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함평노씨시조(咸平魯氏),노목(魯穆),함풍노씨

작성일 : 2017-04-03 19:46 수정일 : 2018-03-22 14:19

함평노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

함평노씨(咸平魯氏)의 시조(始祖) 노목(魯穆)은 고려 인종(仁宗)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삼가 현감(三嘉縣監)이 되어 권신(權臣) 이자겸(李資謙)을 축출하는데 공을 세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가수(嘉樹: 경남 합천군에 있었던 신라와 고려시대의 지명)군(君)에 봉해졌다가 함풍군(咸豊軍)에 가봉(加封)되었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이 함평(咸平)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界)를 계승하여 왔으며, 함풍군 신(愼)의 아들 3형제 대에서 크게 3갈래로 나뉘어 장자 성안(成顔)의 계통은 나주파(羅州派)로, 둘째 희안(希顔)의 후손들은 무안파(務安派), 막내인 유안(有顔)은 함평파(咸平派)로 갈리었다.

함평(咸平)은 전라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함풍(咸豊)과 모평(牟平) 2현(縣)의 합명(合名)이다.

함풍현(咸豊縣)은 본래 백제(百濟)의 굴내현(屈乃縣)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함풍현으로 고쳤고, 모평현(牟平縣)은 다지현(多只縣)을 다기 현(多岐縣)으로 개칭하고 무안군(務安郡)에 이속되었다가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모평현(牟平縣)으로 하였다. 그후 1409년(태종 9) 함풍현과 모평현을 병합하여 함평(咸平)으로 개칭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맥(家脈)을 이은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 목(穆)의 증손 관도(貫道)가 고려 때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를 지내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한편 부사(副詞) 여희(汝姬)의 아들 신(愼 : 시조의 7세손)은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랐으며, 1363년(공민왕 12) 중신(重臣) 김 용(金 鏞)의 반란을 평정하고 경성(京城)을 수복(收復)하는데 공을 세워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함풍군(咸豊軍)을 습봉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무공을 떨쳤던 인(認)이 일본에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가 탈출하여 명나라 무이서원(武夷書院)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강론하였는데, 명나라 신종(神宗)은 "충(忠)은 문천상

(文天祥 : 송나라 말기의 충신)고 같고 절(節)은 소무(蘇武 : 한나라 때의 절신)와 같다"고 칭찬하며 말을 하사하여 본국에 돌아가게 하였다.

1599년(선조 32)에 귀국한 인(認)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옹진(甕津)과 수원(水原)을 다스렸으며 저서(著書)로「금계집(錦溪集)」을 남겼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막하(幕下)에서 진영장(鎭營將)으로 무공을 세워 원종이등공신(原從李等功臣)에 책록된 홍(鴻)은 훈련원 부정(訓련(鍊)院副正)을 지냈으며 정유재란 때는 당포(唐浦)에 침입한 왜적을 격퇴시켜 훈련원 봉사(訓련(鍊)院奉事)를 지낸 대방(大邦), 대련(大連), 용양위 부 사과(龍 衛副詞果) 덕현(德玄)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평노씨(咸平魯氏)는 남한에 31,72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함평노씨조상인물

노몽필(魯夢弼) 고려조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지냈다.

노인후(魯仁厚) 고려 때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예부 상서(禮部尙書), 좌복야(左僕射)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금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御袋)를 받았다.

노관도(魯貫道) 시호(諡號)는 문안(文安). 고려 때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를 지내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다.

노창문(魯彰文) 고려 때 밀직사사(密直司使)를 지냈다.

노여희(魯汝姬) 고려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노신(魯 愼) 자는 수초(遂初), 호(號)는 악은(岳隱), 시호(諡號)는 무열(武烈). 1359년(공민왕 8) 홍건적(紅巾賊)을 평정(平定)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었고, 다시 1363년(공민왕 12) 김 용(金鏞)의 난(亂) 때 이를 토평(討平)하여 경성(京城)을 수복(收復)하고,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어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함풍군(咸豊軍)에 습봉(襲封)되었고, 경렬사(景烈祠), 두문사(杜門祠), 거평사(居評祠), 학산사(鶴山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노성안(魯成顔)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기장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노세기(魯世麒) 조선조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노유(魯 儒) 조선에서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詞直)을 지냈다.

노전(魯 佺) 조선 때 선무랑(宣務郞)에 이르렀다.

노안충(魯安忠)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역임했다.

노안서(魯安恕) 조선(朝鮮)에서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노희주(魯希周)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충좌위 대호군(忠佐衛大護軍)을 지냈다.

노흥의(魯興義) 조선(朝鮮)에서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노사민(魯思敏)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노언호(魯彦浩) 자는 호여(浩汝). 조선 때 부사과(副詞果)를 지냈다.

노중손(魯仲孫)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회령 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를 지냈다.

노적(魯 迪)조선에서 장연 현감(長淵縣監)을 지냈다.

노행권(魯行權) 조선조에 장수 현감(長水縣監)을 역임하였다.

노사안(魯師顔) 조선 때 선교랑(宣교郞)으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노사원(魯師源) 자는 효백(孝伯). 조선조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노근(魯 謹) 조선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훈련원 봉사(訓련(鍊)院奉事)를 지냈다.

노전(魯 詮) 자는 공겸(公謙). 조선조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노인(魯 認) 호는 금계(錦溪).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원수(元帥) 권 율(權 慄)을 따라 이치(梨峙), 행주(幸州), 의령(宜寧) 등지의 전투에 참가했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남원(南原)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잡혀갔다가 탈출, 명나라 무이서원(武夷書院)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했다. 1599년 귀국, 1603년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수원(水原), 옹진(甕津)을 다스렸다. 죽은 후 수원, 옹진의 사당(祠堂)에 제향(祭享)되었다.

노홍(魯 鴻) 자는 여신(汝信), 호(號)는 관암(冠巖).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순신(李舜臣) 막하(幕下)에서 진영장(鎭營將)으로 여러 차례 공을 세우 원종이등공신(原從李等功臣)이 되고, 훈련원 부정(訓련(鍊)院副正)을 역임하였다. 그후 1604년(선조 37) 당포 (唐浦)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

노성택(魯聖澤) 조선(朝鮮) 때 학유(學諭)를 지냈다.

노대방(魯大邦) 자는 군좌(君佐). 조선조에 훈련원 봉사(訓련(鍊)院奉事)를 역임하였다.

노대안(魯大安) 자는 군필(君弼). 조선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용양위부사과(龍 衛副詞果)를 지냈다.

노대연(魯大連) 자는 군우(君佑). 조선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訓련(鍊)院奉事)를 역임하였다.

노일경(魯一慶) 자는 공신(公信). 조선조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訓련(鍊)院奉事)를 지냈다.

노 삼(魯 參) 조선조에 부사과(副詞果)를 역임하였다.

노중연(魯中連) 조선 때 통덕랑(通德朗)에 이르렀다.

노덕현(魯德玄) 자는 관서(寬瑞). 조선에서 어모장군(禦侮將軍), 용양위부사과(龍 衛副詞果)를 지냈다.

노사인(魯思仁) 조선조에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노승국(魯承國) 조선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