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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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09 12:07 수정일 : 2018-01-01 20:5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남평문씨(南平文氏)는 신라(新羅)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인 문다성(文多省)시조(始祖)로 하며, 감천 문씨(甘泉文氏)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고려 태종(太宗) 때 중국(中國)에 건너가 문명(文名)을 떨침으로써 문씨(文氏)의 성()을 하사(下賜)받았다고 한다.

남평(南平)은 전라남도(全裸南道) 나주군(羅州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을 통일신라(統一新羅) 때 경덕왕(景德王)이 현웅현(玄雄縣)으로 고쳐 무주(武州 : 광주의 옛 이름)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조(高麗朝)에서는 남평(南平) 또는 영평(永平)으로 불리웠고, 그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913년 나주군(羅州郡)에 합쳐져서 지금의 남평면(南平面)이 되었다.

문씨(文氏)의 본관(本貫)은 남평(南平)을 비롯하여 단성(段城)․감천(甘泉 : 경동 안동지방)․정선(旌善)․강성(江城)․함평(咸平)․파평(坡平) 156()까지 문헌(文獻)에 기록되어 있으나, 감천과 정선을 제외한 관향(貫鄕)은 모두가 남평 문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선문씨(旌善文氏)는 본래 전씨(全氏)였으나 시조 문임간(文林幹)이 역시 중국에서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쳐 문씨로 사성받고, 돌아와서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태자소부(太子少傅)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문씨(文氏)의 대종(大宗)인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시조 문다성(文多省)은 신라 말에 남평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출생에 대한 설화(說話)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서기 472(신라 자비왕 15) 전남 나주군 남평현 동쪽에 장자지(長者池)라는 큰 못이 있고 그 못가에는 큰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郡主)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石函)이 놓여 있었다. 함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玉雪)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있었다.

기이하게 생각된 군주(郡主)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니 나이 불과 5세에 문사(文思)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聰明)하여 사물(事物)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을 성()으로 삼게 하고 이름을 <다성(多省)>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 후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으로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貫鄕)을 남평으로 하게 되었으며, 시조의 탄강지인 바다 위에다 <문암(文巖)>이라는 비()를 세우고, 못가에 장연서원(長淵書院)을 디어 매년 음럭 9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享祠)하고 있다.

고려조에서 주로 명성을 떨쳤던 남평 문씨는 중시조(中始祖) ()이 고려 문종(高麗文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1098(숙종 3) 좌․우찬성대부(左․右贊成大夫)를 지내고, 급사중(給事中)과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거쳐 우산기상시(右散騎常寺)에 올라 상주국(上柱國)으로 풍산군(楓山君)에 봉해져서 가문(家門)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명문(名門)의 기초를 다졌다.

당세에 명필(明필)로 유명했던 공유(公裕)는 익()의 막내 아들로 예종(睿宗)과 의종조(毅宗朝)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의 창사 비문(創寺碑文)을 남겼다. 공유(公裕)의 아들 극겸(克謙)은 문무겸직의 시초를 만든 충직(忠直)한 현상(賢相)으로 이름이 높았고, 그의 아들이 고종(高宗) 때 참지정사(參知政事)와 판예부사(判禮部事)를 지낸 유필(柳필)이다.

우리나라 의복혁명(衣服革命)의 기수 삼우당(三憂堂) 익점(益漸)은 남평 문씨가 자랑하는 인물(人物)이다. 그는 1329(고려 충숙왕 16) 강성현 원당리 배양촌(江城縣元堂里培養村 : 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배양리)에서 세칭 청도선생(淸道先生)으로 불리웠던 충정공(忠貞公) 숙선(叔宣)의 아들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1360(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고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을 시작으로 벼슬에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1363(공민왕 12)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계품사(計稟使)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갔다.

이때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의 배원책(排元策)에 대한 응징문제로 공민왕의 폐위론을 의논하자 이를 극구 반대하다가 원제(元帝)의 노여움을 받아 교지국(交趾國 : 지금의 월남)에 귀향갔다가 돌아올 때 금수품(禁輸品)목화(木花)씨룰 붓대 속에 넣어온 것으로 우리나라의 혁명을 일으켰다.

특히 그는 공만왕(恭愍王) 때 우문관 제학(右文館提學)에까지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9년간이나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세상과 인연을 끈고 살자 아태조가 친히 불러 벼슬에 등용시키려 하였으나 끝까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으며, 효행(孝行)이 지국하여 왕명(王命)으로 그가 살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慶南山淸郡丹城面沙月里)효자정각(孝子旌閣)을 세우고 마을 이름을 효자리(孝子里)로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익점의 아들 중용(中庸)․중성(中誠)․중실(中實)․중진(中晋)․중계(中啓)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명성을 떨첬으며, 간의대부(諫議大夫)중실의 맏아들 ()는 이 색(李 穡)의 문하(文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성리학(性理學)을 비롯한 천문(天文)․지리(地理)․산수(算數) ․율려(律呂)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던 학자로 목화에서 실을 뽑는 <물레>를 발명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권율(權 慄)의 휘하로 들어가 역전의 훈공을 세웠던 위세(緯世 : 익정의 9세손)가 용담 현감(龍潭縣監)을 지내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홍헌(弘獻)은 진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강물에 투신자살하여 광해군 때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지낸 희성(希聖), 병자호란에 왕을 호종하고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재도(載道),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순절한 기호(基浩)와 함께 가통을 이었다.

남평문씨(文氏)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40,419가구, 228,820, 1975년에는 62,027가구로 집계되었고,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445,94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문익(文 翼) 시호(諡號)는 경절(敬節), 고려(高麗) 문종조(文宗祖)에 문과(文科)에 급제, 1908(숙종 3) 좌․우찬선대부(左․右贊善大夫)를 거쳐 급사중(給事中)에 아르렀다. 이듬해 고진(告奏) 겸 밀진사(密進使)로서 원자(元子) 책봉(冊封)을 청()하려고 요()나라에 다녀왔다. 1102(숙종 7) 직문하성(直門下省)으로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고 1103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寺)에 올랐다.

문공인(文公仁) ? 1137 (인종 15)

초명(初名)은 공미(公美), 시호(諡號)는 충의(忠懿),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 1115(예종 10)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사은(謝恩) 겸 진봉부사(進奉副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1117(예종 12) 전중 소감(殿中少監)․우승선 겸 태자 우찬선(右承宣兼太子右贊善), 1122년 예빈 소경(禮賓少卿)․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거쳐 이해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으나 권신 이자겸(李資謙)의 미움을 받아 충주(忠州)로 유배되었다.

1126(인종 4) 이자겸이 몰락하자 이듬해 이부 상서(吏部尙書)가 되고, 예부 상서(禮部尙書)․지제고(知制誥)․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등을 거쳐 1129년 아부 상서(吏部尙書)․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1131년 검교사도(檢校司徒)․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서경 유수(西京留守)를 역임, 1133년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감수 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묘청(妙淸)의 서경 천도설에 찬성하고 그를 성인(聖人)으로 추천했으나 1135년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그 토벌을 강력히 주장, 서경인(西京人)들이 벤 묘청의 목을 가지고 항복을 청해 윤 첨(尹 瞻)을 옥에 가둠으로써 서경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뒤에 묘청을 추천하여 국사(國事)를 그르치게 했던 일로 탄핵받아 수대위(守大尉)․판국자감사(判國子監事)로 좌천되었다.

문공원(文公元) 1084 (선종 1) 1156 (의종 10)

시호(諡號)는 정경(貞敬), 우산기상시(右散騎常寺) ()의 아들. 음보(蔭補)로 기용되고, 예종(睿宗) 때 문과(文과)에 급제, 인종(仁宗)때 우정언(右正言)․지제고(知制誥)에 발탁, 1130(인종 8)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주연(李周衍)등과 함께 시폐(時弊)를 상언(上言)하여 시정토록 했다.

1135(인종 13) 낭중(郎中)으로 금나라에 가서 만수절(萬壽節)을 축하, 1148(의종 2) 어사 대부(禦史大夫)․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1150(의종 4) 지공거(知貢擧)로 전선(銓選)을 관장,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판형부사(判刑部事)가 되고 이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에 올라 수사공(守司空)이 되었다. 1152(의종 6) 서경 유수사(西京留守使)가 되고, 그후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로 치사(致仕)했다. 의종 묘정(廟庭)에 배향 되었다.

문공유(文公裕) ()는 항적(亢迪), 시호(諡號)는 경정(敬靖), 우상기상시(右散騎常寺) ()의 아들, 판사(判事) 공인(公仁)의 아우. 1122(예종 17) 합문 지후(閤門祗侯)로서 이자겸(李資謙)의 모함으로 형공인과 함께 유배, 뒤에 복직되어 1129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욌다. 1133년 시어사(侍御史)로서 묘 청(妙 淸)의 도참설(圖讖說)에 현혹된 인종(仁宗)에게 충고를 하다가 충주목 부사(忠州牧副使)로 좌천되었다.

의종 때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거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예부 상서(禮部尙書)․병부상서(兵部尙書) 등을 지냈다. 글씨에 능했다. 인종(仁宗)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남평(南平)의 장연 서원(長淵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극겸(文克謙) 1122 (예종 17) 1189 (명종 19)

()는 덕병(德柄),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병부 상서(兵部尙書) 공유(公裕)의 아들. 음보(蔭補)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 되어 여러번 문과(文科)에 낙방하자 상소, 남삼(藍衫)으로는 3회로 한정된 응시 횟수를 5회로 개정케하고 의종(毅宗) 때 마침내 급제했다. 좌정언(左正言)이 되자 환자(宦者) 백선연(白善淵)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황주 판관(黃州判官)․진주 판관(晋州判官)으로 좌천되었으나 이는 언로(言路)를 막는 일이라는 유사(有司)의 상주(上奏)로 합문지후(閤門祗侯)로 전임, 전중 내급사(殿中內給事)로 승진되었다.

1170(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앞서 좌정언(左正言)으로서 직언하여 좌천된 일로 해서 화()를 면했고, 의종 역시 그의 말을 좇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한다. 이해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우승선(右承宣)․어사중승(禦史中丞)이 되어 많은 문신들을 화에서 구해내고 무신들로부터는 고사(故事)의 자문(諮問)을 받았고 용호 대장군(龍虎大將軍)을 겸임, 후에 상장군(上將軍)까지 겸하여 문무 겸직의 시초가 되었다.

대부 소경(大府少卿)․예부 시랑(禮部侍郞)․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태자 소사(太子少師)를 거쳐 1183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판호부사(判戶部事)가 되고, 1187년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에 이르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문후식(文候軾) 시호(諡號)는 충렬(충렬). 1177(명종 7) 문과(文과)에 급제하여 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로 여러 관직을 거쳐 합문 지후(閤門祗侯)․이부시랑(吏部侍郞)․전중 내급사(殿中內給事)를 역임하고, 1198(신종 1)동북면 지병마사(東北面知兵馬使)가 되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상주국(上柱國)․평장사(平章事)에 추증 되었다.

문유필(文惟弼) ? 1228 (고종 15)

시호(諡號)는 효혜(孝惠), 평장사(平章事) 극겸의 아들. 1220(고종 7) 안서 부사(安西副使)로 좌천, 이듬해 수사공(守司空)․좌복야(左僕射), 1222(고종 9)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고 1227(고종 14) 참지 정사(參知政事)․판예부사(判禮部事)에 올랐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상주국(上柱國)․평장사(平章事)에 추증, 남평(南平)의 장연서원(長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탄(文 誕) 시호(諡號)는 충익(충익). 고려 때 제학(제학)을 지냈다.

문착(文 言卓) ()는 남제(南濟). 명종(明宗) 초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상주국 평장사(上柱國平章事)를 지내고, 1194(명종 24) 대제학(大提學)으로 왕()의 명령(命令)을 받고 탐라(耽羅 : 제주도)에 가서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을 선화(宣化)케 해서 가나군(加那君)에 봉해졌다.

문정(文 言正) 시호(諡號)는 정민(貞敏). 고려(高麗) 때 추밀 원사(樞密院事)를 지냈다.

문양부(文陽夫) 시호(諡號)는 장숙(章淑). 1193(명종 23)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죄정언(左正言)을 역임, 1206(희종 2) 남해도(南海島)의 왜구(倭寇)를 토벌(討伐)한 공()으로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추증(追贈), 가나군(加那君)에 추봉(追封)되었다.

문득준(文得俊) 시호(諡號)는 의안(毅安), 1263(원종 4) 문과(文科)에급제하여 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가 되고 해적을 탐라(耽羅)에서 토평한 공()으로 봉익대부(奉翊大夫)․판도판서(版圖判書)․강성백(江城伯)에 봉해지고 충렬왕(忠烈王) 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문극검(文克儉) 시호(諡號)는 정렬(靖烈). 충선왕(忠宣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좌사의(左司議)를 지내고,1314(충숙왕 1) 판도 판서(版圖判書)를 거쳐 개성윤(開城尹)을 지냈다. 광록대부(光祿大夫)․지문하시랑 평장사(知門下侍郞平章事)․상주국(上柱國)에 추증 되었다.

문경(文 璟) 고려(高麗)때 찬성사(찬성사)를 지냈다.

문근(文 瑾) 고려 때 판도 판서를 역임하였다.

문숙선(文叔宣) ()는 덕방(德芳), ()는 청도(淸道), 시호(諡號)는 충정(忠貞). 1351(충정왕 3)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좌정언(左正言)․지제고(知制誥)․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원종훈에 책록되고 보문각 제학을 지냈다. 군수(郡守)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군호(郡號)를 청도(淸道)라 하였다. 광록대부(光祿大夫)․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

문재도(文載道) 고려 때 평해 군사(군사)를지냈다.

문귀(文 龜) 고려(高麗) 때 사성(사성)을 역임하였다.

문달한(文達漢) ? 1392 (태조 1)

시호(諡號)는 충익(忠翊), 평장사(平章事) 극겸(克謙)의 후손. 우왕(禑王) 때 대호군(大護軍)이되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때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이 되었으며, 지문, 하성사(知門下省事)를 거쳐 1388(우왕 14)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양광․경상도 도체찰사(陽廣慶尙道都體察使)로 나갔다.

이때 왜구 1천여 명이 옥주(沃州)․보령(保寧) 등지를 함락,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하는 등 계룡산(鷄龍山) 일대를 노략질하자, 왕안덕(王安德)․도 흥(都 興)․김사혁(金斯革)․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이를 공격하여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대파했다.

후에 사소한 사건으로 우왕의 비위에 거슬려 삭직(削職), 오랫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최 영(崔 瑩) 등의 노력으로 복직, 다시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어 추충익대 보조공신(推忠翊戴輔祚功臣)의 호를 받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그 후 외척을 빙자하여 탐학이 심하다는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으로 합포(合浦)․철원(鐵原) 등지에 유배, 곧 방환(放還)되어 삼사 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공양왕의 즉위초 이 임(李 琳)의 일파로 탄핵을 받고 다시 유배되었다. 그후 풀려 1392(태조 1)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다. 김제(金提)의 저산서원(楮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세봉(文世鳳) 시호(諡號)는 강헌(康獻). 문장(文章)과 도학(都學)이 뛰어났으며 1375(우왕 1)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거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이르렀다.

문세린(文世麟) 고려 때 소부윤(少府尹)을 지냈다.

문익겸(文益謙) 시호(諡號)는 충혜(忠惠). 고려 때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지냈다.

문익점(文益漸) 1329 (충숙왕16) 1398 (태조 7)

초명은 익첨(益瞻), ()는 일신(日新), ()는 삼우당(三憂堂), 시호(諡號)는 충선(忠宣), 숙선(淑宣)의 아들. 강성현(江城縣) 출신. 1360(공민왕 9) 문과(文科)에 급제, 김해부 사록(金海府史錄)․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내고 1363년 좌정언(左正言)으로 서장관(書狀 官)이 되어 계품사(計稟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이 해 최 유(崔 濡) 일파가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고려에 쳐들어오자 이에 가담, 귀국후 파직 되었다. 귀국할 때 목화씨를 얻어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에 재배, 뒷날 한국의 의료(衣料) 및 경제상(經濟上) 커다란 공헌을 했다.

1375(우왕1)다시 전의 주부(典儀主簿)로 등용되고, 1389(창왕1)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었으며, 공양왕(恭讓王) 때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 준(趙 浚)의 탄핵을 받아 사직, 낙향하여 은거(隱居) 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9년간이나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고, 이태조(李太祖)가 친히 물렀으나 굳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효행(孝行) 또한 지극하여 왕()의 특명으로 효자비(孝子碑)가 세워지고 그가 사는 동네 이름을 효자리(孝子里)라 명명(命名)하였다. 성리학(性理學)에도 밝았다.

태종(太宗) 때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강성백(江城伯)에 봉해지고 부조묘(不祧廟)를 세웠으며, 1440(세종 22) 영의정(領議政)에 추증, 부민후(富民侯)에 추봉(追封)되었다. 남평(南平)의 장연서원(長淵書院), 산청(山淸)의 도천서원(道川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중용(文中庸) ()는 도보(道甫). 고려 때 헌납(獻納)을 지냈다.

문중성(文中誠) 시호(諡號)는 순질(純質). 1385(우왕 11) 5월에 문과(文科)에 급제 하여 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가 되고, 합문 지후(閤門祗侯)․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사직했다.

창왕(昌王)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405(태종 5) 강성군(江城君)의 후예(後裔)라 하여 나라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정헌대부(正憲大夫)․병조 판서(兵曹判書)․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문중실(文中實) 시호(諡號)는 의안(毅安). 고려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문중진(文中晋) 고려 때 지문하시중(知門下侍中)을 지냈다.

문중계(文中啓) ()는 창주(滄洲), 시호(諡號)는 성숙(成淑).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부 상서(禮部尙書)가 되었다.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은거(隱居), 1395(태조 4) 조정에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자헌대부(資憲大夫)․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문계종(文繼宗) 조선(朝鮮) 때 병마절 제사(兵馬節制使)를 지냈다.

문효종(文孝宗) 1365 (공민왕 14) 1444 (세종 26)

시호(諡號)는 호간(胡簡), 삼사우사(三司右使) 달한(達漢)의 아들. 음보(蔭補)로 무관직을 거쳐 조선개국 후 첨총제사(僉摠制使)가 되고 1409(태종 9) 풍해도 첨절제사(豊海道僉節制使)에 올랐다.

1418(태종 18) 좌금위 일번절제사(左禁衛一番節制使)․좌군 총제(左軍摠制)가 되고 1425(세종 7) 진향 겸 등극부사(進香兼登極副使)가 되어 명나라네 다녀온 후 에 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 1432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듬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등을 역임했다. 1440(세종 22)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내고 치사(致仕),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문 화(文 和) ()는 양중(養中), ()는 만은(晩隱), 시호(諡號)는 경혜(景惠). 1397(태조 6) 낭중(郎中)이 되고,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상서원정(尙瑞院正)․경연참 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 등을 지냈다.

제전(祭田)을 하사(下賜)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좌찬성(左贊成)․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문임(文 稔) 조선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문빈(文 彬) ? 1413 (태종 13)

시호(諡號)는 평익(平翼). 1400(정종 2) 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1401(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월천군(越川君)에 봉해졌다. 여러 무관직을 거쳐 1409년 풍해도첨절제사(豊海道僉節制使)가 되었다.

문래(文 萊) ()는 자봉(子蓬), ()는 이곡(理谷), 시호(諡號)는 정혜(靖惠). 경사(經史)에 통()하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산수(算數)․척도(尺度) 등에 밝았으며, 물레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1395(태조 4) 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가 치사(致仕), 장연백(長淵伯)에 봉해졌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문영(文 英) ()는 해은(海隱), 시호(諡號)는 양민(襄敏). 1393(태조 2) 문과(文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그는 베짜는 방법을 만들었는데 베가 되어진 것을 문영(文英)이라 한 데서「무명」이라는말이 생겼다고 한다.

문치(文 致)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문유(文 猷) 조선 때 대사성을(大司成)을 지냈다.

문영(文 榮) 조선조(朝鮮朝)에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문천봉(文天奉) ()는 이경(以敬). 1400(정종 2)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으로 방간(芳幹)의 난() 때 태종(太宗)을 호위(護衛)한 공()으로 보상을 받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내고, 개령군(開寧君)에 봉()해졌다.

문민(文 敏) 1431(세종 13) 호군(護軍)을 거쳐 1441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이듬해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에 이르렀다. 딸이 세종(世宗)의 친선(親選)으로 세자(世子)의 승휘(承徽)가 되었다.

문서(文 叙)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문충세(文忠世) 조선에서 우도지관(右都知管)을 역임하였다.

문극층(文克忠) ()는 옥여(玉汝). 조선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문승서(文承瑞) ()는 현조(顯照). 조선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승지(副承旨)로 공충도수사(公忠道水使)를 지냈다. 1467(세조 13)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討滅)한 공()으로 조석문(曺錫文)등과 함께 녹훈(錄勳)되었다.

문치창(文致昌) 조선 문종(文宗) 때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고, 1455(段종 3) 노산군(魯山君 : 단종)의 화()를 막으려다가 1461(세조 7) 국형(鞠刑)을 받았으나 충신(忠臣)의 후예라 하여 사유(赦宥)되어 구성(龜城)으로 유배(流配)되었다.

문찬(文 贊) ()는 명천(明泉).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문완(文 琬) ()는 형옥(亨玉), ()는 경암(敬菴), 시호(諡號)는 익정(翊定), 조선 때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지냈다.

문여충(文汝忠)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문여녕(文汝寧) 1427(세종 9) 친시문과(親試文科)레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황제(皇帝)로부터 의대(衣帶)를 상()으로 받고 귀국 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문순(文 珣) 조선(朝鮮) 때 이조 참의(參議)를 지냈다.

문인(文 璘) 조선 때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문상능(文尙能) ()는 인재(人財). 조선 때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문상행(文尙行) ()는 월곡(月谷), 시호(諡號)는 경숙(敬肅). 1411(태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세조(世祖) 때 용담 현령(龍潭縣令)을 지내고,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어 세조(世祖)에게 상소(上疏)하다가 단성(丹城)에 유배(流配), 능주(綾州)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숙종(肅宗) 때 사유(赦宥)되었다.

경종(景宗) 때 이조 판서(吏曺判書)․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경연춘추관사(經筵春秋館事)에 추증(追贈)되었다.

문사영(文士英) ()는 희현(希賢), ()는 진명재(進明齋). 조선 때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을 지냈다.

문송수(文松壽) 조선조(朝鮮朝)에 정랑(正郞)을 지냈다.

문몽원(文夢轅) ()는 중길(仲吉), ()는 환성(喚醒).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문회지(文繪地) ()는 추과재(錐錁齋). 조선 때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가 피화(被禍)되자 은거(隱居)하여 도학(道學)에 전념, 실천궁행(實踐躬行)에 힘썼다. 영조(英祖)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追贈)되었다.

문윤명(文允明) ()는 회숙(晦叔). 조선(朝鮮) 때 봉상시 부정(奉常寺副正)을 지냈다.

문계창(文繼昌) ()는 양심정(養心亭).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문서귀(文瑞龜) ()는 장경(長卿). 조선조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문자신(文自愼)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문익성(文益成) 1526(중종 21)1584(선조 17)

()는 숙재(叔裁), ()는 옥동(玉洞). 합천(陜川) 출신. 조 식(曺 植)․주세붕(周世鵬)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이 황(李 滉)에게서 「대학(大學)」의 요지를 배웠다.

1549(명종 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61(명종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 156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벼슬은 사헌부(司憲府)의 지평(地平)․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지냈다. 도승지(都承旨) 겸 직제학(直提學)에 추증(追贈),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소조(文紹祖) 조선조(朝鮮朝)에 별좌(別坐)를 지냈다.

문치(文 致) ()는 사성(思成), 시호(諡號)는 충양(忠襄). 1506(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연산군(燕山君)을 폐()하고 진성대군(晋城大君)을 왕()으로 추대,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으로 문원군(文原君)에 봉()해졌으며,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냈다.

문온(文 蘊)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문경도(文敬度) ()는 언휴(彦休), ()는 총계당(䕺桂堂). 조선(朝鮮)에서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문자수(文自修) ()는 도숙(道叔), ()는 면수재(勉修齋). 조선 세종(世宗)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454(단종 2) 장흥고 부직장(長興庫副直長)에 이르고 1455(세조 1) 녹사(錄事)로서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2등에 녹훈, 이어 함열(咸悅)․곡성 현감(谷城縣監)을 역임하였다.

퇴임 후 고향(故鄕 : 능주 월곡)에 사마재(司馬齋)를 건립(建立)하여 후진(後進)양성에 힘을 썼고, 향사당(鄕射堂)을 지어 향민들의 교화에 정성을 다했다. 능주(綾州)의 삼현사(三賢祠)에 제향되었다.

문구연(文九淵) ()는 영숙(永叔), ()는 월파(月坡). 조선 때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문우창(文佑昌) 조선조(朝鮮朝)에 목사(牧使)를 지냈다.

문행(文 行) 조선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

문기우(文起佑) 조선에서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문승수(文承洙)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문헌징(文獻徵) ()는 성언(聖言).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문여(文 勵) ()는 자선(子善), ()는 운계(雲溪). 1553(명종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정자(承政院正字)를 지내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토적(討賊)의 공()으로 2등훈(二等勳)이 되고, ()을 호종(扈從)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공(錄功)되었다. 헌납(獻納)․교리(敎理)․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문여량(文汝良) 조선 때 한성윤(漢城尹)을 역임하였다.

문손관(文孫貫) 조선조(朝鮮朝)에 사성(司成)을 지냈다.

문경동(文敬仝) 1457(세조 3)1521(중종 16)

()는 흠지(欽之), ()는 창계(滄溪).

1495(연산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 벼슬을 거쳐 비안 현감(比安縣監)․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를 역임하고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 등을 지냈다.

1508(중종 5) 삼포왜란 때 왜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사성(司成)이 되었으며, 예천 군수(醴泉郡守)․청풍 군수(淸風郡守)를 지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영양(영양)의 창계서원(창계서원)에 제향되었다.

문걸(文 傑) ?1500(연산군 6)

초명(初名)은 빈(), ()는 언장(彦章). 1480(성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의정부 사록(議政府司錄)․영동현감(永同顯監)․헌납(獻納)을 지내고 1499(연산군 5) 양양 부사(襄陽府使)가 되었다.

문근(文 瑾) 1471(성종 2)?

()는 사휘(士輝), ()는 매계(梅溪). 1495(연산군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1508(중종 3) 금산 군수(錦山郡守)로 치적을 올려 상을 받았다.

1516년 대사간(大司諫)․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都承旨)를 지냈고, 특히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신진사류(新進士類)로 중종(中宗)의 신임을 받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전직, 1519(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의 처형을 통박하다가 파직되었다. 1521년 다시 참판(參判)에 기용되었으나 또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이조 판서(吏曺判書)에 추증, 용궁(龍宮)의 기천서원(箕川書院)에 제향되었다.

문관(文 瓘) 1475(성종 6)1519(중종 14)

()는 백옥(伯玉), ()는 죽계(竹溪). 1507(중종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부임하여 전임(前任)인 정여창(鄭汝昌)과 같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전정후문(前鄭後文)이라고 찬양했다.

지평(地平)을 거쳐 1518년 주청사(奏請使)의 검찰관(檢察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장령(掌令)․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을 지냈다. 용궁(龍宮)의 기천서원(箕川書院)에 제향되었다.

문홍도(文弘道) 1553(명종 8)?

()는 여중(汝中). 진사(進士)1588(선조 2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지평(地平)․장령(掌令) 등을 지내면서 북인(北人)에 가담, 정인홍(鄭仁弘)의 일파가 되어 임진왜란 때 강화(講和)를 주장한 남인(南人)인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을 탄핵하여 축출했다. 후에 평안도 어사(平安道御史)․수원부사(水原府使)․사인(舍人) 등을 지냈다.

문위(文 緯) 1555(명종 10)1632(인조 10)

()는 순부(純夫), ()는 모계(茅溪), 통정대부(通政大夫) 산두(山斗)의 아들. 거창(居昌)출신. 정 구(鄭 逑)의 문인.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義兵大將) 김 면(金 沔)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가 김 면이 병사(兵使)하자 뒷일을 맡아 처리했다.

후에 부제학(副提學) 김 옹(金 顒), 재상(宰相)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고 이어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감찰(監察)을 역임,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사임하고 낙향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고령현감(高靈縣監)이 되었으나 수개월 후에 병으로 사임했다. 거창(居昌)의 용원서원(龍元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덕교(文德敎) 1551(明종 6)1611(광해군 3)

()는 가화(可化), ()는 동호(東湖),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 ()의 아들. 1585(선조 1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냈으며 문명(文名)이 높았다. 임진왜란 때 일가족이 왜적(倭賊)과 항거하다가 순절하였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 함흥(咸興)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삼(文 參) ()는 여로(汝魯), ()는 백초당(白草堂). 조선 때 진사(進士)로서 형 벽()과 함께 지극히 부모를 공양하더니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여 3년 여막(廬幕)할 때 근처의 풀잎이 빛을 잃다가 3년 후에 빛이 돌아오니 그 마을을 백초동(白草洞)이라 하였다. 장흥(長興)의 백동사(白洞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익주(文益周) ()는 중욱(仲郁), ()는 백련당(白蓮堂). 조선 때 효자(孝子)로 향민(鄕民)의 칭송을 받았다.

문홍운(文弘運) ()는 여간(汝幹), ()는 매촌(梅村). 1612(광해군 4) 진사(進士)를 지내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창의(倡義)하여 원종훈(原從勳)에 책록되었다.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행의(行義)가 독실해서 유림(儒林)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함천(陜川)의 임천서원(臨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홍원(文弘遠) ()는 모두헌(慕杜軒). 1603(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 임해군(臨海君)이 역모죄로 정배당하자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서 궁내(宮內)의 경비를 맡아보다가 3개월 만에「부귀사(不歸詞)」를 짓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隱居)하였다.

문경호(文景虎) ()는 역양(嶧陽).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창의(倡義)하였고, 찰방(察訪)을 지냈다.

문광복(文光福) ()는 중수(仲授), ()는 규헌(奎軒). 조선 명종(明宗) 때 진사(進士)가 되고 음보(蔭補)로 훈련원 습독관(訓鍊院習讀官)을 지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들 호섭(虎燮)과 함께 금산성(金山城) 싸움에 참가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아들과 함께 순사, 소식을 들은 처() 김씨(金氏)와 자부(子婦) 이씨(李氏)도 자진(自盡)하였다.

문상표(文尙彪) ()는 호은(湖隱). 조선 때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지냈다.

문위세(文緯世) 1534(중종 29)1600(선조 33)

()는 숙장(叔章), ()는 풍암(楓庵), 익점(益漸)9대손. 류희춘(柳希春)․이 황(李 滉)의 문인. 1567(명종 22) 진사(進士)가 되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朴光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 조달 등으로 공을 세워 1595년 용담 현령(龍潭縣令)에 임명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읍민을 동원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 많은 왜군을 베어 1600년 파주 목사(坡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 장흥(長興)의 강성서원(江城書院)에 제향 되었다.

문홍헌(文弘獻) ?1593(선조 26)

()는 여징(汝徵),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사(進士)로서 초토사(招討使)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싸우다 금산(錦山)에서 패하자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막하에서 진주성(晋州城)에 집결한 의병장들과 합류, 분전 끝에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와 함께 강에 투신해서 자살했다.

문희성(文希聖) ()는 경수(敬修), ()는 지헌(止軒), 판관(判官) 관도(貫道)의 아들. 1594(선조 27) 무과(武科)에 급제,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전공을 세웠고, 광해군(光海君) 때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거쳐 방어사(防禦使)로서 원수(元帥) 강홍립(姜弘立)을 따 라 요동(遼東) 싸움에 출전, 홍립과 함께 후금(後金)에 투항, 화의(和議) 후 돌아와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이해 투항한 사실로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두둔으로 무사했고, 뒤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문재도(文載道) ()는 계기(戒器), ()는 휴헌(休軒). 1597(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백의(白衣)로 관군(官軍)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603(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3(三郡)의 수령(守令)을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를 지냈다.

문기방(文紀房) ?1592(선조 25)

()는 중률(仲律), 강성군(江城君) 익점(益漸)의 후손.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수문장(守門將)이 되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복남(李福男)을 따라 남원(南原)에서 싸우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이복남과 함께 전사했다. 남원(南原)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문관도(文貫道) 1550(明종 5)?

1584(선조 17) 문과(文科)에 급제, 하양 현감(河陽縣監). 경주판관(慶州判官)을 지내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아들 희성(希聖)․희현(希賢)․희철(希哲)을 거닐고 창의(倡義)하였으며 경상도 순찰사(慶尙道巡察使)의 중군(中軍)으로 재직(在職) 중 감영(監營)에서 순직(殉職)하였다.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문희현(文希賢) ()는 송제(松齊). 조선조(朝鮮朝)에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문석생(文石生) ()는 죽계(竹溪).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都元帥) 장 만(張 晩)의 막하(幕下)에서 싸우다 강도(江都)에서 순절(殉節)했다. 진무훈(振武勳)에 책록, 판관(判官)에 추증(追贈)되었다.

문회(文 晦) ()는 자명(自明).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을 고변(告變)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3(三等)으로 오천군(鰲川君)에 봉해졌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내고,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문상례(文尙禮)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의주 서성(義州西城)의 장군(將軍)으로서 역전 끝에 전사(戰死)했다.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에 추증(追贈), 귀암사(龜巖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문덕겸(文德謙)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대 왜병(倭兵)이 동래(東萊)를 침공하자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순절(殉節) 하였다.

문존도(文存道) ()는 퇴정(退亭). 조선(朝鮮) 때 학자(學者)로 후진양성에 힘썼다.

문희순(文希舜) ()는 태고정(太古亭). 1636(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여산(礪山)까지 갔다가 강화(講和)가 이루어지자 분개하여 고향에 태고정(太古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벼슬은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문성흠(文聖欽) 조선에서 무과(武科)에 급제,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고, 벼슬은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이르렀다.

문수빈(文守彬) 숙종(肅宗) 때 김수장(金壽長)․김천택(金天澤) 등과 함께 경정산(敬亭山) 가단(歌壇)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그의 시조(詩調)가 전한다.

문천두(文天斗) ()는 성칠(成七), () 수촌(睡村). 조선조에 학자(學者)였다.

문영후(文榮後) ()는 인경(仁卿). 조선 때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문징후(文徵後) 조선(朝鮮) 때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문익빈(文益彬) ()는 유문(有文).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문덕구(文德龜) ()는 자하(子夏). 조선(朝鮮) 때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문덕린(文德麟) ()는 성휴(聖休). 조선에서 통례(通禮)를 지냈다.

문재중(文在中) ()는 길보(吉甫).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문동도(文東道) ()는 성원(聖源), ()는 경암(敬菴). 일찍이 성리학(性理學)을 강마(講磨)하여 학행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다. 숙종(肅宗) 때 후릉 참봉(厚陵參奉)과 세자익위사 부수(世子翊衛司副率)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합천(陜川)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복형(文復亨) ()는 내양(來陽). 조선조에 찰방(察訪)을 지냈다.

문형중(文衡中) ()는 방언(邦彦). 조선 때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문도신(文道新) ()는 성보(聖甫). 영조(英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 나숭대(羅崇大)의 반란이 있자 동생 도환(道桓)과 같이 토평, 그 공으로 부산 병마절제사(釜山兵馬節制使)를 지냈다.

문봉수(文鳳壽) 조선 때 전적(典籍)을 역임하였다.

문오채(文五采) ()는 천소(天素). 조선 때 전적(典籍)을 지냈다.

문시룡(文始龍) ()는 현지(賢之). 1753(영조 2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을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호조 정랑(戶曹正郞)․춘추관사(春秋館事)를 역임하였다.

문약연(文躍淵) ()는 연천(淵天). 조선 때 전적(典籍)을 지냈다.

문찬규(文燦奎) ()는 광오(光五), ()는 반암(泮庵). 조선조에 도정(都正)을 역임하였다.

문극효(文極孝) 조선(朝鮮) 대 도사(都事)를 지냈다.

문봉익(文鳳翼) ()는 덕징(德徵). 1798(정조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문봉기(文鳳岐) ()는 성우(聖遇), ()는 죽우당(竹友堂). 조선(朝鮮)에서 전적(典籍)을 지냈다.

문응규(文應奎) 1811(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공()을 세워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의주(義州)의 학봉사(鶴峯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문범룡(文範龍) ()는 홍서(洪瑞), ()는 안곡(安谷). 조선에서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냈다.

문기호(文基浩) ?1811(순조 11)

()는 양오(養吾). 1811(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정주(定州)에 가서 경래를 타이르겠다고 의주 부윤(義州府尹)에게 자청, 성에 들어가 난군을 초유(招諭)하다가 살해당했다. 의주(義州)의 학봉사(鶴峯祠)에 제향되었다.

문경애(文慶愛) 조선 때 판윤(判尹)을 역임하였다.

문학천(文學天) ()는 명보(明普), ()는 백운처사(白雲處士). 1891(고종 28) 2월 학문(學問)과 행의(行誼)로 도향(道鄕)에서 천거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호조 판서(戶曹判書)․경연 춘추관(經筵春秋館)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둔적(遁蹟)하여 백운암(白雲庵 : 초당)을 짓고 개탄시(慨嘆詩)․개탄가(慨嘆歌)를 지어 국(憂國)의 뜻을 품었다.

19232월 효행(孝行)에 대한 경학원(經學院)의 포상(褒賞)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 제요(濟堯)․제순(濟舜)․제우(濟禹)도 효자(孝子)로 경학원(經學院)의 포상(褒賞)을 받았다.

문봉휴(文鳳休) ()는 명직(明直), ()는 심암(心巖). 조선(朝鮮)때 도정(都正)을 지냈다.

문달환(文達煥) ()는 덕경(德卿), ()는 둔재(遯齋).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 그는 스승을 따라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19066월 관군(官軍)․일군(日軍)과 격전 끝에 패전하자 최후가지 스승을 따르다가 체포되어 12의사(義士)로 칭송되었다. 그후 감옥에서 풀려 나와 은거 생활로 학문에만 전심, 1982년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로 포상이 내려졌다. 능주(綾州)의 부춘사(富春祠)에 제향(帝鄕)되었다.

문태수(文泰洙) 경남 함양(咸陽) 출신. 1908(융희 2)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무주(武州) 덕유산(德裕山)을 근거로 영남(嶺南)․호남(湖南) ․호서(湖西) 일대에서 활약, 호남 의병장(湖南義兵將)이 되었다.

이듬해 지례군(知禮郡)․안의군(安義郡)․용담군(龍潭郡)․무주군(茂朱郡)․남원군(南原郡) 등지에서 크게 활약, 여러 차례 일본군을 주찔렀으나 뒤에 부상을 당하고 피체, 대구(大邱)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복장)이 수여되었다.

문병현(文炳鉉) ()는 사일(士日). 국운(國運)이 쇠토하여지자 고향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덕유산(德裕山) 원통사(元通寺)를 거점으로 군사(軍士)를 양성하고 박춘실(朴春實)을 선봉장(先鋒將)으로 일본군(日本軍)과 싸워 큰 전공(戰功)을 세웠다. 후에 체포되어 경성미결소(京城未決所)에서 죽었다.

문석환(文奭煥) ()는 영백(英伯), ()는 운초(雲樵).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자 분함을 참지 못하여 참판(參判) 민종직(閔宗直)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홍양(洪陽)에서 의거(義擧), 일본군(日本軍)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경성(京城) 감옥에서 대마도(對馬島)로 이송,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옥중생활을 하였다. 경술합방(庚戌合邦)이 발표되자 울분으로 병을 얻어 죽었다.

문양목(文讓穆) 한말에 미국에 건너가 대동 보국회(大同保國會) 회장으로 있다가 1908(융희 2) 한국정부 외부고문(外部顧問) 스티븐스가 귀국하여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보호정치를 찬양하자 이에 격분하여 재미(在美) 애국단체와 회합, 진상규명(眞相糾明) 총대(總代) 4명의 한 사람으로 뽑혀 그를 방문, 여전히 일본의 정책을 지지함을 듣고 격분 끝에 구타했다.

이에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등이 스티븐스를 살해하자 그들의 변호비용으로 의연금(義捐金) 7백 달러를 모금한 뒤 판서 전담위원(判書專擔委員)이 되어 재무를 담당했다.

문용기(文鏞祺) 1878 (고종 15) 1919

전북 익산(益山) 출생. 군산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로 있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리(裡理) 역전에서 개최된 익산군민대회(益山郡民大會)에서 연설, 궐기할 것을 호소하던 중 일본 경찰의 칼에 오른손을 잃었다. 이에 왼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고창, 다시 왼손을 절단 당했으나 맨몸으로 군중을 지도하다가 일본 경찰의 칼에 찔려 순국했다.

문창범(文昌範) 일찍이 시베리아 방면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9년 쌍성(雙城)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를 결성, 회장이 되었다. 19194월 임시정부가 조직될 때 국민의회 대표로 참여, 초대 교통총장(交通總長)이 되고, 525일 개각(개각) 때 사임, 계속 항일 지하운동에 투신했다.

문창학(文昌學) 1882 (고종 19) 1923

일명 언준(彦俊). 온성(穩城) 출신. 일본 헌병보조원(憲兵補助員)으로 있다가 전향하여 31운동에 참가하고 만주에 망명,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 후 신건원 주재소(新乾院駐在所)를 습격하다가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문창숙(文昌淑) 1898 (광무 2) 1927

황해도 신계(新溪) 출신.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참가, 후에 만주에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수료,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들어가 부사(副使)를 거쳐 중대장이 되어 1923년 부하 하순경(河舜卿) 5인을 거느리고 평북 강계(江界)로 잠입,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의 밀정 홍종락(洪鍾洛)을 암살한 후 돌아갔으나 후에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문창수(文昌秀) 평북 창성(昌城) 출신. 유학자로 학문을 닦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항일투쟁을 전개, 후에 일본군에 체포되어 악독한 고문 끝에 눈알을 뽑히면서도 끝까지 항쟁하다 죽었다.

문명훤(文明煊) 1892 (고종 29) 1958

평양 출신. 한일합방이 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귀국, 31 운동 때 맹산(孟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1920년 임시정부의 내무부 서기(內務部書記)를 지내고 1921년 도미, 1923년 귀국,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피체, 3년간 복역했다.

문일평(文一平) 1888 (고종 25) 1939

()는 호암(湖岩). 평북 출신. 1910년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학부를 중퇴,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 근무했다.

후에 귀국, 중동(中東)․중앙(中央)․배재(培材)․송도(松都) 중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외일보(中外日報)」기자로 있다가 1933년「조선일보」편집고문으로 취임, 7년간 논설을 집필하며 국사 연구에도 정진, 많은 논문을 남겼다.

문세영(文世榮) ()는 청람(靑嵐).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 뒤에 배재고보에서 교편(敎鞭)을 잡았다. 이윤재(李允宰)와 함께 사전(辭典) 편찬 사업(編纂事業)에 종사했으며, 1939년 최초로 국어사전(國語辭典)인「조선어 사전(朝鮮語辭典)」을 간행(刊行)하였다. 1940년「수정증보조선어사전(修正增補朝鮮語辭典)」을 출판하고, 1954년 국어사전(國語辭典) 간행회(刊行會)에서「수정증보국어대사전(修正增補國語大辭典)」으로 다시 개편하여 출판, 그밖에도 여러 권의 국어 소사전(國語小辭典)과 이와 유사한 사전을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