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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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08 19:38 수정일 : 2018-02-08 15:07

장흥마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마씨(馬氏)는 삼한시대(三韓時代)은 부족국가에서 발원(發源)된 우리나라 토착성씨(土着姓氏)로서 마한(馬韓)의 첫 군주(君主)인 마겸(馬謙)이 비조(鼻祖)로 알려져 왔으며,「마씨대동보(馬氏大同譜)」에는 백제(百濟) 건국의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좌보(左輔)의 벼슬을 역임한 마려(馬 黎)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소목을 밝힐 수 없으므로 마육침(馬陸沉)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보(系譜)를 잇고 있다.

그는 서기 660년(백제 의자 왕 20, 신라 무열왕 7)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신라(新羅)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13만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百濟)가 멸망하자 군사(軍士)를 일으켜 옛 목지국(目支國)의 성거산(聖居山 : 충남 직산)을 근거지로 백제 부흥전(復興 戰)을 도모했던 장군(將軍)이다.

그후 마씨는 육침의 10세손 점중(占中)이 고려 문종(文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목성군(木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맏아들 현(鉉 : 예빈전 태학사를 역임)이 목천파(木川派)로, 둘째 혁인(爀仁: 선종 때 개성 윤을 지냄)은 장흥파(長興派)로 분관(分貫)하여 마씨(馬氏)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충청남도 천원군(天原郡)에 속해있는 목 천(木川)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을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으며, 고려에서 와서 목주(木州)로 고쳤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목천으로 개칭하여 1913년 천원군(天原郡)에 속한 면(面)이 되었다.


목천파(木川派)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관조(貫祖) 현(鉉)의 8세손 천린(天麟)이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자 복주 (福州 : 지금의 안동)로 피난가는 왕(王)을 호종(扈從)하여 보리일등공신(輔理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목안군(木安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경수(坰秀)는 신안군(新安君)에 봉군되어 고려 말 무신들의 방자함을 견제하다가 미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송도(松都) 선죽교(善竹橋) 옆에 살면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성리학(性理學)에 정 통했던 희경(羲慶: 경주의 9세손)은 1567년(명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선조(宣祖) 때 이율곡(李栗谷)의 천거로 북부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역학(易學)과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일찍이 서경 유수(西京留守) 윤근수(尹根壽) 는 송도를 지날 때 그를 찾아와 <난초는 깊은 계곡에 있어도 향기가 절로 배어난다(在蘭幽谷香氣自襲)>고 그의 깊이있는 학문과 고결한 인품에 감탄했다고 한다.

한편 효렴(孝廉)으로 극찬을 받았던 희상(羲祥 : 희경의 형)의 손자(孫子) 상원(尙遠)은 문장(文章)이 뛰어나 당시 <동방문사(東方文士)>로 일컫어진 차천로(車天輅) 형제와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로 불리워졌다.

희경의 손자 사종(嗣宗 : 덕룡의 맏아들)은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에게 글을 배웠고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서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는 <문학으로는 세상에 사종이 있다. 이는 서경(西京)의 아유(雅儒)다>라고 칭찬 했다고 하며, 주자(朱子)의「가례(家禮)」가 현실에 맞지 않는다 하여 당시의 실정에 맞「오륜통의(五倫通義)」와「사례비요(四禮備要)」를 저술하여 우리 나라 고유의 예법을 정립(定立)하였거고, 윤리도덕의 전서(典書)가 되었다.

그외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른 인호(仁浩 : 사종의 종숙)와 영조(英祖) 때 직강(直講)을 지낸 지휘(之徽)가 학유(學諭)를 역임한 맹하(孟河)와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고려 선종(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개성윤(判開城尹)에 이르렀던 혁인(爀仁)이 뿌리를 내렸던 장흥(長興)은 전라남도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오차현(烏次縣)을 신라가 오아(烏兒)로 고쳐 보성군에 속하게 하였다가 고려 때 영암에 소속되고, 인종(仁宗) 때 장흥부(長興府)에 이어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으나 충선왕조에 와서 다시 장흥부로 개칭, 여러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에 장흥군이 되었다.


장흥파의 인물로는 관조(貫祖) 혁인의 손자 의유(義裕)가 고려 의종(毅宗) 때 문과(文科)에 오르고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희원(希願)은 희종(熙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를 지낸 지백(智伯 : 혁인의 7세손)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태종(太宗) 때 관산군(冠山君)에 봉해진 치원(致遠)의 아들 영(榮)은 사마봉시경(司馬奉寺卿)을 역임하고 귀향하 여 조종(祖宗)이 쌓은 수령산성(遂寧山城)을 보수(保修)하여 왜구(倭寇)를 막는 한편 후학(後學)에 진력하다가 후에 곡성(谷 城) 당상촌(堂上村)으로 이거(移居)하였고, 만년에 수령군(遂寧君)에 추봉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3등공신(佐命三等功臣)에 책록된 천목(天牧)은 영(榮)의 아들로 1412년(태종 12) 전라도 병마절제사(全羅道兵馬節制使)를 두 번이나 역임하여 당시 해안(海岸)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웠고, 항구적(恒久的)인 왜적방어책(倭賊防禦策)으로 광주(光州)에 있던 병마본영(兵馬本營)을 도강(道康 : 강진)의 수인산(修因山)으로 옮겨 장수대(將帥臺)를 만들어 왜구를 방비하니, 그후부터는 왜구가 접근하지 못했다.

1419년(세종 원년) 북방육진(北方六鎭) 개척(開拓)의 필요 성을 역설(力說)하여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에 대비(對備)토록 하였고 도성수축도감제조(都城修築都監提調)가 되어 현재 서울 성곽(城郭)을 완축(完築)하는데 공을 세워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맏아들 승(勝)은 세종과 단조 대에 경상도 수사(慶尙道水使)와 판안주목사(判安州牧使),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내며 청백(淸白)한 관리로 유명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일생동안 문의(文義)와 충절(忠節)을 지켰다.

승의 아우 전(腆)도 단양 군수를 지내다가 장흥(長興)으로 돌아가 예양강(汭陽江)에서 시(詩)로 회포를 달랬고, 반(胖)은 도강(道康)으로 내려가 후진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전(腆)의 6세손 하수(河秀)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비 아들과 함께 향선(鄕船) 10여 척으로 이순신을 도우고 특전대를 조직하여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려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낸 반(胖)의 6세손 응방(應房)은 진안 현감(鎭安縣監)으로 동생 응허(應虛 : 병마도위)․응정(應井) 등과 남원성(南原成)에서 싸우다가 순국하여 남원(南原)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한편 폭군 연산군(燕山君)의 불의(不義)와 패 륜(悖倫)에 항거했던 숭조(崇祖)의 5세손 윤(倫)․응훈(應勳)․운종(蕓宗)․창종(昌宗) 5종형제(五從兄弟)가 모두 창의(倡義)하 여 의병장으로 진주(晋州)의 남강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고, 창종의 아들 인호(仁好)는 남강(南江) 전투에서 순절하여 충의(忠義)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목천마씨는 12명 장흥마씨는 31,886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歷代人物)-마씨조상인물정보

◎ 목천관(木川貫)

마현(馬 鉉) 고려 고종(高宗)과 문종조(文宗朝)에서 제관전 대학사(諸館殿大學士)를 지내고, 일생을 학문(學問)에만 전심하였다. 목천마씨(木川馬氏)의 일세조(一世祖).

마천린(馬天麟) 자(字)는 운화(雲華), 호(號)는 초암(草巖),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1345년(충목왕 1) 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 1351년(충정왕 3)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역임하였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자 대호군(大護軍)으로 공민왕(恭愍王)을 복주(福州)까지 호종(扈從)하고 난(亂)이 평정되자 보리일등벽상공신(輔理一等壁上功臣)에 올랐다.

평장사(平章事)․삼중대광(三重大光)․판삼사부사(判三司府事)를 지내고 목안군(木安君)에 봉(封)해졌고, 공민왕(恭愍王)이 시해(弑害)되자 치사(致仕)하였다.

마우동(馬羽東) 호(號)는 연재(淵齋),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조선 성종(成宗) 때 승의부위(承義副尉)를 지내고, 개성(開城)에서 사학(私學)을 개설(開設), 만년에는 장단(長短)에 은거(隱居)하여 후진(後進) 양성에 힘썼다. 부제학(副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마희상(馬羲詳) 호(號)는 괴당(傀堂). 조선 때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이 이(李 珥)가 가전 효우학관천(家傳孝友學貫天)이란 시(詩)를 지어 칭찬했다.

마희경(馬羲慶) 1585 (선조 18) ~ 1649 (인조 27)

자(字)는 중적(仲積), 호(號)는 죽계처사(竹溪處士), 개성(開城) 출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 1567년(명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81년(선조 14) 이 이(李 珥)의 천거로 북부 참봉(北部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역학(易學)과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했다. 개성의 사현사(四賢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마유(馬 遊) 호(號)는 치학(치學). 조선 때 세인(世人)들이 노곡선생(魯谷先生)이라 불렀다. 분교관(分교官)․중부령(中部令) 등을 역임하고, 노곡(魯谷)에 은거하며 후진(後進) 교육에 힘썼다.

마상원(馬尙遠) 자(字)는 이중(而重), 호(號)는 인해(人垓).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學問)에만 전심하였다. 특히 문장이 뛰어나 당시 차천로(車天輅) 형제와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라고 세인(世人)들의 칭송을 받았다.

마사종(馬嗣宗) 호(號)는 낙포(樂圃), 윤두수(尹斗壽)의 문인(門人). 문장과 학문(學問)에 뛰어나서 월정(月汀)이 <문학(文學)으로는 세상에 사종(嗣宗)이 있다. 이는 서경(西京)의 아유(雅儒)>라고 칭송했다.

저서로는 「오륜통의(五倫通義)」․「사례비요(四禮備要)」를 남기어, 우리 나라 고유(固有)의 예법(禮法)을 정립(定立)하였고, 윤리도덕의 전서(典書)가 되었다.

마맹하(馬孟河) 자(字)는 군범(君範). 1747년(영조 2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학유(學諭)를 지냈다.


◎ 장흥관(長興貫)

마혁인(馬爀仁) 자(字)는 군선(君善), 호(號)는 정재(靜齋), 시호(諡號)는 문절(文節), 목주군(木州君) 점중(占中)의 둘째 아들. 1085년(고려 선종 2) 문과(文科)에 올라 판개성윤(判開城尹)을 역임하였다.

마엽(馬 曄) 자(字)는 화일(華日). 1128년(인종 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부 시랑(兵簿侍郞)을 지냈다.

마의유(馬義裕) 자(字)는 예호(禮好). 1165년(의종 19) 문과(文科)에 올라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마희원(馬希援) 자(字)는 한옹(漢翁), 호(號)는 국헌(菊軒), 시호(諡號)는 문의(文毅), 1205년(희종 1) 문하시중(門下侍中)․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몽고(蒙古)에서 온 사신(使臣) 탑고야(嗒古也) 등이 돌아갈 때 나라에서 노자를 주었는데도 불만을 품고, “도중에서 수달피나 세포(細布) 장사를 만나거든 빼앗아라, 만일 주지 않으면 사살하라”고 부하들에게 말했다. 그는 이 사실을 이첩(移牒)하고 이들을 서경(西京)까지 고이 송환(送還)하고 돌아왔다.

마중기(馬仲奇) 자(字)는 준부(俊夫), 호(號)는 역재(易齋), 시호(諡號)는 문강(文剛), 1205년(희종 1) 7월에 문과(文科)에 올랐으나 오직 학문(學問)에만 전심하였고, 전리 상서(典理尙書)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응하지 않다가 최충헌(崔忠獻)이 죽은 후에 사관(仕官)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마지백(馬智伯) 자(字)는 일고(一顧), 호(號)는 하계(霞溪), 1266년(원종 7)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으며 국자감 박사(國子監博士)와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마수손(馬壽孫) 자(字)는 덕수(德叟), 호(號)는 동강(東江), 시호(諡號)는 충장(忠莊). 1309년(충선왕 1) 예빈동정(禮賓同正)․평장사(平章事) 등을 역임하고, 만년에 백남(白南) 산하의 예양강(汭陽江)에서 시(詩)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마치원(馬致遠) 자(字)는 우탁(愚倬), 호(號)는 가봉(佳峰).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종부령(宗簿令)을 지내고, 모원촌(茅原村)에서 교수(敎授)하며 후진(後進)양성에 힘썼고, 조선 태종(太宗) 때 관산군(冠山君)에 봉해졌다.

마영(馬 榮) 자(字)는 화숙(和淑), 호(號)는 백암(栢巖). 1318년(충숙왕 5) 사마봉 상시경(司馬奉常寺卿)에 올랐는데 치사(致仕)하고, 낙향(落鄕)하여 후학(後學)을 위한 강론(講論)과 조종(祖宗)이 축성(築城)한 수령산성(遂寧山城)이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으로 인하여 황폐 (荒廢)되었으므로 이를 보수(補修)하기에 전심하였다.

마천목(馬天牧) 1358 (공민왕 7) ~ 1431 (세종 13)

시호(諡號)는 충정(忠靖). 고려(高麗) 우왕 때 산원(散員)이 된 뒤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고, 1398년(태조 7)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방간(芳幹)을 토벌, 그 공으로 1401년(태종 1) 좌명3등공신(佐命三等功臣)에 동지총 제(同知摠制)가 되었다.

1412년(태종 12) 전라도 병마도절제사(全羅道兵馬都節制使)․판나주목사(判羅州牧使)를 지내고, 1414년 장흥군(長興君)에 봉해졌다.

1416년 도총제(都摠制)를 거쳐 판우군부사(判右軍府使)에 이르러 사직,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마승(馬 勝) 자(字)는 노부(魯夫), 호(號)는 지곡(智谷),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조선 때 경상도수사(慶尙道水使)․판안주목사(判安州牧使)․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하고, 1449년(세종 31) 진하사(進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다.

1455년(세조 1) 세조(世祖)가 왕위를 찬탈(纂奪)하여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퇴, 일생동안 문의(文義)와 충절(忠節)을 지켰다. 의성(義城)의 화산서원(禾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마전(馬 腆) 자(字)는 후경(厚卿), 호(號)는 조은(釣隱). 일찍이 호학(好學)하였으며 단양 군수(丹陽郡守)를 지냈다. 1456년(세조 2) 장흥(長興)에 낙향(落鄕)하여 회포(懷抱)를 예양강(汭陽江)에서 시(詩)로써 읊었다.

마반(馬 胖) 자(字)는 윤경(允卿), 호(號)는 규당(規堂). 1456년(세조 2) 벼슬을 버리고, 옛 병마 본영(兵馬本營)인 도강(道康 : 지금의 강진)에 돌아와서 후진 양성(後進養成)에 일생을 바쳤다.

마준(馬 月春) 자(字)는 성경(聖卿), 호(號)는 만죽(萬竹). 일생을 학문(學問)과 함께 하였다. 당시 북방개척(北方開拓)을 상소(上疏)한 부원군(府院君)을 뜻을 따라서 입북(入北)하여 북방개척에 선도적(先導的) 역할을 하고, 미개(未開)한 향민(鄕民)들에게 학문(學問)을 가르쳤다. 성종(成宗) 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마중규(馬仲規) 초명(初名)은 숭조(崇祖). 조선 때 폭군(暴君) 연산(燕山)의 실정(失政)에 항거하였다.

마성훈(馬成勳) 자(字)는 칭덕(稱德).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그의 종형(從兄) 윤(倫)과 함께 의병(義兵)을 모아 고경명(高敬命)의 후원군(後援軍)으로 활약했다.

마온종(馬溫宗) 자(字)는 성여(誠如), 호(號)는 모국(慕國).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형 운종(雲宗), 아우 창종(昌宗)과 같이 의병(義兵)을 모아 왜병(倭兵)과 격전,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진주전(晋州戰)에서 조카는 전사하였다. 뒤에 통정대부 (通政大夫)에 추중(追贈)되었다.

마지룡(馬之龍) 자(字)는 비섭(丕燮), 호(號)는 죽암(竹菴). 조선 효종(孝宗) 때 심양(瀋陽)에서 금주(錦州) 공략의 선봉장(先峰將)이 되라는 청(淸) 나라의 요청(要請)에도 불구하고 명(明)나라를 잊을 수 없다하여 부하들에게 촉(촉)과 환(丸)을 빽 화살만 쏘게 하여 청(淸)으로 부터 죽음을 당했다. 명(明)나라로부터 대명충신조선의사(大明忠臣朝鮮義士)라는 호(號)를 받았다.

마하수(馬河秀) ? ~ 1597 (선조 30)

자(字)는 선천(先天), 호(號)는 주촌(舟村). 임진왜란 때 선공 주부(繕工主簿)로서 1597년(선조 30) 이순신(李舜臣)이 무고로 투옥하자 사직. 이순신이 풀려나자 군사를 지휘할 때 향선(鄕船) 10여 척을 거느리고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참전, 적선에 포위된 이순신을 구하기 위하여 칼을 빼어 적진에 돌입했으나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마계변(馬繼卞) 조선조(朝鮮朝)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하였다. 천성(天性)이 온화(溫和)하고 효심(孝心)이 지극(至極)하였고, 문학(文學)에 심취하여 책을 놓지 않았다. 낙향하여 향리(鄕里)에서 후학(後學) 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마응방(馬應房) ? ~ 1597 (선조 30)

자(字)는 정숙(靖叔), 호(號)는 용암(龍庵). 음보로 현감(縣監)이 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활약, 1597년 정유재란 때 청주에서 전사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마군후(馬君厚) 자(字)는 인백(仁伯), 호(號)는 양촌(陽村). 조선 정조(正祖) 때 사람으로 화필(畵筆)이 선경(仙境)이 이르렀으며 특히 인물(人物)․영모(翎毛)에 뛰어났다.

 

마성린(馬聖麟) 자(字)는 경의(景義), 호(號)는 미산(眉山). 조선 정조(正祖) 때 사람으로 글씨는 특히 해서(楷書)․초서(草書)에 뛰어나서 당시 사람들이 신필(神筆)이라 일컫었으며, 판자(板子)에 루(鏤 : 새긴것)한 것이 전한다.

마지성(馬之成) 자(字)는 운서(雲瑞). 조선 때 의성(義城)에서 수학(修學)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었고, 사재(私財)를 털어 많은 사람들을 도와 조정에서 고양서추(高揚西樞)라 하였으며, 그의 계자(季子) 찬룡(贊龍)이 인조(仁祖)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추증(追贈)되었다.

마비(馬 非) 김제(金提) 사람으로 출가하여 서치명(徐致命)의 아내가 되었다. 남편이 죽자 20여년 간 상(喪)을 벗지 않고 조석(朝夕) 상식을 폐하지 않았으므로 1492년(성종 23)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마행일(馬行逸) 자(字)는 운일(運一), 호(號)는 성암(省菴). 1853년(철종 4) 소모사(召慕使)로 관계(官界)에 들어가서 부령 부사(富寧府使)․무산 부사(茂山府使)․경원 부사(慶源府使)․경흥 부사(慶興府使) 등을 역임하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세칭(世稱) 관북 대감(關北大監)이라 하였다.

마진(馬 晋) 구한말 때 만주로 망명, 이동휘(李東輝) 등과 한국교포의 자취 및 교육에 힘쓰고, 1919년 한족독립기성회(韓族獨立期成會)의 부회장이 되어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중심으로 조직한 결사대를 인솔, 국내로 들어오다가 만주 돈화현(敦化縣)에서 잡혀 아들 천목 (天穆)과 함께 살해되었다.

마협화(馬協華) 자(字)는 성일(聖一), 호(號)는 수파(守坡). 고종(高宗)이 물러나자 관직(官職)을 버리고 쇠퇴한 국운(國運)을 한(恨)하여 삭발(削髮)하고,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수산사(江原道寧月君水周面水山寺)에 은거(隱居)하여 의병을 일으켜 국권회복(國權回復)에 노력하다가 마침 관동창의대장(觀東倡義大將) 민긍호 장군(閔肯鎬將軍)이 치악산(稚岳山)에 들어오자 그 휘하로 들어가 항전(抗戰)하다가 그해 2월 민장군(閔將軍)이 순국(殉國)하자 남은 병사(兵士)들과 더불어 투쟁(鬪爭)하였다.

마춘성(馬春成) 3․1운동시(運動時) 의성(義城)에서 궐기했으며, 대구형무소(刑務所)에서 3년형을 마치고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하여 봉천(奉天)을 중심으로 광산 노동자를 규합하여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하였다.

마상규(馬湘圭) 1905 (광무 9) ~ 1966

호(號)는 해송(海松). 개성(開城)출신. 중앙학교(中央學校)을 중퇴, 1920년 보성학교(菩城學校)에 재학중 동맹휴학사건으로 퇴학, 이 무렵 문예지 여광(麗光)의 동인으로 문예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 홍난파(洪蘭波) 등과 극단 동우회(同友會)의 한 사람으로 국내 각지를 순회하며 연극을 통한 개화운동에 힘썼다. 이듬해 공진항(孔鎭恒) 등과 문학 클럽 녹파회(綠波會)를 조직하고, 1923년 송도소녀가극단(松都小女歌劇團)을 도와 지방을 순회하며 자작 동화를 구연(口演)했다.

이듬해 방정환(方定煥) 등과 색동회의 동인이 되어 많은 동화를 발표함으로써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해 끼꾸찌가 주재하는 일본 문예춘추사(文藝春秋社)에 입사, 편집장․선전부장을 지냈으며, 1930년 사재를 털어「모던 닛뽕」을 창간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송도 학술연구회 위원장․국장부 한국문화 연구소 소장․정훈국 편집실 고문 등을 역임하고 1951년 공군 종군 문인단(從軍文人團) 단장을 지냈다. 1957년 어린이 헌장(憲章)을 기초, 이듬해 천주교에 입교, 1959년 제6회 자유문학상을 수상(受賞), 이해부터 마을문고 보급회 명예회장이 되어 농촌의 독서 운동에 힘썼다.

1960년 대한소년단 이사, 1962년 서울특별시 시민헌장(市民憲章)을 기초, 1962년 고마우신 선생님 상, 제1회 한국 문인협회상을 받았다. 그의 작품 세계는 초기의 탐미적 경향에서 점차 세태와 인정을 풍자 비판하는 방향으로 기울었으나, 항상 아동세계의 순화(醇化)와 보호를 염원하는 사상으로 일관했다. 장례는 문인장(文人葬)으로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