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약목류씨시조(若木柳氏),류익정(柳益貞),약목류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06 13:35 수정일 : 2018-04-15 14:45

약목류씨의 연원

약목류씨는 고려 후기 왕실에서 변성한 곤산부원군(崑山府院君)의 후손이다.

그 선세는 고대 중국의 황제 헌원(黃帝軒轅ː姬氏)으로부터 하후우(夏后禹ː姒氏)로 전하고 그 11세손 사신갑(似辛甲)이 요수(遼水)를 건너 동국으로 들어와 평양 일토산하에 정착하여 성을 왕(王)씨로 고치고 이름을 조명(祖明)이라 하니 이분이 단군조의 치민장으로서 문명을 일으키고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순화하였다.

공의 25세손 왕수긍(王受兢)은 주(周)나라 무왕(武王) 원년에 기자(箕子)가 동국으로 임하여 공을 상신(相臣)을 삼아 교민사사(敎民士師)를 임명하니 예(禮) 악(樂) 문(文) 물(物) 의(衣) 관(冠) 법(法) 도(度) 8조의 정치를 보성(輔成)하였다.

공의 34세손 왕몽(王蒙)은 기준왕(箕準王) 때에 「일토초가자왕의(一土草家者王矣)」라는 동요와 비결이 있어서 왕이 이를 꺼려 일토산 왕씨를 모두 죽이므로 일곱째 아들 림(琳)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도입(逃入)하여 신인(神人)의 계시(啓示)로 삼변성(三變姓)하니 곧 차무일(車無一)이다.

때에 신라 태조가 경주(慶州)에다 나라를 세움에 공이 고을을 들어 귀부(歸附)하므로 좌승상으로 삼았다. 공의 후손이 34세를 계승한데 그중 25세가 승상에 올랐는데 33세손 차승색(車承穡)은 승상(丞相)으로 헌덕왕(憲德王)이 애장왕(哀莊王)을 시해하고 자립하므로 아들 형제로 더불어 왕의 원수를 갚으려다가 기밀이 탄로나므로 장자 공숙(恭叔)과 함께 유주(儒州) 구월산(九月山)으로 피신하여 류색(柳穡)으로 변성명하니 동방의 류(柳)씨와 왕(王)씨는 모두 이분의 후손이다.

그중 장자 공숙(恭叔)의 후손은 문화류씨(文化柳氏)가 되고, 차자 공도(恭道)는 강남으로 피신하여 충절을 보전하였다. 공의 증손 건(建)이 고려태조가 되어 국조원덕대왕(國祖元德大王)으로 추존하니 곧 개성왕씨(開城王氏) 시조이다.

약목류씨의 시조 곤산부원군(崑山府院君)  류익정(柳益貞)의 세계(世系)는 고려태조→안종(安宗)→현종(顯宗)→문종(文宗)→숙종(肅宗)→예종(睿宗)→인종(仁宗)→신종(神宗)→희종(熙宗)→경원공 조(慶源公 祚)→광평공 혜(廣平公 譓)로 계대되었더니 충렬왕이 광평공의 재산을 몰수하고 종실에서 추방하므로 인하여 그 아들 익령(益翎)․익상(益翔)․익현(益顯)․익정(益貞)․익복(益福) 5형제는 왕실을 떠나게 되므로써 왕씨성을 쓰지 못하고 어머니 元宗女(元宗女} 함녕궁주류씨(咸寧宮主柳氏)의 성을 좇아 류(柳)씨로 변성하여 각기 관향(貫鄕)을 달리하였다.

고려 왕실의 성씨제도는 부계와 모계성이 공존하였으니 왕씨성은 오직 왕실과 종실에 한하여 계승할 수 있었으나 왕실과 종실에서 추방 당한 경우나 왕위계승권을 상실한 경우에는 모계성을 좇아야 했으며, 딸은 원칙적으로 모계성을 좇아 휘칭(諱稱)하였다.

이는 정종(靖宗) 5년에 제정한 천자수모법(賤子隨母法)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에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왕자가 모두 후사(後嗣)가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은 바로 이를 증명하고 있다.

광평공의 아들 5형제의 후손중 두 형제의 후손이 지금 족보에는 다함께 곤산부원군 익정(益貞)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연대를 추적한 결과 6세 하(夏)는 도원수 이희경(李希慶)의 사위이니 고려 말의 인물이어야 하는데도 불고하고 약 백년의 연대차이가 있으며, 5세 제(堤) 역시 약 백년 이상의 연대차가 있음을 감안하면 그 5형제의 계대를 낮추어 조작한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하양파(河陽派ː都事公派)는 문화류씨보에 입보하면서 조상을 바꾸어 곤산부원군을 대승공(大丞公) 후손으로 만들고 자파의 조상인 종(淙)을 형으로 만들고 형 지(沚)를 아우로 조작하였지만 이는 그 아버지 사직공(司直公) 차명(次明)의 묘 음기에서 그 증거가 확인되었다.

당시 문화류씨보에 입보하게 된 동기를 추적해 보면, 하양현감(河陽縣監)을 역임한 류병균(柳秉均)이 관직을 사임하고 돌아와서 문화류씨 정사보(丁巳譜)를 수보(修譜)하면서 임지에서 그동안 친의를 다져온 하양에 사는 류씨<하양파>문중에 통문하여 족보 수단(收單)을 권유하였던 것이다. 이때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족보가 있었으므로 이를 근거로 수단하였던 것인데 수단 이후에는 이를 폐기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약목류씨는 1797년 정사년에 문화류씨로 입보(入譜)한 족보 외에는 세전(世傳)하는 구보(舊譜)가 없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문화류씨보에 입보하기 이전인 1704년에 영일현감(迎日縣監) 손단(孫湍)이 비문을 지어 입비(立碑)한 통상공(統相公) 휘 여강(汝橿)의 묘갈명에 “오향유통제삼도자 약목류공기인야(吾鄕有統制三道者 若木柳公其人也“ 라 하였으니 이것이 곧 약목류씨라는 증거이다. 그러나 지금은 통상공파만이 약목류씨로 행세하며 나머지는 종파는 모두 조상을 바꾸어 문화류씨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 주요 인물 - 약목류씨조상인물

고려시대(高麗時代)

류익정(柳益貞) ː 약목류씨 시조. 충숙왕조 곤산부원군(崑山府院君)

류번(柳蕃) ː 우왕 때 밀직사를 거쳐 문하찬성사에 이르러 약목군(若木君)에 봉해졌다. 이성계 가 우왕 부자를 내몰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하자 동지 제현으로 더불어 은밀히 우왕의 복위를 모의하였다가 마침내 김저옥사(金佇獄事)에 연루되어 정지(鄭地)․이거인(李居仁)․ 류혜손(柳惠孫)․이을진(李乙珍)․이유인(李惟仁)․조호(趙瑚)․안주(安柱) 등 27인과 함께 유배되었으나 끝내 조선조에 불복하고 충절을 보전하다.

류윤경(柳允卿) ː 지밀직부사 상설도감상호군 동지사(知密直副使 商設都監上護軍 同知事)

류록(柳祿) ː 한림(翰林) 만경현령(萬頃縣令) 개성부윤(開城府尹).

조선시대(朝鮮時代)

류영계(柳英繼) ː 호조판서(戶曹判書}

류승(柳 升) ː 양산군수(梁山郡守).

류사온(柳思溫) ː 호 구정(龜亭). 임진난에 창의하여 전공을 세우고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제수 되었으나 정한강(鄭寒岡)․장여헌(張旅軒) 문하에서 후진 교육에 정려하였다. 아들의 귀(貴)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문집이 있다.

류여강(柳汝橿) ː 호 학산(鶴山). 무과에 올라 자산군수(慈山郡守)로서 자모성(慈母城)을 쌓고 또 영변부사로서 철옹성을 수축하여 북적(北狄)의 침입을 막았다. 그 공을 가상하여 中樞府事에 특진되고 4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거쳐 마침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올랐다. 별세하자 숙종(肅宗)이 제문을 내려 치제(致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