聃孫)의 아들. 15세 때 이미 문장에 능하여 대제학 신용개(申用漑)의 눈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되었다. 1495(연산군 1) 진사가 되고, 이듬해 18세로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149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승문원(承文院)에 발탁되었다가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수찬(修撰)을 역임, 경연관(經筵官)으로 5년간 있으면서 류자광(柳子光)성 준(成 俊)이극균(李克均)의 죄상을 연산군에게 극언했다가 그들의 모함으로 투옥된 후 파직 당했다.

이때부터 산수를 주유하면서 문주(文酒)로써 소일, 독서에 열중하여 많은 책을 읽었고 1504년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으나 이해의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동래에 유배,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어 사형 당했다. 조선 5백 년의 으뜸가는 한시인(漢詩人)으로 일컫기도 한다

1506(중종 2) 신원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박장(朴 璋) 조선(朝鮮) 연산군(燕山君)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진(朴 稹) 1513(중종 8)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

박세광(朴世匡) 조선 중종(中宗) 때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박서(朴 瑞)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

박방룡(朴芳龍) 조선(朝鮮) 연산군(燕山君) 때 소윤(少尹)을 역임하였다.

박육(朴 稑) 1511(중종 6) 문과에 급제한 후 목사(牧使)를 지냈다.

박세정(朴世貞) 조선 중종(中宗) 때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역임하였다.

박자영(朴自英) 조선 중종(中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박자방(朴自芳) 조선 중종(中宗) 때 수사(水使)를 지냈다.

박공량(朴公亮) ? ~ 1556 (명종 11)

()는 명보(明甫), 수찬(修撰) ()의 아들. 진사(進士)1538(중종 3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정자(正字)가 되고, 박사(博士)부교리(副校理)우문학(右文學)을 역임,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헌납(獻納)을 거쳐 검상(檢詳)사인(舍人)집의(執義)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역임했다.

1551(명종 6) 황해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고 부승지(副承旨)승지(承旨)를 거쳐 1555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이 되고, 이듬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글씨에 능하여 많은 금석문(金石文)을 썼으며,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편찬에도 참여했다.

박영준(朴永俊) 1540(중종 35) 문과에 급제한 후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박승찬(朴承瓚) 조선(朝鮮) 중종조(中宗朝)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승손(朴承孫) 조선 중종(中宗)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박인량(朴仁亮) 조선 중종(中宗) 때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을 역임하였다.

박영석(朴永錫) 조선 중종(中宗)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박영한(朴永漢) 조선(朝鮮) 중종(中宗)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박기(朴 璣) 조선 중종(中宗) 때 보공장군(保功將軍)에 올랐다.

박형정(朴亨禎) 조선조(朝鮮朝)에서 주부(主簿)를 지냈다.

박수래(朴守萊) 조선 중종(中宗)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박일(朴 溢) 조선(朝鮮) 중종(中宗)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박철정(朴鐵貞) 조선 중종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

박수영(朴壽永)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박무(朴 懋) 조선 명종(明宗)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박계옥(朴啓沃) 조선(朝鮮) 명종조(明宗朝)에서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박색(朴 穡) 조선 명종(明宗)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윤(朴 潤) ()는 죽연(竹淵). 조선 명종(明宗) 때 학자였다.

박택(朴 澤) ()는 낙락당(樂樂堂). 조선 명종(明宗) 때 학자였다.

박즙(朴 楫) 조선 명종조(明宗朝)에 주부(主簿)를 지냈다.

박점(朴 漸) 1569(선조 2) 문과에 급제한 후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박대령(朴大齡) 조선 명종(明宗)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호(朴 灝) 조선 명종(明宗) 때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박정완(朴廷琬) 조선 명종(明宗)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창신(朴昌臣) 조선 명종조(明宗朝)에서 찰방(察訪)을 지냈다.

박형정(朴亨楨)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박정완(朴廷琬)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경남(朴敬男) 1588(선조 21) 문과에 급제한 후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다.

박임(朴 琳) 조선 선조(宣祖)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전(朴 琠) 조선 선조(宣祖)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효성(朴孝誠) 1568 (선조 1) 1617 (광해군 9)

자는 백원(百源), ()는 진천(眞川), 교위(校尉) ()의 아들. 1590(선조 23) 진사(進士)가 되고, 159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어 정자(正字)와 박사(博士)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명나라 유격(游擊) 마정문(馬呈文)과 함께 영남에 갔고,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가 전적(典籍)에 이어 공조병조예조의 좌랑(佐郞)을 지냈다. 1604(선조 37)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 1607년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1609(광해군 1) 선산 부사(善事府使), 1612년 단천군수(端川郡守) 등을 역임했다. 사부(詞賦)에 능했고, 김상헌(金尙憲) 등과 친교가 있었다.

박경업(朴慶業) 1568 (선조 1) ~ ?

초명은 승업(承業), 자는 응휴(應休), 호는 암수(巖叟)추탄(秋灘), ()의 증손, 1594(선조 2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장령(掌令)정언(正言) 등을 거쳐 1622(광해군 14) 청주 목사(淸州牧使)를 지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대간(臺諫)에 재직중 부정한 관리를 엄중히 탄핵하기로 유명하여 하루에 10여명씩을 삭직(削職) 시키게 했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전에 그에 의해 삭직당했던 공신들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

박정번(朴廷璠) 1550 (명종 5) ~ ?

자는 군신(君信), 호는 학암(鶴巖), ()의 아들. 판관(判官) ()에게 입양(入養). 선조 때 행의(行誼)로써 천거되어 예빈시 주부(禮濱寺主簿)가 되고, 뒤에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유학(儒學)에 뛰어나 명현(名賢)들과 교유했다.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1636(인조 14) 승지(承旨)에 추증(追贈), 고령(高靈)의 문연서원(文淵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진남(朴震男) ()는 응원(應元), ()는 회암(悔岩).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같이 의병 활동을 하면서 세운 공으로 훈련원정(訓練院正)을 지내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봉해졌다.

박만추(朴萬秋) 조선 선조(宣祖)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사현(朴師賢) 조선 선조(宣祖)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박여(朴 欐) 조선 선조(宣祖)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박미(朴 楣)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박유년(朴惟年) 조선 선조조(宣祖朝)에서 현령(縣令)을 지냈다.

박잠(朴 潛) 조선 선조(宣祖)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박대수(朴大秀) 조선 선조(宣祖) 때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지냈다.

박진성(朴盡性) 조선 선조(宣祖) 때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의 병을 간호하기 위해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선조(宣祖)의 특명으로 찰방(察訪)에 오르니, 효자(孝子)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박응량(朴應良) 조선 선조(宣祖) 때 어모장군(籞侮將軍)에 올랐다.

박도생(朴度生) 조선 선조(宣祖)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박천서(朴天瑞) 조선 선조(宣祖) 때 호군(護軍)을 지냈다.

박응희(朴應禧) 조선 선조(宣祖)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박근(朴 瑾) 조선 선조(宣祖)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기준(朴耆俊) 조선 선조(宣祖) 때 판관(判官)을 역임했다.

박광선(朴光先) 1617(광해군 9) 문과에 급제한 후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을 지냈다.

박종주(朴宗冑) 1591 (선조 24) 1623 (인조 1)

자는 언중(彦仲), 장령(掌令) 광선(光先)의 아들. 1615(광해군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다음해 설서(設書)가 되고, 1617년 수찬(修撰)정언(正言)을 거쳐 헌납(獻納)부교리(副校理)를 지냈으며 이듬해 이조 정랑(吏曹正郞) 겸 문학(文學)을 거쳐 1622년 승지(承旨)에 올랐다.

박종윤(朴宗胤) 1615(광해군 7)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좌랑(吏曹佐郞)지제교(知製敎)등을 역임하였다.

박천신(朴天信)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무(朴 茂)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율(朴 硉)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박유현(朴惟賢)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박문엽(朴文燁) 조선(朝鮮) 광해군(光海君)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박장원(朴長遠) 1612 (광해군 4) 1671 (현종 12)

자는 중구(仲久), 호는 구당(久堂)습천(隰川), 시호(諡號)는 문효(文孝), 직장(直長) ()의 아들. 1627(인조 5) 생원(生員)이 되고, 163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했으나 이 해에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외조부 심현을 따라 강화도에 피난했다.

1639년 검열(檢閱)이 되고 이어 정언(正言)으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선조수종실록(宣祖修正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653(효종 4) 승지(承旨) 때 남인(南人)의 탄핵으로 흥해(興海)에 유배, 이듬해 풀려났다. 1658년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이어 강원도 관찰사, 1664(현종 5) 이조 판서가 되고, 공조 판서대사헌예조 판서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역임한 후 자청하여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부임, 재직 중에 죽었다.

박이립(朴而立) 1624(인조 2)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박인(朴 絪) ()는 백화(伯和), ()는 아민당(牙悶堂). 용연재(龍淵齋)를 지어 후배를 양성하는데 힘썼으며 학규(學規) 9조목을 세워 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박난영(朴蘭英)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1619(광해군 11)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금()나라 정벌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1627(인조 5) 귀국하여 조선(朝鮮)을 괴롭히는 후금(後金)에 회답관(回答官)선위사(宣慰使) 추신사(秋信使)춘신사(春信使) 등으로 왕래하며 회유하였고,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청()나라 용골대(龍骨大)마부인(馬夫人) 등과 휴전 교섭에 힘썼다.

이때에 인질로 능봉군(綾峰君)과 심집(沈諿)을 요구하자 이들 대신으로 가장시켜 청나라 진영에 보냈던 사람들의 정체가 탄로나자 청()나라 장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박경종(朴景宗) 조선 인조조(仁祖朝)에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박대임(朴大任) 조선 인조(仁祖)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박대용(朴大容) 조선 인조(仁祖) 때 동지 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잠(朴 箴) 조선 인조(仁祖)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박번(朴 蕃) 조선 인조(仁祖)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돈(朴 惇) 조선 인조(仁祖)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박창장(朴昌長) 조선 인조(仁祖) 때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지냈다.

박대수(朴大秀) 조선 인조(仁祖) 때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지냈다.

박령(朴 靈) 조선 인조(仁祖)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흥인(朴興仁) 조선 인조(仁祖)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운(朴 雲) 조선 인조조(仁祖朝)에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박취문(朴就文) 조선 인조(仁祖) 때 부호군(副護軍)에 올랐다.

박예문(朴禮文) 조선 인조(仁祖)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박유(朴 輶) 조선 인조(仁祖)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박희문(朴希文) 조선 인조(仁祖) 때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박망지(朴望之) 조선 효종(孝宗)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사원(朴士元) 조선 효종(孝宗) 때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지냈다.

박흡(朴 翕) 조선 효종(孝宗)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박서전(朴瑞全) 조선 효종(孝宗) 때 우통례(右通禮)를 역임하였다.

박형(朴 珩) 조선 현종(顯宗) 때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박심(朴 鐔) 조선 현종(顯宗) 때 경연관(經筵官)을 지냈다.

박태한(朴泰漢) 1664 (현종 5) 1697 (숙종 23)

자는 교백(喬伯), 이조 판서 장원(長遠)의 손자, 군수(郡守) ()의 아들. 윤중(尹拯)의 문인. 1694(숙종 2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이르렀다. 언론이 준정(峻正)하고 당파에 휩쓸리지 않았다.

박상형(朴相馨) 1660(현종 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외직(外職)으로 8()을 잘 다스려 백성의 칭송이 높았다.

박만중(朴萬重) ()는 삼오당(三吾堂).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비될 때 벼슬에서 물러나 후진 양성에 힘썼는데, 유림(儒林) 3백여 명이 그의 높은 뜻을 상계(上啓)하여 대사헌(大司憲)에 특별히 추증되었다.

박선(朴 銑) 1639 (인조 17) 1696 (숙종 22)

자는 회숙(晦叔), 호는 지관재(止觀齋), 장원(長遠)의 아들. 1657(효종 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674(현종 15) 세마(洗馬)가 되었으며 명문(名門)출신으로 문명(文名)이 높았다.

박홍수(朴弘壽) 조선 현종(顯宗)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박재장(朴再章) 조선 숙종(肅宗)때 무과에 급제한 후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역임하였다.

박민신(朴敏信) 조선 숙종(肅宗)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박만항(朴萬恒) 1695(肅宗 2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박시변(朴始釆) 1699(肅宗 2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박양한(朴亮漢) 자는 사룡(士龍), 호는 매옹(梅翁), 장원(長遠)의 아들. 윤지완(尹趾完)의 외손자. 1696(숙종 22) 진사(進士)가 되고, 영조 때 고산 현감(高山縣監)을 지냈다. 소론(少論)의 명문 출신으로 인조효종현종숙종 4()의 시사(時事)를 수록한 저서매옹한록(梅翁閑錄)은 소론파의 사적(史籍)으로 귀중한 책이다.

박내우(朴來羽) 1713(숙종 39)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을 지냈다.

박명우(朴溟羽) 조선 숙종(肅宗) 때 목사(牧使)방어사(防禦使) 등을 역임하였다.

박시적(朴始迪) 조선 숙종(肅宗)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몽우(朴夢羽) 조선(朝鮮) 숙종조(肅宗朝)에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박한우(朴漢羽) 조선 숙종(肅宗)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박신해(朴信海) 조선 숙종(肅宗) 때 방어사(防禦使)를 지냈다.

박상백(朴相百) 조선 숙종(肅宗)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담년(朴聃年) 조선 숙종(肅宗)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박만욱(朴萬郁)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을 지냈다.

박재장(朴再章) 조선 숙종조(肅宗朝)에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지냈다.

박재화(朴再華) 조선 숙종(肅宗) 때 무과에급제한 후 현감(縣監)오위장(五衛將) 등을 역임하였다.

박사성(朴師聖) 조선 숙종(肅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박사도(朴師道) 조선 숙종조(肅宗朝)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천숭(朴天崇) 조선 숙종(肅宗)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했다.

박임흥(朴林興) 조선 숙종(肅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민신(朴敏信) 조선 숙종(肅宗)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박한기(朴漢耆) 조선 숙종(肅宗)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수오(朴壽五) 조선 숙종(肅宗)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영훈(朴永曛) 조선 숙종조(肅宗朝)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박장현(朴長賢) 조선 숙종(肅宗)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박찬(朴 鑽) 조선 숙종(肅宗)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감(朴 鑑) 조선 숙종조(肅宗朝)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만(朴 鏝) 조선 숙종(肅宗)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박재한(朴載漢) 조선 숙종(肅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지세(朴芝世) 조선 숙종(肅宗) 때 선전관(宣傳官)부사과(副司果) 등을 역임했다.

박항한(朴恒漢) 1666 (현종 7) 1698 (숙종 24)

자는 도상(道常)덕일(德一), 지관재(止觀齋) ()의 아들, 병조판서(兵曹判書)문수(文秀)의 아버지.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학행(學行)으로 일세의 추앙을 받았다. 죽은 후 아들이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오름에 따라 영은군(靈恩君)으로 추봉(追封),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박성한(朴聖漢) 조선 숙종(肅宗)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박수한(朴壽漢) 조선 숙종조(肅宗朝)에 현령(縣令)을 지냈다.

박사한(朴師漢) 조선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부사(府事)를 역임했다.

박기담(朴耆潭) 조선 숙종(肅宗)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박호(朴 鎬) 조선 숙종조(肅宗朝)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박강(朴 鋼) 조선 숙종(肅宗)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표한(朴彪漢) 조선 숙종(肅宗)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우한(朴羽漢) 조선 숙종조(肅宗朝)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박창조(朴昌祖) 조선 영조조(英祖朝)에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상순(朴相舜) 조선 영조(英祖) 때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

박경조(朴景祖) 조선(朝鮮) 영조조(英祖朝)에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박대유(朴大有) 조선 영조(英祖) 때 문과에급제한 후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

박창조(朴昌朝) 조선 영조(英祖) 때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박문수(朴文秀) 1691 (숙종 17) 1756 (영조 32)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시호는 충헌(忠憲), 항한(恒漢)의 아들. 1723(경종 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이듬해 설서(說書)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가 1724(영조 즉위) 노론(老論)이 집권할 때 삭직(削職)되었다.

1727년 정미 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少論)이 기용되자 사서(司書)에 등용, 영남 암행어사(嶺南暗行御史)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拔擢)되고,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으로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 참찬관(參贊官)에 이어 호서 어사(湖西御史)로 나가 기민(飢民)들의 구제에 힘썼으며, 1734년에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고 1737년 도승지(都承旨)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을 지냈다.

이듬해 다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다녀와 앞서 안동서원(安東書院)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 부사(豊德府使)로 좌천당했다가, 1741(영조 17) 어영대장(御營大將)을 거쳐 함경도 진휼사(賑恤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와서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이듬해 병조 판서(兵曹判書), 174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良役)의 폐해를 논하다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다시 좌천되었다. 그 후 영남 균세사(嶺南均稅使)를 거쳐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판의금부사(判義禁副使)세손 사부(世孫師傅)를 지내고, 1752년 왕세손(王世孫)이 죽자약방 제조(藥房提調)로 책임을 추궁 당해 제주(濟州)에 안치(安置)되었다. 이듬해 풀려 나와 우참찬(右參贊)에 올았다. 특히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았고, 암행어사때의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박성규(朴性圭) 조선 영조조(英祖朝)에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박흥주(朴興柱) 조선 영조(英祖) 때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을 역임하였다.

박만정(朴萬廷) 조선 영조조(英祖朝)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박정우(朴整羽) 조선(朝鮮) 영조조(英祖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충기(朴忠基) 조선 영조(英祖)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박규장(朴奎章) 조선 영조(英祖)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박만윤(朴萬潤) 조선 영조조(英祖朝)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승검(朴承儉) 조선 영조(英祖) 때 교수(敎授)를 역임하였다.

박지한(朴之漢) 조선(朝鮮) 영조(英祖)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봉익(朴鳳翼) 조선 영조(英祖)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았다.

박동철(朴東徹) 조선 영조(英祖)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박세항(朴世恒) 조선 영조(英祖)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박보한(朴保漢) 조선 영조(英祖)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인수(朴仁秀) 조선(朝鮮) 영조(英祖)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광수(朴光秀) 조선 영주(英祖)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용수(朴龍秀) 조선 영조(英祖)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박민수(朴民秀) 조선 영조(英祖) 때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박인영(朴仁榮) 조선 영조(英祖)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박시영(朴始榮) 조선 영조(英祖)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박향영(朴向榮) 조선(朝鮮) 영조(英祖) 때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를 지냈다.

박만영(朴萬榮) 조선 영조조(英祖朝)에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박현수(朴賢秀) 조선 영조(英祖)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박서한(朴舒漢) 조선 영조(英祖)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박경문(朴慶文) 조선 영조(英祖)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박의문(朴宜文) 조선 영조조(英祖朝)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박봉한(朴鳳漢) 조선 영조(英祖)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박태수(朴台秀) 조선 영조(英祖)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박장일(朴長逸) 조선(朝鮮) 영조(英祖)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박원서(朴元瑞) 조선 영조(英祖) 때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박경진(朴敬鎭) 조선 영조조(英祖)에 현감 (縣監)을 지냈다.

박응복(朴應福) 조선 영조(英祖)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박응록(朴應祿) 조선 영조조(英祖)에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역임하였다.

박재순(朴載淳) 조선 정조(正祖)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박종순(朴鐘淳) 조선(朝鮮) 정조조(正祖朝)에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박경구(朴慶九) 조선 정조(正祖) 때 정언(正言)을 지냈다.

박현규(朴顯圭) 조선(朝鮮) 정조(正祖)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박경덕(朴慶德) 조선 정조(正祖)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경한(朴敬漢) 조선 정조(正祖)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박노영(朴魯榮) 조선 정조(正祖)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박영수(朴英秀) 조선 정조(正祖)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박상영(朴尙榮) 조선 정조(正祖)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박치영(朴致榮) 조선(朝鮮) 정조(正祖) 때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을 지냈다.

박경규(朴敬圭) 조선 정조(正祖) 때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지냈다.

박의립(朴義立) 조선 정조(正祖) 때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지냈다.

박대규(朴大圭) 조선 순조조(純祖朝)에 문과에 급제한 후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했다.

박민수(朴敏樹) 조선(朝鮮) 순조(純祖) 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했다.

박신규(朴信圭) 조선(朝鮮) 순조(純祖) 때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를 지냈다.

박정규(朴正圭) 조선 순조(純祖)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박치규(朴穉圭) 조선 순조(純祖) 때 군수(軍守)를 지냈다.

박경운(朴慶雲) 조선 순조(純祖)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시채(朴時采) 조선 순조(純祖)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박경순(朴敬淳) 조선(朝鮮) 순조(純祖)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진영(朴震永) 조선 순조(純祖) 때 도정(都正)을 지냈다.

박희호(朴希鎬) 조선 순조(純祖)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박근호(朴根鎬) 조선 순조(純祖)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주일(朴周逸) 조선 순조(純祖) 때 도정(都正)을 지냈다.

박태호(朴台鎬) 조선 순조(純祖)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박인수(朴寅秀) 조선 순조(純祖)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종수(朴宗秀) 조선(朝鮮) 순조(純祖)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익수(朴益秀) 조선 순조(純祖)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대영(朴大榮) 조선 순조(純祖) 때 군수(軍守)를 지냈다.

박무영(朴武榮) 조선 순조(純祖)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박대순(朴大淳) 조선 순조(純祖)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박민순(朴民淳) 조선 순조조(純祖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화문(朴和文) 조선 순조(純祖)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이찬(朴履贊) 조선(朝鮮) 순조(純祖) 때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이용(朴履容) 조선 순조(純祖) 때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박화규(朴和圭) 조선 순조(純祖) 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박이수(朴履綏) 조선 순조(純祖)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박이환(朴履煥) 조선 순조조(純祖)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박영원(朴永元) 1791 (정조 15) 1854 (철종 5)

자는 성기(聖氣), 호는 오서(梧墅), 시호는 문익(文翼), 예조 참의(禮曹參議) 종순(鐘淳)의 아들. 1813(순조 1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81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로서 경영관(經筵官)이 되었다. 1837(헌종 3) 실록교수당상(實錄校讐堂 上), 이어 호조 판서(戶曺判書), 1846년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史)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국조보감 찬집청 교정당상(國朝寶鑑簒輯廳校正堂上) 등을 지냈다.

1848(헌종 14) 양선(洋船)의 출몰로 동해안 지방의 민심이 소란해지자 함경도 관찰사로 특임 되었고, 1851(철종 2)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실록청 총재관(實錄廳總裁官)을 겸했으며, 이듬해 좌의정(左議政), 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박영보(朴永輔)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1844(헌종 10) 문과에 급제한 후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박준우(朴俊愚) 1844(헌종 10) 문과에 급제한 후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박영준(朴永俊) 조선(朝鮮) 헌종(憲宗)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희순(朴希淳) 조선 헌종(憲宗) 때 부사(付使)를 역임하였다.

박시휴(朴時休) 조선 헌종(憲宗) 때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냈다.

박동필(朴東弼) 조선 헌종(憲宗)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재근(朴在根) 조선 헌종(憲宗) 때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박대순(朴大洵) 조선 헌종(憲宗) 때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지냈다.

박태하(朴泰河) 조선 헌종(憲宗)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박태빈(朴太彬) 조선(朝鮮) 헌종(憲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박이두(朴履斗) 조선 헌종(憲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용진(朴龍振) 조선 헌종(憲宗)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도빈(朴道彬) 조선 철종조(哲宗朝)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했다.

박이도(朴履道) 조선 철종(哲宗) 때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박신규(朴臣圭) 조선(朝鮮) 철종(哲宗) 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박영식(朴永軾) 조선 철종조(哲宗朝)에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냈다.

박종악(朴鐘岳) 조선 철종(哲宗) 때 경모궁령(景募宮令)을 지냈다.

박승규(朴勝圭) 조선 철종(哲宗)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박이중(朴履重) 조선 철종(哲宗)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이소(朴履韶) 조선 철종조(哲宗)에 현감 (縣監)을 역임하였다.

박이정(朴履定) 조선 철종(哲宗)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승규(朴承圭) 조선 철종(哲宗)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박정식(朴貞植) 조선 철종(哲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박영근(朴永根) 조선(朝鮮) 철종(哲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박이철(朴履哲) 조선 철종(哲宗)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이채(朴履埰) 조선 철종조(哲宗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영화(朴永華) 조선 철종(哲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동규(朴桐圭) 조선 철종조(哲宗朝)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박명규(朴命圭) 조선 철종(哲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래종(朴來鍾) 조선 철종(哲宗)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

박주세(朴周世) 조선 철종(哲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정근(朴廷根) 조선 철종(哲宗)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명규(朴明奎) 조선(朝鮮) 철종(哲宗)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박우현(朴遇賢) 1870(고종 7)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있을때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大院君)을 탄핵함에 관련하여 충효(忠孝)의 바른길을 직간(直諫)하다가 끝내 지조를 지켜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었으나 그후 대원군(大院君)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박봉빈(朴鳳彬) 1871(고종 8)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박영두(朴永斗) 조선 고종조(高宗朝)에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을 역임하였다.

박준빈(朴駿彬) 조선 고종(高宗)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태희(朴台熙) 1887(고종 24) 문과에 급제한 후 비서원승(秘書院丞)을 지냈다.

박충빈(朴忠彬) 1888(고종 25) 문과에 급제(及第)한 후 주서(注書)를 지냈다.

박이원(朴履元) 조선 고종(高宗)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영도(朴永道) 조선 고정(高宗)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주헌(朴周憲) 조선 고종조(高宗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해우(朴海愚) 조선 고종조(高宗朝)에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박갑종(朴甲鍾) 조선 고종(高宗)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박규환(朴圭煥) 조선 고종(高宗) 때 판윤(判尹)을 역임하였다.

박병배(朴柄培) 조선(朝鮮) 고종조(高宗朝)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박근을(朴根乙) 조선(朝鮮) 고종(高宗)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박희준(朴熙駿) 조선 고종(高宗)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주빈(朴冑彬) 조선 순종조(純宗朝)에 창례원 장례관(掌禮院掌禮官)을 지냈다.

박명희(朴明熙) 조선 순종(純宗) 때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다.

박성빈(朴成彬) 조선 순종(純宗)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박정빈(朴正彬) 조선 순종(純宗) 때 의병장(義兵將)을 지냈다.

박정희(朴正熙) 1917 1979

한국의 전() 대통령(재임기간 : 19631979), 군인. 경상북도 선산(善山) 출신. 어사공파(御史公派) 직강공(直講公) 숙동(叔童)의 후손, 군수(郡守) 성빈(成彬)의 아들. 1937년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를 졸업하고 3년간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졸업하였다. 한국 국군 창설에 참여 1946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포병학교장, 5사단장, 7 사단장, 1군 참모장, 6 관구 사령관, 육군 군수기지(郡守基地) 사령과, 1관구 사령관, 육군본부작전참모부장(作戰參謨副長), 2군 부사령관 등 군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961516혁명을 주도하고 7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19623월 대통령 권한대행을 겸임, 19638월 육군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이어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총재에 추대되고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19677월 제6, 19717월 제7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197212월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주체적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조국근대화(祖國近代化)를 촉성하고,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 정신을 고취하여 국민의 정신혁명을 불러 일으키는데 진력하였다. 또한 민족사적 정통성(正統性) 위에 평화통일을 이룩한다는 명분 아래 10월 유신(維新)을 단행하였으며, 1, 2,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제45개년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연평균 10%의 경이적인 성장을 이룩하였다.

또한 우리 민족사상 최대의 토목공사인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를 비롯하여 전국의 산업도로망을 우리의 기술과 자본으로 건설하여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으며, 비약적인 수출진흥(輸出振興)을 이룩하여 연평균 신장율(伸張率) 42.8%의획기적인 기록을 수립하고 새마울운동을 전국민적인 운동으로 전개, 농어촌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평화통일을 위한 기반구축에도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는데, 1970년의 815선언을 기점으로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 그리고 남북조절위(南北調節委)의 구성과 그 운영을 주도함으로써 4반세기 동안 단절되었던 남북대화(南北對話)의 실마리를 풀었고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통일 정책에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하였다.

1973년에는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성명을 통해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여모든 국가와의 문호개방정책을 추구하고 상호친선과 국제협력의 폭을 넓힘으로써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었고, 1974년에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남북한 상호불가침협정(不可侵協定)의 체결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우방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정상회담을 가짐으로써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한편 지도상을 부각시켰는데, 1961년에는 케네디 미국대통령과 이케타(池田) 일본 수상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1964년에는 서독의 뤼브케 대통령을 초청하였으며, 19655월과 19684월에는 미국의 존슨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19662월에는 말레이시아태국중화민국 등을 공식 방문했고, 그해 10월 월남지원국(越南支援國) 마닐라 정상회담에 참석하였으며, 19689월에는 호주와 뉴질랜드를 공식방문, 19698월에는 미국 닉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또한 한미행정협정의 체결, 오랜 현안이었던 한일간의 국교 정상화, 그리고 월남파병(越南派兵)등 역사적인 결단을 내림으로써 국제 협력체제를 강화하였다. 197910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 (金載圭)의 저격으로 급서(急逝)하고 113일국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4년북괴의 지령을 받은 문세광의 흉탄을 맞고 사망한 부인 육영수(陸英修)와의 사이에 12녀가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민족의 저력(底力)」「연설문집(演說文集)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