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여흥민씨(驪興閔氏),여흥민씨시조,민칭도(閔稱道),여흥민씨본관

작성일 : 2017-04-09 12:39 수정일 : 2018-01-05 13:14

여흥민씨시조 및 여흥민씨본관의 유래

민씨(閔氏)는 중국(中國) 농서현(隴西縣:감숙성 난산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성인 공자(聖人孔子)의 10제자 중 한사람인 민손(閔損:자는 자건, 노나라 현인)의 후손 민칭도(閔稱道:상의봉어를 역임)가 고려 중엽에 사신(使臣)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여흥(驪興)에 정착(定着)한 것이 우리나라 민씨(閔氏)의 시원(始原)이 된다.

민씨의 본관(本貫)은 여흥을 비롯하여 황려(黃驪)․영주(榮州)․여주(驪州)․대전(大田)․해남(海南) 등 32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여흥 민씨(驪興閔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여흥(驪興)은 경기도(京畿道) 남동단에 위치한 여주(驪州)의 옛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골래근현(骨內斤縣)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황효현(黃驍縣)으로 개명하여 기천군(沂川郡)의 영현이 되었으며, 고려(高麗) 초에 황려현(黃驪縣)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원주에 속하였다가 고종(高宗) 때 영의(永義)로 개칭되었다.

1305년(충렬왕 31)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한 후 조손 태종(太宗) 때 음죽현(陰竹縣)의 북부를 현입하여 여흥부(驪興府)로 승격되면서 관할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변경되었다. 예종조(睿宗朝)에 천녕현(川寧縣)을 병합하여 여주목(驪州牧)으로 하고 1501년 충주부(忠州府)의 관할하에 두었다가 1895년 충주부 여주군으로 칭하였으며, 1914년 경기도 여주군이 되었다.

고려 말기에서부터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혀온 민씨(閔氏)는 시조의 증손 영모(令謨)가 고려 인종(仁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을 지내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왕(王)의 총애를 받았으며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거쳐 태자 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고, 신종조(神宗朝)에서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오른 아들 식(湜)과 판병부사(判兵部事)와 태자 소보(太子小保)를 지낸 공규(公珪) 형제를 낳아 가문(家門)의 양대산맥을 이루어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두드러진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상서공(尙書公) 식(湜)의 후손에서 그의 증손 지(漬)가 충렬왕(忠烈王)과 충선왕조(忠宣王朝)에 결쳐 원나라와의 외교에 공을 세웠고, 충숙왕(忠肅王) 때 수정승(守政丞)으로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으며 문장(文章)이 탁월하여「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와「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저술했고 슬하에 아들 상정(詳正)과 상백(祥伯)이 뛰어났다.

1301년(충렬왕 27) 문과에 급제한 상정(詳正)은 충숙왕 때 장령(掌令)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지냈으며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고려 말에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내고 조선 개국 (朝鮮開國)에 반기를 들었던 안부(安富)는 상서공(尙書公) 식(湜)의 6세손으로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고, 상정(詳正)의 손자 여익(汝翼:도평의사 현의 아들)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創業)에 공(功)을 세우고 개국3등공신에 올랐으며, 태종(太宗) 때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세종조(世宗組)에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여천부원군(驪川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한편 여흥군 지(漬)의 증손 안인(安仁:찬성사 선의 아들)은 공민왕(恭愍王) 때 삼사 우윤(三司右尹)을 거쳐 조선이 개국된 후 왕명(王命)으로 악기(樂器)를 정리하고 제도(制度)를 바로잡아 대례(大禮)를 완성했으며, 그의 아우 유의(由誼)는 판서(判書)를 지냈다. 태자 소보(太子小保) 공규(公珪)의 증손 종유(宗儒)는 충령왕 때 삼사 우윤(三司右尹)을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했고 충혜왕 때 대제학(大提學)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지냈으며 전고(典故)에 밝아 명망이 높았다.

대사헌(大司憲)으로 여평군(驪平君)에 봉해졌던 적(頔:종유의 아들)의 아들 사평(思平)은 일찍이 충정왕(忠定王)을 따라 원(元)나라에 들어갔던 공으로 공신(功臣)의 호(號)를 받고 첨의참리(僉議參里)가 되었으며, 시서(詩書)를 즐기고 학문에 뛰어나 당대에 학자(學者)였던 이제현(李濟賢)․정자후(鄭子厚) 등과 함께 문명(文名)을 떨쳤다.

특히 조선 초기에 가문을 드러낸 인물로는 여평군 적(頔)의 손자 제(霽:여원군 변의 아들)와 개(開)의 형제가 두드러진다. 공민왕(恭愍王) 때 19세로 문과에 올랐던 제는 창왕(昌王) 때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과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어 한양부윤(漢陽府尹)을 역임했고, 조선 태조(太祖)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여흥백(驪興伯)에 봉해졌으며 태종(太宗)의 국구(國舅)로 잡신(雜神)을 섬기는 음사(淫祠)를 지극히 미워하여 그가 거처하는 관청이나 집의 벽에는 화공(畵工)을 시켜 몽둥이를 든 하인과, 개가 무당과 중을 쫓는 모양의 그림을 그리게 하여 붙여 두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치와 오만을 배격하고 건강 양성에 힘을 쏟아 병자에게 약을 주는 방(榜)을 전국에 보내 보건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이와 같은 그의 관념으로 슬하의 아들 이름을 무구(無咎:참지승추부사․여강군)․무질(無疾:우군도총재․여성군)․무휼(無恤:한성윤)․무회(無悔:예문관 제학․여산군) 등으로 지었다.

변의 막내아들 개(開)는 공양왕(恭讓王) 때 한성부윤(漢城府尹)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정도전(鄭道傳) 일파가 이성계(李成桂)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이를 반대했다가 피살 직전에 방원(芳遠)의 저지로 위기를 넘겼으며, 그의 둘째 아들 불탐(不貪)이 세종(世宗) 때 등과(登科)하여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명성을 얻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 음모에 완강히 거절했던 신(伸:개의 손자, 불해의 아들)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현릉(顯陵)에 비(碑)를 세우는 공사를 감독하고 있다가 수양대군이 보낸 자객인 삼군진무(三軍鎭撫) 서조(徐遭)에 의하여 다섯 아들과 함께 무참히 살해당했다.

대제학(大提學) 유(愉)의 7세손 제인(齊仁:사간 수의 손자, 전적 귀손의 아들)은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인종(仁宗) 때 위사이등공신(衛社二等功臣)에 책록되었다.

명종(明宗)이 어려서 즉위하자 수렴정정(垂簾聽政)을 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밀지(密旨)를 내려 인종(仁宗)의 장인 윤임(尹任)과 류인숙(柳仁淑)․류관(柳灌) 등을 제거하려 하자 그는 윤임 일파의 처벌은 마땅하나 평지풍파를 일으켜 민심을 동요시키지 말 것을 건의했다.

명종(明宗)과 선조대(宣祖代)의 명신(名臣) 기(箕:현령 세류의 아들)는 여흥 민씨의 중흥 인물이다. 다섯의 나이로 천자문(千字文)을 배울 때 진(晋)․초(楚) 두 글자를 익힐 무렵 아버지에게 묻기를

진나라와 초나라가 있기 전에는 이 글자의 뜻을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여 아버지를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명종조에 좌의정(左議政) 윤개(尹漑)가 정치를 자기 주장대로 하는 독재성 때문에 조정이 모두 그를 싫어했을 때 기(箕)는 윤개의 면전에서 거만한 용이 후회함이 있다 라고 충고했으며, 후에 윤개가 왕의 미움을 받아 대신에 합당치 않다 는 전교를 내렸을 때 기는 대신을 예로써 대우해야 하며 간(諫)하는 신하의 말을 받아들여 용납해야 합니다 하며 본인 앞에서는 대담하게 충고하고, 또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제하는 데 힘써 그의 훌륭한 인격으로 선조가 즉위하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역리(易理)를 공부했던 순(純:대제학 유의 6대손)은 주정설(主靜設)을 생활의 철학(哲學)으로 삼아 개성있는 일생을 살았으며, 제인(齊仁)의 현손 광훈(光勳)은 아들 정중(鼎重), 손자 진장(鎭長)과 함께 〈삼세문장(三世文章)〉으로 명성을 떨쳤다.

1628년(인조 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壯元)했던 광훈은 정언(正言)과 지평(持平)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와 사간(司諫)을 지낸 후 효종(孝宗) 때 승지(承旨)에 오르고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으며, 그의 맏아들 시중(蓍重)은 현종(顯宗)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치사(致仕)했으며 충후(忠厚)한 인품과 학행(學行)으로 유명하다.

거유(巨儒)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정중(鼎重)은 인조(仁祖) 때 장원으로 등과(登科)하여 주요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지냈으나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남인(南人)의 득세로 장흥부(長興府)에 유배되었다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풀려나와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숙종 때 노론(老論:서인)의 중진으로 경서(經書)에 밝고 문장(文章)이 뛰어나 사림(士林)의 명망이 높았던 유중(維重)은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장흥(長興)의 연곡서원(淵谷書院)과 벽동(碧潼)의 구봉서원(九峯書院)에 제향되었고, 그의 딸이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의 격렬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폐비의 비운을 겪었던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이다.

광훈(光勳:할아버지)․정중(鼎重:아버지)에 이어 모두 과거에 장원했던 진장(鎭長)은 형조와 호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유중(維重)의 아들 진원(鎭遠)은 1691년 (숙종 1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으나 당시 누이인 인현왕후가 유폐되어 있었기 때문에 등용하지 못하다가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검열(檢閱)로 등용되어 병조 정랑(兵曹正郞)과 사복사정(司僕寺正)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 서원(書院)의 남설(濫設)로 지방관청의 재정소모가 심하고 당쟁의 원인이 된다고 상소하여 서원 건립을 줄이게 했고, 경종(景宗) 때 공조 판서로 실록청 총재관이 되어 「숙종실록(肅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성주(星州)에 유배되었다가 1724년(경종 4) 풀려나와 우의정(右議政)에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영조(英祖) 때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가족제복론(加足帝腹論)」을 찬진했고, 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소론의 영수 이광좌(李光佐)와 탕평(蕩平)을 기약했으나 끝까지 소론에 대한 반격을 멈추지 않고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문장과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진주(鎭周)의 아들 응수(應洙)와 좌의정(左議政) 진원(鎭遠)의 손자 백상(百祥)도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하여 명문의 지위를 굳혔으며, 첨지중추부사 단현(端顯)의 아들 치구(致久)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장인이 되어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여양부원군 유중(維重)의 5대손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에 추봉된 치록(致祿)의 딸이 명성황후(明成皇后: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비)가 되자 여홍 민씨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명성황후는 16세 때 왕비로 뽑혀 한말(韓末)의 격동기에 국내외의 정치적 거센 바람을 한 몸으로 감당하며 대원군(大院君)과 권력싸움으로 파란많은 일생을 살았다.

그밖의 인물로는 치록의 아들 승호(升鎬)가 여동생 명성황후를 도와 국정 전반에 참여하여 민씨일족(閔氏一族)의 거두(巨頭)로서 세도(勢道)가 등등했으며, 겸호(謙鎬)는 고종 때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고 정치제도의 개혁 후에 선혜청 당상관(宣惠廳堂上官)에 올라,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규호(奎鎬)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한말의 순국열사 영환(泳煥:겸호의 아들, 태호에게 입양)은 여흥 민씨가 자랑하는 인물로 1877년(고종 14) 문과에 급제, 동부승지(同副承旨)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예․형․병․조의 판서(判書)를 비롯한 한성판윤(漢城判尹)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한 후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백관(百官)을 인솔하여 궁궐에 나가 이를 반대했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자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에 모여 상소를 의논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전동(典洞) 이완식(李完植)의 집에 가서 〈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로 시작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했다.

그가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지하실에 간직하고 그 방을 봉했는데 이듬해 봄 그 자리에서 대(竹)가 솟아 올라,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충절을 말하는 혈죽(血竹)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외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상해(上海)로 망명한 영익(泳翊), 홍주(洪州)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종식(宗植:판서 영상의 아들), 상해임시정부와의 연락을 담당했던 강(橿), 의병장으로 강원(江原)․충청(忠淸)․경상도(慶尙道)를 누비며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긍호(肯鎬),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사재를 털어 임시정부 군자금을 조달했던 치도(致道),신민회(新民會) 회원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형식(衡植),대한민국청년단 재무부장 제호(濟鎬),중국정부와 협의하여 무장 경위대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필호(弼鎬) 등이 국운이 기울어가는 구한말과 일제 암흑기에 구국(救國)의 대열에 앞장서서 겨레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절의 가문인 여흥 민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민씨(閔氏)는 남한(南韓)에 159,52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