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서촉연안명씨(西蜀延安明氏),서초명씨시조,연안명씨시조,명옥진(明玉珍),연안명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08 21:34 수정일 : 2018-02-13 14:51

서촉연안명씨시조

서촉(西蜀)은 고대 중국(中國)의 진(秦)나라 서쪽에 속해있던 지명이다. 원(元)나라가 기울어 가는 1362년(고려 공민왕 11) 사천성(泗川省) 성도(成都)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하(夏)나라를 세웠던 명옥진(明玉珍)의 아들 명 승(明昇)은 1366년(고려 공민왕 16)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王位)를 계승하여 현군(賢君)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1371년(공민왕 20) 명(明)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세력에 굴복하고 이듬해 어머니 팽씨(彭氏)와 함께 가족 27명을 거느리고 고려(高麗)에 귀화(歸化)하였다.

고려에서는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여 국빈(國賓)의 대우를 하였고, 집과 노비를 내려 왕족(王族)의 지위를 지켜주었다. 그는 송도(松都)의 북부(北部) 이정리(梨井里 : 흥국사 북쪽 산밑)에 정착(定着)하고 총랑(摠郞) 윤희종(尹熙宗)의 딸과 혼인하여 살면서 아들 4형제를 낳아 우리나라 명씨(明氏)의 시원(始原)을 이루었다.

명승(明昇)은 이성계(李成桂)와 친분을 맺어 두터운 교분으로 자주 바둑을 즐겼으며, 그의 어머니 팽씨(彭氏)는 이태조(李太祖)가 등극할 때 용포곤의(龍袍袞衣 : 임금이 입던 정복, 황색이나 적색의 비단으로 지으며 가슴과 두 어깨에 발톱이 다섯 개 달린 용의 무늬를 금실로 둥 글게 수 놓았음)를 지어 올려 태조가 감읍(感泣)했다고 한다. 태종(太宗)때에 승(昇)은 화촉군(華蜀君)에 봉군되어 충훈세록(忠勳世祿)의 예우를 받았으며, 영조조(英祖朝)에 와서는 그의 후손들에게 병역과 납세를 면제토록 하였다.

그로부터 명씨(明氏)는 문호(門戶)를 역어 대하(大夏)의 왕(王)인 명옥진(明玉珍)을 시조(始祖)로 삼고 선조(先祖)의 원향지(原鄕地)인 서촉 (西蜀)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게 되었으며, 명 승의 아들 자헌공(資憲公) 의(儀), 총랑공(摠郞公) 현(俔), 부사공(副使公) 준(俊), 시랑공(侍郞公) 신(信)의 후예들이 전국 각지에 분산 세거(世居)하면서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였다.


본관의 유래

명씨(明氏)의 본관(本貫)은 서촉(西蜀)을 비롯하여 연안(延安)․해주(海州)․황해(黃海)․한양(漢陽)․양산(陽山 : 옥천지방)․태안(泰安) 등 24본(本)까지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한 핏줄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여, 황해도(黃海道) 연안(延安)은 자헌공 의(儀)의 후손들이 뿌리를 내렸던 지역으로 선조(先祖)의 유적이 있는 곳이기도 하여 일부에서는 아직도 관향(貫鄕)을 연안(延安)으로 쓰고 있으나 1986년에 간행된「명씨대동보(明氏大同譜)」에서는 서촉과 연안의 합본(合本)으로 되어있다.


대표적인 인물

명씨의 인맥을 살펴보면 6세손 진사(進士) 극겸(克謙)의 맏아들 광계(光啓)가 임진왜란 때 평택 현감(平澤縣監)으로 창의(倡義)하여 중봉(重峰) 조 헌(趙憲)의 의병(義兵)과 합세, 유명한 금산(錦山)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후손 정구(廷耈)는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보령 현감(保寧縣監)을 지냈다.

한편 광계의 증손(曾孫) 천득(天得)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자현(自賢)은 훈련원 첨정(訓鍊院 僉正)을 역임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거쳐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낸 치상(致庠 : 광계의 11세손)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그밖의 인물로는 고종(高宗) 때 효자(孝子)로 유명했던 우진(祐鎭)과 연안 군수(延安郡守)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범석(範錫)이 뛰어났다.


서촉연안명씨 인구

명씨는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14, 452명, 1975년에는 3,840가구로 집계되었고,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서촉명씨는 3,820명, 연안명씨는 23,3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조상인물

명승(明 昇) 1355 (공민왕 4) ~ ?

하(夏)나라 왕 옥진(玉珍)의 아들. 명나라 태조(太祖)가 하나라를 멸망시키자 그에 항복하고 귀의후(歸義候)에 봉해졌다. 1372년(공민왕 21) 18세로 명태조에 의해 한주(漢主) 진우량(陳友諒)의 아들 이(理)와 함께 남녀 27인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하, 이듬해 총랑(摠郞) 윤희종(尹熙宗)의 딸과 결혼, 개경(開京)에 살았다. 조선 태종(太宗)때 화촉군(華蜀君)에 봉해지고 충훈세록(忠勳世祿)을 하사받았다. 죽은 후 연안(延安)에 사당(祠堂)이 세워졌다.명준(明俊)조선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를 역임하였다.

명신(明 信) 조선조에 시랑(侍郞)을 역임하였다.

명상덕(明尙德) 조선에서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를 지냈다.

명광계(明光啓) 1543 (중종 38) ~ 1592 (선조 25)

자는 치회(稚晦), 호(號)는 모암(慕庵), 진사(進士) 극겸(克謙)의 아들. 개성(開城)출신. 1576년(선조 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양사(兩司)의 벼슬을 지내고 1592년 평택 현령(平澤縣令)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휘하에 정예병을 인솔, 조 헌(趙 憲)의 의병과 합세하여 왜군과 금산(錦山)에서 격전 끝에 전사했다.

명귀수(明龜壽) 조선조에 내자시 별제(內資寺別提)를 지냈다.

명경덕(明景德)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을 지냈다.

명성일(明誠逸) 조선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하였다.

명천득(明天得) 호(號)는 헌남(軒楠). 조선에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명자현(明自賢) 호는 회월당(晦月堂). 조선 때 훈련원 참정(訓鍊院參政)을 지냈다.

명신걸(明信傑) 조선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명윤업(明潤業) 초명(初名)은 윤현(潤玄), 자는 내익(乃益). 조선조에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명안명(明安明) 자는 화여(華汝). 조선에서 수인 별장(修仁別將)을 역임하였다.

명윤중(明潤仲) 자는 노신(老信), 호(號)는 별송재(別松齋). 조선에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명간흡(明澗洽) 조선에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명원조(明元祚) 조선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명덕화(明德和) 조선 때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를 지냈다.

명응진(明應鎭) 조선조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명희룡(明羲龍) 조선에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명화식(明化植) 초명(初名)은 범주(範柱), 자는 치중(致仲). 조선 때 내부주사(內府主事)를 지냈다.

명치상(明致庠) 자는 선여(善汝), 호(號)는 호운(湖雲).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지내고,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오위장(五衛將) 등을 역임했다.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명덕의(明德懿) 자는 달숙(達淑). 조선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명선욱(明瑄煜) 자는 필서(弼瑞), 호는 송오재(松梧齋), 조선 때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명예종(明禮宗) 자는 권여(權輿), 호는 남헌(藍軒). 조선 때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냈다.

명계광(明繼光) 호는 기암(寄巖). 조선에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명해선(明海瑄) 자는 중화(仲化).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명도수(明道洙) 자(字)는 우연(禹璉). 조선조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다.

명진우(明震雨) 초명은 재홍(載弘), 자(字)는 내수(乃秀).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명진기(明震基) 조선 때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을 지냈다.

명진항(明震恒) 조선조에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명세창(明世昌) 조선에서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명덕행(明德行) 조선 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명준성(明俊成) 자(字)는 의준(儀俊). 조선조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명계순(明啓順)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명정구(明廷耈) 자는 노경(老卿), 호는 광암(廣巖). 1693년(숙종 1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조 좌랑(禮曹佐郞),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 보령 현감(保寧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명달호(明達昊) 조선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명두호(明斗昊) 조선 때 의금부사(義禁府事)를 역임하였다.

명선호(明宣昊) 조선에서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명재호(明才昊) 자는 두칠(斗七). 조선조에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다.

명완벽(明完璧) 호는 진당(眞堂). 1861년(철종 12) 장악원 전악(掌樂院典樂)에서 임명되어 악사(樂師), 국악사(國樂師), 아악사(雅樂師) 등을 거쳐 아악사장(雅樂師長)이 되었다. 가야금의 명수로 다른 악기에도 능했고, 1921년 서울 공회당(公會堂)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명이항(明以恒) 호는 성재(成齋). 21세 때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했고, 3.1운동 때 총독에게 장문(長文)의 진정서를 제출하였다가 투옥, 출옥 후 오성학교(五星學校)를 경여하는 한편 협성학교(協成學校)를 인수하여 협성실업학교(協成實業學校)로 발저 시키고 김여식(金麗植)과 함께 광신상업학교(光新商業學校)를 설립했다. 1942년 고향에다 영변여자중학교(寧邊女子中學校)를 세우는 등 일생을 교육사업에 바쳤다.

명제세(明濟世) 1885 (고종 22) ~ ?

영변(寧邊) 출신. 한일합방(韓日合邦) 뒤에 광복단(光復團)에 가입, 활약하다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외국어 학교를 졸업하고 남북만주 각지와 시베리아를 돌아다니며 항일투쟁에 투신했다. 3.1운동 때 체포되어 5년간 복역, 뒤에 불변단(不變團)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계속,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간부, 초대 심계원장(審計院長)을 지냈다. 6.25사변 때 납북(拉北)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