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신창맹씨시조(新昌孟氏),맹의(孟義),신창맹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08 21:26 수정일 : 2018-02-18 17:35

시 조

맹씨(孟氏)는 중국 평릉(平陵 : 협서성 관중 도)에 연원(淵源)을 두고, 춘추시대(春秋時代) 제나라 15대 임금인 환공(桓公)의 아들 경부(慶父)의 호(號)가 맹손(孟孫) 이라서 맹(孟) 자(字)를 따서 성(姓)으로 삼았다고 하며, 아성(亞聖) 맹자(孟子)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진다.

기원전 372년 경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에 있었던 추(趨)에서 태어난 맹자(孟子)는 공자(孔子)의 사상을 발전시켜 인의예지(仁 義禮智)가 인간(人間)의 본성(本性)이라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으며, 제(齊)․양(梁) 등의 제후(諸侯)에게 왕도(王道)를 바탕으로 한 인의(仁義)의 정치를 권하다가 고향에 돌아와서 제자(弟子)와 토론하였고, 유학(儒學)의 정통(正統)으로 숭앙(崇仰)되어 불후(不朽)의 이름을 남렸다.

어릴 때 현모(賢母) 장씨(仉氏)의 밑에서 자라면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 아들의 면학을 위하여 세 번을 이사함)> 와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 : 공부를 중단하고 돌아온 아들을 꾸짖으며 짜던 베틀의 씨 날을 칼로 자름)>의 유명한 고사(故事)를 남겼다.

우리 나라 맹씨(孟氏)는 맹자(孟子)의 40세손 맹승훈(孟承訓)이 888년(신라 진성왕 2) 당(唐)나라 한림원(翰林院)의 오경박사(五經博士)로 유교를 전파하기 위하여「경전(經典)」을 가지고 동래(東來)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하나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본관의 유래

맹씨(孟氏)의 본관(本貫)은 신창(新昌)을 비롯하여 온양(溫陽)․파주(坡州)․양주(楊州)․청주(淸州)․안읍(安邑 : 옥천지방)․천안(天安)․전주(全州) 등 32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거나 신창과 온양을 제외한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신창(新昌)은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굴직현(屈直縣)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기량현(祁糧縣)으로 고쳐 온정군(溫井郡 : 온양)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高麗) 초에 신창현(新昌縣)으로 개칭히여 1018년(현종 9)에 천안부(天安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그후 조선조에 와서는 태조(太祖)가 만호(萬戶)를 없애고 1414년(태종 14)에 온수현(溫水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신창현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 1914년 행정구역 개칭에 따라 아산군(牙山郡)에 속하여 지금의 아산군 신창면이 있다.

신창맹씨(新昌孟氏)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부시랑(禮部侍郞)을 거쳐 예부 전서(禮部典書)에 오른 맹의(孟義)를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당대에 학자로서도 유명했던 의(儀)는 역신 조적(曺 頔)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충선왕(忠宣王) 때 신창백(新昌伯)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本貫)을 신창(新昌)으로 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신창 맹씨의 역대 인물을 살펴보면 일세조 의(儀)의 아들 유(裕)가 고려(高麗)에 이부 상서(吏部尙書)와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역임했고, 고려가 망하자 조의생(曺義生)」임선미(林先味) 등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충절(忠節)을 지켰다.

유의 아들 희도(希道)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어사(翰林御史)․수문전 제학(修文殿提學)․한성윤(漢城尹) 등을 지내며 길 재(吉 再)․정몽주(鄭夢周)와 교유했고, 공양왕(恭讓王) 때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를 받았으나 어지러운 정계(政界)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온양(溫陽) 오봉산(五峯山)에서 은거(隱居)하면서 호(號)를 동포(東浦)라 하였다.

희도(希道)의 아들이 조선조의 대표적인 명상(名相)으로 손꼽히는 고불(古佛) 사성(思誠)이다. 고려 말의 명장 최 영(崔 瑩)의 손녀사위이기도 한 그는 천성(天性)이 효도하고 청백(淸白)하여 정승의 벼슬에서도 권세(權勢)를 철저히 배제했고, 청결하고 간고(簡古)하여 늘 상민차림으로 소(牛)를 타고 나들이를 하여 보는 이들은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뵈러 온양에 오가는 때에 각 고을의 관가에 들리지 않고 늘간소한 행차를 하였는데, 어느날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 원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長好院)에서 기다렸더니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 그가 하인더러 이르기를 “네,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하였다. 그 하인이 돌아와 고했더니 두 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 밑 깊 은 못에 인(印)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후일 사람들은 그 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세종조상신편(世宗朝相臣編)>에 보면 그에 대한 유명한 <공당문답(公堂問答)>의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그가 온양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龍仁) 여원(旅院)에 들렸더니, 행차를 성하게 꾸민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그는 아래층에 앉았었다. 누상에 오른 자는 영남(嶺南)에 사는 사람으로서 의정부 녹사(議政府錄事) 시험에 응하러 가는 자였다.

그 선비는 맹정승을 보고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으로 문답하는 말 끝에 반드시 ‘공’ ‘당’하는 토를 넣기로 하였다. 맹정승이 먼저 “무엇하러 서울에 올라가는 공”하였더니,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하였다. 다시 “무슨 벼슬인공”하니 “녹사 시험보러 간당”하자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하니 그 사람은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하였다.

후일 맹정승이 의정부에 앉아있는데 그 사람이 시험을 치러 들어왔다. 그 사람은 눈앞의 정승이 전날에 장기를 두며 농담하던 그 노인인줄 알지 못했으나 맹정승은 그를 알아보고 “어떠한공”하니, 그 사람이 비로고 깨닫고 갑자기 말하기를 “죽었지당”하니 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김으로 맹정승이 그 까닭을 애기하자 모든 재상이 크게 웃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고, 맹정승의 추천으로 여러 처례 고을의 수령을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던 맹정승은 죽어서 곁에 남긴 것이 한 자루의 피리뿐이었다고 하며, 유명한 황 희(黃 喜) 정승과 함께 조선 초기의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여 후세의 신망받는 명상으로 일컫어졌다.

사성(思誠)의 아들 귀미(歸美)와 득미(得美)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증손(曾孫) 석흠(碩欽)이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平定)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신창군(新昌君)에 봉해졌고, 후손 세형(世衡)은 김장생(金長生)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워 1623년(인조 1) 문과에 급제하고 호조 정랑(戶曹正郞), 선산(善山)․장흥(長興)의 부사(府使)를 거쳐 6차례나 시정(侍 正)을 지냈다.

그외 세형의 아들 주서(冑瑞)가 황해(黃海)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내고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주서의 아들 만택(萬澤)은 관찰사와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고 지리(地理)에 글씨에 능했다. 근대에 와서는 고종(高宗) 때 의병(義兵)을 모아 동학난(東學亂)으로 혼란해진 치안(治安)을 유지하고, 민비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군(日本軍)과 항전하다가 순절한 영재(英在)가 유명했다.

인 구

신창맹씨는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11,000명, 1975년에는 2,928가구로 집계되었고,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19,97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신창맹씨조상인물

맹의(孟 義) 고려조(高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영동정(令同正)을 거쳐 예조 의랑(禮曹議郞)을 역임하고, 이어 이부 전서(吏部典書)에 이르렀다.

맹유(孟 裕)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순창 군사(淳昌郡事)를 지냈다.

맹도서(孟道瑞) 고려 때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맹희도(孟希道) 호는 동포(東浦), 호전(湖田),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 한림원 어사(翰林院御史)를 거쳐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을 역임하고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이르렀다.

맹사성(孟思誠) 1360 (공민왕 9) ~ 1438(세종 20)

자(字)는 자명(自明), 호(號)는 고불(古佛), 동포(東浦),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한성부윤(漢城府尹) 희도(希道)의 아들. 양촌(陽村) 권근(權 近)의 문인.

1386년(우왕 12) 문과(文科)에 급제, 예문춘추관 검열(例文春秋館檢閱)을 거쳐 전의승(典儀丞)․기거사인(起居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수원 판관(水原判官)․내사사인(內史舍人)․예조 정랑(禮曹正郞)․시어사(侍御史)․간의(諫議)를 지내고, 1400년(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1406년 이조 참의(吏曹參議),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이듬해 진전사(進箋使) 시종관(侍從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고, 1408년 대사헌(大司憲)으로 왕에게 알리지 않고 왕의 사위 조대림(趙大臨)을 국문(鞫問)한 것이 태종(太宗)의 노염을 사서 한주(韓州)에 유배되었으나, 영의정(領議政)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곧 풀려 나왔다.

그후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1416년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승진, 이어 호조․공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1419년(세종 1)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겸했다.

1425년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문신(文臣)으로는 최초로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1427년 우의정(右議政)에 승진했다.

1429년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고, 이듬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監修), 1431년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며 이듬해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를 겸하여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에 찬진(撰進)하고, 1435년 치사(致仕)했다.

황 희(黃 喜)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청렴하기로 이름높아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집에 비가 새고, 고향에 다닐 때 남루한 차림으로 행차하여 그곳 수령(守令)이 잘못 알아보고 야유했다가 나중에 알고 도망하다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려 후에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 하여 스스로 악기를 제작했다. 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 효자정문(孝子旌門)도 세워졌으며, 아산(牙山)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맹효민(孟孝敏) 조선 때 시중(侍中)을 역임하였다.

맹귀미(孟歸美) 조선에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맹득미(孟得美)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맹효증(孟孝曾) 조선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맹계증(孟繼曾) 조선 때 선교랑(宣敎郞)으로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를 역임하고,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에 추서(追叙),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맹석흠(孟碩欽) 조선 세조(世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벌(討伐)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신창군(新昌君)에 봉(封)해졌다.

맹석경(孟碩卿) 자(字)는 치화(致華). 조선조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맹석준(孟碩俊) 조선 때 호군(護軍)을 역임하였다.

맹안인(孟安仁) 조선조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맹호인(孟好仁) 조선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복시정(司僕侍正)을 역임하였다.

맹종인(孟宗仁) 자(字)는 자안(子安). 조선조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였다.

맹돈인(孟敦仁) 조선에서 사과(司果)를 지냈다.

맹홍인(孟弘仁) 자(字)는 수현(粹賢). 조선 때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다.

맹원선(孟元善) 조선조에 사직(司直)을 지냈다.

맹형선(孟亨善) 조선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맹의선(孟義善)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맹숭선(孟崇善) 조선(朝鮮)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성주 판관(星州判官)을 지냈다.

맹숭업(孟崇業)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맹방선(孟方善) 자(字)는 연포(淵포), 조선조에 부사과(副詞果)를 역임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맹천이(孟天彛) 조선조에 판관(判官)을 지냈다.

맹천복(孟天福)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追贈)도고, 이어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가자(加資)되었다.

맹천덕(孟天德) 초명(初名)은 덕양(德良). 조선조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맹유길(孟惟吉) 조선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냈다.

맹유명(孟惟命)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종친부 직장(宗親府直長)을 지냈다.

맹유경(孟惟慶) 조선조에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지냈다.

맹윤성(孟胤成) 조선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맹윤은(孟胤殷)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맹흥수(孟興壽) 조선조에 고령(高齡)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맹원(孟 瑗) 자(字)는 여옥(汝玉). 조선조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맹세형(孟世衡) 1588 (선조 21) ~ 1656 (효종 7)

자(字)는 여평(汝平), 호는 하곡(霞谷), 만은(晩隱), 희(喜)의 아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온양(溫陽)출신. 1623년(인조 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학유(學諭), 박사(博士), 전적(典籍)을 지냈다.

감찰(監察)․호조 좌랑(戶曹佐郞)․형조 정랑(刑曹正郞)을 거쳐 후에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어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고, 이어 종묘서령(宗廟署令)이 되었다. 1629년 호조 정랑(戶曹正郞)으로서 금산 군수(錦山郡守)가 되고, 장흥(長興)․선산(善山)의 부사(府使)로 있다가 한때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냈다.

울산 부사(蔚山府使)를 거쳐 직강(直講)․사예(司藝)․통례(通例)․정주 목사(定州牧使)․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안동 부사(安東府使) 등을 역임하는 동안 6차례에 걸쳐 시정(侍正)의 위계(位階)에 전직(轉職)하였고,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맹자문(孟自文) 조선(朝鮮) 때 음보(蔭補)로 사섬시정(司贍寺正)을 역임하였다.

맹한좌(孟漢佐)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맹몽업(孟夢業) 조선(朝鮮)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냈다.

맹사안(孟師顔)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별제(別提)를 지냈다.

맹효남(孟孝男) 조선조에 무과(武科)에 급제,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선천 부사(宣川府使)을 역임하였다.

맹현중(孟賢重) 조선(朝鮮) 중종조(中宗朝)에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으로 중화 군수(中和郡守)를 거쳐 거제 부사(巨濟府使)를 역임하였다.

맹우민(孟友閔)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정사공신(靖사功臣)에 녹훈(錄勳)되고 판서(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맹주서(孟冑瑞) 1622 (광해군 14) ~ ?

자(字)는 휴징(休徵), 부사(府使) 세형(世衡)의 아들. 1654년(효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660년(현종 1) 대교(待敎)를 거쳐 봉교(奉교), 정언(正言) 등을 역임, 1664년 사예(司藝)가 되었다. 1660년 장령(掌令)으로서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1670년(현종 11)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거쳐 1970년 좌부승지(左副承旨), 다음해 병조 참지(兵曹參知)․우승지(右承旨)․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역임했다. 1677년(숙종 3)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푼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특진관(特進官)에 이르렀다.

맹만시(孟萬始) 1636 (인조 14) ~ ? 자(字)는 원지(元之), 호(號)는 백평(栢枰), 윤서(胤瑞)의 아들. 1673년(헌종 14) 진사(進士)가 되고 벼슬이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서화(書畵)에 뛰어났으며, 특히 소(牛)를 즐겨 그렸다.

맹만택(孟萬澤) 1660 (현종 1) ~ 1710 (숙종 36)

자(字)는 시중(施仲), 승지(承旨) 주서(冑瑞)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현종(顯宗)의 딸 명선공주(明善公主)와 약혼했다가 1672년(현종 13) 공주가 죽자 신안위(新安慰)에 봉해졌고, 이듬해 사헌부(司憲府)의 건의로 봉작이 환수(還收)되었다.

1684년(숙종 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를 지내고, 1698년(숙종 2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1702년 사서(司書), 문학(文學), 이듬해 강원도 감진어사(江原道監賑御史)가 되었다.

1704년(숙종 30) 사간(司諫)․동부승지(同副承旨)․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 2년 후 대사간(大司諫), 1708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내고 이듬해 다시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지리(地理)에 능통했고,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소해체(小楷體)에 능 하여 안진경(顔眞卿)․류공권(柳公權)의 체를 터득했다.

맹만윤(孟萬胤) 자(字)는 종백(宗伯).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맹양호(孟養浩) 조선조에 주부(主簿)를 지냈다.

맹후성(孟後聖) 조선에서 전적(典籍)을 역임하였다.

맹이량(孟以亮) 조선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맹계현(孟繼賢) 조선조에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맹지대(孟至大) 조선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맹양대(孟養大) 조선 때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맹용대(孟龍大) 조선조에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지냈다.

맹유룡(孟儒龍) 조선 때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맹흠규(孟欽圭) 조선 때 집의(執義)를 지냈다.

맹도식(孟道植) 조선에서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맹노술(孟魯述) 자(字)는 득여(得汝). 1846년(헌종 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계속 학업(學業)에만 정진하였다.

맹영재(孟英在) 1894년(고종 31) 동학란(東學亂)으로 치안(治安)이 혼란해지자 의병(義兵)을 모아 경기(京畿)․충청(忠淸)․강원(江原) 일대의 치안(治安)을 유지하였고, 그후 지평 현감(砥平縣監) 때 민비시 해사건(閔妃弑害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日本軍)과 도처에서 항전하다가 순사(殉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